로마의 역대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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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르바 | 트라야누스 | 하드리아누스 | 안토니누스 피우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이름 |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비우스 보이오니우스 아리우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Titus Aurelius Fulvius Boionius Arrius Antoninus Pius) |
출생지 | 로마제국 라누비오 |
생몰년도 | 86년 9월 19일 ~ 161년 3월 7일 |
재위기간 | 138년 7월 10일 ~ 161년 3월 7일 |
질서있는 평온(Tranquilitas ordinis)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를 유지한 황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네 번째 황제
1 재위 이전
서기 86년 라누비오에서 태어났다.[1] 태어나면서 부터 로마 귀족층, 그 중에서도 핵심 엘리트 계층에 속해 있었다. 그로 인해 안토니누스는 필연적으로 당시 로마 엘리트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공직 생활을 하게 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 그는 뛰어난 행정관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데,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안토니누스의 능력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그를 후계자로 삼게 된다. 애시당초 하드리아누스에게는 루키우스 아일리우스[2]라는 다른 후계자가 있었으나 불행히도 그는 폐렴을 앓고 있었고 그것을 모른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전방으로 보내졌다가 병사하게 된다. 그 덕분에 안토니누스는 후계자 문제에 골치를 앓게 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눈에 띄게 된다.
2 재위 이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르게 된 안토니누스 황제는 하드리아누스황제의 정책를 이어받아 수성 위주의 제국 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달리 이탈리아 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으며 원격 조정으로 로마 제국을 통치했다.[3] 물론 이것은, 철저하게 제국의 행정 및 군사 체제를 다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공로에 의한 결과였지만 안토니누스의 뛰어난 행정 조정 능력도 크게 공헌했다. 안토니누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실시한 인사 정책을 거의 바꾸지 않았고, 정년이 다 돼서야 바꿀 정도로 철저하게 하드리아누스의 정책을 따랐다.
그 결과는 로마 제국의 유례없는 평화였다. 그가 통치한 23년 동안 자연 재해나 가끔씩 일어나는 분쟁[4]을 제외하곤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물론 항상 게을리 하지 않고 상황을 주시했던 안토니누스의 통치 철학이 그런 평화를 낳기도 했지만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끊임없는 시찰에 의한 성과가 더 큰 결과이기도 했다.
따라서 안토니누스의 재위 하에 로마 제국은 별다른 문제점이 보이지 않았다. 후임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5] 때 들이 닥친 온갖 재해 및 이민족의 칩입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들 정도이다. 그래서 안토니누스 치세 당시 미리 문제점에 대비해야 해야 하지 않았느냐는 지적도 나온다.[6] 그렇지만 빡빡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치세 이후 조금 나른한 안토니누스의 통치를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을 듯 싶다. [7][8]
아무튼 23년간의 행복한 통치 및 평화로운 감시를 마친 이후, 161년 안토니누스 황제는 사위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후계를 넘기고 병사했다. 그가 죽은 이후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2.1 게르만족 관련 문제
안토니누스 황제 시기에 가장 큰 논란이 되는 부분은 먼 게르만 부족에게 박살나고 있었던 가까운 게르만 부족이 로마에 직접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안토니누스가 묵살한 것이다. 그 결과 그나마 로마에 우호적이였던 가까운 게르만족이 먼 게르만 족에게 합병당하고, 로마 제국은 결국 더 공격적이고 야만화 된 자들인 먼 게르만 족(고트족, 반달족 등등)의 대규모 공세에 시달리게 되는데 일조했다는 해석이 가능하지만, 안토니누스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다고 생각된다.
후기 로마 제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하나 같이 지적하는 것은 로마 제국 국경선 바깥의 게르만족의 사회 조직과 군사 조직이 성공하고 갈수록 로마 제국의 총력전 전략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들이 이걸 어디서 배우고 있었던 걸까? 다름아닌 로마 제국이다. 이렇게 점차 성장해가고 있던 "가까운 게르만족"이 "먼 게르만족"을 제압해서 인력까지 얻게 된다면?
물론 적극적인 군사적 지원을 통해 이들을 우방으로 삼고 이들과 함께 이들의 영토에서 먼 게르만 족을 견제하였다면 후대 황제들의 부담이 훨씬 줄어들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매사가 그렇게 원하는 대로만 이뤄진다는 보장은 없을 뿐더러 오히려 "가까운 게르만족"이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트라야누스가 어째서 그렇게 다키아 왕국을 멸망시키는 데 집착했는지 그리고 "먼 게르만족"의 횡포와 더불어 국경선에 대한 외부 압력이 가중되고 있었다는 점을 미리 간파한 하드리아누스가 왜 방어적 전략으로만 일관했는지 깊이 생각해볼 대목이다.
이는 시오노 나나미의 설이기도 하지만, 그것 자체가 이미 사학계에 제기되었던 주장들이라곤 해도 대부분 옛날 학설이니까 문제가 된다. 그나마 연구가 일찍부터 잘 이뤄진 로마 제국사 전기 부분은 이 점이 크게 단점으로 두드러지지 않지만, 합리적인 연구와 분석이 비교적 근래 한국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뿐이지 서구 학계에서는 이미 90년대에 다 논쟁 끝난 부분[9]으로 이뤄진, 후기에 접어들수록 틀린 부분은 많아질 수밖엔 없다.
카이사르의 경우를 예로 든다고 해도, 한창 게르만 족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던 갈리아 족을 도와 이들 게르만 족을 격파하고 갈리아 족의 세력을 유지시킨 뒤 점차 로마화를 시켜 갈리아 전역을 로마땅으로 삼는데 성공했던 건 그 "우호적인 갈리아 부족"까지 포함하는 대대적인 정벌까지 수반되어야 했다.
먼 게르만 족에게 밀리고 있었던 가까운 게르만 족의 처지도 이때의 갈리아 족과 마찬가지라곤 하지만, 게르만족을 엄연히 타자로 여겼던 갈리아인들과 "가까운 게르만인"들의 환경이 같을까? 게다가 종국엔 "가까운 게르만족"까지 결국은 진압해야 되는데?
이런걸 할려면 또 다시 대규모 군사 계획을 수립해야 하지만 전쟁을 감행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안토니누스에게 군사적 식견과 전략적 안목이 부족했던 건 맞지만, 그에게도 그리고 당대의 로마인들에게도 이런 것을 포함한 결단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을 뿐더러 했다한들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카이사르 같은 천재적인 무장이 아무 때나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이때의 게르만족은 카이사르 시절의 게르만족과는 전투력이 또 달랐다. 후대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카이사르와는 달리 고전한 것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그 시대의 로마군이 카이사르보다 멍청하고 군략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게르만족 사회 자체의 조직력과 군사력이 성장한 게 이유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때 많은 어려움을 무릅썼지만 결국은 국경 지대에서 횡포를 부리는 게르만족을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무찌르는 데 성공한 것을 볼 때, 적어도 환경이 비교적 유리했던 안토니누스 시대 때 선제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면 확실히 결과는 더욱 나았을 거고, 안토니누스가 이를 하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안토니누스의 군사적 식견과 역량이 하드리아누스나 트라야누스만 못했던 게 이유라는 추론은 물론 일리가 있다.
J.B 번리는 안토니누스를 두고 하드리아누스의 정책에 안주하였으며 잠재적 위기에 대한 대처를 하려들지 않은 것이 그의 죽음 이후의 재앙에 노출시켰고, 따라서 현명한 통치자로 볼 수가 없다라는 비판을 하였다. 그리고 Ernst Kornemann이라는 학자는 그의 통치는 기회의 낭비의 연속일 뿐이라는 지적을 하였다.
이는 호전적인 게르만족의 잠재적인 위협을 우호적인 게르만족과 "연합해 싸우는 예방전쟁"을 통해 외부영토에서 저지할 수 있는 기회였으나 안토니누스는 평화에 지나치게 안주하여 방치하였고, 그로서 호전적인 게르만족을 로마가 직접 상대해야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므로 예방에 소흘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이다. 해당 설들은 물론 일리는 있으나, 당대 게르만족 사회의 성장에 대한 연구가 반영되지 않았으므로 위에서 제기된 문제도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안토니누스가 그러한 결정을 내린 이유를 알 수 있다.
3 성격 및 일화
전임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와 달리 겸손하고 솔직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만년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자기한테 개긴 원로원 의원들을 고발하는 칙령을 내리자 앞장서서 이를 막았고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죽음 이후 고발을 모두 취소시켰다. 그 이유를 하드리아누스의 명령 때문이라고 말해 원로원의 신임을 얻었다. 그의 이름에 붙여지는 '피우스(자비로운 자)'라는 별칭은 이 때문에 생겨났다. 정책 결정 시 친구들과 숙의하고 결정을 내리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모든 정보를 보고 판단해야 하는 황제로서 과히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안토니누스의 친구들이 대부분 한가닥 하던 인물들이라 굳이 걸고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태어나면서 부터 엘리트 계층이었고 자신도 이를 자각하고 있었다. 황제 즉위 직후 관례적으로 내리는 하사금을 몽땅 원래 자기 재산에서 충당해 버릴 정도로 공과 사의 구별에 엄격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유머감각과 온화함도 갖추고 있었다니. (동시대 인물들의 평처럼) 천상 '신사'. 사자 사냥을 좋아한 전임 황제와 달리 낚시를 좋아했고 황제 소유로 되어 있는 별장에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검소했다고 한다. 뭐지 이 사람?
물론 약점이 없었던 건 아니다. 안토니누스의 최대 약점은 딸 파우스티나였다.[10]
애시당초 하드리아누스는 안토니누스뿐만 아니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안토니누스의 후임 황제로 정해놓은 다음 마르쿠스의 배필까지 정해놓고 죽었다. 그런데 안토니누스는 즉위 직후 그 배우자를 자신의 딸로 바꾸어 버린다. 즉 하드리아누스가 정해놓은 결혼 정책을 바꾸어 버린 셈.[11] 그 덕분에 안토니누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사위로 맞이하게 되고 마르쿠스의 황제 즉위 명분도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에서 안토니누스의 명분으로 넘어가게 된다.[12]
게다가 파우스티나는 그 당시 기준으로는 그렇게 음탕한 편은 아니었으나 정숙한 부인이라곤 말하기가 어려웠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운신 폭이 이 때문에 좁아진 건 확실하고, 콤모두스가 또 그녀의 소생이다. 앞서 항목에서도 그렇듯 안토니누스에게도 그렇게 해야 할 개연성과 이유는 충분했지만, 하드리아누스의 구상을 충실히 이어갔다면 이후 전개는 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기 때문에[13] 역사 애호가들 입장에선 아쉬운 대목이다.
- ↑ 라누비오는 본국이었던 이탈리아의 도시지만 그의 가문은 속주인 나르보넨시스 속주 출신이다. 즉 안토니누스도 속주 출신 인물이었던 셈.
- ↑ 본명은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였으나 제위 계승자가 되면서 개명. 하드리아누스가 즉위 초기에 숙청한 선황제의 4명의 중신들 중 한 사람의 딸을 아내로 맞아 그 사이에 자식이 있었던 그를 후계자로 삼은 건 하드리아누스 입장에선 정치노선은 달랐으나 분명 애국자였던 그들에 대한 나름의 속죄였을지도 모른다.
- ↑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에 설치된 안토니누스 성벽. 하드리아누스 성벽과 달리 이 성벽은 기본적인 감시 기능을 확장한 개념이었다. 철저하게 수성으로 일관한 안토니누스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
- ↑ 그나마도 안토니누스의 편지 한 통으로 해결하곤 했다.
- ↑ 안토니누스의 사위다.
- ↑ 물론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는 하지만, 안토니누스는 엄연히 황제다. 하드리아누스의 치세로 인해 피곤했던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훗날의 문제를 대비하지 않았던 것까지 괜찮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 ↑ 하드리아누스 역시 20년 넘게 로마를 통치했고, 안토니누스도 20년 넘게 로마를 통치했다. 그런 두 황제가 모두 훗날을 대비한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면 - 물론 후대 사람들은 그 혜택을 훨씬 더 많이 누렸겠지만 - 당대 사람들은 자그마치 40년을 훌쩍 넘는 세월 동안 황제들에게 시달리게 되었을 것이다(...)
- ↑ 다만 후계자 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의 입장 에서는 즉위전 변방경험 을 어느정도 는 치를수 있도록 했어야 한다. 그저 자기곁에 붙잡아두기만 한건 잘못이 맞다.
- ↑ 3세기의 위기를 로마 체제 자체에서만 찾고, 게르만족의 성장에 대해선 도외시하던 잘못된 연구 경향들을 말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평화 정책에 대한 건이 아니다.
- ↑ "파우스티나 없이 황궁에서 사느니 딸과 함께 유배지에서 사는 게 낫다"고 말했을 정도.
- ↑ 사실 안토니누스의 행동이 이해가 되는 것이, 하드리아누스가 정한 결혼 정책은 안토니누스의 딸에게 너무 불리했다. 원래 하드리아누스가 정한 파우스티나의 상대는 마르쿠스의 후계자로 내정된 루키우스 베루스이지만 루키우스 쪽이 한참 동생일 정도로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고 한다. 나이대로는 마르쿠스 쪽이 파우스티나와 더 맞았다고. 더군다나 안토니누스 입장에서도 딸이 다음번 황후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을 것이다.
- ↑ 파우스티나 와 이혼을 하려면 자신의 황제의 직위도 반납해야 한다고 했다는 이야기 까지 있으니 말 다했다...정말로 그랬는지 그저 찌라시 인지는 추가바람...
- ↑ 적어도 콤모두스 같은 아들은 나오지 않았을 거라든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능력 있는 사위나 양자에게 제위를 물려주게 되었을 거라든지...다 부질없는 IF긴 하지만. 근데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하더라도 콤모두스 같은 아들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으니 역시 부질없다.
콤모두스 '같은' 아들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콤모두스 본인은 안 나올 거 아냐더 심한놈이 나왔을수도 있다는점은 넘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