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영

(관절팔팔 아기사슴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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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현진영
본명허현석[1]
출생1971년 2월 3일
학력원촌중학교 졸업
가족아버지 故 허병찬, 배우자 오서운
데뷔1990년 현진영과 와와 1집
소속iHQ
종교개신교
SNS트위터 인스타그램

1 한국의 힙합 가수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천재

원래 이태원 나이트클럽 등지에서 활동하던 한국 비보이 1세대이다. 이주노, 박남정 등의 후배뻘이며 당시에 이주노, 양현석 등과 상당한 교류가 있었다. 당시 이태원에서 활동하던 댄서들의 회고에 따르면 이주노, 박남정, 박철우가 이태원의 터줏대감격이었으며, 강원래, 구준엽 등이 여기에 영향을 많이 받은 세대였고 양현석은 갑자기 등장해서 판도를 바꾼 다크호스였다. 현진영은 양현석이 각광받던 시기쯤부터 와서 춤을 추기 시작했으며 그 당시 비보이 중에 드물게 양현석이나 이주노 양대 산맥에 휩쓸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댄스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댄서였다고 한다. 박남정 밑에서 백댄서 생활을 한 적도 있으며 이태원의 이주노-양현석 패밀리들(영턱스클럽 멤버들이나 지누션 등이 대표적이다)을 나중에 자신의 백댄서로 쓰기도 했을 정도로 댄서들 사이에서 신망과 실력을 모두 인정받았었다.

1988년 이수만에게 발탁되어 트레이닝을 받았다고 한다. [2] 이 장르로는 선구적인 가수로, 1990년 '현진영과 와와'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제1집 "New Dance"에서 한국에 힙합음악을 소개했다.[3] 1집의 타이틀곡 '야한 여자'는 당시로서는 노골적인 가사와 힙합이라는 낯선장르로 인해 여러모로 반향을 일으켰지만, 큰 인기를 끌지 못하고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후속곡 '슬픈 마네킹'이 큰 인기를 얻으며 주목받기 시작한다.

1992년 제2집 "New Dance 2"를 발표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여기서 타이틀 곡인 '흐린 기억 속의 그대'는 높은 완성도와 함께 굉장한 인기를 얻었으며 아직도 현진영의 대표적인 노래로 남아있고 같은 앨범의 '너는 왜'는 '현진영 고 진영고'라는 후렴구와 랩으로 강한 인상을 남기면서 인기를 이어갔다. 그가 무대의상으로 즐겨 입었던 X마크가 새겨진 알록달록한 무지개 색깔의 후드티와 큼직한 힙합스타일의 청바지는 당시 청소년 및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힙합 패션이라는 장르를 새로이 유행시키며 X세대 문화를 만들어낸 효시로 평가 받는다. 당시 1990년대의 최종보스 서태지와 아이들의 돌풍 때문에 빛이 가려지긴 했어도 당시로서는 서태지와 아이들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라이벌이었다.[4] 서태지 돌풍 당시 초기는 현진영, 중기는 이현도, 김성재의 힙합 듀오 듀스가 라이벌이었다.

2집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후에 현진영 본인이 회고하기로는 자신은 이수만으로부터 한푼도 못받았다고 하는데, 이수만이 마약흡입으로 사고친 자신의 뒷수습까지 해 준걸 감안하면 불만은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도 당시 SM은 현진영이 수익을 낼 시점에 대마초나 필로폰으로 구속되면서 음반과 상품을 모두 폐기시킬정도로 큰 손해를 보았고 매니저들도 수사를 받으면서 고초를 겪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이현도, 김성재, 신동엽, 김승현, 이홍렬 등이 회사에 미래가 없다고 여겨져 SM를 떠나게 되면서 이수만은 그 당시 수입이 좋았던 월미도와 방배동까페를 팔아서 SM의 부도위기를 겨우 넘기던 절박한 상황이었던지라 현진영 본인으로서도 이런 부분들까지 감안해서 그냥 넘어가려는 듯 하다.[5]

2007년 인터뷰에서는 이수만을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고 연락도 하고 지낸다고 했는데, 사이는 별로 나쁘지 않은 모양. 과거 2000년대 초반 김구라 황봉알의 시사대담에서도 배임 문제로 미국 도피중인 이수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을 준 고마운 분이다"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어서 "그러나 배임문제로 도피한 건 다 자기인생이니 내 알바 아니고, 너희들이 미국가서 이수만을 까더라도 상관 없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뭐 이렇게 말한 건 사실 굳이 자신이 개입해서 이수만의 범죄 행위까지 쉴드를 쳐야 할 명분은 없었기에 방송 분위기를 고려해 본인 스스로 적당히 드립을 친거라 보는 편이 맞을 듯.

1993년에 3집 "Int: World Beat And Hiphop Of New Dance 3"를 발표하여 '두근두근 쿵쿵'이란 곡으로 인기를 이어갈 듯 했으나, 발매 직후 필로폰 투약혐의로 구속되고 이때부터 방송금지가 되었으며 나락으로 떨어졌다. 사실은 1991년 이미 대마초 흡입 혐의로 처벌을 받은바 있었다. 이후에 1995년에도 필로폰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다. 그래서 나락으로 떨어진 1998년에는 돈이 없어 마약을 못하고 대신 본드흡입을 하다가 구속되었고, 몸무게가 100kg을 넘는 모습으로 나타나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2000년에 현재의 부인인 모델 겸 탤런트 오서운씨를 만나 교제를 시작하면서 오씨의 설득으로 마약중독 치료를 본격적으로 마음먹게 되고, 2002년 4집 발매와 동시에 공식 기자회견을 열고서 마약중독 공개치료를 선언하고 전문적인 치료를 받기 위해 순천향대학교병원 정신병동에 스스로 입원하였다. 공개치료가 시작되고 나서 부터 그 동안의 마약에 찌든 삶과 수감생활을 적나라하게 회고하는 등 故 이주일씨가 폐암 말기에 금연홍보대사로 활동하듯이 마약퇴치를 위해 공익활동을 많이하였고, 치료에서도 좋은 경과를 보이며 살도 빼고 정상적인 행보를 보여준 덕분에 그동안 현진영을 마약 연예인으로 낙인 찍고 있던 대중들의 부정적 인식도 긍정적으로 많이 바뀌게 되었다.

마약 때문에 몸무게가 130kg까지 나간적이 있다니 그 폐혜를 알만하다. 그런데 이 시절 사진을 보면 완전 히스패닉 스타일의 간지가 난다. 마약 중독 자체는 살이 찌지 않고 오히려 빠지는 경우가 많지만 마약을 끊으려고 시도할 경우 극도의 식욕 때문에 살이 찌는 케이스가 있어서 금단 증상의 하나가 아닌가 사람들이 의심하기도 했다. 현진영 본인은 폐활량 증가를 위해 일부러 찌웠다고 말한다. 김구라 황봉알의 시사대담에서는 찌고나니 저음이 좋아져서 일부러 놔뒀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음악 작업을 하면서 엄청나게 찌웠다 뺐다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건강을 걱정해서 더 이상 안 하기로 했다고 한다.

1997년에는 절친한 친구이자 같은 힙합 가수였던 이탁[6]과 IWBH(International World Beat Hip-hop)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고 "stop Aids stop drug"라는 곡도 발표하였으나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후 2002년 4집 "21C New Dance Jin Young Vol. 4"을 발표하고, 2006년 5집 "street jazz in my soul"을 발표하여 재기하였다. 2011년에는 데뷔 20주년 기념앨범을 내기도 했다.

그의 백 댄서 밴드격인 와와를 거쳐간 가수 중에는, , 이현도(1집), 구준엽, 강원래(2집 이후) 등이 있다.

여담으로 절대무적 라이징오 국내 비디오판 오프닝을 부르기도 했다. 원곡에는 없는 랩 부분도 있다. 이후 투니버스에서 재방영할때도 이 오프닝을 썼다.

한 라디오 방송에서 유승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실력 있고 좋은 녀석인데, 왜 군대를 안가!" 라는 발언을 해서 병역 대 마약이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정작 본인 역시 군면제인 것이 아이러니한 점. 항간에는 학력으로 인하여 면제를 받았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정확히는 중졸 학력 등의 문제로 인하여 방위 판정이 나왔는데, 대기자가 너무 많아 소집면제 된 케이스.

삼국전투기에서 진영이란 별명을 가진 고순이 현진영의 모습을 하고 나와서 "함진영 고! 진영 고!"를 한다.

2014년 6월 파산신청을 했는데 과거에 방송에서 부인의 수입을 자랑한 적이 있어서 여론이 영 좋지 않지만 법원은 현진영에게 파산을 선고했다.

복면가왕 33회에 꺼진 불도 다시 보자 119라는 이름으로 출연. 코스모스를 꺾은 최강자인 캣츠걸과도 상당히 좋은 무대를 보여주어 호평을 받았다.[7] 하지만 상대가 상대라 결국 탈락. 의외로 가창력이 너무 좋아 패널들 모두 현진영이라고 절대 생각지 못한채 권선국, 박상민 등의 가수를 예상했으나 현진영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다들 멘붕해버린다. 이후 자신을 있게 해준 대표곡이자 클레오파트라를 꺾게 해준 명곡 "흐린 기억 속의 그대"를 열창한 뒤 퇴장한다.

시간이 지나 2016년 JTBC 걸스피릿에 '레전드와 콜라보레이션'편에 레전드로 초청을 받아 출연하였다.여기서 스피카의 김보형과 한팀이 됐는데 여기서 본명을 밝히고 '내 본명은 법조계 종사자들만이 안다(...)'며 장렬히 자폭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그리고 김보형이 김해김씨라는 것과 자신이 김해 허씨라는걸 알고 팀명도 '로열 패밀리'로 지었다.김보형이 '진보'라고 할때 '정치적인 말은 안된다며 아예 사드로 할까?(...)란 개드립도 치셨다어쨌든 본 경연에서 김보형에게 철저히 포커스를 맞춘 무대를 보여주며 김보형의 1위에 공헌하였다.

1.1 디스코그라피

현진영/음반 목록 참고

2 일러스트레이터

게임라인-게이머즈 계열에서 일러스트를 투고하는 일러스트레이터다. 보통 본명보다는 미하루(간혹 미루/하루로 분리됨), DARKART같은 펜네임으로 알려져있으며 한때 몇몇 슈로대 관련 기사에서는 슈퍼로봇이나 각종 로봇들의 모에 의인화 일러스트를 투고하기도 하였다.[8]
  1. 이 이름으로 검색해도 이 문서로 들어올 수 있다.
  2. 2집만 이수만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진영이 직접 이수만이 자신을 발탁해서 1988년부터 트레이닝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1,2집 모두 이수만의 휘하에서 발표
  3. "최초"에 대해선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현진영이 매우 초기에 도입한 사람중 한사람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4. 다만, 서태지와 아이들을 좋아하는 팬층이 현진영과도 겹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5. 이 때, 이현도가 와와로 활동할 때 현진영이 대마초로 체포되면서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애기하면서 현진영을 디스하였는데 현진영도 자서전으로 이현도를 디스하기도 했다.
  6. 구준엽과 더불어 탁2준2라는 듀오로 활동했으며 '흐린 기억 속의 그대'의 작사/작곡가이기도 하다.
  7. 이후 복면가왕 경연을 보면 알겠지만 캣츠걸은 이긴 상대들을 그야말로 압살했다. 의외로 현진영이 파리넬리(13점차)를 제외하면 캣츠걸과의 점수 격차가 가장 적었다.
  8. 당시에는 한국 동인들사이에서 메카무스메건담걸 의인화가 잘 알려지기 이전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꽤나 선구자적인 측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