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보녕

高寶寧.[1]

활동 시기는 6세기 말.

북제의 영주자사이자 부흥운동가.

1 생애

북제의 방계 왕족으로, 요서 일대를 관장하는 영주자사로 오래 부임하며 현지의 한족과 이민족들에게 깊은 신뢰를 얻고 있었다고 한다.... 부흥운동가로 활약하기 전에 뭘하고 살았는지는 기록이 거의 없다.

그런데....

577년 북제가 멸망하고 북제를 되살리기 위해 황제로 추대된 황족 고소의(高紹義)에게 승상으로 임명되어 부흥운동군으로 합류했으나 북주에게 원체 승세가 기운 모양인지 고소의는 북주와 화친한 돌궐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결국 고보녕만 남는다. 고소의는 촉으로 유배를 떠나고 결국 고보녕 홀로 남아 영주를 중심으로 요서 일대를 장악해서 버틴다.(580년) 그래도 고소의가 살아있었을때는 몇 번 승리하기도 했고 하북 일대까지 활동무대로 삼았으나 고소의가 사라지자 나름 황제라는 거점도 사라지고 세력이 변방 요서 일대로 축소되어 그야말로 '잔당'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꼴이 되어버린다(....)

고보녕도 나름 돌궐,거란,말갈을 비롯한 이민족을 등에 업고 돌궐의 40만 기병을 동원하기도 하는 등 북주에게 열심히 저항하나 결국 583년에 수나라에게 토벌당한다. 고보녕은 북쪽의 사막으로 도주하나 거란에서 헌상금에 목이 마른 부하에게 피살당한다.

이후 요서 일대는 수나라의 세력권으로 완전히 편입된다.

2 연대기

3 기타

고구려의 머리맡인 요서에서 활동한데다가 돌궐,거란,말갈 등 주변 세력을 동원했기 때문에 고구려와도 모종의 관계를 맺었을 것으로 보이나 관련 기록은 없다. 중국에 통일정권이 들어서는것을 막기 위해 북제 부흥 세력을 지원했다는 설도 있고 고보녕이 세력을 키워 고구려를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견제했다는 설도 있다. 당시 대강의 상황을 살펴보자면 고구려는 평원왕의 치세로 안장왕 이래의 오랜 내분으로 인한 쇠퇴를 극복하고 재기중이었으며 북제 부흥운동의 조연인 돌궐과는 대립하고 있었다.
  1. 고보'령'이 아니라 고보'녕'이 맞다. 그런데 구글에 검색하면 고보'경'이라고 바로잡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