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회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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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昌回鹘

"고창국 내에는 빈민이 없으며 먹을거리가 없는 자가 있으면 함께 그를 구제해준다 합니다. 백성 중에 많은 사람이 장수하여 대개 백여 세를 살며 요절하여 죽는 자가 전혀 없습니다. (중략) 가난한 사람들도 모두 고기를 먹습니다. "

-『송사 고창전』

대충 어떤 나라인지 짐작이 온다.

1 개요

키르기스에 의해 위구르 제국이 멸망한 뒤 흩어진 위구르족의 한 갈래가 지금의 투르판과 천산산맥 방면에 나라를 건국했다. 수도는 고창에 두었다.

2 성립과 발전

서주회골(西州回鹘), 천산회골(天山回鹘), 북정회골(北廷回鹘) 또는 투르판 위구르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840년, 키르기스가 위구르 제국의 수도 오르두 발리크를 무너뜨려 위구르 제국이 멸망하자 위구르의 잔존세력은 서진하여 투르판 분지와 천산산맥에 나라를 세웠다. 정확히 나라가 몇년에 세워졌는지는 알 수없으나 911년, 감주회골이 '서한의 금산 제국'을 멸망시킨 이 시기에 고창회골이 성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창회골은 실크로드를 통해 얻는 이익을 기반으로 하여 국가를 유지하였다. 경제력이 뒷받침되자 주변국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향상했다. 종교는 마니교를 대체적으로 신봉했다. 때문에 마니교가 원활하게 퍼지도록 마니교를 전파하는데 앞장섰다.[1]

3 멸망

1132년, 요나라 황족 출신 야율대석북요를 수립했다가 멸망하자 군사를 이끌고 서진하여 중앙아시아에 세력을 펼쳐 서요를 건국했다. 야율대석은 고창회골의 왕 빌게에게 선대의 위구르족과 거란족은 우호관계였다는 내용을 강조하고 카라한 왕조를 정복하기 위해 길을 빌려 달라는 서신을 보냈다. 이에 빌게는 야율대석에 직접 찾아가 토산물 바치고 길을 빌려주었다. 이렇게 비교적 강대국인 서요에게 우호적인 자세를 취해 비록 예속되었지만, 국가의 명맥은 유지했다. 그러나, 몽골제국이 몽골 초원을 통일한 뒤 새로운 북방의 패자로 떠오르자 1209년, 고창회골은 몽골제국에 복속되었다.[2] 명분적 멸망은 1368년, 고창회골이 명 태조 주원장에게 항복한 기년까지 포함시킨다.

4 문화

이 국가는 존재감이 없어 왠만한 듣보잡 국가로 볼 수 있지만, 왕연덕의 서역사정기(西域使程記)와 왕연덕사고창기(王延德使高昌記)를 통해 고창회골의 문화만큼은 세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3] 고창회골은 남으로 토번, 서쪽으로 카를룩 동으로는 서하와 마주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한족 문화와 스텝 문화는 물론있고, 페르시아 문화까지 교차하는 다문화 중심지였다. 그럼에도 각 문화의 중심부와 거리가 있어서 어느한쪽으로 기울이지 않았다.
  1. 이희수가 쓴 터키사엔 불교가 성행하고 오히려 마니교가 비호받았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위구르족의 후손인 회족은 이슬람교를 믿고있다.
  2. 비록 고창회골은 몽골제국에 복속되었지만, 이들 위구르족은 몽골제국이 관료 조직이 정비된 국가를 건설하는데에 부분적 역할을 맡았다.
  3. 두 사서는 위구르 문화사를 연구하는데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