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만

이름이수만(李秀滿)
출생1952년 6월 18일, 서울특별시
본관전주 이씨 효령대군[1]
직업SM엔터테인먼트 대표
학력서울매동초등학교 졸업[2]
경복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공학과 농업기계전공 학사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 노스리지 컴퓨터공학 석사
가족부인, 슬하 2남
형 이수영, 조카 이순규[3]
수상2012년 코리아 소사이어티 문화상
2012년 제1회 가온차트 K-POP 어워드 K-POP 공헌상

한국 아이돌K-POP 문화의 선구자
자신의 이름을 딴 연예기획사의 수장이자 가요계 중 한명

1 개요

대한민국가수, 기업인, 프로듀서. 다만 가수는 사실상 관둔지 오래 되어서 방송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국내 아이돌 시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끼치고 있는 "사실상 케이팝 필드를 만든 장본인" 기업인 겸 프로듀서. 소속 가수들에겐 대개 선생님, 회장님, 은사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SM엔터테인먼트 회장이자 최대 주주다. 일부 장년층에겐 가수로 더 유명하기도 하다. 전직 가수였고 지금은 기업인에 가깝지만 사실 이수만을 설명하는 단어는 프로듀서다. 아이돌 문화를 일으킨 대표적인 그룹들을 만든 프로듀서로서 의의가 사실 가장 크다. 아이돌이라는 말이 익숙치 않던 시절부터 앞으로 아이돌 가수 시대가 올 것을 일찍이 예측하고 철저히 기획된 아이돌 팀을 제작하기 시작였다. H.O.T., S.E.S, 신화, 보아,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 엑소, 레드벨벳등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최고의 인기 가도를 달리는 아이돌 가수들은 모두 이수만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에서 나온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수만이 해외에서 도피 중이던 2000년대 초반, SM에서 나온 아이돌의 흥행성적이 좋지 못했다. 굳이 SM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쪽 장르를 개척한 장본인으로 이수만 덕분에 전술한 SM 소속 인기 아이돌 뿐만 아니라 타사의 여러 인기 아이돌들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 DSP 사장 이호연H.O.T.의 성공을 보고 강성훈, 은지원의 듀엣 그룹에 급하게 4명을 추가해 젝스키스를 만든 일화는 유명하다. DSP는 'SM 아이돌에 +1' 전략으로 각각 젝스키스, 핑클, 클릭비를 배출하며 라이벌로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

최초의 한류 진출을 염두에 둔 아이돌 그룹을 만든 선구자격 제작자이기도 하다. H.O.T.가 중국과 일본, 동남아 등에서도 인기를 얻자 이후 거의 최초로 기획부터 철저히 해외진출을 염두에 둔 아이돌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본 진출을 염두에 둔 보아나 중국 진출을 염두에 두고 중국인 멤버까지 도입했던 슈퍼주니어 등의 아이돌은 이수만이 기획하기 전, 과거 한국에는 볼 수 없는 가수들이었다. 여러모로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지금의 철저한 기획형 아이돌이 만들어지게 된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프로듀서라 할 수 있다.

2 가수로 데뷔하다

1952년에 출생하였으며 1975년에 가수로 데뷔하였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공학과[5]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노스리지에서 컴퓨터공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에는 보기 드문 유학파 연예인이었다. 인디 시절에는 샌드페블즈 초창기 멤버로서 활동하는 등 정통 락을 기반으로 음악을 갈고 닦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수만이 샌드페블즈 였었는데 왜 대학가요제는 나가지 않았나?" 라고 묻는 부분이 있는데, 1977년 첫 대학가요제 당시 샌드페블즈는 기수로 6기였다. 이수만은 2기. 그리고 바로 윗선배(1기)가 김동만씨인데 이분의 아들이 지금 TOXIC의 김정우. 그리고 특별히 77년 첫 대학가요제 당시는 5기 멤버가 한명 있었는데 그 사람이 우승곡인 "나 어떡해"의 작곡자이자 바로 산울림의 레전드 베이시스트인 김창훈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어쨌든 이수만은 1977년 제1회 대학가요제 MC를 맡은데 이어 1998년까지 이효리에 이은 최다 MC로 활약했다.(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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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만과 365일 1집. 1980년 발매된 이 앨범에서는 정통 록을 확실하게 시도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좋은 노래들이 상당 수록되어 있다. 당대에 워낙 쟁쟁한 가수가 많아서 큰 두각은 나타내지 못했다.

라디오 DJ를 하기도 했었는데 TBC의 비바 팝스를 제외하고는 MBC 라디오가 주 활동무대였다. 별이 빛나는 밤에의 진행을 맡기도 했고 1980년대 후반에는 '젊음의 음악캠프'를 맡았으며 이는 '팝스 투나잇'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다시 '젊음의 음악캠프 이수만과 함께'가 된다. 어디서 많이 본 단어가 느껴졌다면 제대로 본 것이다. 이수만의 뒤를 이어 배철수20여년간 계속 맡아온 그 프로그램의 전신이다.[6] 지금은 아무도 배철수 앞의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당시 MBC 라디오의 가수출신 DJ로 "별이 빛나는 밤"에 이문세, "젊음의 음악캠프" 유열과 함께 마삼트리오(馬三 Trio)[7]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2015년 12월 4일 응답하라 1988 9화에서 이문세가 이수만의 곡을 소개하면서 대놓고 마삼트리오 인증. 심지어 지금도 세 명이 정기적으로 만난다고...

당시 앞의 두 사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인지도 있는 가수였다. 그러나 점차 연예 활동에 한계를 느꼈다. 포크/록 가수로서 최정상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상실감과 정상에 서고 싶다는 욕망 등 여러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가운데 미국 유학시절 MTV를 보고 틴아이돌들과 일본에서 본 초창기 쟈니즈에 큰 충격을 받아 SM을 세우게 되었다.

이로 인해 '대중 음악계'에서의 평판도 좋지 않은데 조영남은 2006년 GQ 인터뷰에서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이문세 또한 샤이니가 오늘 아침 이문세입니다에 출연하여 이수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더 이상 이야기 하지 말도록 해요. 별로 안 좋아하거든."이라며 말을 했지만 2015년에도 이수만, 유열과 아직도 정기적으로 가족동석 식사를 한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친분이 있으니 반농담식 발언이었다. 다만 2012년, 이문세 역시 기획자와 아티스트로서의 차이를 강조했고, 그 어떤 가수도 직간접적으로 이수만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나름 레전드로 칭송받는 4월과 5월의 초대 보컬로 1집에 자신의 목소리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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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화려하고 아티스틱한 앨범 패키징을 선호했다

본인부터 1989년 10집 뉴에이지 이후 아예 음악활동을 끊었으니 미련은 없는 듯. 그래도 별이 빛나는 밤에 1만회 특집에서는 랩을 이문세와 같이 하기도 했다. 별밤 40주년 기념 특집방송에서 주철환 전 MBC PD(현 JTBC 콘텐츠본부장)와 샤이니가 같이 출연했을 때 기념삼아 틀어줬다. 별밤 홈페이지에 동영상으로 제공되니 그 현란한 래핑을 확인해보자. 또한 이 시절에는 모 주스의 모델을 맡기도 했는데 당시의 CF가 발굴되면서 화제(?)가 되었다. SM 금지영상

3 가수에서 프로듀서로

음악 활동을 접을 무렵 MC로도 진출하였으며 한편 가수 현진영을 키우려고 하는 등(2집 제작 총지휘) 매니지먼트 사업행보가 시작됐다. SM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여 H.O.T., S.E.S, 신화, 플라이 투 더 스카이, 보아, 동방신기, 천상지희,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 f(x), EXO, 레드벨벳 등의 수많은 아이돌 그룹들을 배출하였다.

일단 결과적으로 보면 K-POP의 선구자이자 기틀을 닦은 장본인.

이런 아이돌그룹을 연달아 성공시키며 SM은 두말하면 입만 아픈 국내 최고의 연예기획사 중 하나로 성장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현재 정형화되고 있는 아이돌 2세대 이후 시장에서 나름대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으며, 샤이니f(x) 등의 기획에 참여하며 두 그룹이 천편일률적인 아이돌 그룹들과는 다르다는 이미지를, 그리고 음악적으로 평가될 발판을 확실히 만들어준 사람이 이수만이다. 슈퍼주니어 한국 아이돌 최초로 중국 '현지화' 를 시도했고 유닛 데뷔 8개월만에 중국 연말 시상식에서 신인상과 동시에 대상을 타는 등 그의 선견지명이 드러났다. 국내 차트 순위에 연연하는 대신, 유투브를 통한 해외 시장 공략으로 일찍이 눈을 돌린 것도 이수만과 SM이었다. 확실히 SM의 파리 콘서트 이후 국내 기획사들이 유투브를 매우 중요시하게 되었고, 음악중심/인기가요 등에도 유투브 점수가 반영되게 되었다. 예전부터 보아동방신기를 일본에서 성공시키고, 슈퍼주니어EXO의 중국 현지화가 성공했다는 점에서 이수만의 기획력은 대중들과 팬덤들한테 어그로를 끌 수밖에 없는 '대형 기획사 회장' 이라는 직함에 가려 저평가되어 있었다.

또한 2006년 3단계 CT론을 제시하였는데 <한류 문화상품을 수출하는 1단계, 현지회사 또는 연예인과의 합작으로 시장을 확대하는 2단계, 현지회사와 합작회사를 만들어 현지 사람에게 한국의 CT를 전수하는 3단계를 거쳐 한류 현지화를 이루고, 그 부가가치를 공유한다> 주된 요지다. 1단계가 보아, 동방신기라면 2단계가 슈퍼주니어, 엑소로 볼 수 있을것이고 3단계가 NCT가 될것이다. 2006년 당시만 하더라도 이수만의 CT론은 부정적인 입장이 많았다 하지만 10여년이 흐른 지금 한중 합작 컨텐츠 제작사들이 늘어나고 한국의 감독, PD들이 중국으로 넘어가서 현지회사와 제작초기부터 참여하는 등 시대를 앞선 안목은 제대로 들어맞았다고 볼수가 있다. 그리고 이수만은 중국의 자본력을 이길수 있는 회사와 시스템은 전세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수만의 말대로 한국이 참여하는 식으로 가서 이익의 일부를 받아오면 13억의 중국, 1억 2천만의 일본에 비해 5천만명의 한국이 이득이 가장 높기 때문에 문화수출(CT론)은 국가경제에도 크게 기여할것이라는 주장도 하였다.

이 해외 공략은 어느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2011년 6월 10일, 한국 가수로썬 이례적으로 열린 프랑스 파리콘서트에선[8] K-POP이 어느정도 세계시장에서 반응을 보인걸 입증했으며[9], 2013년 10월 19일 베이징 콘서트에서는 7만명의 관중을 모으는 위엄을 보였다. 또한 중국 멤버를 영입하는등 중화시장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는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위에서도 말한 슈퍼주니어EXO. 그러나 후자의 경우 현지화를 시도하던 도중 그룹의 중국인 출신 멤버들이 인기를 얻은 뒤 급작스레 탈퇴하는 바람에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다. 하지만 아래의 논란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으니...

3.1 논란

2001년 대주주로 있는 SM엔터테인먼트에서 주금 가장 납입 형식으로 횡령한 회사 공금 11억원을 'PR비'명목으로 PD에 금전제공 등에 사용했다는 혐의와 코스닥 등록 이후 수백억 원 대의 시세차익을 얻은 혐의로 당시 검찰은 이 대표가 1998년께 자기자본금의 100% 이상을 증자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으로 증권업협회 운영규정이 곧 개정된다는 사실을 알고 개정 직전 회사 돈을 빼돌려 급하게 유상증자를 하면서 5,000만원이던 자본금을 12억원으로 늘렸다고 밝혔다. 근데 수사를 받던 도중 미국으로 도피, 2003년 1월 인터폴에 수배를 비롯 여권무효화 등으로 압박의 강도가 높아지자 2003년 5월 23일 자진귀국하여 검찰소환에 응했으나, 하루만에 귀가시켰다. 2004년 9월 재판 결과 공소사실이 모두 유죄로 인정되면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와 관련 재판부는 빼낸 돈을 다시 회사 계좌에 입금했고 실제로 회사 자본증식이 이뤄진 점을 감안해 형 집행을 유예한다고 밝혔다.

간단하게 말하면 검찰은 이수만이 회사 돈 11억을 뺀 뒤 주식을 사서 시장에 팔아 수백억원의 이득을 보았으며, PD등에게 금품제공을 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조사 결과 11억은 이수만 계좌에서 바로 다시 빠져나가 SM의 유상증자대금으로 사용되었고, 실제로 이수만은 주식을 팔지도 않았기에 수백억원의 시세차익은 당연히 없었다. 금품제공 역시도 혐의가 없음이 드러났지만, 어쨌거나 잠시나마 회사의 돈이 빠져나간 것은 사실이나 그 고의성이 없었다고 판단하여 징역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던 것이다. 어쨌든 상당히 알려진 인물이 이유야 어쨌든 코스닥 상장사의 자본 유출이 되었으니 작은 죄는 결코 아니라고 볼수 있다.

검찰이 의혹을 주장했던 1999년 당시 이수만 입장에선 보아를 필두로 아시아에서 계속되는 성공을 위해선 대량의 자본이 필요한 상황에서 주식을 대량발행해서 유상증자를 해야하는데 그 과정에서 회사의 자본금을 빼서 유상증자 대금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이는 이수만 독단의 생각이 아니라 이수만과 SM엔터테인먼트 임원진 전체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이었다. 당시 이수만이 미국에 있었기에 SM에서 유상증자 금액을 차용해 유상증자를 실시, 귀국 후 회사에서 차용한 금액을 바로 변제했다고 주장하였고 이 의견이 재판부에서 인정되었던 것이다. 미국 도피에 관해서는 보아가 일본 활동중이었고 그 보아가 속한 SM의 대표가 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이 될시 일본 제휴사등의 계약관계가 파기 될 가능성도 있어서 일신상과 그 외 모든 작업을 마무리하고 귀국하려 했다고 주장하였다. (골프를 하는 사진이 찍힌 것은 바람쐬러 나갔다가 찍혔다고 인정을 하였다.) 당시 김영민이 아닌 SM엔터 사장직함을 가지고 있던 사람과 이런 일 때문인지 소송과정이 있기도 하였다.

그 뒤 2007년 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 취임 4주년 특별사면 대상자에 이름을 올리면서 형선고가 사라지게 되었지만 '솜방망이'라는 시민단체와 법조계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도피/구속기간 동안 SM엔터테인먼트의 주식은 1/5 토막이 나버렸고, 이수만이 대표 프로듀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룹들이 밀크, 이삭 N 지연, 신비, 트랙스, 블랙비트[10]를 출범시켰으나 반응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당시 SM 상황상 이수만이 팀 기획과 데뷔과정, 컨셉 등 프로듀싱에 참여할 수가 없었기에, 오히려 이 기간에 나온 실패한 그룹들과 이수만 기획하에 탄생한 그룹들과 비교해보면 이수만의 프로듀싱 능력만큼은 인정할만 하다.

한국의 음악시장을 망쳐놓은(?) 원흉으로 지목받기도 한다.이수만을 죽입시다 이수만은 나의 원수 시스템 하에서 연습생 몇몇을 뽑아 컨셉을 잡고, 같은 작곡가(혹은 작곡가 집단)가 비슷비슷하게 찍어내는 공장형 음악을 조합해 시장에 내놓으며, 이를 반복해 수익을 올리는 거대기업형 연예 매니지먼트 시초가 SM이었기 때문. 물론 이수만이 없었다고 해서 현재의 아이돌 홍수시대가 오지 않았을 거란 보장은 없다. 또한 mp3와 인터넷의 등장으로 음반 위주의 음악 시장이 현재의 음원 위주로 재편된 것은 전세계적인 추세인만큼 한국 음악시장의 침체를 이수만 개인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SM은 팬덤의 영향으로 음원보단 음반이 강한 회사임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주장은 모순적이고 단면만을 본 주장이다. 하지만 공중파 방송에 출연해 선보인 '립싱크도 하나의 장르로 봐달라'는 희대의 개드립은 음악과 가수에 대한 그의 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일면이라 할 수 있다. 가수 이은미는 후일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이수만의 이러한 립싱크에 대한 견해를 통렬히 비판하기도 했다.[11]

실질적으로 보자면 아이돌 시스템에 관련해선 이수만 본인이 대표격으로 인식되어 욕을 먹은 거라고 볼 수도 있다. 이수만 이전에도(주먹구구식으로 좀 막장스럽긴 했지만) 비슷한 형태의 기획사나 가수들은 많이 있었다. 가수에 대한 수익분배 처우나 음악적견해등도 이수만보다 나을 게 없었다. 이수만은 기존의 형태를 좀 더 분업 - 체계화 시키고 (수익적으로)발전시킨것과 아이돌이란 이름으로 10대 위주의 시장을 개척시킨것. 다만 이수만의 경우는 이런 초대박을 연이어 터뜨리고 모델화 시켰고, 다른 부분들을 발전시킨데 반해 해당 가수와의 수익 분배에선 살짝 나아지긴 했지만 그 전과 같이 관행적으로 처리했다는 문제로 인해 HOT의 반발을 샀다는게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볼 수있다. 더불어 아이돌 위주의 가요계 변화에 있어서 이수만은 중장년 층에게도 인지도가 있는, 인기 연예인 출신 연예기획사 사장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져있었기에 욕을 더 먹었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이 사람을 두고 현재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SM엔터테인먼트와 해당 연예인들과의 노예계약. H.O.T. 해체 때도 계약금과 인세가 논란이 된 바 있으며 2009년 동방신기가 전속계약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다. 이외에도 차별적인 각종 대우 등으로 인해 팬들에게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지금은 최고참 아이돌로 가요계에서는 입지가 탄탄한 신화조차도 1집 성적이 생각보다 저조한 결과가 나오자 바로 해체할 거라는 루머가 나올 정도로 푸대접을 받아서 신화와 신화창조는 불만이 많았다. 물론 데뷔전부터 대놓고 '수만이', '수만이 아저씨', '이수만씨'라고 부르던 신화 멤버들이지만 1집 이후로는 대놓고 방송에서도 그랬다. 게다가 나름 잘나가던 4집 때 앤디 탈퇴 건을 둘러싼 갈등은 정말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 전에 가수들의 수익 분배 구조는 그냥 사장 내키는 대로(...)였다. 사장이 기분이 좋으면 돈 더주고 안되면 말고 식. 예를 들어 몇 년 선배인 룰라의 경우 100만장을 팔았지만 정상적인 수익분배는 기대도 할 수 없었고[12] 심지어 심신은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오직 밤무대에서만 활동하는 가수로 전락했다. 그 때가 그랬던 시절이었다. 그냥 사장이 내키는대로 보너스 식으로 돈 더주는 것에 만족했을 정도이며 R.ef의 경우도 자신들의 인기 정점의 시기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밤무대에서 활동 했을 때가 수익적으로 훨씬 나았다고 할 정도. 서지원은 생전은 물론이고 사후에 추모콘서트 등으로 번 수익마저 기획사에서 삼키는 바람에 말이 많았다. 심지어는 레전드로 칭송받는 조용필 조차 자신이 작곡한 곡의 저작권 조차 소속사 사장이 가지고 수익분배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13]. 그 전엔 돈 문제로 사장한테 얘기했다간 니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잘됐냐는 식으로 사장이 적반하장 화를 내고 협박하는 등의 경우도 많았다. 이수만식의 앨범당 얼마 등 명문화된 수익분배는 1990년대 중후반 치곤 나름 발전된 체계였던셈 물론 주는 돈이 적었지만 동시대에 활동했던 이호연이 키운 젝스키스의 경우 아예 계약서를 쓰지 않고 활동했다. 2000년 6월 16일자 피자의 아침 방송에서 이상호 기자가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추궁하자, DSP 측은 멤버들이 계약에 묶이지 않도록 배려한 것일 뿐이라고 밝혔다. 자기가 말한대로 실행되어서, 2016년 젝스키스가 YG와 계약할 때 SM 출신 아이돌과 달리 상표권 등의 문제에 있어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은지원이 20세기 미소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3년 동안 활동하면서 받은 돈이 2억원 정도라고 한다. 당시에 6명 해서 총 12억이니 많이 받은거라 생각했다고 한다.[14]

자신의 소속사를 운영하는 방식은 엄격하지만 원리원칙에 따라 행동하며 가수들을 가혹하게 굴 때도 자신이 나름대로 정한 선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성공할 싹은 확실하게 밀어줬다. 그 대표적인 예가 보아. 참고로 보아 데뷔비용은 당시 기준으로 30억이 들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SM의 명운을 걸고 투자했던 셈인데 결과는 뭐 말할 것도 없다. 보아는 일본에서 정규앨범 6장 연속 백만장이 넘는 판매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는 2015년 현재까지도 일본 여가수 전체 공동 2위의 기록이다(1위는 하마사키 아유미, 2위는 코다쿠미). 또한 아레나투어를 가장 먼저 시작한 한국 가수이기도 하며, 홍백가합전 최다출연 기록도 가지고 있다. 다만 당시 일본 내 인지도는 무명에 가까웠던 SM이 일본 내 레이블과 좋은 비율로 계약 관계를 가질수는 없었던 걸로 보인다. 물론 당시 엔화 환율을 생각하면 그래도 남는 장사겠지만.

동방신기의 계약 기간이 13년 이상으로 길다는 점, 그리고 앨범이 50만장 이상 팔리지 않으면 수익을 받을 수 없는 조항 등으로 엄청난 논란에 휩싸였다. '논란'인 이유는, 장기계약에 대해서는 "가수도 이득"이라는 반론이, 앨범 수익분배에 대해서는 "음반수익은 애초에 얼마 되지도 않고, 다른 수익은 동방신기에게 유리하다"는 반론이 있기 때문. 심지어 동방신기는 모든 해외 스케줄의 비행기표 값, 미용사와 코디네이터 비용도 자신들이 부담해야 했다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주장도 있다. 현진영도 김구라 황봉알의 시사대담에서, 이수만 밑에서 일하면서 한푼도 받지 않았다며 (물론 본인이 사고친 것들을 이수만이 뒷수습 해주긴 했지만), SM 1층은 자신이 지은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15]

물론 반대론자들 사이에선 뒷공작으로 동방신기를 해체시킨 것은 김영민이고 이수만은 그걸 막으려고 했다는 얘기도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 재빨리 귀국하긴 했다. 그 예로 SM 소속 가수들이 이수만 선생님 감사하다는 말은 하지만 김영민 사장님 감사하다는 말은 한번도 나오질 않았다면서. 물론 또 그 반대론자들은 "어차피 바지사장인데 고맙고 말고 할 게 있냐" 라고 말하곤 한다. 허나 실제로는 언제부턴가 소녀시대를 비롯한 현 소속가수들이 대부분의 자리에선 이수만과 함께 김영민에게도 감사하다고 얘기한다.(잘하면 유영진 등 이사들도) 어쨌건 현재에 와선 SM빠들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이수만보다 김영민을 더 까는 편이다. 노린건가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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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로드 시스로드 2009년 6월에 샤토 무통 로쉴드로부터 와인 기사 작위를 받았다. 결국 와인 사업에 진출할 계획이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일부 계층에서는 이 사진을 가지고 이수만이 프리메이슨에게 기사작위를 받았다며 인터넷에 퍼트리기도 했다.

EMOS라는 브랜드의 와인을 만들었고 소속가수들의 특별한 행사등이 있으면 선물로 보내주고 SM내 임직원들도 결혼이나 여러 이벤트 등지에서 EMOS 와인을 마실수 있다고 한다. 마셔본 사람말로는 생각보다 괜찮은 와인이라고.

이수만 소유의 100평이 넘는 펜트하우스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소녀시대써니가 이 사람의 조카다. 형의 딸이라고 하니 즉 써니의 작은 아버지다. 관계가 관계인 데다, 써니가 소녀시대에는 제일 늦게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아 데뷔했기 때문에 낙하산 논란이 있으나, 써니가 방송 출연하여 "사실을 숨기고 오디션을 봤기 때문에 작은 아버지는 몰랐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먼 과거에 기갑창세기 모스피다의 오프닝곡을 부르기도 했다.

코갤에서의 별명은 흰수만. SM 소속 가수의 팬들이 그의 생일에 축하와 함께 '이수만 아버지 감사합니다'라는 리플을 줄줄이 단 것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수만은 현재 SM의 지분 24.43%를 보유하고 있다. 그는 2,100억원 어치의 주식을 소유한 연예계 최대 주식부자 였다. 양현석은 2012년 초 지분가치 1,400억원으로 2위였으나 싸이의 초대박으로 주가가 상승하여 2012년 9월 24일 계속된 주가 상승으로 양현석의 지분가치는 3,000억원을 넘어 부동의 1위에 올랐다. 배용준이 315억원으로 3위를 차지한 것을 비교해보면 넘사벽 수준. 2016년 기준 다시 이수만이 주식부자 1위에 올랐다. 양현석은 강남스타일 고점 이후 YG의 주가하락과 루이비통,텐센트 등지에 개인 지분을 넘겨 다시 2위가 되었다. 이수만이 약 1800억,양현석이 약 1500억.

한편 1986년에 서세원이 감독한 <납자루떼>라는 컬트적이고 괴상한 영화의 OST를 만들었던 흑역사가 있다. 그리고 둘은 나란히 도피생활 1987년 이현세 원작의 만화를 영화화 한 "지옥의 링"의 주제가도 그가 불렀다. 흥행은 망했어요

2011년 SM 파리 콘서트를 성공시킨 쯤 해서 KB투자증권의 TV CF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다. 횡령으로 인터폴 수배를 받았던 양반이 투자증권 광고라니

미얀마의 민주화운동가 아웅산 수치 여사를 다룬 프랑스 뤽 베송 감독의 영화 'The Lady'의 미국 시사회에 참가, 뤽 베송 감독과 주연배우 양자경, 미국의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과 사진을 찍었다. 애초에 이는 이수만이 힐러리에게 시사회에 초대를 받았기 때문으로, 이 기묘한 인연은 힐러리가 한국에서 미얀마로 출국할 때, 이수만이 힐러리에게 'The Lady'의 DVD를 구해다주어 성립한 것이다.

2010년대 들어선 전에 하도 까인 것에 대한 반작용인지(...), 한국 매니지먼트 사업의 선구자로써 이수만을 재평가하는 사람들도 많다. 아이돌 키우는 능력 하나는 월등한 게 SM이고, 샤이니, f(x)의 몇몇 앨범들이 음악적으로도 호평을 받으면서 프로듀서인 이수만을 다시 보게 된 것. 실제로 '피노키오' 가 처음 나왔을 때 이수만의 지시로 한번 엎고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 또한 김경욱이 만들어 망해가던 천상지희에 손을 대서 천상지희 the grace로 개편해 결국 망했지만 잠시나마 회생시키고, 복귀한 이후 참여한 모든 신인그룹들이 성공하였으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역시 아시아에서 크나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경영자 이수만보단 기획자 이수만이 더 뛰어나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다. 밴드 롤러코스터 출신의 SM프로듀서 히치하이커의 인터뷰에 따르면 SM에서 나오는 모든 타이틀곡은 이수만이 결정하고 앨범 수록곡의 가사 한줄까지 들어보고 결정한다고 한다.# 태티서의 Twinkle 역시 이수만과 A&R 팀 사이에서 수없이 많은 의견교환으로 가사와 기타리프가 정해졌다고 한다.

어째서인지 삼대장과 엮인다. 가수 시절에는 이문세, 유열과 삼대장이었고 음반기획자가 된 이후에는 양현석, 박진영과 삼대장이다.

이수만의 부인 김은진 씨가 2014년 9월 30일 소장암으로 별세했다.#

2015년 SM 할로윈 파티에서 괴도 분장을 했는데, SNS상에서 크게 화제가 되며 '괴도 수만'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포즈가 커암 선생님을 떠올리게 한다

  • SM 설립초기부터 대마파문 등 여러 사건 사고를 일으킨 멤버들이 많았지만 먼저 내보내지는 않았다. 더 트랙스처럼 수익이 나지 않는 팀이라도 뮤지컬,드라마,OST등 여러 활동에 참여시키고 오히려 개인수입을 가질수 있게 해주었고 계약관련하여 SM에게 소송을 걸지 않는 이상 무조건 욕을 먹더라도 무조건 안고 가는편.
  • 바다가 데뷔전 부모님의 병원비를 대주었다거나 현진영이 대마초 사건으로 감옥에 있을 당시 현진영의 부모님까지 챙겼다는 얘기가 있는걸 보면 일단 자신의 회사에 들어오기로 결정된 이상 지원만큼은 확실한듯 보인다. 물론 커져가는 매출과 수익배분, 계약기간은 여러 논란이 있으나 소송을 걸고 나간 멤버들제외하고 남아 있는 멤버들은 바보도 아니고...
  • 한국경제의 인터뷰에 따르면 셀레브리티와 로봇이 오는 세상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SM과 이수만이 과거 1990년대부터 일본,중국,한류를 외쳤을때 이들의 주장을 동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보는게 맞다. 20년이 지난 지금 이수만과 SM의 행보를 볼때 그때의 이들의 주장이 틀렸다고 할 사람은 없을것이다. 2016년인 지금 이수만의 말대로 가까운 미래에 로봇과 셀레브리티의 세상이 올지 지켜보자. 자세한 전문은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5102203541 여기로
  • 소속 가수들 말로는 이수만은 SM 사내 연애를 권장한다고 한다. 이유는 막아주기 편해서라고. 지금은?
  • 굳이 연예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기 밑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전력을 다해 키워준다. 그 일례가 바로 소성진. 신화의 매니저였던 소성진이 성실하고 일을 잘해서 이수만은 신화가 떠나자 소성진을 다른 연예인의 매니저로 옮겨주는 게 아니라 프로듀싱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직책으로 진급시켰다. 그리고 소성진이 이수만의 밑에서 떠나서 독립하려 하자 이수만은 소성진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 그 결과 소성진은 2016년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걸그룹을 키워냈다. 아주 바람직한 청출어람인 셈이다.
덧붙여서 매니저로 출발한 정창환 역시 매니저-콘서트연출가-SM C&C 이사가 되었으며 평범한 직원으로 입사했던 민희진 역시 본부장으로 승진했다. 능력있는 스텝은 확실히 밀어준다
  • 공식적으로 발표된 얘기는 아니지만 이수만 평전이 출시될 당시 자료조사를 했던 작가의 주장으로는 동방신기 분열 당시 이수만이 극심한 스트레스로 심장에 무리가 왔고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이후로 심장에 좋다고 알려진 와인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있다. 당시 나이가 환갑(60세)인걸 감안하면 고령의 나이에 극도의 스트레스가 당연히 있었을것으로 보인다.
  • 방송에 출연을 자주 하는편이 아니지만 가끔 등장하는 이수만의 모습은 몸관리가 상당히 잘되어있다. 어깨와 허리도 굽지 않고 배도 많이 나오지 않았다. 얼굴에 주름만 늘어나 있다(..)
  1. 전주 이씨 효령대군 20세손, 시조 44세손 秀자 항렬이다.
  2. 써니의 고등학교인 배화여고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 연기자 오미연이 동창이라고 한다.
  3. SM 소속 걸그룹 멤버이지만, 낙하산은 아니라고 한다.정말인가(??) 진실은 둘만 알 듯하다 되려 일부러 넣은 것일수도 있다. 하도 연예기획사 사장들이 소속가수들을 가혹하게 굴린다는 소문이 나돌던 시절인지라 아예 자기 조카를 넣어서 "나는 소속가수들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걸 광고하려고 한 것일 수도 있다.
  4. 당시 기사 원문: ‘SM기획’과 ‘대성기획(후에 DSP로 명칭변경)’은 그 중 단연 두드러지는 곳. SM기획(대표 이수만)은 H.O.T S.E.S 신화를, 대성기획(대표 이호연)은 젝스키스와 핑클을 배출해 가요 시장의 권력을 장악했다. 요즘 가요계를 ‘수만이와 호연이의 전성시대’라고 부를 만큼 이들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 그러나 라이벌은 옛날 이야기고, 이호연 사장이 2010년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DSP는 크게 쇠퇴했다. 현재 이수만의 라이벌은 박진영 양현석이며 새롭게 급부상하는 소성진까지 가세하고 있다.
  5. 당시 농공학과 내에서 농업토목전공과 농업기계전공으로 나뉘어 있었다. 현 바이오시스템소재학부 바이오시스템공학전공
  6. 실제로 2013년 배철수가 진행 도중에 이수만 선배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7. 얼굴형이 긴 탓에 말의 얼굴을 닮았다고 해서(...) 마삼트리오가 됐다. 제1회 MBC 강변가요제 금상을 탔던 홍삼트리오의 이름에서 파생되기도 했다.
  8. 슈퍼주니어의 sorry sorry가 해외에서 큰 반응을 일으키며 대형 팬덤층을 형성했고, 슈퍼주니어의 투어 리스트에 프랑스와 북미 지역을 추가해 달라는 대형 플래시몹과 서명문이 전달되어 파리 콘서트가 열리게 되었다.
  9. 심지어 이 떡밥으로로 광고도 찍었다! 그만큼 이 콘서트는 당시 연예뉴스면은 물론,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의 감사패를 받을 정도로 시사쪽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10. 멤버 중 심재원은 이글 파이브에서 활동한 후 블랙비트에 합류했다. 현재는 SM의 안무 디렉터.
  11. 하지만 이은미는 이수만이 자신에게 SM에게 들어오라는 얘기도 하였고 이뻐해준다고 좋은 관계임을 밝혔다.립싱크에 대한 견해만 깠던것
  12. 예능 방송에서 고영욱이 후배 가수들에게 너네 백만장 팔아봤어? 라고 농담식으로 자랑하자 옆에있던 신정환은 그래서 100만장 팔아서 얼마 받았는데? 라고 디스하자 고영욱이 데꿀멍 했던 적도 있다.
  13. 예외적인 경우라면 아예 본인들이 회사를 차려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 정도이다.
  14. 다만 2억보다 더 벌었을거라 생각하게 만드는 다른 멤버들의 발언이 있기는 하다. 자세한 것은 젝스키스/정산 문제 문서 참조 바람. 그리고 해당 문서에서 보듯이 12억원을 준 것이 사실이라면, 대략 2:8에서 3:7 사이의 비율로 수익이 배분된 것으로 보인다. 젝키로 DSP가 번 수익은 대략 40~60억원일 것으로 추측된다.
  15. 하지만 실질적으론 현진영의 경우 투자금을 회수하기도 전에 마약사건으로 인해 음반 등은 폐기되고 직원들은 경찰에 조사받고 소속가수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SM 자체가 공중분해 될 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