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사서 | |||
흠정 24사 | |||
순서 | 이름 | 저자 | 권수 |
1 | 사기 | \[[[전한]]\] 사마천 | 130 |
2 | 한서 | \[[[후한]]\] 반고 | 100 |
3 | 후한서 | \[[[유송]]\] 범엽 | 120 |
4 | 삼국지 | \[[[서진]]\] 진수 | 65 |
5 | 진서 | \[[[당나라|당]]\] 방현령 등 | 130 |
6 | 송서 | \[[[양나라|양]]\] 심약 | 100 |
7 | 남제서 | \[[[양나라|양]]\] 소자현 | 59 |
8 | 양서 | \[[[당나라|당]]\] 요사렴 | 56 |
9 | 진서 | \[[[당나라|당]]\] 요사렴 | 36 |
10 | 위서 | \[[[북제]]\] 위수 | 114 |
11 | 북제서 | \[[[당나라|당]]\] 이백약 등 | 50 |
12 | 주서 | \[[[당나라|당]]\] 영호덕분 등 | 50 |
13 | 수서 | \[[[당나라|당]]\] 위징 등 | 85 |
14 | 남사 | \[[[당나라|당]]\] 이연수 | 80 |
15 | 북사 | \[[[당나라|당]]\] 이연수 | 100 |
16 | 구당서 | \[[[후진]]\] 장소원 등 | 200 |
17 | 신당서 | \[[[북송]]\] 구양수 등 | 225 |
18 | 구오대사 | \[[[북송]]\] 설거정 등 | 150 |
19 | 신오대사 | \[[[북송]]\] 구양수 | 74 |
20 | 송사 | \[[[원나라|원]]\] 탈탈 등 | 496 |
21 | 요사 | \[[[원나라|원]]\] 탈탈 등 | 116 |
22 | 금사 | \[[[원나라|원]]\] 탈탈 등 | 135 |
23 | 원사 | \[[[명나라|명]]\] 이선장 등 | 210 |
24 | 명사 | \[[[청나라|청]]\] 장정옥 등 | 332 |
기타 정사서 | |||
- | 동관한기 | \[[[후한]]\] 유진 등 | 22 |
- | 신원사 | \[[[중화민국]]\] 커사오민 등 | 257 |
- | 청사고 | \[[[중화민국]]\] 자오얼쉰 등 | 536 |
宋史
1 개요
중국 25사 중 하나이며 북송과 남송의 약 320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기전체의 정사이다. 1343년 2월, 중서우승상 탈탈(脫脫)이 도총재관 겸 감수국사를[1], 철목아탑식(鐵木兒塔識), 장기암(張起岩), 구양현(歐陽玄), 여사성(呂思誠). 갈혜사(擖傒斯) 등이 총재관을 맡아서 찬수사업을 시작하였다. 송사의 편찬사업은 신속하게 착수되어 2년 7개월만인 1345년 10월에 496권이 완성되었다.[2]
2 편찬 과정
송사는 원나라가 남송을 멸망시킨 직후 편찬이 시도되었다. 1279년, 원 세조(世祖) 쿠빌라이 칸은 사관들에게 요, 금, 송의 역사를 편찬하도록 지시했다. 이미 쿠빌라이는 1261년, 요사와 금사의 편수를 지시한 바가 있다. 1271년, 요사, 금사의 편찬자가 증대되어 박차를 가했으나 이러한 와중에 남송이 멸망하자 요사, 금사, 송사를 함께 편찬하도록 명했다.
2.1 정통성 문제
그런데, 이렇게 시작된 편찬 사업은 차일피일 미루어졌다. 인종(仁宗) 연우(延祐) 연간(1314 ∼1320),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영종(英宗) 지치(至治) 연간(1321∼1323) 원 조정은 국령을 반포해 송사 편찬의 의지를 드러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사의 편찬은 많은 딜레마를 내재하고 있어 계속 답보 상태를 이어갔다.
송사 편찬의 골칫거리가 된 것은 의례(義例), 즉 사서의 성격을 어떻게 매듭짓냐는 것이었다. 송나라는 북방 민족의 왕조들과 병존했다. 북송 시기 거란족의 요나라와, 남송 시기 중반까지 여진족의 금나라와 공존했다. 따라서 송나라의 역사를 기술할 때 요, 금과 불가분적인 관계에 있었다. 이것은 어느 왕조가 정통성이 있었느냐는 문제와 직결되었다. 송사와 더불어 요사와 금사의 편찬이 계속 지지부진 했던 것도 바로 이때문이었다. 당시 원에서는 두 가지의 입장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주자학을 따르는 학자들은 송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고 나머지 요와 금을 송사에 복속시켜 기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송 뿐만 아니라 요, 금에게도 정통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송을 본기(本紀)에 기록하고 요와 금은 각각 재기(載記)에 기록해야 한다.
2. 요와 금을 북사(北史)로 편찬하고, 송은 송사(宋史), 남송사(南宋史)로 분찬해야 한다.
그런데, 지정 연간 황실의 분열과 부정부패, 홍건적의 난 등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자 원 조정은 이전 시기의 전장제도(典章制度)와 치란흥망(治亂興亡)을 살펴서 거울로 삼고자 역사 편찬을 서둘렀던 것이다. 총감독으로 임명된 탈탈은 논쟁을 중단시키고, “삼국 모두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고 각각의 연호를 사용한다(三國各 與正統, 各繫其年號)”는 원칙을 확정했다.
3 구성
본기(本紀) 47권, 지(志) 162권, 표(表) 32권, 열전(列傳) 255권으로 합 49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4 의의와 평가
역대의 정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최대의 분량을 보유하고 있다. 당사를 기록한 구당서와 신당서를 합해도 송사가 71권으로 더 많다. 특히 지(志) 162권은 전체 중에서 3분의 1를 차지할 정도로 방대한데, 송나라의 사회, 문화, 제도, 경제 등 세세하게 살펴볼 수 있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열전(列傳) 225권에는 인물만 약 2,000명이 수록되어 있으니... 이때는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3] 송사는 남송이 멸망할 때 관련자료가 잘 보존되어 빠르게 편찬될 수 있었다. 송사의 근본은 구사(舊史)에서 비롯되었는데 역사가들은 저작인 구사가 있었기에 송사가 지금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송사는 너무나 일찍 편찬되어 많은 문제점과 한계점을 안고 있다. 일단, 실록의 문장을 초록하여 전후 문맥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 부분이 허다하다. 또한, 사료의 고증 문제도 심각하다. 전반적으로 중복된 내용이 많으며 문맥이 혼동되어 앞뒤가 맞지 않다. 이러한 면모 때문에 송사는 역대 정사 중에서 최악의 정사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명나라 때 가유기(柯維騏)의 『송사신편(宋史新編)』 과 왕수(王洙)의 『송사질(宋史質)』 등이 송사의 구조적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 편찬되었다.- ↑ 사업 당시 총감독을 맡은 직함이다.
- ↑ 송사가 이렇게 신속하게 종결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료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남북조시대까지만 해도 편찬제도를 국가에서 시행하지 않았다. 당나라가 건국되어 기거주(起居注), 시정기(時政記), 실록, 회요 등의 제도에 덧붙여 일력(日曆), 국사(國史) 등의 편찬제도가 단계별로 정리되기 시작하더니 송나라 때 사서 편찬제도가 완비되었다.
- ↑ 참고로 송보다 오래 존속했던 고려의 고려사 열전이 50권에 수록된 인물이 1,008명이다. 물론 국토와 인구의 차이나 고려의 잦은 외침으로 인한 기록손실을 감안하면 고려도 꽤 많은 역사 인물 기록을 남겼다고 할 수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