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dth=50 고구려의 역대 국왕 | ||||
24대 양원왕 고평성 | ← | 25대 평원왕 고양성 | → | 26대 영양왕 고대원 |
시호 | 평원왕(平原王) /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 | |
성 | 고(高) | |
휘 | 양성(陽成) | |
생몰년도 | 음력 | ?~ 590년 10월 |
재위기간 | 음력 | 559년 3월 ~ 590년 10월 (31년 7개월) |
1 소개
양원왕의 장남으로 다른 고구려 임금들에 비해 비교적 주목도가 덜하고, 흔히 대중들에게는 평강공주의 아버지와 온달의 장인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 고구려를 중흥시킨 명군이다. 요약하면 고구려 말기의 중흥 군주. 평원왕 재위 말년에 이미 수문제의 위협적인 국서가 왔고, 이로 말미암아 뒤의 영양왕 대에 여수전쟁이 일어나는데, 그의 중흥을 위한 노력이 없었다면 살수대첩 같은 대대적인 싸움은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특별히 사서에 어질다라고 나와있을 정도로 성군.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스스로가 먹는 음식을 줄이고, 농상을 장려했다. 또한 선대 왕부터 축성해온 장안성의 축성을 일시 중단하는 등 민심 수습을 위해 노력했다. 이후 대성산성에서 장안성으로 궁을 옮겼다. 평양내에서의 이동이니 경복궁-창덕궁 등처럼 이궁이지 천도까지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 때문에 장수왕대에 천도한 평양은 요동(또는 요하 인근의 만주 어딘가...) 에 있고 평원왕대에 천도한 평양이 현재의 평양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장수왕대에 완공된 안학궁이라는 물증이 떡 버티고 있어서 신빙성이 떨어진다.
북주의 침입을 배산의 들판에서 격퇴했다. 이 때 활약한 사람이 온달. 한 편 역사학자 김용만은 배산의 위치를 내몽골이라고 고증했는데 북주의 일방적인 침입이라기 보다는 북주가 요서지방으로 진출하면서 요서의 패자를 가리기 위해 날잡아서 서로의 완충지대에서 싸운것 같다. 이 전투는 귀주대첩과 함께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야전에서의 승전이다. 하지만 나제동맹과의 싸움에서는 보합으로 공세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북주의 뒤를 이어 세워진 수나라가 남조의 진(육조)을 멸망시키고 화북과 화남을 통일한데다가, 고구려에 속해있던 거란의 일부가 수나라에 투항해버리는 등 서북방에 어두운 정세가 드리워젔다. 이때문에 평원왕은 남쪽의 신라와의 대치는 일단락시키고 서북방의 안정에 주력했다.
이 시기 신라는 백제 성왕을 꺾은 신라 진흥왕의 위세가 절정에 달한 시기로, 568년에 세워진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로 보면 고구려는 신라에게 한반도 중부는 물론 함경도 지방까지 신라한테 탈탈 털린 상태였다. 고구려와 신라 역사상 함흥 지역까지 신라에 털린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 그럼에도 황초령비의 내용에 따르면 더 이상 신라와 추가로 싸우진 않고 고구려가 신라의 영토 획득을 순순히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상술한 북방전선 안정화에 주력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이 함경도 영토는 신라가 지배하기엔 너무 북쪽이라,[1] 고구려가 얼마 안 가 다시 수복했다.
그 외에 570년 일본에 사신을 보내 공식적으로 고구려-왜국 간 외교노선을 세우기도 했던 기록이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조에 등장한다. 원래 5세기 장수왕 대에도 고구려 사신이 일본에 갔지만 국교 성립에는 실패했고, 이후로도 교류는 있었으나 본격적인 대일외교는 평원왕 대부터 시작했다. 이 때의 사신 파견은 신라 영토를 피해 동해 바다를 횡단해서 호쿠리쿠의 카가 지방으로 향하는 루트였고, 훗날 발해 또한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 이 루트를 사용했다. 이는 당연히 멀고 험난한 항해로, 573년에도 일본에 사신을 보냈지만 다수의 익사자가 발생했다고 하고 있다. 5년 동안 세 차례나 사신단을 보냈는데, 이렇게 갑자기 무리해서 일본과 국교를 트려고 한 이유는 562년에 대가야를 마지막으로 가야가 완전히 신라에 정복당했기 때문에, 욱일승천하는 신라를 후방에서 견제할 수 있는 새로운 우군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일본서기에는 이시기에 고구려 평양성을 쳐들어가 왕궁까지 털어 먹었다는 뻥카(...)를 기록해 놓고 있다.
8월 : 덴노가 대장군 大伴連狹手彦을 보내어 군사 수만명을 이끌고 고려를 치게 하였다. 사데히코(狹手彦)는 이에 백제의 꾀를 써서 고려를 쳐서 깨트렸다. 그 왕이 담을 넘어 도망하자 狹手彦은 마침내 승세를 타고 왕궁에 들어가 진귀한 보물과 갖가지 재화,칠직장(七織帳),철옥(鐵屋)을 모두 얻어 돌아왔다.【옛 책에 “철옥은 고려 서쪽의 높은 누각 위에 있으며 직장(織帳)은 고려왕의 내전 침실에 걸려 있다”고 한다】. 칠직장은 덴노에게 바치고 갑옷 2벌,금으로 장식한 칼 2자루,무늬를 새긴 구리종 3개, 오색번(五色幡) 2간,미녀 원(媛)【원은 이름이다】 및 그의 시녀 오전자(吾田子)를 소가노이나메노스쿠네(蘇我稻目宿녜) 大臣에게 보내었다. 이에 大臣은 두 여자를 맞아 들여 처로 삼고 경(輕)의 곡전(曲殿)에 살게 했다.【철옥(鐵屋)은 장안사(長安寺)에 있다. 이 절이 어느 나라에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어떤 책에는 “11년에 오오토모노 사데히코노 무라지(大伴狹手彦連)이 백제국과 함께 고려왕 양향(陽香)을 비진류도(比津留都)에서 쫒아내었다”고 한다】.
2 삼국사기 기록
一年 평원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북제가 왕을 책봉하다
二年春二月 시조 사당에 제사지내다
二年春三月 왕이 죄수를 사면하다
三年夏四月 기이한 새가 궁정에 모이다
三年夏六月 큰물이 나다
三年冬十一月 진에 조공하다
四年春二月 진이 왕을 책봉하다
五年 큰 가뭄이 들다
六年 북제에 조공하다
七年春一月 왕자 원을 태자로 삼다
七年 북제에 조공하다
八年冬十二月 진에 조공하다
十二年冬十一月 진에 조공하다
十三年春二月 진에 조공하다
十三年秋七月 왕이 패하에서 사냥하다
十三年秋八月 궁실 수리를 중단하다
十五年 북제에 조공하다
十六年春一月 진에 조공하다
十九年 주에 조공하니 주가 왕을 책봉하다
二十三年春二月 많은 별이 떨어지다
二十三年秋七月 서리와 우박이 내리다
二十三年冬十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다
二十三年冬十二月 수에 조공하니 수가 왕을 책봉하다
二十四年春一月 수에 조공하다
二十四年冬十一月 수에 조공하다
二十五年春一月 수에 조공하다
二十五年春二月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다
二十五年夏四月 수에 조공하다
二十五年 수에 조공하다
二十六年 수에 조공하다
二十六年夏四月 수 문제가 사신을 위해 잔치를 베풀다
二十七年冬十二月 진에 조공하다
二十八年 장안성으로 천도하다
三十二年 진이 멸망한 소식을 듣고 수의 침입에 대비하다
三十二年 수 고조가 왕을 책망하다
三十二年冬十月 평원왕이 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