귄터 기욤 사건

1 개요

Die Guillaume-Affäre

1970년대 냉전시기 서독을 뒤흔든 희대의 간첩 사건.

2 내용

1973년 독일 연방헌법수호청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 요원이 정부 내에 스파이로 침입해있다는 사실을 포착한다. 그리고 수사 결과 독일 사회민주당 빌리 브란트 총리의 개인 비서로 일하고 있던 귄터 기욤(Günter Guillaume)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다.

수호청은 내무부 장관과 총리한테 이 사실을 통보하면서, 추가적인 정보수집을 위해서 귄터가 계속 활동하게 놔두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빌리 브란트 총리는 귄터를 해임하지 않고 평소와 같이 대하였으며 같이 노르웨이로 휴가를 떠나는 등 기존의 친분관계를 유지하였다. 1년이 넘는 밀착 감시와 집중 수사 끝에 사법적 증거를 확보한 수호청은 1974년 4월 귄터를 체포하였다.

체포과정에서 귄터는 스스로 동독 국가인민군의 장교라고 신분을 밝혔으나, 나머지 사실에 대해선 전부 묵비권을 행사하였다. 귄터와 함께 스파이 행위를 한 부인 크리스탈 기욤도 역시 체포되었다. 이후 재판에서 귄터 기욤은 징역 13년, 크리스탈 기욤은 징역 8년을 선고받았으나 1981년 동독으로 함께 추방[1]되었다.

수사 결과 브란트의 개인 비서에 불과했던 귄터 기욤은 안보상의 민감한 정보에는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동독으로 유출한 자료 25건 중에 1급 기밀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리의 비서가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엄청난 후폭풍을 야기하였고 다음 선거에 타격이 올 것을 염려한 사민당 중진들의 권고에 따라 빌리 브란트는 기욤 체포 얼마 뒤에 총리에서 사임하고 만다. 후임 총리로는 브란트와 달리 사민당내에서 우파로 여겨지던 헬무트 슈미트가 취임하였다.

빌리 브란트의 사임은 이 사건이 결정적이긴 했지만, 부수적으로 사건 수사 과정에서 귀욤이 브란트에게 섹스 파트너들을 수시로 공급한 정황과 브란트의 과도한 음주행태 등이 밝혀졌다. 정치인에게는 심각한 타격이 될만한 사생활이 불거지면서 다음 선거에서 도저히 빌리 브란트를 내세워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사민당 고위인사들은 브란트를 총리에서 낙마시키기로 결정하고 그에게 브란트에게 사임 압박을 가했다. 동독이 섹스 스캔들 자료를 압박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또한 당시 브란트 본인의 우울증도 영향을 끼치기는 했다. 다만 빌리 브란트 본인은 이 사건이 사임의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라고 훗날 주장하였다. 브란트는 유고작으로 이 사건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여담이지만 소련 KGB는 기욤의 정체를 파악하고는 동독 슈타지쪽에 기욤의 철수를 요구했다고 한다. 이유는 기욤이 간첩인 게 밝혀졌을 시, 소련 및 공산권과의 화해와 협력을 목표로 동방 정책을 추진하던 브란트 정권이 무너지고 대소련 강경정책을 주장하는 우파정권이 들어설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1. 실질적으로는 포로 교환이었다. 당연히 서독에서는 붙잡힌 스파이를 돌려받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