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조오례의

1 개요

國朝五禮儀. 성종 5년, 1474년에 신숙주와 정척이 왕의 명으로 편찬한 예법책. 국가의 기본 오례인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에 대한 책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있다.

2 역사

최초로 우리나라의 예법을 정리하도록 명한 사람은 세종으로 허조(許稠)에게 예례를 책으로 편찬할 것을 명했다. 하지만 이는 완성되지 못했고 이에 세조가 다시 강희맹(姜希孟)에게 오례와 도식(圖式)을 편찬하도록 명했으나 역시 방대한 양을 완전히 탈고하지 못하였다. 결국 성종대에 와서야 신숙주와 정척에 의해 완성되었다.

현종예송논쟁의 1년복 지지 근거 가운데 하나. 사대부의 집안에서는 장차남 모두 1년이었기 때문이다.

3 내용

한반도 국가들의 왕실에 대한 기본 예법과 예식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으나 대부분 조선 이전까지는 고대 중국의 황실이나 제후와 관련된 행사를 그대로 받아 따라하는데에만 급급했다. 또한 그나마 자연발생한 독자적인 예법들은 중국의 예법책에만 의존하는 바람에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왕실 예법 문화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러다 정도전이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에서 최초로 우리나라만의 예제(禮制)를 기록했으나 부족한 점이 많았다. 강희맹은 오례의서(五禮儀序)를 편찬하며 두씨통전과 중국의 여러 예제와 함께 우리나라만의 속례(俗禮)를 모으게 된다. 이후 이를 바탕으로 국조오례의가 편찬되며 경국대전과 함께 국가의 기본 예전이 되었다.

길례는 나라의 제사에 대한 기록으로 선농단, 숭령전 등에서의 제사 의식, 기타 기우제 등에 대해 적혀 있으며 왕실 이외의 일반 백성의 시향행사에 대한 내용들도 모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가례는 중국에 대한 가례절차와 의식, 명절날의 의식, 왕실 가족들의 혼례 의식, 왕이 직접 나라의 노인들을 모셔 잔치를 열고 위로하는 양로연에 대한 내용이다.

빈례는 중국, 일본, 유구 등의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는 의식에 대한 내용, 군례는 군사의식에 대한 내용, 흉례는 장례와 국장의식에 대한 내용이다.

4 의의

고조선시대·삼국시대·고려시대까지는 의식에 일정한 준칙이 없었고 의식의 내용을 통일하거나 기록을 남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또한 이전까진 중국의 의례서에만 기대었으나 국조오례의 이후부터 한반도의 국가 의식들은 국가 규정에 따라 정례화되고 체계적으로 변하게 된다.

또한 이전에 그나마 구전되어 전해지던 우리 고유의 왕실의례들은 불교, 유교, 민속적인 것이 혼합된 잡통 의식이었으나 조선조에 와서는 유교를 바탕으로 한 의식, 즉 예교질서(禮敎秩序)가 정립되었다.

또한 단순 왕실의 의식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산천, 기우 등 제의식(祭儀式)과 특정일에 치러지는 명절의식, 각 달마다 치러지는 시향행사 등 민간의식에 대한 내용도 상세히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고대 민간인들의 문화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아볼 수 있다.

또한 의식절차에 대한 내용 뿐만 아니라 의식에 사용된 의복, 재물, 물건, 사용한 제기 등등에 대한 모든 것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경번갑의 경우 국조오례의에 그려진 삽화들을 통해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경번갑 유형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기타 두두미갑, 두정갑 등 수많은 갑옷과 무기에 대한 삽화들도 모두 국조오례의에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