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스페인의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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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4세, 디에고 벨라스케스, 1631~1632년경 | |
왕호 | 스페인의 왕 펠리페 4세 (Felipe IV Rey de España) |
생몰년도 | 1605년 4월 8일 ~ 1665년 9월 17일 (60세) |
출생지 | 스페인 바야돌리드 |
사망지 | 스페인 마드리드 |
재위기간 | 1621년 3월 31일 ~ 1665년 9월 17일 |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왕. 이 군주 시대에 포르투갈이 연합에서 이탈했다. 전반적으로 스페인 제국이 서유럽 최강국이자 세계 제국으로 당대의 정치적, 전략적 주도권을 확실하게 쥐고 패권 국가로 군림했던 시절이 끝나고 공세에서 확실한 수세로 몰리는 시점이 이 사람의 치세와 겹치기 때문에 기존은 평가는 좋지 않았다.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이전과 달리 나름 국정에 대한 관심도 있었고, 자국의 위기를 명백하게 느끼고 있었으며, 지금까지 알려졌던 것 처럼 올리바레스가 다 해처먹은 것도 아닌 걸로 밣혀졌기 때문에 어느정도 재평가를 받고 있으나, 일단 스페인 제국 상대로 전 유럽의 개신교도들과 지중해권의 이슬람 세력이 대혈투를 벌이던 리즈시절은 이 시기인 17세기 중엽에 끝났다고 봐야한다.
어려서부터 군왕의 근엄한면만 강조하는 제왕학을 받고 자라서 낮을 심하게 가리고 자신감이 굉장히 부족한 편이었다. 그래서 실질적인 국정을 총괄하는 대재상으로 올리바레스 공작 가스파르 데 구즈만을 임명했다. 펠리페 4세는 올리바레스와 매일 같이 만나며 대내외 정책을 설립했는데, 국왕의 책상까지 올라오는 정보와 권력은 실질적으로 올리바레스를 모두 통과해 오고, 왕 본인 자체가 자신감이 부족하여 큰 결정은 올리바레스의 뜻에 따랐다. 올리바레스는 개인적으로는 명석하고 청렴결백한 인물이었다. 그는 관료의 부정을 척결하면서 풍속조사 위원회를 설치해 사회 개혁에 착수하고 세금을 공평하게 거두는 정책을 썼다. 종교 재판을 폐지하려 했으나 많은 반대가 있어 결국 폐지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내정은 그럭저럭 괜찮게 운영했으나 1621년 네덜란드와의 휴전 협정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전쟁을 재개할 것을 지시함으로써 다시한번 종교와 국가간의 갈등이 골치아프게 엃힌 서유럽 열강 다툼의 문을 열어 재꼈다. 12년 화평이 끝나고 전쟁 초기 스페인군은 브레다를 함락시키고 암스테르담을 위협하는 등 암브로지오 스피놀라의 지휘 아래 전세를 유리하게 끌고 갔으나, 30년 전쟁이 터지고 이에 네덜란드 전쟁이 같이 빨려 들어가며 결국 리슐리외 추기경이 재상으로 있는 프랑스가 개신교 네덜란드편에 참전하면서 또다시 서유럽의 나머지 모든 열강에게 다굴 맞는 상황을 연출하였다. 리슐리외도 처음에는 고전했지만 30년 전쟁 자체가 끝나고도 십년이다 더 1659년까지 스페인과 전쟁을 벌인 끝에 서유럽 중심에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지방 전체를 위협하던 네덜란드 주둔 스페인군을 박살내는데 성공했다. 이 와중에서 역사적으로 카탈로니아에 속했던 로세요 (불어로는 루시용), 체르다냐 (세르다뉴) 등을 빼앗기면서 스페인은 피레네 산맥 이북의 마지막 영토를 상실했다.
1640년에 카탈루냐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올리바레스 공작이 워낙 무리하게 중앙집권화 정책을 추진한 결과였다. 물론 공물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또 연안 지대에 배치되어 있던 기사단이 바르셀로나를 공격해 부왕 산타 콜로마 백작을 참살했다. 1641년 스페인 군이 반란 진압에 나서자 반란 지도자가 카탈루냐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프랑스 왕 루이 13세에게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카탈루냐의 반란은 1652년에 펠리페 4세의 사생아인 후안 호세가 바르셀로나 및 카탈루냐 나머지 지역을 탈환한 후에 피레네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인정함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포르투갈에서는 이미 1628년부터 반란의 조짐이 보였다.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의 왕이 되면서 광범위한 자치권과 정부조직의 유지를 약속했으나 펠리페 3세와 펠리페 4세가 포르투갈을 억압하자 차차 포르투갈 인들은 불만이 쌓여갔다. 나머지는 포르투갈 왕정복고전쟁 참조.
1641년에는 안달루시아에서 메다나시도니아 후작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시칠리아, 나폴리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아라곤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나폴리에서 일어난 반란은 후안 호세가 바로 진압했다.
펠리페 3세의 뒤를 이어 30년전쟁에도 개입했다. 1648년에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졌으나 스페인은 프랑스와 전쟁을 계속했다. 1659년에 평화 조약이 맺어져 룩셈부르크, 플랑드르의 일부를 프랑스에 내주었고 펠리페 4세의 딸이 지참금을 지불하고 프랑스 왕 루이 14세와 결혼하게 되었으며 더 후대에 이르러 이 결혼으로 인해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스페인의 왕위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1665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