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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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역대 국왕
31대 공민왕 왕전32대 우왕 왕우33대 창왕 왕창
묘호없음
시호없음[1]
왕(王)[2]
우(禑)[3]
배우자근비 이씨(謹妃李氏)[4]
영비 최씨(寧妃崔氏)[5]
현비 안씨(賢妃安氏)[6]
명순옹주(明順翁主)[7][8]
아버지공민왕 혹은 신돈(辛旽)[9]
어머니반야(般若)[10]
생몰년도음력1365년 7월 7일~1389년 12월 14일
양력1365년 7월 25일~1389년 12월 31일(만 24세 5개월)
재위기간음력1374년 9월 병술일~1388년 6월 경술일
양력1374년~1388년(만 13년 9개월)

1 개요

禑王

고려의 제32대 왕. 공민왕 스스로 신돈에게 상납받은 여종인 반야와 관계하여 낳았다고 주장한 아들이다. 하지만 하단에 설명되어있듯 이 신돈에게 상납받기 전 신돈이 먼저 반야와 관계하였고, 공민왕의 핏줄이 아닌 신돈의 핏줄이라는 소문으로까지 이어졌다. 또한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 일파와 조선 개국의 주역인 이성계등은 폐가입진[11]의 명분을 얻기 위와 같은 우창비왕설[12]을 주장했고, 이는 조선개국의 정당성을 얻는 사안으로까지 이어진다. 조선 초기 <고려사>와 <동국통감> 등을 편찬한 조선의 사관들마저 우왕을 그저 "반역조(반역자)" 항목에 '신우(辛禑)'라고 기록한 것 역시, 태조 이성계의 손에 의해 요절한 우왕과 창왕이 정당한 왕이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왕은 왕씨가 아니라고 음해당하여 강제로 폐위당했고, 복위마저 물건너갔기 떄문에 물론 시호마저도 받지 못했다. 우왕이라고 불리우는 건 그냥 이름이 '우'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연산군광해군도 최소한 왕이었던 적이 있다는 건 인정받았고, 군호로 불린 것에 비하면, 우왕은 죽어서도 굴욕적인 대우를 받은 것이다. 이 점은 창왕도 마찬가지.

2 권력 쟁투에 따른 즉위

반야가 우를 낳은 이후에 신돈의 집에서 살다가 신돈이 처형된 후 1371년에 7세[13]에 궁에 들어갔으며 신돈의 노비였던 반야가 단 하나뿐인 왕자의 어머니라고 할 경우 혈통에 의혹이 일어날 위험이 있어서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후궁인 궁인 한씨의 소생으로 발표되었다. 1373년(공민왕 22년)에는 우(禑)라는 정식 이름을 받고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해졌다. 이듬 해 부왕 공민왕이 시해당하자 이인임 등의 비호를 받아 10세로 왕이 될 수 있었다.

초기에는 나름대로 국왕 수업에 힘썼고 왕실의 큰 어른으로 남아 있던 할머니 명덕태후의 훈계를 명심하여 좋은 왕이 되리라 노력하는 듯 보였다. 총명하고 의욕이 강했던 우왕은 어머니인 반야가 입막음을 위해 살해된 후로도 평정을 유지하였으나, 이인임의 독주와 탐욕에 반발해 권신 중 이인임과 반목하던 지윤, 지윤과 통정하던 유모 장씨 등을 통해 최영을 포섭하고자 했다. 최영의 군권을 이용해 이인임 일당을 숙청하고 친정을 하고자 했던 듯하다. 그러나 노회한 이인임은 궁궐 내 정보망을 통해 이를 포착한 뒤 지윤을 숙청했으며 국왕의 최영 포섭을 저지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렇게 신하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우왕은 유모 장씨 마저 살해되는 것을 묵과해야 했을 뿐더러 혈통의 문제까지 겹쳐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사실 당시 나이 어린 국왕이 이인임을 대신하리라 기대하기 어려웠고, 이인임의 노련한 정치력에 의해 최영은 훗날에도 이인임을 죽이지 못할 정도로 그를 믿고 어쩌지 못했었고, 우왕의 친위 세력도 부패세력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소장파 유림과 양심적인 신료들은 물론 이인임과 대립하던 명덕태후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그나마도 명덕태후 사후 명덕태후의 외척 세력[14]경복흥마저 숙청되어 이인임 일파가 권력을 독점하게 된다.

2.1 혈통문제

우왕을 둘러싼 가장 큰 논쟁거리는 우왕의 혈통문제로, 우왕이 진짜 공민왕의 아들이 맞는가?(혹은 신돈의 아들이 아닌가) 하는 문제다. 우왕이 즉위할 때부터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장 명덕태후부터 공민왕 시해라는 위급상황에서 공민왕이 자기 자녀라 인정하던 모니노 대신 다른 왕씨종친을 추대하려고 했고, 훗날 이성계 일파도 우왕과 창왕을 폐위할 때도 우왕은 적어도 최영도 인정할 만큼 실정을 벌였으니 의종처럼 그냥 폐위하면 될 일이었는데, 굳이 후술할 폐가입진이라는 잘못하면 무리수에 가까운 명분을 가져다 쓴 것도 당시 고려사람들 사이에서 우왕의 혈통을 의심하는 움직임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허나, 명덕태후가 우왕대신 다른 종친을 보위에 앉히려 한 이유는 우왕의 혈통보다는 그의 모계가 천출이라는것이 큰 이유였다는게 중론이다. 조선은 정비소생 적장자가 없을 적차자나 후궁소생,중인출신(경종) 하다못해 천민인 무수리가 모친(영조)이라해도 왕의 아들이면 후계계승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고려는 부계 뿐만아니라 모계 또한 중요했다. 게다가 능력(?)이 있거나 명분이 있다면 부자계승보다 형제계승에도 정당성이 부여되었다. 건국초기부터 괜히 유력호족이나 왕족내 종친과 족내혼을 한게 아니다. 우왕의 경우 부친은 공민왕이나 모친이 천민출신이라 명덕태후는 왕실의 큰어른으로 당연히 모계혈통도 감안했어햐했기에 우왕의 즉위를 반대한 것이다.

이후 이성계 일파는 흥국사에서 창왕을 폐위할 명분으로 '우왕은 공민왕의 자녀가 신돈의 자녀이니 신우와 신창 같은 가짜 왕을 폐하고, 진짜 왕씨를 고려의 왕으로 앉히자' 는 폐가입진의 명분을 내새워 창왕을 폐한다. 이후 공양왕과 이성계의 조선은 폐가입진을 주요명분으로 조선을 즉위했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공인되어 버린다. 이후 이시기를 기록한 태조(이성계)실록이나 《고려사》(高麗史)에도 우왕을 왕우가 아닌 신우로 기록하고, 특히 고려사는 우왕과 창왕을 왕의 기록을 수록하는 세가(世家)편에 넣지 않고 인물의 기록을 수록하는 열전(列傳)편 그중에서도 반역열전에 기록하는 등 조선 정부는 철저하게 우왕을 신돈의 혈통으로 주장했고 현대까지 이어졌다.

일단 우창비왕설의 주요 근거는 고려사와 태조 기록에서는 우왕이 신돈의 아들인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자세하게 들어가 있지만, 일단 그 이야기를 언급하기에 앞서 '누군가가 말하기를(或云)'이란 토를 달아놓았다. 그리고 해당 기록들은 조선시대 즉 '폐가입진'(廢假立眞)을 주장했던 이성계 일파와 그 후손들이 쓴 기록임으로 창왕을 폐하기 위해 공론화 시킨것은 어느 정도 확실하고. 따라서 크게 자기 조상들을 정당화 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주장이다.[15] 그리고 고려사 우왕편에서도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직접적인 근거는 없고 누가 그렇다 카더라라는 식으로 소문만 제시하고 있다. 결국 당시에도 확실한 신돈의 아들이란 물증 자체는 없었다.

소문과 별개로 공민왕은 우왕이 자신의 아들이라 믿은 것은 분명하다. 신돈이 처형당한 후에는 우왕을 궁궐로 들여서 보호했고, (비록 목격자가 이인임 밖에 없기는 하지만) 공민왕도 직접 "이 아이는 내가 신돈네 집 여종을 가까이 해 낳은 내 아들이다."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무리수를 두면서 자신의 후궁(한씨)의 양자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거기에 공민왕이 죽기 얼마 전에는 후계자 교육을 공식적으로 실시하려하는 등 공민왕은 우왕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16] 결국 이성계는 자신의 정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왕신씨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조선이 멸망한 이후에는 우왕신씨설은 정설처럼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가령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도 겨드랑이 용의 비늘 이야기를 통해 사실은 왕씨 핏줄이 맞는데 신돈의 아들로 억울하게 모함을 당한 것으로 연출했다.

고려사원문

3 막장 행보

결국 국왕은 정치에 흥미를 잃고 사냥, 음주가무, 엽색으로 소일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질풍 노도의 치세. 특히 사냥도 사냥터에서 안 하고 민가에서 아예 말 달리며 사냥을 했을 정도며 그렇게 말을 달리다가 맘에 드는 이쁜 여자가 있으면 즉석에서 그 여자 집으로 들어가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런 비행을 보다 못한 신하들이 간언을 하기도 했으나 우왕은 듣지 않았다. 하는 짓이 완전히 할아버지 충숙왕과 큰아버지 충혜왕 뺨친다. 실제로 최영이 이걸 가지고 충언을 하자 충혜왕과 충숙왕 얘기를 했는데 이때 최영은 "충혜왕께서 색을 좋아하신건 사실이나 남들이 안보는데서 했고 충숙왕께서는 놀기를 좋아해도 때를 골라서 하셨는데 전하께선 법도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출처: 고려사 최영 열전)

우왕이 즉위했을 때 자기 아버지 공민왕의 제4비 정비 안씨가 젊고 아름다웠으므로 정비를 두고 "나의 후궁들은 어찌 모씨(母氏)와 같은 이가 없는가?"라 하며 늘 희롱하였다고 한다. 자기 큰아버지 같은 짓을... 자주 정비의 처소에 들렀는데 혹은 하루에 두 세 차례 가기도 하고 혹은 밤에 가기도 하였으며, 혹은 들렀다가 들어가지 못하니 추한 소문이 외부에 파다했다고. 우왕이 어느 날 정비의 처소에 갔으나 비가 병이 들어 머리를 빗지 않았으므로 만나지 않았는데 정비가 동생인 판서 안숙로(安淑老)의 딸을 우왕에게 보이자 우왕이 맞아들여 현비(賢妃)를 삼으니 사람들은 "정비가 남의 비웃음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감추려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출처: 고려사 우왕 열전)

그러나 실제로 우왕이 이런 행동들을 보였다고 해도 고려사가 우왕을 지나치게 비하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정비 안씨의 일화도 후대 연산군과 월산대군 부인 일화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듯하다. 우왕은 어릴 때 어머니와 유모를 잃었고, 할머니 명덕태후에게도 사랑받지 못했으므로 의붓 어머니뻘이 되는 그녀에게 모성애를 갈구했을수도 있는 일이고, 생각해보면 우왕이 즉위했을 때의 나이는 겨우 10여세였다. 다만 우왕이 성인이 된 재위 13년까지도 자주 안비의 처소에 들락거렸다는 부분은 좀 석연치 않긴 하다.

어쨌든 정치가 권신들에게 왜곡되어 공공성이 파탄난 상황에서 군부 역시 재정난과 몽고식 부호제의 영향으로 사병집단화 되어 있었고, 장수들 역시 부패하고 무능한 자들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나라는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고 내륙지방까지 학살과 약탈, 납치가 자행되었으며 수도 개경까지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최영이 재건해낸 수군이 격파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왜구의 침입 격퇴에서 최영과 이성계, 최무선화포가 맹활약을 펼쳤다. 특히 이성계는 왜구 격퇴 과정에서 최영에 버금가는 무장으로서의 입지와 명성을 굳히게 된다.

4 이인임 일파의 숙청

그러나 조금 성장하고 어느정도 정신을 차렸는지 원나라가 완전히 북방으로 물러가자 왕은 이인임의 전횡을 보다 못해 자신의 자리를 되찾고 싶어졌다. 이인임이 사직한 후로도 그 일당인 염흥방임견미 등은 온갖 불법적 방법으로 막대한 토지를 약탈하고 있었고, 국고는 텅 비었으며, 최영은 이를 탄식할 뿐이었다. 또한 이런 상황은 우왕의 사치비용을 충당하는 것을 방해했다. 마침 염흥방 등의 난행으로 인한 조반의 옥사사건이 일어나면서 군부의 실력자로 인망이 높던 최영이 현상 타파를 결심하게 되었고, 우왕은 그런 최영의 손을 잡고 이인임 일당의 제거를 획책했다. 최영은 친밀한 후배 무장 이성계를 끌어들였고 이 둘의 힘으로 결국 이인임을 필두로 한 권문세가 일당들을 숙청하는 데 성공했다. 1388년 1월의 일. 하지만 4년 후 고려는 멸망하는데... 이 공으로 최영과 이성계는 재상이 되어 고려 정계의 핵심으로 급부상하게 되었고 특히 최영은 정계의 실세가 된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우왕은 최영을 자신의 돈독한 정치적 후견인으로 삼기 위해 그의 딸을 아내로 맞기도 했는데 이때 맞이한 비가 최영의 딸인 영비 최씨(寧妃 崔氏)였다.

5 위화도 회군

이 무렵 원을 몰아내고 새로운 대륙의 승자가 된 명나라와는 외교 관계가 좋지 않았다. 재위 초 친원정책을 취하던 실권자 이인임 등 권문세족들이 명나라 사신을 살해해 버린 일도 있었으며, 금과 말, 포 등의 막대한 세공을 강제하여 고려에 큰 부담을 주기도 했다. 더군다나 사신단이 세공을 위해 가져가던 말들을 비루먹은 말로 바꾼 뒤 차익을 이인임 일당에게 뇌물로 바치는 케이스도 많았다.

우왕 시대는 원과 명 사이의 일종의 양팔외교기로 이해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이인임의 영향으로, 이미 원나라는 공민왕 말기에 대도(베이징)을 상실한 뒤였다. 그리고 이인임의 친원 외교도 일시적인 것으로, 점점 친명쪽으로 기우는 것은 분명했다. 이인임이 쫓겨나기 직전인 1387년에 명의 관복, 즉 익선관곤룡포 등을 습용하기로 승인 받은게 그 예.[17] 그 이전엔 공민왕 어진에서 보듯 송의 관복을 재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조선 인조 때 명청 관계와 거꾸로 원을 공격하고자 하며 (동시에 고려의 복종을 확인 목적으로) 공물(심지어 공녀!)을 뜯어낸 것이 명이었던 지라 조정의 반발과 골치꺼리가 되었고, 뒤의 철령위와 함께 친명에서 거리를 두는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이인임 일당이 숙청된지 2개월만인 3월, 명 태조 주원장"철령 이북은 우리 땅. 그러니 내놓으셈"이라며 강짜를 놓았다. 이에 반발한 재상 최영은 대대적인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우왕도 이를 승인하여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반대하는 신하까지 죽여가며 강행했음에도 이성계는 그 유명한 '4불가론'을 들어 반대했지만 우왕과 최영은 듣지 않고 요동 정벌 계획을 실현해 나갔다. 아직 왜구가 약탈을 지속하고 있던 농번기에 이는 백성들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또한 가망없는 원정에 자신의 주 세력을 대거 참여시킨 이성계에게도 큰 타격이 될 터였다.[18]

그런데 준비가 다 끝나고 출정할 때 최영도 총사령관 자격으로 출진하려 했으나 아무래도 믿을 사람이 최영밖에 없었던지 가지 마라라며 청했고[19] 마지못해 최영은 우왕과 함께 고려에 남아 이성계와 조민수 등만이 북방으로 출정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우왕에게 결정적 패착이 되고 말았다.

우왕은 사실 요동정벌 때 서경(평양)까지 나아가 동향을 지켜보았고, 최영도 함께 서경에 있었다. 하지만 회군이 시작되자 빠르게 개경으로 후퇴해야했다. 도중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이로서 대응 시간은 더욱 늦어졌다.

6 폐위 그리고 비참했던 최후

4불가론을 들어 반대했음에도 출전했던 이성계는 조민수 등과 함께 군대를 돌려(요게 바로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 개경을 포위/함락하고, 최영을 제압한 뒤 정국을 완전히 장악했다. 결국 우왕도 다시 꼭두각시 군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그런데 우왕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기가 남아 있었는지 친히 무장을 하고 환관 80여 명을 무장시켜서 이성계를 참살하러 이성계와 조민수의 집을 찾아갔으나, 이성계와 조민수는 당시 집에 없고 군영에 그대로 남아있던 터라 망했어요.

우왕 14년(1388) 6월 병오일. 이날 밤에 우왕이 환수(宦竪) 80여 명과 함께 무장한 채 태조와 조민수(曹敏修), 변안열(邊安烈)의 집으로 쳐들어갔지만 모두 집에서 나와 사대문 밖 군영에 있었으므로 해를 입히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

《고려사》 권137, 열전50 우왕5

혹자는 이성계가 군영이 아닌, 집에 머물렀다면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만일 이성계가 집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거사를 앞두고 이성계가 아무런 경계 태세 없이 편히 집에 머물러 있었을 리 만무한 데다가, 이성계라는 인물 자체가 무공으로 치면 한국 역사에서 손꼽을 수준의 인물이기 때문에, 무장한 환관 80명은 어떻게 생각해도 우왕의 무리수라고밖엔 볼 수가 없다.[20]

결국 이 때문에 분노한 이성계 일파한테 폐위된 뒤 강화도로 쫓겨났다. 이인임을 몰아낸지 고작 4개월만의 일이었다. 이후 이성계는 사돈의 형인 정창군(공양왕)을 옹립하려 했으나, 학계의 거두였던 이색과 조민수의 반대로 인해 우왕의 아들 창왕이 옹립되었다. 또한 이들은 귀양간 이인임을 복권시키려 했으나 이인임이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강릉으로 옮겨졌는데 아들 창왕 때 우왕을 복위하려 한다는 모략 사건에 연루되어 아들 창왕도 폐위되었고 결국 공양왕 때 이성계 일파가 내세운 폐가입진론에 의해 신돈의 혈육으로 몰려 우왕은 아들 창왕과 함께 향년 25세의 나이로 처형당한다.

司宰副令尹會宗上 請誅禑 昌。王歷問諸宰相皆黙然 我太祖獨曰 此事不易。旣以安置江陵 聞于朝廷 不可中變。且臣等在 禑雖欲爲亂何憂哉 王曰 禑多殺無辜 宜其自及。命知申事李行下旨 遣政堂文學徐鈞衡于江陵 誅禑 藝文館大提學柳玽于江華 誅昌。

사재부령(司宰副令) 윤회종(尹會宗)이 우왕과 창왕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공양)왕이 재상들 하나하나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다들 말이 없었는데 우리 태조(이성계)가 홀로 의견을 말했다.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왕을 강릉에 안치했다고 명나라 조정에 이미 알린 터에 중간에 말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또 저희들이 있으니 우가 비록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들 무엇이 걱정되겠습니까?" 그러자 왕이, 우왕은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으니 죽어야 마땅하다고 결론지은 후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에게 분부해 정당문학(政堂文學) 서균형(徐鈞衡)을 강릉에 보내 우왕을 처형하고,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유구(柳玽)를 강화에 보내 창왕을 처형하게 했다.


고려사》 공양왕 원년

무덤 기록이 없고 무덤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반역자인 신돈의 아들로 간주되어 처형되었으므로 무덤에 제대로 안장되었을지 의문이다. 다만 경기도 내에 예로부터 우왕의 무덤이라고 전해내려오는 무덤이 있긴 하다.

이때 우왕의 아내 영빈최씨도 우왕의 유배지까지 따라갔었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우왕이 처형된 후 밤낮으로 곡을 하다가 우왕의 시체를 끌어안고 자고 시체에 밥을 지어 올리고 하며 시체를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7 야사와 평가

야사에는 사망할 당시 자신을 죽이러 온 사람에게 "왕씨 일족에게는 겨드랑이에 의 비늘이 있다!"고 외치며 웃통을 벗어 그 용 비늘을 보여줬다고 한다.[21]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우왕의 최후 장면에서 이 이야기를 채용했다. 정도전에서는 조금 더 현실적으로 각색되어 우왕이 직접 자기 몸에 인두를 대어 상처를 낸 후 이를 용의 비늘로 주장하다가 참수되는 모습이 나왔다.

이 야사를 채택한 저술 중에 이중환의 《택리지》가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녀에 대한 일은 믿을 수 없지만,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태조(왕건)가 낳은 자녀들 중에 양쪽 겨드랑이 밑에 비늘이 있다 한다. 태조의 외가가 용이고, 용녀가 바다로 돌아가면서 어린 딸을 데리고 가서 다시 용이 된 것은 어린 딸이 시집가서 혹 왕자를 낳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왕실의) 여자 중에서 비늘이 없는 사람은 신하에게 시집보냈으나, 비늘이 있는 사람은 모두 대를 잇는 임금의 후궁으로 삼아 윤기(倫氣, 윤리와 기강)를 더럽히는 부끄럼도 서슴지 않았다. 중기에 들어서는 여동생을 비로 삼는 임금까지 있었다. 송사(宋史)에서도 "이러한 일은 이상하기 이를 데 없다"하였으나, 하지만 그런 일은 오직 왕가에서만 그러하였고 민간 풍속은 그렇지 아니하였음을 몰랐던 것이다. 우리 태조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에 왕우를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폐위시켰다. 그리고 공양왕 요(瑤)를 임금으로 세우고, 또 공양왕으로 하여금 우를 강릉에서 베어 죽이도록 시켰다. 우가 형을 당하게 되자 겨드랑이를 들어 보이면서 "나를 신씨(辛氏)라 하지만 왕씨는 용의 종내기이므로 겨드랑이 밑에 비늘이 있는데, 너희들은 와서 보아라." 하였다. 참관하던 사람이 가까이 가서 보니 과연 그 말과 같으니 이것은 가장 이상한 일이었다."

《다시쓰는 택리지》 1권, 신정일 저, 166페이지

용비늘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 이성계 일파가 그의 목을 베려고 했는데 용의 후손이라서 병장기가 먹혀 들어가지 않아 죽이질 못하자 이성계가 마침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아버지 이자춘(환조)이 조상의 묘를 옮기다 나온 것을 아들에게 준 명검인 전어도(傳御刀)[22]로 손수 베어 죽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 뒤 우왕이 가지고 있던 사진참사검이 저주를 내려 이성계의 수하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자 무학의 조언에 따라 사진참사검 옆에 전어도를 꽃아 저주를 막았고, 두 칼은 3일 밤낮으로 싸우며 울다가 전어도는 박살나고 사진참사검은 금이 갔다고 한다. 사진참사검은 비록 망가졌지만, 이성계의 혈통에 내린 저주가 남아 있어서 그것을 막기 위해 조선 왕실에서는 용의 기운을 가진 사진참사검과는 정 반대로 호랑이의 기운이 담긴 사인참사검을 신하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정기적으로 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박살난 전어도와 금간 사진참사검은 무학대사가 거두었고 현재는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는데, 어디까지나 야사인 만큼 믿거나 말거나…

다만 후대로 내려갈수록 왜곡이 심해진 왕이었을 가능성을 고려하더라도 그렇게 유능했던 군주라고는 보기 어렵다. 소년기의 막장행각을 뒤로 하고 청년기에는 나름대로 정치적인 모습도 보여 줬지만 결국 충동적이고 혈기를 누르지 못해 폐위되어 살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경순왕이나 순종(대한제국)이 찬탈자에 순응해서 결국 왕위는 잃었어도 평생 잘 먹고 잘 산 것과는 대조된다. 그리고 그렇게 비참한 왕의 운명과 함께 고려왕조의 운명도 기울어졌다.

8 다른 매체에서의 모습

여말선초를 다룬 사극이 많아서인지 아버지 공민왕과 더불어 사극에서 가장 자주 등장한 고려 왕이다.

  • 용의 눈물에서는 위화도 회군으로 당황하는 모습과 이성계를 죽이려는 시도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고, 죽기 직전에도 야사 내용대로 "왕씨에게는 겨드랑이에 용의 비늘이 있다!"며 상의탈의 그것을 보여주며 최후를 맞는다. 그렇지만 정도전(드라마)의 우왕보다는 배짱이 없는 것이, 1화에서 이성계가 최영의 처벌을 요구하자 "최 시중을 보내주면 과인을 살려준다더냐? 그래라, 보낸다고 하여라!"(...)라며 흔쾌히 말한다. 그러나 대비에게 제정신이냐는 돌직구를 맞자 바로 철회한다.
  • 신돈(드라마)에서는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
  • 대풍수에서는 우왕의 저런 난행들이 이인임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암군의 행동을 벌이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더욱이 생모인 반야도 살아남았다! 결국 이인임을 숙청하는 데는 성공해서 왕다운 정치를 펼치려고 한다. 그러나 곧 위화도 회군에 폐위크리
  • 정도전(드라마)에서도 등장. 권신 이인임 일파의 국정 농간에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거기에 출생의 비밀에 대한 트라우마를 간직한 똘끼혈기 넘치지만 우유부단한 청년 군주의 모습을 잘 그려냈다는 평을 받았다. 더불어 용의 눈물처럼 우왕의 최후에 야사를 각색하여 넣었는데, 용의 눈물과는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하지만 최악의 암군이라는 것은 감싸주지 않았다. 자세한건 항목으로
  •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뜬금없이 원래 제작진의 말로는 고려의 왕은 공양왕만 출연시키기로 했었으나 도당3인방이 몰락한 후에 풍악부왘을 울리던 도중 악공이 실수를 하자(음을 틀리자) 죽이려는 모습으로 첫등장했는데 그 모습이 굉장히 살벌했다..... 그리고 최영에게 홍인방길태미에게서 몰수한 가산들중 일부를 자신의 내탕금[23]으로 요구하며, 하라는 정치는 안하고 굉장히 방탕한 생활을 한다. 그후 이성계를 불러 사냥을 같이 하는데 그때 그에게 요동정벌을 명한다. 정도전이 그것을 막으러 계략을 꾸몄지만 결국 이성계의 결정으로 실패하며, 그가 요동정벌을 떠나자, 최영과 함께 이방원을 제외한 이성계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는다. 하지만 압록강 위화도에서 병사들이 죽는것을 보다못한 이성계가 회군하자, 개경에 있는 가족들은 이성계가 들어오는 순간 만월대 성벽에 세워 인질로 세우려고 했고, 서경에있는 두 아들 이방우와 이방과를 죽여 효수하려고 했으나 개경쪽은 이방원, 서경쪽은 무휼에 의해 실패하고 만다. 결국 이성계는 성까지 쳐들어오게 되고, 몸을 피하라고 하는 최영에게 한마디 하는데...
당신들이 왕을 하라기에 왕을 했소. 당신들이 놀라기에 향락 속에 버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제야 당신들이 정치를 해보라기에 하려고 했지. 헌데 난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소.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허나 난 당신들이 그리 비교하던 공민대왕 보단 딱 한가지 나은 것을 보이려한다. 과인은 궁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오.
결국 최영은 패배하고 자신은 폐위된다. 이후 아들 창왕도 폐위되고, 그 뒤 사형당했다는 언급만 나온다.
  1. 우왕은 후대에 붙여진 왕호로, 이름인 '우'에다 '왕'을 붙여서 우왕이라 부른다. 폐위 후 여흥으로 귀양가 있다가 살해되었기 때문에 여흥왕(驪興王)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별칭이었고, 조선왕조실록에서 딱 두 번 쓰인 사례를 제외하면 그냥 신우로 불렸다.
  2. 우왕이 왕씨 핏줄이 아니라 신돈의 씨앗이라는 것은 조선 건국세력의 주요 명분이었으므로, 조선 5백년 내내 '신우'로 지칭되었다. 고려사조선왕조실록에도 신우라고 써 놨다. 조선이 망하고 우왕이 왕씨냐 신씨냐 논의가 자유로워진 현대에도 신辛씨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긴 하나, 이는 이성계를 비롯한 신진사대부 일파의 왜곡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두산백과위키백과에도 우왕의 본명을 왕우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는 아들인 창왕도 마찬가지다.
  3. 이 이름은 1373년(공민왕 22년)에 받았으며, 아명은 모니노(牟尼奴)였다. '모니'는 석가모니의 그 모니. 노(奴)는 종놈(노비 할 때 그 노 자다) 아니면 매국노 등등의 심각한 비칭에 붙는 단어이므로, 대충 석가모니(를 받드는 자)가 낳은 찌끄레기 정도의 멸칭이다.
  4. 이인임의 외가 친척인 이림(李琳)의 딸이다. 창왕의 친모라서 창왕 즉위 후에 왕대비가 되었다. 우왕이 위화도 회군으로 쫓겨난 뒤 폐출되지 않은 부인 중 한 명이다. 물론 폐가입진(廢假立眞) 후에는 얄짤 없었지만...
  5. 최영의 서녀다. 우왕이 폐출된 뒤 그를 따라 수행했기 때문에 폐출되지 않았다. 물론 폐가입진 이전까지만이지만...
  6. 정비 안씨의 남동생 안숙로의 딸이다. 그 때문인지 우왕이 쫓겨난 뒤 폐가입진 전까지는 폐출되지 않았다.
  7. 연쌍비(燕雙飛)라고 불린 기생 출신이다. 우왕이 쫓겨난 뒤 영비 최씨와 함께 우왕을 수행했기 때문에 폐가입진 전까지는 폐출되지 않았다.
  8. 우왕은 따로 적후(嫡后)를 두지 않고 9비 3옹주(九妃三翁主)를 두었는데, 이 표에 기재된 세 비와 명순옹주를 뺀 나머지 비와 옹주들은 우왕이 위화도 회군으로 축출된 후에 폐출되었다. 폐출된 비와 옹주들은 의비 노씨(毅妃盧氏), 숙비 최씨(淑妃崔氏), 안비 강씨(安妃姜氏), 정비 신씨(正妃申氏), 덕비 조씨(德妃趙氏), 선비 왕씨(善妃王氏), 화순옹주(和順翁主), 영선옹주(寧善翁主)이다.
  9. 공민왕 시절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소문이며, 결과적으로 우왕과 창왕의 목숨을 앗아간 계기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10. 공식적으로는 혈통에 대한 의혹을 피하기 위해 우왕 즉위 당시에는 궁인 한씨, 즉 순정왕후(順靜王后)가 친모라고 포고되었다. 물론 이후에 반야가 친모라는 사실이 알려졌고, 이는 조선왕조 역성혁명 과정에서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근거로 써먹혔다.
  11. 가짜(왕)를 폐하고, 진짜(왕)를 세운다.
  12. 우와 창은 왕씨가 아니다.
  13. 본 위키에서는 오랫동안 10세라고 돼 있었는데 오류이고, 7세가 맞다. 10세는 왕이 된 해였다.
  14. 명덕태후의 친정인 남양 홍씨는 김용의 난으로 홍언박이 죽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다 태풍 때문에 빠져죽고, 공민왕 시해로 죽어 나가고, 이인임 일파에 밀려났다가 이인임 일파가 숙청당할때 염흥방과 인척이라서 또 죽어 나가는 등 하여간 많이 죽는다. 참고로 공민왕을 시해한 홍륜의 증대고모가 명덕태후. 홍륜과 홍관은 국왕인 동시에 자신의 할아버지뻘 친척을 살해한 것이다.
  15. <윤두수. 우창비왕설의 연구. 『고고역사학지』 5.6합집, 1990 인용>
  16. 때문에 성호 이익은 우왕이 실제로 누구의 씨냐 하는 (유전적인) 문제를 떠나서 공민왕 본인이 "이 아이는 내 아들이다."라고 말한 이상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정말 신돈의 피라고 해도 일단 한 나라의 왕이었던 만큼 세가에 넣어서 기록해주는 것이 맞는데 열전(그것도 반역열전)으로 넣은 것은 맞지 않다며 중국의 선례(진시황진원제)를 들어 비판한 것이다. (출처: 성호사설 제25권 '신우')
  17. 회흘(위구르) 가문으로 공민왕 때 온 학사인 설송의 아들인 설장수가 사신로 다녀왔다. 4개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후에 위화도 회군 후 창왕 폐위와 조선 건국에 동의하며 영달을 누렸다.
  18. 원정에 대한 회의는 다른 장수들에게도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위화도 회군 때도 창왕때 이성계의 정적이 되는 조민수를 비롯한 장수들이 저항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까닭으로 여겨진다.
  19. 최영이 목호의 난을 토벌하러 제주도에 내려가 있었을 때 우왕의 아버지 공민왕이 홍륜 일당에게 시해당했다. 이 사건을 생생히 기억하는 우왕으로서는 최영이 곁에 없는 것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다.
  20. 드라마 정도전 28회에도 나오는데, 자세히 알지 못한 몇몇 시청자들은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냐고 비판을 하려고 했다가 엄연히 고려사에 기재된 정사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21. 이 야사와 연결되는 설화로 작제건 설화가 있다.
  22. 이방원이 제작한 복제품이 실유물로 남아있다. 150CM짜리 괴물검.
  23. 쉽게 말하자면 왕의 용돈이라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