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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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시대 |
몽골 제국 Yeke Mongɣol Ulus | ||
[1] | ||
존속기간 | 1206년 ~ 1368년 | |
위치 | 몽골, 중국, 한반도,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중동 북부, 동유럽 | |
수도 | 오논 강→카라코룸→대도[2] |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 칸 / 황제(皇帝)[3] | |
언어 | 몽골어 | |
민족 | 몽골인, 셀 수 없을정도로 많은 피지배 민족들 | |
종교 | 텡그리, 불교 이슬람, 경교 등의 종교들 | |
주요사건 | 1206년 건국 1368년 원 멸망 1388(북원 멸망) 1487년 다얀 칸의 몽골 제국 재건 1634년 청의 외몽골 합병 1921년 마지막 칸인 복드 칸 폐위 | |
통화 | 추가바람 | |
성립 이전 | 소규모 몽골 부족들 | |
멸망 이후 | 원나라, 차가타이 칸국 킵차크 칸국, 오고타이 칸국 일 칸국 |
목차
1 개요
전성기 시절 동유럽, 서아시아부터 고려까지 정복한 제국
역사상 가장 큰 황제국[4]이자, 중세 유라시아 전역을 지배한 초대형 유목제국
중세 몽골어로는 '예케 몽골 울루스(Yeke Mongɣol Ulus)'라고 했으며 대몽골국이라는 뜻이다. 현대몽골어로는 이흐 몽골 올스(Их Монгол улс) 라고 한다. 수도는 칭기즈 칸 때는 오논, 2~4대 칸 때는 카라코룸,5대 쿠빌라이 칸 때는 대도.
아버지를 잃고 아홉 식구의 생계를 걱정하던 아이가 세계의 공포 칭기즈 칸으로 자리잡아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갈아마시며 시작부터 극적으로 세계사에 등장하였다. 이후 쿠빌라이 칸, 바투, 훌라구 등이 전 세계의 여러 지역을 정복하였다.
그 크기[5]가 현재 러시아와 비슷하거나 혹은 조금 더 커보이나, 그것은 고위도 지역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메르카토르 도법의 특징.때문에 그러하며, 다른 도법으로 본 실제크기는 러시아와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거대하다.[6] 그러나 칭기즈 칸이 세습제를 바탕으로 마련한 분할 통치 제도가 이후 제국이 칸국[汗國]으로 분열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칸국들은 다양한 역사를 겪다가 토착 민족의 반발을 주 원인으로 멸망하였다. 황성(皇姓)은 보르지긴. 참고로 세계사 교과서 등에서는 칸을 한자로 음차한 汗을 우리식 발음(한)으로 표기한 까닭에 한국이라는 명칭이 등장했었는데 지금은 거의 없다.
2 각국에서의 이미지
이들의 위세가 워낙 컸던지 아직도 유럽과 이슬람교 문화권에서는 칭기즈 칸을 학살자나 위대한 정복자로 보는 등 시선이 갈린다. 몽골에서는 당연히 자랑스러운 역사로 다룬다. 하지만 공산주의 시절에는 칭기즈 칸을 대놓고 칭송하기 힘들었고, 학교에서도 칭기즈 칸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정작 심하게 피해를 입은 국가였던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인식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7] 나름대로 잘 나가던 남송이 싸그리 갈린 것도 그렇고 고려도 옛날부터 내려오는 문화재(특히 황룡사)가 파괴되고 사회가 개판이 되는데 일조한 것도 그렇고 좋게 볼 이유는 적다. 일단 일제강점기처럼 가까운 시대가 아니라 실감이 나지 않아 감정적으로 바라보질 않고, 같은 동북아시아 사람이라는 동질성 때문으로 보인다. 게다가 일각에서는 사대주의와 식민사관에 대한 반감으로 고구려와 함께 북방 유목민들을 높여주는 풍조도 한동안 만연했었다. 고려의 경우 결국 자신들의 힘으로 몰아내기도 했다. 물론 어쨌든 타민족의 국가에 예속된 시기는 맞으므로 한국의 강한 민족주의적 사관 경향에 따라 부정적 시각도 크다.]
다만 중국은 정부적인 입장 및 공정 외에 별개로 일반적인 한족들과 몽골인들의 감정은 그리 좋지만은 않다. 특히 남부지역 한족들의 몽골에 대한 감정과 외몽골의 몽골인들의 한족에 대한 감정은 한 마디로 표현하면 원수.[8] 바이두나 해외 아시아인 포럼에서 몽골인과 중국인의 댓글을 봐도 무지 살벌하다. 한족주의자들 에게는 한족에게 가혹한 통치를 펼친 원나라는 야만적이라는 평가가 일반적. 그런데 어쨌든 넓고 강했으니까 원나라를 최고로 치는 한족들도 꽤 된다.[9]
일본은 우호적인 편이다.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대륙으로 건너가 칭기즈칸이 되었다는 개드립도 그렇고 원나라때 있던 일에 대해서는 침략으로 기억하지만, 일단은 자기네들이 카미카제덕으로 살아남았다며 이날을 기억한다.
티베트의 경우에도 징하게 항전하고 버텨내려고 안간힘을 썼는데도 지금은 호의적이다. 아무래도 청나라나 현대 중국에 정복당한 것에 비해서는 훨씬 옛날 이야기에, 티베트 불교가 몽골에서는 어느정도 지분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베트남은 코 앞에 붙어 있었는데도 3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략을 막아낸 뒤 이를 이끌었던 쩐흥다오가 민족 영웅으로 자리한 덕분인지 이런 취급은 안 받는다. 여타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는 밀림과 바다, 그리고 베트남이라는 방벽이 있어줬기 때문에 접점이 크게 없었기에 관심이 크지 않다.
서아시아에서는 직접 갈려나갔기 때문에 현재에도 평가가 나쁜 걸 넘어서서 증오의 대상이다.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의 역사서에는 칭기즈 칸이 아예 악마와 손을 잡았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서는 칭기즈 칸이 알렉산드로스 3세와 함께 가장 최악의 침략자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 동네에서는 몽골 제국 얘기를 함부로 하다간 멱살까지 잡힐 정도이다. 특히 몽골의 서아시아 침공 선봉장이었던 투르크인에 대해선 그야말로 극악의 증오심을 갖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투르크계 종족인 하자라인의 경우가 바로 이 투르크 군인들의 후손들인데, 아프간을 박살낸 몽골제국의 후손이라는 것과 소수인 시아파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고 어렵게 산다. 물론 이는 다른 투르크계인 우즈벡이나 키르기즈, 투르크멘 등도 마찬가지라 이 셋이 연합해 북부 동맹을 구성해 탈레반과 싸우기도 했다. 이란 역시 몽골-투르크와 관련된 것들은 본능적으로 증오해 이웃나라인 터키나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국가들을 되게 고깝게 본다.
인도의 경우는 수십 년에 걸쳐서 여러번 침략이 있었지만, 시대별로 인도에 있던 왕조들이 모조리 몽골 제국과 차가타이 칸국을 물리쳐서 몽골제국에 대한 이미지는 그냥 아시아의 자존심 정도에 그친다. 그리고 무굴 제국은 방계 혈통으로 몽골제국의 후손을 자처하는 페르시아화된 투르크계 국가였다. 인도의 네루도 칭기즈 칸에 호의를 표한 걸 보면 19세기 ~ 20세기 동안 유럽의 지배를 받은 아시아의 자존심을 세워주기에 우호적으로 여겨진 듯하다.
이렇듯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는 몽골 제국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서구에서는 야만성을 강조하는 느낌이 큰 편이다. 물론 그런거 없고 오오 몽골제국 오오 하며 하악거리는 양키 역덕들도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주로 직접 갈려나갔던 폴란드나 러시아[10]를 비롯한 동유럽에서 이미지가 안 좋고, 접점이 별로 없었던 서유럽 쪽에서는 그냥 이전의 훈족과 더불어 야만적인 유목인의 이미지 정도만 갖고 있다.
캅카스지역의 일부 국가들은 정복당했지만 일부는 침공에 저항하여 땅을 지켜냈다. 이 지역은 여러 산맥이 얽혀 있어 지세나 그에 따른 세력관계가 매우 복잡하지만 전략적 요충지[11]라 몽골 제국이나 몽골 계열 국가들이 자주 공격하는 지역이었다. 칭기스칸 때 제베와 수부타이가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크게 이겼고 이후 일칸국 때 본격적으로 침공해 속국이 된다. 체첸같은 북부 지방은 두차례 침공을 이겨냈으나 긴 후유증을 앓아야 했다.
터키는 몽골제국의 장군들의 대부분이 튀르크계로서 유럽이나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원정에 참가하였고 킵차크 칸국이나 일 칸국, 차가타이 칸국, 오고타이 칸국 등이 전부 몽골-튀르크 제국이었다는 이유로 몽골제국에 호의적이다. 애초에 훌라구의 바그다드 원정 때 사령관이었던 키트 부카부터가 기독교를 믿는 튀르크인이다. 칭기즈 칸 역시 아랍이나 이란과 달리 같은 알타이인으로서 영웅으로 보고 관련 학회도 많이 있다. 사실 튀르크인 자체가 원래 몽골계 종족이었고 몽골 통일 이전에는 외몽골에 키르기즈나 나이만, 메르키트, 케레이트 등 여러 튀르크 부족이 섞여 살았다는 것도 그렇고 이래저래 둘은 형제나 다름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몽골땜에 사실상 룸 셀주크가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별 신경쓰지 않고 좋게 보며 이는 티무르 제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냥 같은 튀르크계 부족끼리의 알력다툼 정도로 보는 듯.물론 남쪽의 아랍인들에게 있어선 몽골이나 튀르크나 둘 다 죽일 놈취급을 할 뿐이며 특히 몽골 제국의 앞잡이였고 이후 오스만 제국 당시 아랍인을 차별한 튀르크인에 대한 증오는 극에 다른다. 이라크나 시리아 같은 나라에서 터키이야기는 민감하다.
서구 학계에서는 원래 야만적인 파괴의 제국이라는 평가가 강했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동서양 교류의 촉진을 통해 세계사 발전에 큰 영향을 줬다는 재평가도 힘을 얻고 있다. 중국 학계에서도 이전까지는 몽골과 유목민족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 자체가 부정적이었지만, 현재는 정체된 한족의 중화문명에 유목민족이 끊임없이 일종의 문화적, 인적 수혈을 해주었다는 긍정적인 견해 또한 제시되고 있다.[12] 그래도 몽골 제국이 죽인 인구(과학기술에 영향을 끼치던 학자들도 행방불명이 되거나 사망)와 소실시킨 지적 유산(도시나 도서관에 대한 파괴나 방화를 해서 수학이나 과학기술 서적도 많이 사라졌다.)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몽골 제국이 가지고 온 파괴와 학살과는 별개로 몽골 제국과 그 후계 중앙아시아 유목 제국들이 유라시아 동서 문명간 교류 역사에 거대한 새로운 장을 쓴 것만큼은 확실하다. 몽골에서 비롯한 칸이란 호칭은 훗날 만주족에서 페르시아, 심지어 제정 러시아의 짜르들 마저도 역관광정복한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을 상대로 백인 칸이란 타이틀을 내세웠을 만큼 유라시아 국가들에게 무적의 군사력을 가진 절대적인 권위의 지배자로서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형성했으며, 중세 후기의 티무르에서 먼 훗날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 마저도 징기스칸과 몽골 제국의 권위를 빌려 정복 제국으로서 지배력을 강화하려고 했을 만큼 몽골 제국이 광활한 유라시아 문명사에 남긴 자취는 깊다. 당장 마르코 폴로만 봐도 몽골의 통치 아래 실크로드가 마지막으로 안정적인 번영을 누렸을 때 중국을 답사했다. 그것이 설령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몽골의 영향력은 대항해시대와 같은 근대의 발판을 만들어낼 정도로 역사상 최고 수준이었다. 물론 영향력이 아무리 굉장해도 몽골 제국이 가지고 온 파괴와 학살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지만.
3 역사
3.1 칭기즈 칸 이전
몽골이 사서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당대로서, 몽올실위(蒙兀室韋)라는 명칭으로 나타난다. 이 때는 북만주 초원지대에 있었던 군소부족의 하나였을 뿐이었다. 중국으로 치면 송대 이후에 강성해지는데, 이후에는 몽고(蒙古)란 명칭으로 불리게 되며, 원나라 시절 한문으로 써야 할 대외문서 등에서 몽골인들도 언제나 이 '몽고'라는 표기를 썼다.
그러나 이 표기는 '어리석고 낡았다'는 의미라 몽골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비록 단순한 음차에 불과하지만, 단순 음차로 치기에는 좋은 의미의 한자를 갖다 쓰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오랑캐라고 깔보는 면도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13] 따라서 몽골인들과 대화할 일이 생기면 몽고라는 표현은 피하도록 하자. 비슷한 예로 일본의 왜노국도 있다. 실제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도 이런 지적으로 인해 2007년부터 표기가 '몽고'에서 '몽골'로 수정되었다. 오늘날도 중국에서도 같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몽골인들은 초기 거란이나 여진 같은 메이저 유목민족에게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는 중소 유목민족에 불과했다. 게다가 각 부족 간의 분열이 워낙에 잦았기 때문에 타 유목민족에 비해 약소한 세력이었다. 이들은 바이칼 호수 ~ 북만주에 이르는 넓은 구역을 떠돌아 다녔고 딱히 거처는 없었다. 칭기즈 칸 역시 출생지는 외몽골이었다만 그의 일족은 대흥안령부터 바이칼, 알타이까지를 고루 유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적대적인 부족에게 아내를 약탈을 당하기도 했다.
3.2 칭기즈 칸 시대
1189년, 보르지긴 씨족 출신인 테무진이 몽골계 주변 부족들을 통합하고, 튀르크계 민족들을 물리치면서 1206년 몽골 고원을 통일하고 칸의 자리에 올라, 이후부터 칭기즈 칸으로 불리게 된다.
이러한 몽골의 성장을 본 남송은 금나라를 요격하기 위해서 몽골에게 지원을 했고, 이것은 몽골의 성장을 가속화했다. 중국에 대한 지속적인 약탈로 인해 우수한 군사기술력과 재원을 확보한 몽골은 서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해 호라즘 왕조를 비롯해 중앙아시아의 부유한 오아시스 국가들을 박살내며 막대한 부를 획득했다.[14] 호라즘 왕조를 격파한 후 칭기즈 칸이 이끄는 본군은 본국으로 회군했으나 제베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부대는 서진을 계속해 조지아 왕국을 격파한 뒤 캅카스 산맥에 도달한다. 캅카스 산맥에서 토착 산악민족과 쿠만족에게 포위당하는 위험을 겪기도 했으나 쿠만족에게 뇌물을 줘 포위상태를 극복한 후 토착 산안민족과 쿠만족을 각개격파한 후, 칭기즈 칸의 명령에 따라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귀환을 시작하나 그 과정에서 쿠만족의 구원요청을 받고 진격한 러시아공국 연합군과 격돌, 칼가강 전투에서 적 세력을 일소시킨 후 본국으로 귀환한다.[15] 한편 칭기스칸이 이끄는 본군은 칭기스칸이 주력을 끌고 나간 사이 어느 정도 세력을 회복한 서하와 금나라에게 맹공격을 가하나, 서하 정벌 도중 일어난 낙마사건을 계기로 고령의 칭기즈 칸은 건강을 크게 해치고 결국 두 나라에 대한 정벌은 칭기즈 칸이 세상을 떠난 후 완료되게 된다.
참고로 중국 정벌 초기에는 정주민족에 대한 개념이 약했기에 모든 농토 다 쓸어버리고 전부 유목을 위한 목초지로 만들려는 후덜덜한 계획도 있었다. 이걸 요나라 출신의 명참모 야율초재가 막아서 무산되었지, 안 그랬다면 세계의 역사가 바뀌었을 듯.[16] 수 많은 중앙아시아의 도시들도 피해를 입고 고려도 황룡사와 경주 비롯한 수 많은 문화재와 도시가 파괴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는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이 겨우 몽골의 침입 직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점을 보면 얼마나 파괴가 극심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모습들 때문에 현재 여러가지 대중매체(특히 서구권)에서는 단순무식한 야만인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잦다.
3.3 전성기
몽케 칸의 사후 제국은 일 칸국, 오고타이 칸국, 차가타이 칸국, 킵차크 칸국, 그리고 원으로 갈라진다. 원래 몽골족의 전통 상속 제도는 자식들에게 모든 걸 평등하게 분배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나라도 평등하게 분배받았는데, 자손들이 서로 사이가 안 좋아지면서 계속해서 갈라지게 되었다.
원은 카라코룸에서 대도(오늘날의 베이징)로 수도를 옮기고 본격적으로 중국화되기 시작했지만, 하필이면 원의 전성기에 정복에 목마른 쿠빌라이 칸이 등장하면서 주변국들은 졸지에 대재앙을 맞았다. 고려는 복속 이후 일본 정벌할 배 만들고 무리한 공물을 바치느라 나라가 다 뒤집혔고, 남송, 미얀마의 파간 왕조, 참파 등이 망했으며, 베트남과 일본, 자바 등도 간접적으로나마 된서리를 맞았다.
한편 중앙아시아로 진출한 몽골인들은 당대의 선진 문명권이던 중동으로 진출해 셀주크 튀르크와 아바스 왕조 이슬람 제국과 전쟁을 치루면서 끝내 바그다드[17]를 점령했다. 또 다른 한편으론 유럽으로 진출한 몽골인들은 러시아의 크고 작은 공국들을 무너뜨리고 폴란드까지 레그니차 전투 등 3~4번의 침공 끝에 무너뜨리고, 헝가리에서는 치열한 공방을 주고 받았으며, 불가리아와도 전쟁을 치뤘다. 그런데 이 시기에 오고타이 칸의 사망으로 인한 국내 정세가 혼란해지자 정복 활동을 중단하고 귀환해 버렸다.
정복 이후 몽골이 동에서 서에 이르는 무역로를 단일 세력권으로 통합하면서 동서무역로는 본격적으로 가동될 수 있었다.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을 쓸 수 있었던 것도 몽골 제국이 동방무역로를 완전히 통제하는 상황이었기에 가능했다. 유럽과 아시아는 서로 붙어있었음에도 그동안 상호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지만 이후 역참제가 중앙아시아까지 확장되고, 13세기 말에는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해상로와 연계되어 전례없는 원거리 무역 발달의 원동력이 되었다.
마르코 폴로 이외에도 기욤 드 루브룩 등의 선교사나 이븐 바투타와 같은 여행가들, 아르메니아 국왕 헤톰1세와 같은 사절단도 이 역참로를 이용하였다. 이슬람 역사가 아불 가지는 당시 상황을 가리켜 모든 나라들은 누구도 누구한테서도 어떠한 폭행도 당하지 않은 채 황금쟁반을 머리에 이고 해가 뜨는 땅에서 해가 지는 땅까지 여행할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창 잘 나갔을 적엔 국제적인 위상과 위엄이 거의 전세계에 뻗칠 정도라 칸이 중대한 쿠릴타이를 소집할 때에는 몽골인들뿐만 아니라 중국인부터, 중동의 무슬림, 그리고 유럽인 사절단이 찾아오기까지 하였다.
한편으로 유럽에서는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나 여러 이유로 몽골을 왠지 좋게 봤던 듯하며, 프레스터 존 따위 환상이라는 것이 밝혀진 뒤에도 몽골 군주들이 선교만 받으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리라 믿었던 듯하다.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뤼브뤼키, 교황은 카르피니 등의 사절을 보내기도 했지만 현실은 시궁창.[18] 그래도 몬테 코르비노의 전도 활동은 제법 성공적이어서, 대도에 성당을 세우기도 했다.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사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보다 이들 선교사의 여행기가 중요한 사료로 인용된다. 특히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사자 카르피니는 쿠릴타이와 대칸 구유크의 즉위식까지 참가하여 몽골인들의 쿠릴타이를 직접 묘사한 거의 유일한 기록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몽골 제국은 개인역량에만 의존하던 이전 유목민 제국과 달리 칭기즈칸의 칙령에 기반하여 성문화한 야삭(Yassa, Yasaq)을 통해 어느정도 일체성을 유지할수 있었으며 이 야삭은 몽골제국이 정복한 영토 내에 수세기 동안 통용되었다. 특히 중앙아시아에서의 몽골 영향력은 오랬동안 지속되어 칭기즈 칸의 후예를 자청했던 티무르 역시 이슬람 율법 샤리아와 함께 칭기스칸의 야삭을 통치 규범으로 삼고, 동차가타이로 칸국의 야삭에 정통한 학자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이 지역에서는 18세기 마지막 칸국이 사라질때까지 칭기즈칸 보르지긴의 혈족을 잇는 칸이라는 칭호가 계속 사용되었다.
3.4 몽골 침입을 격퇴한 사례
얼핏 보면 침공하는 곳마다 간단하게 갈고 다닌 먼치킨 군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패배하거나 고전한 사례도 적지 않다.
- 몽골군의 가장 첫 패배인 파르완 전투를 비롯, 창업주 칭기즈 칸 시절 서역 원정은 초반에는 고전했다. 그 후로는 큰 무리는 없었지만 무카리가 이끈 중화권과의 전투에서는 꽤나 고전했고, 칭기즈 칸 본인은 남송을 압박하던 여진족의 금도 아닌 탕구트족 서하와의 전투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2대 오고타이 칸 때는 금을 멸망시키기에 이르렀으나, 만만해 보였던 남송과의 전투에서 양양성에서는 여문환의 저항으로 함락시키는데 5년이나 걸리거나 명장 맹공에게 고전해 물러나기도 했다. 당시 송나라는 화창과 화전, 화염방사기 등 당대 화약무기 사용으로는 최고를 달리고 있었고 병력 또한 수십만에, 최대 백만에 달하기도 했다. 몽골이 비로소 중국을 공략할 수 있게 된 것은 회회포를 중동에서 들여오고 대포를 활용한 공성술을 제대로 습득한 이후이다. 남송 조정이 무너진 뒤에도 잔당들은 광저우 일대에서 송의 수군을 주축으로 저항을 계속할 수준이었으니 말 다한 셈.
- 일본은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당시 규슈 하카타에서 2차례에 걸친 침공을 받았지만, 해상에 정박중인 여몽연합군 함대에 불어닥친 태풍의 도움에 힘입어 극적으로 격퇴에 성공했다. 다만 몽골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비를 증강하려고 무리한 결과, 되려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었다.
- 아이누 족이 살던 사할린 섬을 타타르 해협을 건너 1264, 1284, 1285, 1286년에 침공하기도 했다. 거점을 확보하고 둔전을 일궜지만, 하필 1287년 몽골 본국에서 큰 반란이 일어나기도 해서 지배가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상기한 일본 큐슈 침공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짐작하기 쉽지만, 원명대의 지도를 보면 사할린과 홋카이도, 일본이 쭉 이어져 있다는 사실은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 미얀마를 침공해 버간(파간) 왕조를 붕괴시키고 북부를 잠시간 지배하기도 했지만 본국에서 지나치게 험하고 멀어서 유지가 어려웠는지 곧 버간의 왕족을 포섭한 타이계 샨족의 저항군에 의해 패퇴했다.
- 이집트의 맘루크 역시 명군 바이바르스의 활약으로 중동으로 발을 뻗치던 몽골 세력을 시리아에서 격퇴했다. 참고로 이 중에 예전 칭기즈 칸 시대에 아랍에 팔았던 노예들도 있었다. 애초에 맘루크가 이집트로 팔려온 투르크계 노예병들이 일으킨 왕국이다.
- 인도의 노예 왕조, 할지 왕조, 투글루크 왕조도 몽골의 도전을 받았으나 치열하게 싸웠고 결국 견뎌냈다.
- 캅카스 지방 북쪽의 일부 왕조들도 징하게 싸워낸 덕분에 몽골이 침략을 그만두었다. 그 대신 체첸 지방 같은 곳은 아주 오랜 후유증을 앓아야 했다. 단 조지아 나 아르메니아 등의 경우에는 약 백년 정도 지배당했다. 사실 캅카스 지방의 민족들은 러시아인들도 겁낼 정도로 호전적이고 민족성이 강하다. 수백년을 지배당해도 굴복당하지않는 기질이 괜히 그런 게 아니고 코카소이드라는 어원이 나온 지역인만큼 이곳에서 유럽으로 이주한 민족들도 다양하며 좁은 지역에 큰 산맥들이 즐비하고 그로 인해서 수많은 민족들이 존재한다.
- 유럽 군대도 몽골군을 격퇴한 적이 있다. 오스트리아 빈 근방에서 유럽 기사단이 몽골군의 선봉을 격파한 것.
3.5 고려와의 관계
여몽 관계 문서 참조.
3.6 분열과 후계국가
사실상 몽골 제국의 정통이라 할 수 있는 원은 1368년 대도를 버리고 내몽골의 후룬부이르 초원으로 돌아가(사실상 원 멸망) 북원으로 잔존하였으나 1388년 쿠빌라이 칸 가문의 마지막 황제 평종 토구스 테무르가 살해당하고 대칸을 이은 조리그투 칸도 대칸만 이었지 원나라 황제라는 중국식 칭호는 포기하면서 완전히 멸망하였다. 이후에도 부족 단위로 쪼개진 몽골족은 영락제에게 토벌 대상이 되기도 하였고 외몽골의 오이라트는 허구한 날 북원과 그 후예 차하르부를 사막을 건너와 레이드를 뛰곤 했으나, 다얀 칸, 알탄 칸 등의 시대에 다시 부흥하면서 명을 압박하였다. 그러나 1634년 청태종이 이 지역을 합병하면서 스스로 몽골의 대칸을 겸하게 되었고, 이후 내몽골의 차하르부는 청나라의 속국으로 남게 되었으며, 이후 청과 남하하는 러시아의 중간에서 두 세력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분쟁은 강희제, 옹정제 시기 네르친스크 조약(만주 및 내몽골 동부)과 캬흐타 조약(외몽골) 등으로 국경선이 정해지면서 일단락되었으나, 제국주의 시대가 열린 뒤 청이 붕괴하고 러시아가 공산 혁명과 적백내전을 겪던 혼란을 틈타 외몽골에 침투한 미치광이 남작 운게른 슈테른베르크에 의해 1921년 점령되었고, 마지막 칸인 복드 칸은 1921년 폐위되어 1924년 죽었다. 내몽골은 운게른의 광기와 혼란이 비켜가고 중화민국의 엄연한 일원으로 남아 차하르, 열하, 흥안성의 3성이 주어졌으나 1931년 만주를 침략한 일본 육군이 만주국을 세우면서 동몽골(내몽골 동부) 흥안성은 만주국이 되 버리고 남몽골(내몽골 중부 및 서부)은 몽강자치연합정부라는 또 다른 일본 괴뢰국으로 전락한다. 이 몽강국은 "몽골판 만주국"으로 사실상 몽골을 일본이 식민지배했으며 칸이었던 덕왕은 꼭두각시였다. 동몽골의 몽골인은 "만주인"으로 한족 및 조선인과 같이 분류되어 2등 국민으로 차별받았다.
한편 '칸국'은 4칸국 이후에도 많은 국가들이 그 이름을 따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에 난립하였으나 점차 소형화되어 다른 국가들에 병합되거나 흡수되었다. 칭기즈 칸 다음 대에 형성된 4칸국만 들자면 킵차크 칸국은 1502년 타타르족에게 멸망하였으며, 오고타이 칸국은 14세기 초 내부 분열 이후 원과 차가타이 칸국에게 그 세력을 흡수당했고, 차가타이 칸국과 일 칸국은 14세기 중후반 소국으로 분열하였고 후에 티무르 제국이나 러시아 제국에게 병합당했다.
이후 티무르 제국이나 무굴 제국도 방계 혈통을 들어 이들을 계승했다고 주장하였는데, 어떻게 본다면 모계 쪽으로 후손이라 볼 수는 있지만 문화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몽골과는 별 유사성은 없었다. 몽골 제국은 당시 여러 나라와 혼인관계를 맺어서 몽골 제국의 인척이 되는 왕실이 한 두 개가 아니었으므로 당시에 몽골 황실의 후손이라는 건 큰 의미가 없었다.[19]
엄청난 판도를 자랑했지만 몽골 제국은 내전을 치르면서 각 지역별로 분열하게 되었고, 피지배민족을 동화시킬 수 있는 어떠한 문화적 역량도 없었기 때문에,[20] 원이나 여타 다른 나라에서 피지배민족에 동화를 피하기 위한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쇠락하였다.
흔히 몽골이 쇠퇴한 것은 원과 4칸국의 분할 상속으로 인한 집중적 권력의 약화로 알려져 있지만, 그 정도 규모의 거대 제국이 일원적 통치 하에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임을 감안하면 분할 통치도 나름대로 일리 있는 조치였다. 하지만 종주권의 계승을 놓고 4칸국이 서로 물어뜯은 것은 몽골 제국의 쇠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단 쿠빌라이 즉위 시의 아리크부카(아릭 부케)와 같은 반란 세력이 나타났으며, 쿠빌라이 칸의 재위기에 쿠빌라이의 제위 계승에 반발한 오고타이 칸국의 카이두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원과 4칸국이 본격적인 전쟁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결국 쿠빌라이의 대에서는 이를 완전히 정리하지 못하고, 다음 대에서야 카이두의 영역이었던 오고타이 칸국을 멸망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는 원의 종주권을 확인하기보다는 원과 다른 칸국이 완전히 별도의 노선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친선사절이 오갈 경우 동양사에서 일반적으로 일컫는 종번관계보다는 훨씬 밀착된 독특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일 칸국의 칸들이 원나라 대칸의 정식 책봉을 받기도 하고 킵차크 칸국의 왕족 일부가 원나라의 대권에 도전하기도 했다.
이후 원은 본격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혜종 토곤 테무르[21]의 시대에 그 하락세가 정점에 달했다. 당시 원의 화폐 정책이 철저히 실패로 돌아가면서 교초의 유통량이 폭증해 경제 구조가 뒤흔들렸고, 이를 수습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초의 남발이 가속화되면서 민중에게서 직접적인 반발을 부르게 된다.
이미 몽골인들은 지배층의 특권과 중국식 문화에 상당히 젖어 있어 정복기의 활력을 잃은 뒤였다. 게다가 유목민 출신이던 몽골인들은 정착기에 익숙하지 않은 화폐 문화를 사용하게 되면서 빚더미에 올라서 심지어는 자기 자식들을 노예로 판 사람도 꽤 되었다. 이런 와중에 몽골 귀족들은 이곳저곳에서 긁어모은 보물로 잘 살고 있어 빈부격차가 심했다.
결국 홍건적과 같은 반원 한족 세력이 크게 대두되는 중 주원장이 득세하였고, 원은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만리장성 북쪽인 내몽골의 후룬부이르(응창)로 도망가 북원이라는 이름으로 이 일대에 잔존했다. 그러나 1388년 이마저도 멸망당했으며, 이후 한동안은 아리크부카 계가 대칸을 이었으나 오이라트 계열의 에센 타이시가 즉위하면서 칭기즈 칸계 왕통은 15세기 후반 다얀 칸 시대까지 끊겼다.
한편 3개의 잔존 칸국도 혼란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차가타이 칸국과 일 칸국은 14세기 초까지는 그럭저럭 국가를 유지했으나 이후 분열의 시대를 맞았고, 이 사이 티무르가 득세해 두 칸국을 병합하였다. 차가타이 칸국은 이후 모굴리스탄 칸국으로 부활했으나 이전과 같은 활력은 보여주지 못했다.
킵차크 칸국은 이에 비해 장기간 존속했으나, 14세기 중반 일련의 정권다툼과 흑사병[22]의 발병으로 삐끗되기 시작하더니 1380년 쿨리코보 전투에서 러시아인에게 최초의 패배를 당했다. 그후 2년 후 토크타미쉬칸이 러시아 세력을 다시 한 번 억누르는데 성공하였으나, 15세기 후반이 되면 결국 러시아의 독립을 인정할 정도로 세력이 약화되어 3개의 칸국에 의해 영토가 분할되었다. 이 세 나라는 다시 러시아와 격전을 벌여, 16세기 후반이 되면 오스만 투르크의 부용국이 된 크림 칸국을 제외한 두 개 나라는 러시아에 흡수되었다.
15세기 후반이 되면 내몽골의 다얀 칸이 등장해 오이라트를 몰아내고 몽골 제국의 부흥을 선언한다(그의 왕호인 '다얀'도, '대원'을 뜻하는 것이다.). 이후 16세기 중엽 알탄 칸의 시대에 베이징을 포위하는 등(경술의 변) 한동안 몽골 제국은 크게 세력을 떨쳤으나, 본래 이 시기 몽골 제국의 연합체적 성격과 분할 상속으로 인해 이들의 활력도 서서히 떨어져 갔다. 결국 1634년에는 제국의 종주권을 가지고 있던 릭단이 청에 의해 정복되어 쫓겨나면서, 칸의 직위를 청에게 빼앗기고 몽골은 한동안 청의 아래에 복속된다. 하지만 청태종이 원나라의 옥새를 획득하고 칸의 직위를 받은 이후에 칭제한 것을 생각하면 이전의 이민족 국가들에 비해 우월한 대우인 셈이었다. 청태종은 내몽골을 평정 후 만주-몽골 연합제국으로서 청제국을 선언했으며 이후 정통 동몽골 황족인 보르지긴 씨족은 청의 외척이 된다. 청나라 황제의 절반은 징기스칸 일족인 셈이다.
사실 몽골 제국이 잠시 위대한 업적을 세우고 급속도로 와해돼 갔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몽골 제국의 분열의 이유중 가장 크게 꼽는 것이 바로 몽골의 상속 풍습이다. 장남이 모두 상속하거나 가장 많은 분배를 받는 일반적 타 국가와는 다르게 몽골은 재산을 자식들에게 모두 균등하게 분배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서 타 국가의 경우 분배를 크게 받지 못한 자도 물론 불만이야 있겠지만 "그래 뭐...그게 원칙이니까" 하고 넘길 수 있다. 하지만 몽골은 모두 정확히 분배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네가 더 많이 가졌잖아!!"하며 내부 갈등이 심하였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많이 발견되어 15세기에 상속법을 고치기는 하였으나 풍습은 쉽게 바꿀수 있는것이 아니라 몽골제국의 부흥에 큰 지장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몽골제국이 위대한 지도자 아래서선 급성장 할 수 있지만 그 지도자 사후 급속도로 분열과 내부갈등으로 약화되어 버린 큰 이유이다.
4 칭기즈 칸계 계승 국가
- 원 -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국호를 원(元)으로 정하면서 시작된다. 중국과 만주, 내몽골, 외몽골, 부랴티아, 투바, 알타이 지역을 지배했다. 몽골 제국의 종주권과 중국의 황제로서의 권위를 주장했으나 실질적으로 다른 4칸국은 독립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 킵차크 칸국 - 한자로는 金帳汗國(금장칸국), 골든 호드(Golden Horde)라고도 불린다. 칭기즈 칸의 맏아들 주치의 아들인 바투가 러시아 일대를 정복하고 건설했다. 얼마안가 그냥 튀르크계 나라로 변질. 사실 튀르크인은 같은 알타이 계통으로 몽골인과 섞여 살다시피 했고 애초 몽골제국의 장군들부터가 튀르크인들일 정도여서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의 러시아 남부 지역을 지배. 티무르 제국에게 대패한 뒤, 15세기에 크림, 카잔, 아스트라한 칸국 등으로 쪼개지고 크림 칸국과 러시아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현 러시아의 타타르스탄 공화국 및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의 전신이다.
- 오고타이 칸국 - 외몽골 서부와 신강 동부 등 중앙아시아 일대를 지배했다. 얼마 안가 같은 알타이계 유목민이며 오랫동안 섞여 살아 온 튀르크계 문화에 물들어졌다. 카이두가 킵차크 칸국과 손잡고 차가타이 칸국을 복속시켜 원의 쿠빌라이와 한바탕 정통성 분쟁을 벌였으나, 카이두 사후 거꾸로 차가타이 칸국에 먹혀서 멸망했다. 오고타이 칸국을 인정하지 않는 학설에서는 이것을 쿠빌라이에 대한 반란 세력으로 본다.
- 차가타이 칸국 - 지금의 중앙아시아 일대를 지배했다. 동·서로 쪼개진 후, 티무르가 서차가타이 칸국을 장악하고 동차가타이 칸국을 복속시켜 망했으나, 티무르 사후 모굴리스탄 칸국(동차가타이 칸국)으로 부활했다. 1706년에 호자 가문에 칸이 쫓겨나 멸망했다. 현재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전신으로 이 모굴리스탄 칸국의 후손 아파크 호자는 마지막까지 준가르 및 청나라에 저항했다.
- 일 칸국 - 지금의 서남아시아 일대를 지배했다. 지역이 지역인 만큼 이란계 문화가 자리잡앗고 거진 페르시아계 나라였다고 봐도 된다. 아부 사이드 사후 사실상 소멸했다.
한국어 위키백과의 '몽골 제국의 파편화'라는 틀에 아주 보기 쉽게 정리가 되어있다.
5 기타 관련 민족 및 국가
- 칭기즈 칸 이전에 등장했던 '몽골계'로 꼽히는 민족들이나, 칭기즈 칸의 방계 혹은 아예 칭기즈 칸 혈통 외 몽골계 민족이 건국한 국가를 수록. 다만 그들의 후예가 건국했어도 문화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큰변화를 맞은 국가들이 다수다. 애초에 몽골 제국 이후의 유목민족들 중에서는 몽골과의 큰 연계성이 없어도 칸의 후예를 자처하면서 그 명목으로 여기저기 쑤시고 다닌 경우가 많았다.
- 거란 - 몽골계에 속하는 요서 지방의 유목 부족으로 요나라를 세웠다. 현재 중국 소수민족 다우르족이 후계 민족이며 한족과 몽골족에 동화된 이들도 많다. 아니 사실상 베이징 등 북방 중국인의 조상은 몽골계 종족들이라 봐도 된다.
- 선비 - 내몽골 동부의 선비산에 자리잡은 동호의 일족들로 북만주와 내몽골 동부(만주로도 간주)에 자리잡았으며 만주에서 밀려난 후에는 중국으로 들어가 북연 및 북위를 세웠다. 베이징의 옛 명칭인 연경은 바로 이들이 세운 북연의 도읍이라는 뜻이며 그 이름답게 오랫동안 몽골계 정복왕조들의 수도 노릇을 했다.
- 오이라트 - 북원이 내몽골로 쫓겨날 당시 외몽골을 장악하고 북원 멸망 후에는 전 몽골 지역을 장악한 몽골 민족이었으나 칭기즈 칸계 왕통은 아니었다. 북원 당시에는 고비 사막을 경계로 북원과 자주 대치했다. 에센 칸의 시대에 토목보의 변을 일으키는 등 전성기를 맞았으나, 얼마 안 가 칭기즈 칸계 칸인 다얀 칸이 동몽골을 장악하면서 서몽골로 후퇴, 후에 준가르로 이어진다.
- 티무르 제국 - 칭기즈 칸의 자손을 자칭한 티무르가 차가타이 칸국 일대를 기반으로 건설. 다만 모계 혈통이고 이것마저도 징기츠 칸과의 직접적인 연계는 적었으며 문화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몽골 제국과의 유사성 또한 적었다. 사실 티무르는 튀르크인이여도 혈족상 몽골계 피도 있기에 칭기즈 칸의 후손을 내세우는 것도 불가능한건 사실 아니었다. 단지 부계만 인정되어 칸으로는 인정 못받을 뿐이다.
- 무굴 제국 - 티무르의 5대손 바부르가 북인도를 침공하여 건국. 지금의 인도 지역을 악바르 황제가 점령하고 샤 자한 황제가 다져가면서 점차적으로 지배하였고 이 당시가 흔히 알고 있는 전성기 시절의 지배기였고 그 외 시기에는 마라타 제국, 두라니 제국, 하이데라바드 왕국 등에게 밀려서 북인도에서 잔류했던 기간이 길었다. 다만 문화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몽골과의 유사성은 없었다. 바부르나 악바르같은 무굴 황제들의 기록이나 마지막 황제인 바하두르 샤 2세의 사진만 봐도 몽골계통과는 유사성이 없다. 지배층은 튀르크 계통에서 기원했지만 이미 바부르의 대에 가면 페르시아인과 많이 섞여서 그냥 페르시아인이라고 봐도 된다. 애초 이름인 구르카니 자체가 페르시아어이다.
- 청나라 - 청의 황제들은 물론 만주족이지만, 몽골인들과 북방에 대한 지배권을 내세울 때는 칭기즈 칸으로부터 이어지는 몽골제국 카간의 계승자임을 칭했다. 중원 입성 당시 만몽연합정부의 형태를 갖기도 했으며, 역대 청의 황제들은 몽골 제국의 황성인 보르지긴(孛兒只斤)씨의 혈통을 이었다는 보르지기트(博爾濟吉特)씨 황후들을 자주 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청 황제의 대가 끊어지면 내몽골의 칸이 재위를 계승했다.특히,옹정제는 대의각미록에서 원나라를 강하게 옹호하면서, 청의 국력을 원나라를 넘겠다고 선언하였다.
- 준가르 - 외몽골(서몽골) 지역에서 후퇴한 오이라트계가 결집해 세워진 국가였으나 4개 부족의 연합 국가로 통일 제국은 구성하지 못했다.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이고 티베트 및 달라이 라마에 영향력을 미치려 하였으나, 역시나 티베트 불교를 유목 민족을 장악하는 이념적 기반으로 삼고 있던 청과 충돌한다. 또한 정통성 문제도 있는데, 청이 몽골제국의 계승을 자처하고 동몽골(내몽골)은 그것을 지지했지만 준가르는 청을 몽골제국의 계승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 하필 청은 강희제 - 옹정제 - 건륭제의 3대의 봄 시절... 결국 건륭제 시대에 완전히 분쇄되어 멸절되었다. 건륭제는 일종의 제노사이드를 실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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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종속국이냐 내정간섭을 많이하는 독립국이냐 입장차가 갈리는 편 이지만 원종 이후와 훗날 공민왕 이전까지의 왕들은 원나라의 충성을 바치는 의미에서 '충'(忠)자가 들어갔으며 세계에선 그냥 속국으로 친 편 -
오스만 제국- 크림 칸국이 오스만 제국의 번국이었으며, 크림의 칸은 오스만의 술탄자리가 비었을 경우 자동으로 술탄에 즉위하게 되어 있었다. 러시아 제국에게 크림 칸국이 멸망할 때까지 크림 칸국은 오스만 제국의 번국으로서 특히 타타르 기병대는 유럽 원정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언제 이 항목이 삭제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오스만 제국은 셀주크 제국에서 룸 셀주크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룸 셀주크가 몽골의 침입으로 약하된 뒤 룸 셀주크에서 독립한 투르크 부족이 기원이긴 하지만 간접적이나마 몽골 제국과 엮여 있다. 단 선조인 돌궐 시대 원시 투르크인과는 달리 오스만 제국은 인종적으로는 몽골과의 유사성은 없는데 오스만 제국이 들어설 때 이미 투르크인은 아나톨리아에 정착한지 오래이고 그 과정에서 아르메니아나 그리스 등 백인종이 대거 섞였기 때문이다. 술탄의 모후도 투르크인이 아닌 유럽 계통의 여성들이다. 물론 킵차크 칸국 역시 종반부에는 마찬가지로 러시아인이 대거 섞여버려서 외모로만 보면 이미 몽골-투르크 계통은 아니었다.
6 역대 군주
6.1 통일 몽골 제국
대수 | 묘호 | 시호 | 칸호(휘) | 재위기간 | 비고 |
1대 | 태조 | 법천계운성무황제 (法天啓運聖武皇帝) | 칭기즈 칸 | 1206 ~ 1227 | |
임시 | 예종 | 경양황제 (景襄皇帝) | 툴루이 | 1227 ~ 1229 | |
2대 | 태종 | 영문황제 (英文皇帝) | 오고타이 칸 | 1229 ~ 1241 | |
3대 | 정종 | 간평황제 (簡平皇帝) | 구유크 칸 | 1241 ~ 1248 | |
4대 | 헌종 | 환숙황제 (桓肅皇帝) | 몽케 칸 | 1248 ~ 1259 | |
5대 | 세조 | 성덕신공문무황제 (聖德神功文武皇帝) | 쿠빌라이 칸 | 1260 ~ 1271 | 원나라의 초대 황제 몽골 제국 분열 |
칭기즈 칸부터 몽케 칸까지의 시호 및 묘호는 원나라 건국 후 쿠빌라이 칸이 올린 것이다.
6.2 몽골 제국 직계(원나라와 북원)
6.3 킵차크 칸국
킵차크 칸국 항목을 참고.
6.4 차가타이 칸국
대수 | 묘호 | 시호 | 칸호(휘) | 재위기간 | 비고 |
초대 | 성종 | 충무황제 (忠武皇帝) | 차가타이 | 1226 ~ 1242 | 칸을 자처한 적 없음. |
2대 | - | - | 카라 훌레구 | 1242 ~ 1246 1251 ~ 1252 | 예수 몽케 퇴위 후 복위. |
3대 | - | - | 예수 뭉케 | 1246 ~ 1251 | 카라 훌레구를 퇴위시킨 뒤 즉위. |
4대 | - | - | 무바라크 샤 | 1252-1260 1266 | 알구 사후 복위. |
5대 | - | - | 알구 | 1260 ~ 1266 | |
6대 | - | - | 바라크 | 1266 ~ 1270 | 차가타이의 증손자 |
7대 | - | - | 네구베이 | 1270 ~ 1272 | |
8대 | - | - | 부카 테무르 | 1272 - 1287 | |
9대 | - | - | 두아 | 1283 ~ 1307 | 바라크의 아들 오고타이 칸국 멸망 |
10대 | - | - | 콘첵 칸 | 1306 ~ 1308 | |
11대 | - | - | 탈리쿠 | 1308 ~ 1309 | |
12대 | - | - | 케벡 칸 | 1309 1318 ~ 1325 | |
13대 | - | - | 에센부카 칸 | 1309 ~ 1318 |
6.5 오고타이 칸국
대수 | 칸호(휘) | 재위기간 | 비고 |
초대 | 오고타이 칸 | - | 실제로 통치하진 않음. |
2대 | 구유크 칸 | - | |
3대 | 카이두 | 1248 ~ 1301 | 구유크의 조카 |
4대 | 차파르 | 1303 ~ 1306 | 카이두의 차남 원나라로 망명 |
6.6 일 칸국
일 칸국 항목을 참고.
7 국가제도
- ↑ 몽골 제국 영토에 고려가 포함된 이유는 고려와의 관계 참조.
- ↑ 원나라 한정
- ↑ 원나라 한정
- ↑ 식민제국과의 구분을 위한 표기.
- ↑ 영문 위키페디아 기준으로는 1위는 대영제국으로 20세기 초를 기준 약 3,370만 km², 몽골 제국은 전성기를 기준으로 약 3,320만 km². 그러나 몽골 제국은 시베리아 쪽 영토를 얼마나 포함시키느냐에 따라 그 수치가 변동된다.
- ↑ 참고로 러시아의 면적은 약 1,710만 km²로 몽골 제국의 절반 수준이고 소련의 면적은 2,240만 km²였다 . 사실 러시아 정도가 아니라 아시아 다음으로 큰 대륙인 아프리카보다도 조금 더 크다...
- ↑ 특히 KBS 다큐멘타리 중 다큐프라임에서는 몽골 제국을 마치 세계를 통합하고 모든 종교와 문화가 공존하는 점, 칭키스칸의 능력 위주의 인재 중용 등 몽골제국의 장점만 부각시켜서 말그대로 팍스 몽골리카 미화의 극치를 보여준다. 때문에 그 프로만 보면 마치 몽골이 지상 낙원의 세계이며, 그 이외에는 미개해 빠지고 사악한 나라라는 인상마저 심어준다. 해당 다큐를 본다면 반드시 가려서 정보를 수용하자. 분명 몽골 제국의 세계사적 업적도 존재하나 그 설립과정에서 잔혹한 학살과 문명 파괴를 일삼기도 하였다. 지금도 과거 실크로드로 번성했던 도시나 페르시아 일부 지역은 몽골 침입이후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20세기 이후에 겨우 사람들이 돌아오거나 아직도 버려져있다. 또한 왜 100년 정도 밖에 유지 못하였는가를 생각해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 ↑ 전체적으로 중국 내에서 북방구과 남방구의 사이가 안 좋기도 하다. 이런 중국의 지역감정은 둥베이vs광저우로 대표된다. 일명 경상도vs전라도의 대륙판. 사실 신해혁명 발발시에도 위안스카이의 적절한 조치로 어정쩡하게 지나갔으니 망정이지 광동을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인 남군과 북양군으로 남북이 갈릴 뻔 했다.
- ↑ 물론 이런 반감은 만주족에게도 마찬가지라서 청나라 역시 야만족이라고 폄하하고 한족 명나라를 마지막 중국왕조로 보는 입장도 많다. 이 입장에서 청나라는 그냥 만주의 식민지배였을 뿐이다.
- ↑ 몽골에게 점령당했던 기간을 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른다.
- ↑ 후에 다른 제국들도 이 지역을 서로 탐하려고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에는 러시아 제국이 점령하기 전까지는 단 한번도 점령된 적이 없다.
- ↑ 몽골 제국의 경우에는 동서의 교류를 촉진시킨 면이 있다.
- ↑ 오랑캐 종 이라는 뜻의 흉노(匈奴)의 경우도 있다.
- ↑ 이 과정에서 워낙 많은 정예병이 서방원정에 동원된 탓에 금나라의 반격을 받아 상당한 영토를 상실하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대 금나라 방면 최고 사령관 무칼리는 건강악화로 세상을 떠난다.
- ↑ 귀환도중 제베가 병사한다.
- ↑ 물론 이건 야율초재가 그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가정하에 성립하는 이야기. 하지만 야율초재항목에 적힌 것처럼 실제로 야율초재가 몽골 제국의 중요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 ↑ 당시만 해도 세계적인 도시였다.
- ↑ 당시 몽골인들 가운데에는 일찍이 그리스도교를 믿는 이들이 상당수 있었지만 유럽인들이 믿는 그리스도교와는 그 개념이나 교리가 상당이 달랐다. 이들은 451년 칼케돈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네스토리우스교를 신봉하였다. 게다가 몽골인들은 대체로 종교나 신앙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편이었다. 한 몽골인 사절은 유럽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예수의 살과 피'라 부르는 성체성사 광경을 보고는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을 먹고 마시다니 역겨운 풍습이다.'라고 기록하기도 하였다.
- ↑ 대표적으로 고려 왕실과 청나라 황실에도 보르지긴 씨족의 피가 섞였다. 그렇다고 고려나 청나라가 방계 혈통의 몽골의 후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참고로 청나라의 보르지기트씨 황후들은 칭기즈 칸의 동생 카사르의 후손들이지만 원 간섭기 고려의 왕비들은 칭기즈칸 직계 혈통인 원나라 황실의 공주들이라서, 엄밀히 따지자면 몽골 황실의 피가 흘러들어간 왕실 중 가장 칭기즈 칸 직계와 가까운 혈통이 고려의 왕실이었다.
- ↑ 거기다가 세금도 엄청 물렸다고 한다. 아마 대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자금을 얻기 위해서 무역과 세금에 집착한 듯하다. 또 약탈도 심했다고 하니.
- ↑ 토곤 테무르의 아내 중 한 명이 바로 기황후이다. 이로 인해 고려에서는 기씨가 권문세족으로 득세했지만, 정작 토곤 테무르 대에 원은 멸망한다.
- ↑ 서유럽뿐만 아니라 러시아 스텝초원의 흑사병도 엄청났다. 몽골인, 러시아인 가리지 않고 발병하였으며 모스크바의 경우 대공이 흑사병으로 사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