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조선)


조선의 역대 국왕
17대 효종 이호18대 현종 이연19대 숙종 이순
묘호현종(顯宗)
시호
소휴연경돈덕수성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
(昭休衍慶敦德綏成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
장각(莊恪)
본관전주(全州)
능묘숭릉(崇陵)
이연(李棩)
경직(景直)
출생청나라 선양(瀋陽) 봉림대군 관저
사망장소한성 창덕궁 양심합[1]
배우자명성왕후(明聖王后)
아버지조선 효종
어머니인선왕후(仁宣王后)
생몰기간음력1641년 2월 4일 ~ 1674년 8월 18일
양력1641년 3월 14일 ~ 1674년 9월 17일(33년 6개월 3일,1만 2,240일.)
재위기간음력1659년 5월 9일 ~ 1674년 8월 18일
양력1659년 6월 28일 ~ 1674년 9월 17일(15년 2개월 19일, 5,56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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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의 어필.

조선의 역대 왕세자
소현세자 이왕현종 이연 (왕세손)현종 이연
현종 이연 (왕세손)현종 이연숙종 이순
효종 이호 (왕세자)

1 개요

조선의 제18대 임금.

조선 효종의 아들로 효종이 봉림대군이던 시절, 심양에 인질로 가 있을 때 태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임금이기도 하다. 이후 인조가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왕세손이 되었고, 효종이 즉위한 뒤에는 세자로 책봉되었다. 사실 단종과 함께 세손, 세자, 왕 테크를 정상적으로 밟은 얼마 안 되는 인물이다. 인지도가 거의 없어서 단명한 왕으로 착각하기도 하지만, 효종 재위 기간이 10년이고 현종은 15년으로 재위 기간 자체는 결코 짧지 않다.[2]

2 다사다난한 치세 속에

효종이 죽은 뒤 즉위하자마자 예송논쟁이라는 키배에 휘말리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 이 예송논쟁은 국사에 언급될 정도로 당시에는 중요한 정국의 이슈가 되었지만, 다행히 알려진 것만큼 현종과 당시 조정 신료들이 재위 기간 내내 예송에만 매달린 건 아니었다.

조선 민생 역사상 최악의 순간을 넘긴 임금이기도 하다. 전 세계적인 이상저온 현상으로 인해 곡물생산이 뚝 떨어져 조선 역사상 최악의 기근이 일어나고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는 등의 사태가 일어났다. 자세한 건 경신대기근 참조. 경신대기근 이전의 효종시대 ~ 현종 초기 동안 사치풍조가 만연했던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경제대공황보다 몇수 위의 호황 뒤의 대재앙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현종은 나름대로 민생 안정을 위해 노력했고, 현종의 시대에 대동법이 호남지역까지 확대 시행되었는데 호남이 곡창지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민생고 해결에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을 듯 하다.

3 치적

백성들을 장악하기 위하여 오가작통 사목을 제정했고 수리시설과 양전사업에 힘썼으며, 나라 재정을 수습하고 동활자 10만개를 주조하는 등의 치적도 남겼다. 국가적인 관계, 국가적인 문제로 아버지 대에 준비하던 북벌을 중단시키기도 하였으며, 군사적으로는 북벌정책은 계승하지 않았으나 부왕의 군사력 강화정책을 계승하여 화포를 개량하여 대량 생산하는 등 군비증대를 하였고, 온천 행 때마다 군사훈련을 시키기도 하였을 정도로 군사력 증강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큰아버지 소현세자처럼 서양의 문물이나 과학기술 분야에도 관심이 많아서 혼천의의 개량이나 자명종 제작에도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4 아버지아들에게 묻힌 개성

그러나 북벌이라는 대표적 키워드가 있는 아버지 효종과 장희빈인현왕후 사이의 썸씽으로 잘 알려진 아들 숙종에 가려서 상당히 관심도나 존재감이 떨어지는 임금이다. 심지어는 예송논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 때문에 무능하거나 심약한 듣보잡 군주로 기억되곤 한다. 그래서인지 장희빈을 다룬 사극에서도 '사망'하는 장면으로만 등장하거나 그냥 선왕으로 이름만 언급된다. 안습.[3] 그러나 2012년 가을부터 방영된 MBC 사극 마의에서 드디어 현종의 재위 기간을 다룬다. 현종 역을 맡을 배우는 한상진.

그런 흉흉한 배경 속에 귀신 소동이 궁궐에서 일어났는지, 현종이 직접 대화 중 귀신 소동에 대해 언급한 장면이 실록에 나온다. [4]

몸이 병약하여 평생 동안 고생했는데 특히 피부병과 그로 인한 부스럼이 심해 고름이 한 되나 나올 정도의 종기가 얼굴에 붙은 적도 있었을 정도. 그래서인지 재위 기간 내내 온천을 자주 애용한 군주로 가히 조선 역대 국왕 중 최고의 온천 마니아라 해도 과언이 아닌 왕이다.[5]
또 현종은 보통 유약하다는 모습으로 많이 그려지는 경우가 잦은데 이는 아버지 대의 가계를 살펴보면 대충은 짐작할수 있다. 현종의 부왕이었던 효종은 왕비와의 사이에서 3남 9녀를 두었으나 이 중 적1녀였던 숙신공주와 현종을 제외한 나머지 2남은 일찍 죽었고, 실질적으로 장성한 자녀들은 1남 8녀였다. 이 중에서도 현종은 위로 5살, 1살 차이나는 큰누나와 작은누나가 있었고 아래로도 일곱명의 여동생들이 있었는데[6] 이렇게 누나들과 여동생 사이에서 자라났던 현종은 실제로도 온화한 성격이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것만큼 유약하지는 않았다. 현대에도 누나들과 여동생들 많은 집에서 자라난 외아들의 성격이 막 유약하지 않은 것과 비슷한 이치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다만, 현종의 온화한 성격에는 현종의 이러한 가계가 한몫 한건 사실이었다.

존재감과 개성이 그렇게 뚜렷한 임금은 아니지만 예송논쟁을 통해 서인 중심으로 빠진 붕당정국의 균형을 맞추려고 했고, 이에만 매달리지 않아 병자호란 이후 혼란에 빠진 나라를 수습하는 데 노력하는 등 치적을 제법 많이 남겼다. 더군다나 2차예송 당시에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자신의 아버지(=효종)의 위상을 장자(長子)로 확정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서인들의 기세가 대폭 꺾일 정도였고, 김수흥 같은 거물들도 군소리 못하는 강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다만 그러고 나서 1달여 만에 훙서해서 문제였지만...예송논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 때문에 조선 역대 국왕 중 과소평가되고 있는 군주 중 한 명.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어째 뚱뚱한 체형으로 묘사되었다.

5 일화

효종의 부마였던 정재륜이 궁궐을 드나들며 보고 들은 내용을 적은 야사 공사견문록을 보면 현종의 소소한 일화들도 적혀 있다. 비록 정사는 아니지만 저자 정재륜이 효종의 부마였고 그 시대의 사람으로 궁궐을 드나들며 보고 들은 내용을 적은 책이므로 신뢰도는 낮지 않을 것이다. 정재륜(1648~1723)은 효종의 4녀인 숙정공주의 남편으로 아버지는 영의정 정태화이다.[7]

  • 당시 궁궐에는 광해군의 후궁인 허씨를 모셨던 조씨 성의 상궁이 있었는데 그녀는 현종의 할아버지인 인조인조반정으로 집권한 것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던 듯하다. 어쨌든 현종이 탄생한 후 그녀가 현종의 보모가 되었는데, 어느날 어린 현종이 불장난을 하는 것을 보고 "할아버지가 불로서 나라를 얻은 것을 배우려는가"라고 중얼거렸다. '불로서 나라를 얻은 것'은 인조반정 때 궁궐이 불에 탔던 것을 의미한 것으로 이건 그야말로 인조의 집권을 비야냥대는 말이다. 현종은 이를 마음 속에 담아 두었다가 뒷날 왕위에 오른 후 조 상궁을 불러서 그 일을 거론하며 "내가 그거 그냥 부왕께 일러바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대가 나를 양육한 공이 있었기에 차마 중한 벌을 받게 할 수 없어서 참고만 있었다"라고 타이른 후 일단 그녀를 궁에서 내쫓았다. 그러나 현종은 더 이상 벌을 주지 않고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그녀가 먹을 식량을 계속 대 주었다고 한다.
  • 청나라 사신을 서교(西郊)에서 전송하면서 섬돌 위에 나섰는데 청나라 사신이 떠난 후 한 병사가 빨리 걷다가 주위를 살피지 못하고 현종과 부딪혀서 거의 넘어질 뻔 했다. 주위에서 이 병사를 처벌할 것을 건의했으나 현종은 "모르고 한 일인데 어찌 다스릴 것이 있겠는가"라며 곤장 대여섯 대를 치는 것으로 끝냈다고 한다.
  • 세자 시절에는 효종에게 새끼 을 바친 사람이 있어서 이 곰을 궁에서 길렀는데 1년 후 곰이 크게 성장해서 사람 말을 안 듣자 내시가 오래 되면 사람을 해칠지도 모르니 죽일 것을 청해서 효종이 이를 받아들이려 하자 현종은 "곰이 사람을 해치는 동물이라 하지만 아직은 그 해를 받은 이가 없는데 지금 만일 앞날의 일을 염려하여 미리 죽인다면 어진 마음이 아닙니다."라며 곰을 산에 놓아줄 것을 청했다. 효종은 현종을 "네가 임금이 되어서는 시기와 의심 때문에 죽음을 당할 사람은 없겠다. 너의 신하가 되는 사람은 복 많은 사람들일 것이다."이라고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실제로 현종 치세에는 예송논쟁의 대립이 격화되긴 했어도 현종의 중재와 교통 정리 덕에 죽은 사람은 없었다. 가장 큰 형벌을 받은 이가 유배를 간 윤선도.
  • 실록의 현종 행장에 의하면 할아버지 인조가 살아있을 때 표범 가죽을 인조에게 바친 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 표범 가죽이 품질이 좋지 않아서 도로 퇴짜를 놓으려고 했는데, 당시 세손이었던 현종이 "(더 좋은 가죽을 얻기 위해) 표범 1마리를 잡으려면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다칠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인조는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그 표범 가죽을 받았다고 한다.
  • 1살 위인 연년생 누나인 숙명공주가 왕실 사람들과 나눈 서간첩인 <숙명신한첩>을 보면 현종과 나눈 편지도 실려 있다. 이 편지를 보면 현종이 숙명공주에게 정성스럽게 답장을 써 놓고 한쪽 귀퉁이에다가 여동생들인 숙휘공주숙정공주에게 보내는 추신을 적어 두었는데, "(너희들이) 악착스럽고 독하게 편지 한 장 보내라고 해서 이렇게 쓴다"고 적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왕도 일개 오빠몬이었다
여담으로 현종은 외아들로 위로 누나가 둘, 아래로 여동생이 넷 있었다. 7남매 중 유일한 외아들이니 얼마나 귀하게 자랐을지 쉽게 짐작된다.[8] 다른 누이들과 사이가 나쁘진 않은 듯하지만[9] 유독연년생 누나인 숙명공주와 사이가 좋았고 유독 연년생 여동생인 숙휘공주와 사이가 나빴다.

공사견문록에 기록된 일화들을 보면 무인 기질이 강했던 아버지나 괴팍했던 아들과는 달리 온화하고 관대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특히 조 상궁과의 일화는 거의 대인배 인증. 조 상궁의 발언은 인조의 집권 자체를 부정하는 말로도 볼 수 있으니 아무리 그녀가 보모였다고는 해도 역모죄로 처형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특히 정통성 문제 때문에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았던 부왕 효종에게 알려졌다면 바로 목이 달아나고도 남을 상황.

6 개수실록

현종실록은 유일하게 실록이 개수된 케이스다. # 수정실록, 개수실록, 보궐정오의 차이 허적(許積)·권대운(權大運)·민점(閔點) 등의 남인 인사 주도로 숙종의 독촉하에서 1677년(숙종 3년) 완성된 것이 현종 실록이라면, 1680년 경신환국을 계기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1683년에 28권의 《현종개수실록 顯宗改修實錄》을 내었다. 이 개수실록은 부실하게 지어진 현종실록을 대체한다는 의미를 가진 만큼 처음부터 갈아엎었고, 기록도 현종실록보다 훨씬 길다.

7 가족과 후일담

후궁 없이 중전 명성왕후(명성황후 민씨와는 다르다!) 김씨에게만 충실했는데, 금슬 자체는 그럭저럭 좋았다고 하나 그렇게 사이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왕후가 워낙 성깔이 있기로 유명해서 이 때문에 후궁을 들이지 못했다고도 한다. 화를 낼 때는 단호했지만 아버지나 아내, 아들과는 정반대로 현종은 기본적으로는 매우 온화한 성품이었다고. 정종처럼 애처가와 공처가의 일면을 동시에 지녔다고 할 수 있겠다.

명성왕후 김씨와의 사이에서 1남 3녀를 두었는데, 명선공주와 명혜공주는 혼례 직전에 급사[10]했고, 왕세자와 막내 명안공주만이 장성하여 혼인[11]을 하였다. 그나마도 명안공주는 숙종 13년 5월 16일에 20세의 나이로 아들 오원을 낳고 사망.

이때부터 조선 왕조는 점점 후손이 귀해지기 시작했는데, 결국 어렵게 왕통을 이어가다가 헌종 때 단절되었고 철종이 간신히 이었으나, 그마저도 단절되면서 왕위를 이을 가까운 왕손이 없다는, 명종 사후 때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까지 가게 된다.[12] 이것은 후기에 들면서 초기와 달리 자손이 귀해진 것도 있고 역모에 거론된 왕족들이 자꾸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또 이때부터 공주들은 시집가서 아들이든, 이든 일체 자식을 보지 못했다. 자식이 아예 없는 경종순종황제는 일단 빼고 현종, 영조, 정조, 순조의 딸들은 자식을 낳지 못했고 숙종, 헌종, 철종, 고종황제의 딸들은 요절.[13]

8 현종의 능

파일:숭릉.jpg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는 숭릉(崇陵). 명성왕후 김씨와 나란히 묻혔다. 숭릉은 다른 점과 특이한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정자각이 팔작지붕이라는 점이다. 이 능은 비공개 능역이었는데 동구릉 관리소 직원에 의하면 숭릉 남쪽에 연못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서식하는 희귀 조류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오색딱따구리나 해오라기, 딱새, 직박구리 등의 희귀한 조류들이 생태군을 이루고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능의 정자각 등에 파손된 부분이 있어 복원 정비 중이며, 동구릉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있어서 안전상의 이유로 비공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2013년 1월 1일부터 전면 개방. 이제는 찾아가서 볼 수 있다. 동구릉의 능들이 거의 그렇듯이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는 없긴 하지만.

9 드라마 마의의 현종

조선왕조실록의 언급으로 종기를 달고 살다시피 했으며, 종기에서 고름이 한 되 가량 나온 적도 있다고 한다. [14]

중신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지키는 것을 바라며, 청렴하고 심지가 곧은 고주만을 총애해 수의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런 주상전하임에도 불구하고 작중 취급이 별로 좋지 않다. 의관 취재 시험 2차의 임상 환자 역할을 자청하여 윤태주와 백광현에게 진단을 받았는데, 고기 위주의 편식을 즐기는 영 좋지 않은 식단 때문에 몸에 병을 키우고 있었다. 백광현은 현종의 신체 상태가 여지껏 의서에 기록되지 않은 병이라고 진단했으나, 내의원에 의해 지엄하신 왕을 능멸했다는 죄로 혜민서 출교 조치가 내려지게 되었다.

때마침 예고에서 현종이 타이밍 좋게 쓰러지면서 백광현의 진단이 옳았음이 입증되자, 시청자로부터 '현종 잘 쓰려졌다'라는 반응을 얻어냈다. 광현의 치료 이후에는 건강을 되찾은 이후에는, 고주만의 서은서 외과술을 허락하는 등의 면모를 보였으며, 고주만이 쓰러졌을 때 백광현에게 실패하면 목숨을 걸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 고주만이 죽자, 광현을 사형시키려다 장인주와 딜을 한 이명환의 증언[15]으로 형을 감형, 유배를 보내버렸다. 그 뒤 내키지는 않지만 정성조와 이명환이 주장한 혜민서 특별시료청 설립을 허가했다.

3년 뒤에도 광현에 대한 분노는 사라지지 않은 듯하며, 미복차림으로 잠행을 나갔다가 우연히 합석한 오자봉에게서 혜민서의 실상을 듣게 된다. 그리고 광현이 다시 나타나자, 청나라 사신의 설득과 광현의 말을 듣고 그를 용서하였다.
  1. 실록에는 현종의 승하 장소가 창덕궁 '재려(齋廬)'라고 기록되어 있고, 국조보감에는 '여차(廬次)'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재려는 '제사를 지내는 곳', 여차는 '상주가 상중에 지내는 움막'을 의미한다. 이것은 현종이 죽기 2개월 전에 모후 인선왕후가 승하했기 때문이다. 양심합은 창덕궁 대조전 남쪽에 있는 별각으로 현종은 이 건물에서 주로 정무나 경연 등을 보거나 침이나 뜸도 맞곤 했다.
  2. 다만 18세의 나이로 즉위했기 때문에 사망 당시는 33세였는데, 그의 아버지 효종은 41세에 사망했다.
  3. 그러나 사극의 소재거리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큰 격변 없이 정국을 이끌어 갔다는 뜻도 될 수 있다. 예송논쟁을 사극으로 만들기엔 현대인 입장에선 그다지 흥미있는 소재가 아니라는 것도 있다.
  4. 《현종실록》 권12 7년 7월 18일 정유 1번째 기사. [1]
  5. 그 외 온천을 자주 애용한 왕으로는 세종, 세조, 숙종, 영조가 있다. 세종은 안질, 세조는 가려움증, 숙종은 어지러움, 영조는 피부병으로 고생했는데 온양온천이 유명해진 이유가 이 임금들이 모두 여기서 효험을 봤다고 했기 때문. 물론 현종도 온양온천을 자주 이용했다.
  6. 효종의 막내딸과 현종의 나이 차이가 무려 7살이다.
  7. 여담이지만 부마 재혼 금지 법제화의 계기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숙종 대에 숙정공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 죽자 전례를 들어 재혼을 청했는데 거절당하고 도리어 부마 재혼 금지만 법제화되었다.
  8. 그렇다고 효종과 인선왕후가 아들딸 차별이 심하진 않았지만 왕세자이니 정말 귀하게 자랐을 것이다.
  9. 숙안공주숙정공주가 안하무인격에 정치에도 관여해서 사대부의 비난을 받았는데 효종과 현종인 공주들을 보호했다.
  10. 당시 둘 다 부마를 정해 놓고 봉작까지 내린 때였는데, 1673년에 두 공주가 4개월 간격으로 세상을 떴다. 공주들의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명선공주의 경우 사망 1주일 전 실록 기사에 천연두를 앓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편 공주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조정에서는 부마들의 작호를 유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행해졌다. 그 결과 길일을 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사망한 명혜공주의 부마는 작호를 환수하고, 혼례일이 잡힌 명선공주의 경우는 작호를 유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이후 부마 재혼을 금하는 법례 때문에 명선공주의 부마가 평생 모태솔로로 늙을 판이 되자, 현종은 이를 불쌍히 여겨 이마저도 환수하도록 명을 내려 준다.
  11. 다만 현종은 명안공주가 시집가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명안공주는 숙종 6년 2월 18일 전 공조참판 오두인의 아들 오태주와 혼례를 올렸다. 참고로 막내 여동생을 지극히 아꼈던 숙종이 이 날도 승지를 보내 술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12. 명종의 뒤를 이은 선조는 방계였지만 그래도 중종의 서손으로 명종의 조카이지만,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은 철종과 거의 남과 다를 바가 없는 사이였다. 촌수로 18촌. 그의 할아버지 남연군은 사도세자의 서자 은신군의 양자였고, 은신군의 후손이란 이유로 왕위 계승 순서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사실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엄청 촌수가 먼 왕족이었다. 고종-흥선군(1)-남연군(2)-이병원(3)-이진익(4)-안흥군(5)-의원군(6)-복녕군(7)-인평대군(8)-인조(9)-효종(10)-현종(11)-숙종(12)-경종(13)-영조(14)-사도세자(15)-은언군(16)-전계대원군(17)-철종(18)
  13. 덕혜옹주는 요절하진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대가 끊긴거나 다름없어서… 항목 참조
  14. 《현종실록》 권17 10년 11월 17일 병오 1번째 기사. [2]
  15. 외과술을 하다 보면 파상풍이 올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