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nd Dauphin Louis
1661년 11월 1일 ~ 1711년 4월 14일 (49세)
1 생애 초반
1661년 11월 1일, 그랑 도팽 루이는 당시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왕이었던 루이 14세와 스페인의 마리 테레즈 사이에 태어난 장남이었다. 그랑 도팽 루이 이외에도 동생들이 태어났으나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했고, 그랑 도팽 루이만이 루이 14세의 후계자가 되었다.
루이 14세는 마리 테레즈 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과도 만나 자녀들을 두었지만, 그들은 서자여서 왕위를 이어 갈 수 없었고, 그저 역사 속에서 서자로 영원히 남을 수밖에 없었다. 어쨋든 루이는 딱히 유능하지는 않았지만, 성실하고 친절한 아이였다. 루이 14세는 절대왕정의 대명사답게 왕으로서의 삶(궁정 업무, 외교, 전쟁 대비 훈련, 사치 등)을 사느라 자녀들에게 무관심했는데, 어린 시절의 그랑 도팽 루이는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2 결혼과 가정
그랑 도팽 루이는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와 결혼했다. 그랑 도팽 루이는 본래 사촌인 마리 루이즈 도를레앙을 사랑했으나, 아버지인 루이 14세의 명에 따라 마리 루이즈는 스페인 카를로스 2세의 왕비가 되었다.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는 가정에 성실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호화스럽고 웅장한 삶을 추구하기보다는 자기만의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여자였다. 그래서 그랑 도팽 루이와 마찰이 생겼다.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는 왕세자비로서의 의무를 싫어했고, 1683년 루이 14세의 왕비 스페인의 마리 테레즈가 세상을 떠나고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가 프랑스 왕실에서 가장 높은 여성이 되자 의무에 대한 스트레스가 더했다. 그래도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는 3명의 아들을 낳아 의무를 다했다. 그리고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는 1690년 4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3 정치사
그랑 도팽 루이가 30대가 되면서 돌연 정치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그가 정치개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아버지 루이 14세의 정치가 부당하다고 주장한 그랑 도팽 루이는 언제부턴가 아버지 루이 14세와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그랑 도팽 루이가 추진하고자 했던 정책은 그저 그랑 도팽 루이의 추진 방안으로만 불렸고, 실제로 실행되지 못했다. 그랑 도팽 루이도 그다지 유능한 편은 아니었기에 신하들과 개혁에 대해서 논의만 했지 이를 실제로 옮기기에는 명분이 없었고, 그랑 도팽 루이를 받들어 줄 지지층도 아버지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흔히 그랑 도팽 루이가 조금만 더 장수했더라면 프랑스 왕실이 폐지되지 않았으리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명백한 착각이다! 설령 루이 14세가 일찍 죽거나 그랑 도팽 루이가 장수했더라도 이미 루이 14세 때 이루어진 크고 작은 전쟁의 폐해와 경제난을 아무리 유능하더라도 해결하지 못했을 것이다. 앞에도 서술했다시피 그랑 도팽 루이는 지지층이 적어서 개혁에 호의적인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4 죽음
1711년, 프랑스에서 갑자기 천연두가 유행했다. 그랑 도팽 루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그랑 도팽 루이는 몇일간 천연두로 끙끙 앓다가 1711년 4월 14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년 후, 1712년 2월 12일, 그랑 도팽의 며느리 사보이의 마리 아델라이드가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고, 6일 후, 1712년 2월 18일, 그랑 도팽의 장남 프티 도팽 루이도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다. 1712년 3월 8일에는 프티 도팽 루이와 마리 아델라이드의 둘째 아들 루이가 홍역으로 죽고, 프티 도팽 루이와 사보이의 마리 아델라이드가 낳은 셋째 아들 루이는 당시 사혈치료를 반대한 가정교사 마담 드 방타두르 부인에 의해 살아남았다.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형을 잃은 가엾은 4살의 루이는 70세가 넘은 증조할아버지 루이 14세가 죽으면 차기 왕으로 즉위해야 한다. 결국 루이는 1715년 9월 1일, 증조할아버지 루이 14세가 죽자 프랑스의 왕 루이 15세가 된다. 한편 그랑 도팽 루이의 차남 펠리페는 카를로스 2세의 사망으로 스페인의 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가서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