귄터 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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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 대전 전투기 에이스 일람
순위
이름국적격추 수주 기종비고
1위
에리히 하르트만독일352대Bf109세계 1위
2위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독일301대Bf109세계 2위
3위
귄터 랄독일275대Bf109전후 서독 공군 총감 부임
4위
오토 키텔독일267대Fw190Fw190 탑 에이스
5위
발터 노보트니독일258대Fw190
6위
빌헬름 바츠독일237대Bf109
7위
에리히 루도르퍼독일222대제일 오래 생존한 슈퍼 에이스
8위
하인츠 베어독일220대
9위
헤르만 그라프독일212대Bf109세계 최초로 적기 200기 격추
10위
하인리히 에를러독일208대
▼ 11~20위


Günther Rall
1918년 3월 10일 ~ 2009년 10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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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공군의 전투기 조종사. 슈퍼 에이스.
군터 랄 / 귄터 랄이라는 두 표기가 공존하고 있는데, 원어 표기상 귄터가 맞다. 아마 국내에선 인터넷에 원어를 옮기는 과정에서 Ü(U 움라우트;변모음)에 있는 점이 누락되어 귄터가 군터로 알려진 듯하다. 또 움라우트 발음이 사실 좀 애매하달까. 귄터가 맞지만, 군터라고 잘못 쓰는 사람들 마음을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미국 영어도 실제로 들어보면 발음이 지랄맞은 경우 수도 없이 많지 않은가.

2 기록

루프트바페 격추수 3위, 세계 격추수 3위
격추수 : 275

3 상세

귄터 랄은 275기의 스코어를 기록한 독일 공군 제 3위의 에이스이면서 부상을 딛고 1년 8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240기를 격추시킨 경이적인 기록의 소유자다. 또한 랄은 아프리카의 별로 불리는 한스 요아힘 마르세이유처럼 디플렉션 슈팅(편차 사격)에 천재적인 감각을 가졌던 파일럿으로 알려져 있다.

귄터 랄은 1918년 3월 1일 바덴주 출생, 1936년 고교 졸업후 육군에 입대했지만, 2년후인 1938년 8월 공군 파일럿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비행훈련이 끝난 1939년 8월 그는 소위의 계급으로 JG 52 제 3 비행대에 배속되게 되는데, 이후 1944년까지 JG 52에 몸 담으면서 JG 52의 영광을 이룩하게 된다.

랄의 첫 격추는 1940년 5월 18일 대 프랑스전에서였지만, 이후 벌어진 영국 본토 공방전에서는 JG 52가 그러했듯이 그 역시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1941년 6월 개시된 소련과의 개전에서부터 그 역시 중위로서 제 8 중대장으로 승격한 그는 그해 11월까지 30기를 격추시키게 된다.

그러나 11월 28일 공중전에서 36기째의 격추를 기록한 직후, 그가 격추한 적기의 공중 폭발로 시계가 가려진 사이 그의 비행기에 적기의 총탄이 박히기 시작했다. 동체의 날개가 크게 파손된 상태에서 그는 가까스로 애기를 몰고 아군 지역으로 귀환, 불시착했으나 이때 기체가 전복되면서 척추뼈를 크게 다치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만다.

그는 가까스로 생명을 건졌으나, 의사는 당연히 앞으로 더 이상 비행기를 탈 수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병원 신세를 지면서도 다시 하늘을 날아야 한다는 집념으로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했다.

그로부터 9개월이 지난 1942년 8월 그는 기적적으로 전선으로 복귀했다. 그가 동부전선으로 복귀한 때에는 이미 독일 공군에는 100기 이상을 격추시킨 슈퍼 에이스들이 즐비했으며, 이에 자극받은 그는 이전보다도 더욱 정력적으로 출격을 계속하여 복귀후 1개월도 채 안돼서 65기까지 스코어를 기록, 기사 철십자장을 수여받았고, 10월 22일에는 대망의 100기 격추를 달성하게 된다.

1943년 들어서서도 그의 격추행진은 계속되어, JG 52 제 3비행대장으로 승격한 직후인 그해 8월 29일에는 헤르만 그라프와 한스 필립에 이어 전군에서 세번째로 200기를 격추시키는 위업을 이룩한다. 부상에서 복귀한 후 약 1년만에 164기를 격추시킨 것이다. 이 공적으로 9월 12일에 전군에서 34번째로 곡엽검 기사 철십자장이 수여되었고, 그해 10월에는 한달동안 무려 40기를 격추, 당시 톱 에이스였던 발터 노보트니와 엎치락 뒷치락하는 격추경쟁을 전개하기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노보트니는 250기 격추후 본국으로 귀환했고, 랄은 1943년 11월 28일 두번째로 250기를 격추한 후 이듬해 4월까지 23기 격추를 보태 독일 최고 에이스의 자리에 올랐다.

1944년 4월 19일, 그는 오랫동안 몸담은 JG 52를 떠나 JG 11의 제 2 비행대장으로 임명되어 서부전선에 참가하게 된다. 동부전선과는 전혀 다른 상대를 맞아 랄은 격추 페이스가 떨어졌고, 2기 격추를 추가한 후에도 여전히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1944년 5월 12일의 출격에서 그의 탑승기 Bf 109 G-5는 미공군의 P-47 전투기에 피탄, 그는 엄지 손가락을 잃는 부상을 당하고 가까스로 낙하산 탈출을 한다. 이 부상으로 그는 디프테리아에 감염되어 또 다시 6개월간의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퇴원 후 그는 JG 300의 사령관으로 부임하긴 했지만, 더 이상의 격추 전과를 올리지 못한채 패전을 맞고 만다. 만약 이 두번의 부상이 없었더라면 에리히 하르트만이나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을 능가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총 스코어는 275기, 총 출격횟수는 621회였다. 그리고 그가 격추당한 것은 총 5 차례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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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후 그는 서독 공군에 남아, 1956년에는 나토에서 F-104 전투기의 도입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고,[1] 서독공군 총감, 나토 국방군 대표까지 역임한 후 중장의 계급으로 퇴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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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람바 랄, 스트라이크 위치스군들라 랄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다들 아직도 정정한 척 예거에 묻혀 잊힌 감이 있는데, 스트라이크 위치스가 애니화 됐을때 아직 살아있었다.[2]

다큐멘터리 등에서 인터뷰한 장면이 남아있는걸 보면 영어도 매우 잘했다. 독일 공군 에이스들과 인터뷰를 보면 보통 독어로 말하고 영어로 보이스 오버해주는 게 보통인데, 랄은 혼자 직접 영어로 이야기하고 발음도 수준급이다.[3]
  1. 이 과정에서 군 상층부는 F-104는 못 믿을 결함기라고 주장하던 에리히 하르트만 대령을 반강제로 퇴역시켜 버렸는데, 실제 F-104는 하르트만의 우려처럼 엄청난 사고율을 기록했다. 당시 F-104G형 개수 책임자였던 귄터 랄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담당한 프로젝트로 인해 절친한 전우가 잘린 상황이라 난감했을듯.
  2. 그러나 정작 본인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는 애니에 안나와서.
  3. 유튜브에서 인터뷰 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