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와 아이들

서태지와 아이들
서태지양현석이주노


서태지와 어른들 아니 서태지와 아저씨들(...) 근데 활동 당시에는 아저씨가 아니었잖아?

도둑놈과 아이들 [1]

한국어 버전
영어 버전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20세기 대한민국 히트상품 1위.[2]

1990년대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의 혁명이자, 대한민국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그룹.
1990년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자, 듀스와 함께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의 밑그림을 그린 전설의 그룹.[3]

서태지와 아이들을 대중에게 알렸던 특종 TV연예 "서태지씨 잘 들으세요." . 그 유명한 쌩 라이브 난 알아요의 전설. 동영상 제목에 데뷔라고 되어있지만 데뷔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를 특종 TV 연예로 착각하지만, 그 이전에도 여러 매체에 데뷔하고 노래도 했었다고 당시 매니저였던 최진열씨가 증언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실제 데뷔는, 1992년 3월 14일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무대였다. [4] 가수 지석진을 주목하자. [5]

MBC 가요대상 대상
노사연
만남
(1991)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1992)
김수희
애모
(1993)
김건모
핑계
(1994)
서태지와 아이들
Come Back Home
(1995)
김건모
스피드
(1996)
SBS 가요대상 대상
-
-
-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1992)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
(1993)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1992)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
(1993)
김건모
핑계
(1994)
서울가요대상 대상
태진아
거울도 안보는 여자
(1991)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1992)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
(1993)

1 개요


서태지와 아이들의 대표 곡인 Come Back Home .
당시 엣된 얼굴의 양현석도 보인다.

보컬, 작곡을 맡은 서태지와, 서브보컬과 안무를 맡은 이주노, 양현석과 함께 1991년에 결성한 3인조 댄스 그룹. 1992년, 1집 난 알아요로 데뷔하였으며 1996년에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서태지 항목도 참조해 보도록 하자.

2 결성

시나위의 베이시스트였던 서태지시나위가 해체된 이후, 락 뮤지션으로서는 드물게, 80년대부터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생소하던 음악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랩 장르를 바탕으로 한 획기적인 댄스 그룹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마이하우스라는 나이트클럽 업소에서 활동하는 무궁화 밴드의 멤버로 있을 때 같은 업소에서 일하면서 댄스 그룹 활동에 도움이 되고자 춤을 배우기 위해서 소개받은 양현석에게 자신이 작곡하고 있던 음악들을 들려주게 된다. 1년간의 군 생활 뒤 의병제대한 양현석은 서태지가 들려주었던 음악들을 잊지 못해 제대 후 다시 서태지를 찾아오고 때마침 댄서들을 구하고 있었던 서태지와 합이 맞은 둘은 듀엣을 결성하기로 하고 녹음까지 완료했으나, 추가 멤버를 들이기로 하고 수많은 이태원 댄서들을 둘러보다가, 박남정과 프렌즈로 활동했었던 이주노를 최종 멤버로 영입하면서 3인조 댄스 그룹이 되었다.

여담으로 뒤늦게 이주노가 합류하는 바람에, 서태지와 아이들 1집에는 이주노의 목소리가 없다. 안습 이 사실을 양현석이 20년 만에 자기 입으로 직접 말했다. 사실 양현석은 이주노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형이었기 때문에, 팀내 불화가 생길까 염려되어 받아들일까말까 망설였으나 그래도 같은 댄서 출신인데 통하는데가 있으리라 판단하고 이주노를 팀에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그룹 이름은 리더인 서태지가 지었다고 하며 활동에 있어서는 서태지가 중심에 놓인 그룹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서태지가 리더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었다.정작 둘다 서태지보다 형인데 솔직히 유교의 악습이니 뭐니 하는데 그냥 양현석이랑 서태지는 친구 먹었고, 이 시절보다 지금이 훨씬 더 나이 한 살 차이 가지고 형동생 따지는 게 심하다 나무위키에서 활동 기록도 전부 서태지 문서에 써있을 정도니까 말 다 했다. 아무튼 그만큼 서태지 개인의 비중이 컸던 그룹으로, 안무 구성을 제외한 [6] 활동의 대부분을 서태지 본인이 결성하고 있었다. [7]

다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댄스 뮤직'을 했던 그룹이니만큼 '아이들'의 역할을 일방적으로 평가절하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당시의 서태지와 아이들이 음악성 못지 않게 파격적인 '안무'로도 주목을 받았던 그룹이었음을 상기해 보면... 당장 데뷔 곡인 '난 알아요'만 해도 당시 돌풍을 일으킨 '회오리춤'이 없었다면 그 재미가 반감됐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무튼 장르나 스타일은 다르지만 너바나커트 코베인과 비슷할 정도로 리더로써 서태지의 영향력이나 결정권이 크긴 컸다. 팀의 막내가 리더[8] 독특한 구조를 가진 댄스 그룹이었던지라, 팬들 중에선 그들을 우스갯소리로 '서태지와 어른들(...)'이라고 부른 팬들도 간혹 있었다. [9]

3 영향력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이후, 한국의 대중가요계는 성인가요와 발라드 위주에서 10대 취향의 댄스음악 위주로 재편되었다. 또한, "한국어는 한글 구조상 랩이 불가능하다."라는 당시 전문가들의 선입견을 무너뜨리고, 댄스와 랩을 대중화시켰다. 2집 하여가에서 최초로 국악과 흑인음악(힙합), 헤비메탈을 접목하고, 3집에서는 랩 메탈, 4집에서는 갱스터 랩 등의 앨범을 들고 나올 때마다 새로운 장르를 도입하면서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에 신선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이전에도 댄스 곡을 했던 가수들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나미, 민해경, 소방차, 박남정, 김완선 등이 한국 댄스가수를 비롯한 아이돌의 효시라 볼 수 있겠지만 팝과 흑인음악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의 댄스 뮤직과는 다르게 기존의 성인가요를 빠른 템포로 바꾼 것에 불과한 음악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물론, 흑인 음악을 기반으로 데뷔한 첫 남성 솔로 댄스 가수는 현진영이 있었지만... 활동기간 내내 원톱을 찍었다고 보기는 힘들었으며, 당시의 주류였던 트로트, 포크 음악으로 대표되는 한국 음악계의 주류를 크게 바꿔놓지는 못했다.

오늘날과 같은 본격적인 대한민국 아이돌 그룹의 효시로 여겨지는 것은, 1990년대 초반에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듀스로 보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로, 이 그룹이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났다.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이전의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의 주도권은 30~40대의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었지만, 이 그룹의 충격적인 데뷔는 10대~20대에게 대중음악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되는 획기적인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10] [11] 특히,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한국의 대중가요계는 성인가요와 발라드 위주에서 10대~20대 취향의 댄스 음악 위주로 재편되었으며, 노이즈, 듀스, DJ DOC, 룰라와 같은 댄스 그룹들이 점점 등장하게 된다. [12] 그리고, 격렬한 안무, 각 멤버의 캐릭터 기믹 부여, 립싱크 등 현재 대한민국 아이돌의 기원이 되는 많은 시스템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을 시작으로 한 후세대의 댄스 가수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멤버였던 양현석은 이후 YG 엔터테인먼트를 창립해 현재에도 대중음악계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음악적인 영향 뿐만 아니라, 대중가수로써 '남북분단(발해를 꿈꾸며)'이나 '교육제도의 모순(교실 이데아)', '청소년 가출(Come Back Home)' 같은 사회문제를 공론화함으로써 사회적 파장도 일으켰다. 요즘 사회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루는 가수가 있기는 한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흠좀무. [13] 4집의 타이틀곡이었던 'Come Back Home' 같은 경우, 그 곡을 듣고 가출을 했던 청소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뉴스까지 나왔을 정도. #

"활동 후 잠적, 공백기를 가진 이후 다시 컴백" [14] 이라는 현재의 대다수 아티스트, 아이돌의 활동 패턴의 시초며, 레게머리나 염색, 스쿨 룩 패션(1집), 힙합패션(2집), 치마 패션(3집), 스노우보드 패션(4집) 등을 최초로 도입해 유행시켰으며, 이후 연예계에 일반화 된 전속 코디네이터 제도의 도입이라든가, 뮤직비디오의 질적인 향상, [15] 등등...90년대 이후의 가요계 뿐만 아니라, 사회 다방면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를 발표하던 날, 전국의 초, 중, 고, 대학생들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에 빠졌으며 심지어 3대 방송사 9시 뉴스의 메인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 YS가 은퇴시켰다는 음모론이 나왔다고 카더라

4 정규 앨범 목록

발매연도제목주요곡판매량
1992서태지와 아이들 1집난 알아요/환상 속의 그대180만장
1993서태지와 아이들 2집하여가/너에게220만장
1994서태지와 아이들 3집발해를 꿈꾸며/교실 이데아130만장
1995서태지와 아이들 4집Come Back Home/필승240만장

5 디스코그라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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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코그래피
정규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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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와 아이들 1집
서태지와 아이들 2집
서태지와 아이들 3집
1992
1993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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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와 아이들 4집
Seo Tai Ji
Tai Ji
1995
199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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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th Issue
Atomos
Quiet Night
2004
2009
2014
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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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 & Techno Mix
'93 마지막 축제
'95 다른 하늘이 열리고
1992
1994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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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지의 話 - Live Album 2000/2001
6th album Re-recording and etpfest live
Seotaiji Live Tour Zero 04
2001
2003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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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 2008 Seotaiji Symphony
2009 SEOTAIJI BAND LIVE TOUR [The Möbius]
ETP Festival 08 X 09 SEOTAIJI
2009
2010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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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 2015 SEOTAIJI Band Concert Tour `Quiet Night`
2014
싱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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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유감
Seo Tai Ji : Feel The Soul
Atomos Part Moai
1996
200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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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MUDA [Triangle]
Atomos Part Secret
2008
2009
컴필레이션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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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 Taiji and Boys
Goodbye Best Album
[&] Seotaiji 15th Anniversary
1994
199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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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0 Seotaiji & 20 (20th Anniversary Special Edition)}}}
2012
  • 비정규앨범 - 내일은 늦으리 [16] - 나를 용서해 주오, [17] 김종서 - 상실(랩피쳐링) 수록

서태지와 아이들 정규앨범 1집~4집 모두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순위에 들어가있다. 거의 서태지 혼자 작사 작곡하고 연주랑 노래까지 한 셈인 네 앨범이 고작 1년여 간격으로 4년간 4장이 나왔음에도 모든 앨범이 명반이라고 불린다. 보통 전문적인 싱어송 라이터도 이렇게 짧은 간격으로 작곡을 하다보면 자가복제가 되기 쉬운데 앨범마다 곡마다 장르가 다르며 뛰어난 음악성을 보인다.

6 수상

7 근황

3명 모두 해체 이후, 후배 양성에 힘쓰고있다. 그리고 3명 모두 진짜 아이들과 결혼했다. 아내와의 나이차가 하나같이 후덜덜하다.

서태지서태지컴퍼니를 설립하여 Nell, Pia를 발굴해 냈다. 하지만 서태지컴퍼니 소속 밴드들이 모두 독립하면서 현재에는 서태지 개인으로서의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양현석은 연예기획사업가로 대성하였는데 YG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여 지누션, 거미, 빅뱅, 2NE1 WINNER, iKON등 수많은 뮤지션을 육성했다. 그의 라이벌이라는 사람들이 이수만, 박진영 같은 본좌급 연예기획사업가들이다.

이주노는 96년부터 제작자로 활동하면서 아이돌 댄스 그룹 영턱스클럽을 인기 가도에 올려놓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기획한 임성은, 익스트림 스파이 등은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이후에는 안무가, 무용가로서의 활동을 활발히 하고있다. 그리고, 23살 연하의 여자와 결혼을 함으로써 도둑으로서의 활동도 활발히 이어가고 있다.

공교롭게도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 모두 연하의 신부를 맞이했다. 서태지와 양현석은 신부와 띠동갑차며, 이주노는 위에 거론되었듯이 23살 차이다. 허나 2015년 사기혐의로 피소되었고 2016년에는 성추행 혐의로 피소되아 상황이 좋은 편이 아니다.

8 20주년 기념

2012년으로 결성 20주년이 되어 서태지와 아이들 최고의 곡을 뽑는 투표를 실시했는데, 압도적인 표차로 2집의 타이틀 곡하여가가 선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후계를 이을만한 그룹이 20년내에 나오겠는가?"라는 투표에서는 다수의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만큼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전설의 그룹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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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석이 엄청 더워보인다
기사

리더인 서태지도 20주년을 기념하여 팬들에게 메세지를 남겼다.

안녕하세요. 서태지 입니다.

오늘 이렇게 많은 분들이 데뷔 20주년을 축하해주셔서 너무나 기쁘고 감사합니다.

데뷔시절엔 이렇게 오랫동안 음악을 할 수 있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는데
지금까지도 음악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고 새삼 신기하네요

긴 시간 동안 제 음악에 귀 기울여 주시고 또 계속 음악을 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신 모든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그리고 가슴 벅찬 나의 팬들에게
진심으로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합니다.

오늘은 어쩐지 1집으로 데뷔하던 스무 살의 두근거림으로 마음이 설레이네요

이런 마음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딱딱해진 세상에서 음악을 통해 서로에게 위로가, 또 행복이 되기를 꿈꿔봅니다.

감사합니다~

2012년 3월 23일 태지..
하지만 아쉽게도 20주년 기념 앨범은 나오지 않았지만, iTunes Store에서 #에서 8집까지 있었던 음악 중 몇가지를 추려서 넣어논 음원이 있다. 당연하게도(...) 대한민국에서는 못듣고 외국 아이튠즈 스토어를 통해야 한다. 링크는 호주. 아마도 15주년 때 나왔던 서태지 마스터 콜렉션 때문에 무산된 듯 보인다. 그리고 팬들은 서태지 온라인 기념관#과 브라질 인근에 서태지숲을 조성한다고 한다. # 20주년을 기념하여 이런저런 기획기사와 영상물들이 산재해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꼭 챙겨보길 바란다.
  1. 3명 다 나이 차이가 많이나는 배우자를 맞았다. 특히 이주노는 23살(...) 차이로 넘사벽. 장모와 2살 차이라고 한다.(...) 세 쌍 부부의 나이 차를 총합하면 무려 51살.(...) 평균이 17살.
  2. 2위는 한글과컴퓨터 아래아 한글, 3위는 박카스였다.
  3.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은 20대들 사이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4. 이상벽은 나훈아, 김지미의 결혼 특종도 냈던 연예부 기자였고 연예 평론가로 책도 냈었다. 그의 이미지를 바꾼 아침마당은 이 방송과 거의 비슷한 시기 (1주일도 차이 안 난다) 시작했다. 딴지일보에서는 暖謁兒要라는 한시로 패러디한 적이 있었다. 내용인 즉 어린 아이에게는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5. 런닝맨에 나오는 그 지석진이 맞다.
  6. 당연히 개별 안무야 각자 짜지만 군무의 경우는 서태지가 가장 춤실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군무에서 만큼은 서태지의 의견이 많이 들어갔다고 한다. 양현석과 이주노도 서태지의 수준에 맞춰서 안무를 짜줬다고 한다.
  7. 그래서 해피투게더에서 서태지가 밝힌 바에 따르면 수입 역시 3:3:4로 본인이 4를 가졌고, 예외적으로 음반은 본인이 제일 많이 관여를 했기에 2:2:6으로 6을 가져갔다고 밝혔다. 예외적으로 1집의 '이 밤이 깊어가지만'과 3집의 '널 지우려 해'는 양현석이 작사를 했으며, 락밴드로 변신한 이후에 4집에 컴백홈과 같은 힙합곡이 수록된 것도 양현석의 제안이었다고 한다. 그럼 이주노는 무얼 했느냐? 이주노는 1~3집의 대부분의 안무를 만들었다.
  8. 이와 비슷한 영미권 밴드의 사례로는 흑인음악 레이블 스택스의 세션맨 그룹인 '부커 T 앤 엠지스', 뉴웨이브라고만 하기엔 너무나도 전위적인 밴드 토킹 헤즈가 있다.
  9. 여담으로 이원복은 자신의 만화인 '먼나라 이웃나라 우리나라 편' 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을 패러디한 그룹인 동태지와 어른들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부르는 노래는 난 몰라요!
  10. 이렇게 된 이유에는 약간의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1980년대 들어 영미의 팝음악은 다양한 장르의 탄생과 마이클 잭슨 등 대스타의 등장에 힘입어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국내에서도 이들 영미권 팝스타의 인지도는 특히 10~20대에게 대단해서 동네 레코드샵에서 빌보드 핫 100 복사판을 나눠줄 정도였고 유로댄스 듣보잡 가수의 내한공연에도 만석을 이룰 정도였다. 1980년대의 10대들은 신디 로퍼, 마돈나는 알아도 당대 유명 한국 여가수는 누군지 모르고 마이클 잭슨, 컬처 클럽, 듀란 듀란, 프린스는 알아도 당대 유명 한국 남자가수는 조용필 정도만 알며 브룩 실즈, 소피 마르소 등의 사진을 책받침에 붙이고 다녔지만 한국 영화배우는 모른다. 반면에 국내 음악시장은 제5공화국 시기의 검열 등의 영향으로 새로운 장르의 탄생보다는 기성세대풍의 기존 음악 위주로 만들어졌다. 즉 댄스뮤직 위주의 새로운 장르를 받아들일 토양은 이미 1980년대 초중반부터 무르익었으나 한국 음악계가 거기에 맞춰주지 못한 것. 이런 상황에서 음악성을 겸비한 한국 제작 아이돌그룹의 탄생은 10~20대의 갈망하던 수요에 불을 당긴 셈이다. 땔감은 이미 10여년전부터 충분히 쌓여왔으나 불을 붙인 이가 없었던 것.
  11. 오죽하면 10~20대 취향 컨텐츠 부족은 당시 합법적으로 수입이 전혀 금지되어 일반인들은 도저히 접하기 힘든 J-POP까지 손을 대 쿠와타 케이스케 등 당대 일본 유명 음악 또한 80년대 후반 암암리에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했다. 참고로 그 시절은 반일감정이 지금보다 더 컸을 때이며 인터넷 같은 정보 획등 매체가 없었을 때다. 그런 불리함을 딛고 J-POP이 유행할 정도다. 이토록 컨텐츠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12. 그리고, 듀스는 미국발 흑인음악이었던 힙합이라는 장르를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에서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발전시킨 아이돌이자 뮤지션이었고, 듀스 이후 대한민국의 대중음악계에서 힙합음악이 주류에 편입되기 시작한다. 비록, 동시대에 활약했던 서태지와 아이들이나 룰라, 김건모, 신승훈의 명성에 가려진 면이 있었지만, 트렌드를 앞서 간 김성재의 세련된 힙합 패션스타일과 이현도의 뛰어난 작곡능력은 후배 힙합 가수들에게 끼친 영향력이 매우 크며, 듀스의 해체 이후 힙합계는 DJ DOC, 드렁큰타이거, 가리온, 업타운 등으로 이어진다.
  13.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메이저 가수 중에서 드문것일뿐, 지금도 찾아보면 있긴 하다. 화제가 안될 뿐.(...) 서태지는 메이저 가수 중에서도 특히 최정상일 때 사회적 메시지를 던졌다는 점이 특이한 케이스. 오히려 서태지 밴드 이후가 더 점잖아진 느낌이랄까?
  14. 이전에는 컴백, 휴식기 같은 개념이 없었다. 트로트 같은 경우에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한 번 신곡을 내면 몇 년 동안 쉬지 않고 활동한다. 그래도 1996년경까지만 해도 가수들의 활동 기간은 굉장히 길어서, 가을에나온 노래가 이듬해 여름까지 TOP 10을 폭격하는 경우가 잦았다.
  15.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에는 뮤직비디오를 소속사에서 별도로 촬영하지 않고, 방송국에서 노래에 맞춰서 거리나 세트장에서 임시로 촬영한 여러 영상을 뮤직비디오랍시고 갖다 썼다. 사전에 꼼꼼히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즉석으로 촬영된 비디오에 가깝다.
  16. 92 환경콘서트의 타이틀.
  17. 1집 활동 시절 발매되었는데, 곡의 스타일은 3집 스타일의 랩코어에 더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