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충보

郭忠輔
(? ~ 1403)

고려조선 초기의 인물.

1383년 10월에는 병마사를 지내 이을진, 권현용 등과 함께 동산현에서 왜구와 싸워 20여 명을 죽이거나 말 72필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고 백금 50냥을 하사받았으며, 1388년에 위화도 회군 때 개경에서 팔각전 안으로 들어가서 최영을 수색한 후에 끌고 나갔다. 예의찬서를 지내다가 1389년에 우왕이성계를 살해하기 위해 김저, 정득후에게 곽충보와 일을 추진하라고 했는데, 김저, 정득후 등이 이성계를 살해하는 일에 대해 알리자 곽충보는 거짓으로 승낙한 후에 이성계에게 알렸다.

1390년 6월에는 의덕부윤을 지내다가 왜적이 양광도를 침범하자 윤사덕, 이방과, 유용생, 김용초 등과 함께 출정해 영주 도고산에서 이들과 마주쳐 적 1백여 명을 죽이고 백성, 가축 등을 되찾았다. 1392년에 상의중추원사로 있다가 조선이 건국되어 10월 9일에 원종공신이 되었고 1393년 6월 6일에는 왜구가 문화현, 영녕현 등을 공격하자 이방과, 장사길 등과 함께 이를 공격했으며, 1396년 11월 9일에는 이천우와 함께 강릉도로 가서 왜구를 방어했다.

1399년 6월 1일에는 아들 곽승우와 함께 여러 사람들을 붙잡아 반죽음으로 만들고 사람의 똥을 입, 볼 등에 바르는 등 행패를 부리자 형조로부터 탄핵되어 청주로 유배되었으며, 6월 15일에는 곽충보가 간통한 김인찬의 처 이씨가 폭로해 여러 여자의 간통 사건이 거론되고 했다. 7월 1일에는 탄신일이라 죄를 용서받았다가 1400년 7월 12일에 문하부에서 유배를 보내자는 상소가 올라와 먼 지방으로 유배되었으며, 1402년 11월 17일에는 도총제가 되었고 11월 18일에는 말을 하사받았다.

11월 25일에는 조전 절제사가 되었고 1403년 4월 1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