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의 왕실 도서관 및 기록원
역대 국왕의 시문, 친필, 서화, 유교(遺敎) 등을 관리 및 보관하던 곳. 세조 때에 처음 설치하였으나 곧 폐지하였고, 조선 정조 때 다시 부활하였다. 규장각의 의의는 역대 국왕의 어제나 어필을 보관하는데에도 있었지만 당시 왕권을 위태롭게 하던 척신들의 음모와 횡포를 누르고 신하 중 학식, 경륜이 뛰어났던 사람들을 모아 경사를 토론시키고, 정치의 득실, 백성의 고통을 살피는 등 다방면에 걸친 시폐를 개혁하는 것에 있었다. 관원은 제학(提學) 2인, 직제학(直提學) 2인, 직각(直閣) 1인, 대교(待敎) 1인, 검서관(檢書官) 4인이 있었다.
참고로 이 건물은 왕실 정원인 창덕궁 뒤 후원에 지어졌는데, 건물의 규모나 아름다움에서 정조가 이 기관에 어떠한 기대와 어떠한 무게를 두었는지 알 수 있다. 우선 건물 앞으로 천원지방의 이상향을 담은 부용지라는 연못을 만들어 노았으며 연못으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높은 단 위에 2층 건물을 올려 놓았다. 단을 올라가는 문은 어수문인데 이는 등용문에서 비롯된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낸다. 그러면서도 왕이 자나가는 어수문 양옆에는 고개를 숙여서 들어가야 하는 관료들을 위한 작은 문 두개를 양옆에 설치했는데 이는 고개를 숙여 들어가며 겸손함을 배우라는(...) 의미가 아닐까, 라고 후원 가이드는 설명하곤 한다[1]. 어수문을 지나 높은 단을 올라가면 궁궐에서 보기 드문 2층 누각이 서있는데 1층은 서고로 쓰이는 규장각, 2층은 정책을 논하는 주합루 라고 각각 이름을 지었다. 주합루에서 내려다보는 부용지가 절경으로 유명하지만 정조의 총애를 받는 우수한 관료가 아닌 우리들은 그 광경을 볼 수 없다.(...) 후원을 보존하기 위해서 건물 출입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 건물의 크기에서부터 관료들이 일하는 심미적 환경까지 배려한, 아마도 한반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정부 관청 중 하나일 것이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하여 궁내부에 소속되다가 1895년에 규장원으로 개칭되다가 1897년에 다시 규장각으로 개칭되다가 1910년 국권피탈로 폐지되었다.
KBS1에서 방영되었던 성균관 스캔들의 원작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의 후속작인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의 작중 주요 무대이기도 하다.
규장각에서 기록한 기록물은 내각일력을 참조.
여기서 술판을 벌이면 10월 26일에 죽는 저주가 있다.[2]
2 서울대학교 규장각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 奎章閣韓國學硏究院
정식 명칭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6년 2월 1일자로 서울대 학내기관인 기존의 규장각과 한국문화연구소를 통합하여 설치한 엄연한 연구기관이다. 홈페이지 주소는 [1].
1번 항목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던 주요 고문헌을 보관, 전시하고 있으며, 이외에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행정 문서[3]도 일부 보관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서각[4]과 함께 정부의 한국학에 대한 연구지원이 중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명실상부한 양대 축이며 한국사학도, 특히 조선시대를 전공하는 사학도에게는 그야말로 성전이나 다름없다. 조선시대 관련 논문을 쓴다면 반드시 한 번쯤은 들러서 자료를 수집해야 하는 곳. 참고로 규장각 소장 고서는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 고서와도 완전히 별도 차원에서 관리된다.
무턱대고 간다고 해서 바로 고문헌 원본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규정상 대체본 열람이 우선이기 때문에 마이크로 필름(MF)나 복사본으로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대체본이 없어 원본을 봐야 하는 경우 열람예정일보다 며칠 정도 빨리 예약신청하는 것이 열람에 편리하다. 또한 고문헌 이미지, PDF 등이 홈페이지에서 제공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규장각 홈페이지에서 미리 확인해보기를 권장한다. 게다가 아직도 제대로 정리, 연구되지 않은 문헌이 있을 정도로 그 양이 방대하다.[5]
이 규장각 덕분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는 한국사학계에서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규장각에 재직했거나 재직중인 박사급 연구원들의 실적이 한국사학계 전체의 연구실적으로 증명된다.[6] 타 대학원의 연구자들도 규장각 자료를 활용하기 위하여 직접 서울대까지 발품을 팔거나 관악산에 당도한 걸 환영하오 낯선 이여 적지 않은 돈을 자료복사에 쓰곤 한다. 한편 규장각 소장 고문헌들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서울대학교 안의 모든 자료, 기자재 중 가장 먼저 남쪽으로 이관하도록 하는 대상이라는 설이 있는데, 진위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7]
여담으로 서울대의 학내기관이지만 서울대 학생이라고 해도 이런 곳이 있는 줄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중앙도서관을 기준으로 인문계와 자연계의 생활권역이 많이 다르기도 하고 졸업사진을 찍을 때 아니면 가 볼 일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하지만 위치 상 사회대 학생들은 존재를 모르기가 더 어렵다. 하지만 서울대입구역이나 대학동 방향의 셔틀버스, 서울 버스 5516의 정류장에서 두리번거리다가 보이는 기와지붕 얹은 건물이 규장각이니 체감보다 멀리 있지 않다. 그리고 연구기관임에도 이상하게 초글링 등 10대들이 많이 보일 때가 있는데, 전시공간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서울대 견학을 오는 팀에서 거쳐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니 놀라지 않아도 된다. 대부분에게는 벽에 크게 붙어있는 대동여지도 앞에서 인증샷 찍는 게 큰 의미
3 중국 원나라의 관청 이름
추가 바람- ↑ 다만 겸손함을 배우라는 뜻이라는 근거 사료라든가 유물이라도 제시되지 않는 이상은 진지하게 믿으면 좀 곤란하고(...) 그냥 '의미가 아닐까'. 즉 카더라 통신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안전하다.
- ↑ 피해자(?)는 이토 히로부미와 박정희.
- ↑ 조선총독부가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에 이 문서들을 이관했고, 이 문서들을 서울대학교가 접수했다.
- ↑ 이쪽은 대한제국기에 설치한 황실 도서관을 전신으로 삼는다.
- ↑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따르면 2010년 9월 기준으로 각종 고문헌이 246,313건이다. 타 국가기관으로 자료가 이관되거나 이후 계속 유입되는 자료가 있으므로 수치에는 변동이 있을 수 있다.
- ↑ 규장각은 연구논문을 수록한 3건의 연속간행물(『한국문화』·『규장각』·『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을 발행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규장각을 거친 연구자들이 쓴 논문과 규장각 자료를 주로 활용한 논문이 많이 수록되고 있다.
- ↑ 사실 유사시에 급히 내려보내야 할 필요성이 충분하다. 실제로 장서각에서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조실록 적상산 사고본은 한국전쟁 때 북한에 털렸고, 현재 평양 인민대학습당에서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