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스페인의 역대 국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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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2세, 후안 카레노 데 미란다, 1685년경 | |
왕호 |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2세 (Carlos II Rey de España) |
생몰년도 | 1661년 11월 6일 ~ 1700년 11월 1일 (38세) |
출생지 | 스페인 마드리드 |
사망지 | 스페인 마드리드 |
재위기간 | 1665년 11월 17일 ~ 1700년 11월 1일 |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마지막 왕. 재위 1665~1700.
일명 미치광이 왕(El Hechizado, the Bewitched).
1661년 당시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와 그의 두 번째 왕후 사이에서 4남으로 출생했다.펠리페 4세의 아들들이 전부 사망했기 때문에 카를로스 2세의 출생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에 있어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그가 성장하면서 그 기쁨은 한숨으로 바뀌게 되고 나중에는 이웃 나라에서 왕을 수입해 오는 처지로 내몰리게 된다.
1 왕위 계승 사연과 어린 시절
원래 그는 4남이라서 왕이 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위의 형제들이 전부 사망했기에 왕위 계승자가 된다. 펠리페 4세의 장남이었던 돈 발타시르 카를로스는 카를로스 2세보다 무려 32살이나 나이가 많았다. 펠리페 4세도 이 장남에게 상당한 기대를 가졌으나 16살 때 병에 걸려서 죽게 된다. 차남 펠리페 프로스페로는 4살 때에 사망했고, 3남 토마스 카를로스 역시 1살의 나이에 죽게 되어 살아남은 카를로스 2세가 왕위를 잇게 된 것이다.
카를로스 2세는 몸이 매우 허약하여 6세가 되어서야 겨우 젖을 뗄 수 있었으며 걸음마를 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이로 인해 제대로 된 교육도 받을 수가 없었다. 또 10살 때까지 유모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665년 4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모후 마리아나가 섭정을 하게 된다.
2 근친혼의 결정체
파일:Attachment/카를로스 2세/ 1.jpg
그림의 1st Cousins는 사촌, 2nd Cousins는 육촌을 의미한다. inbred level은 근친도 정도로 높을수록 유전병등의 발현 확률이 높다.
합스부르크 가는 근친혼이 너무 심했는데 카를로스 2세는 그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부모에 이르기 까지 5~6대 걸쳐 계속 사촌,육촌 또는 삼촌과 조카사이의 근친혼이 계속 되었던 것이다. 근친혼이 없는 경우에는 부계로 치면 5대조상이고 모계로치면 6대조상이 족보의 시작점인데 근친혼이 없었더라면 5대 핏줄은 16명에게, 6대는 32명의 핏줄이 섞여야 하는데 그의 5대,혹은 6대 조상은 필리프- 후아나[1]를 비롯해 몇 명 없다...
주걱턱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람들의 대표적인 집안 내력인데, 카를로스 2세의 경우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는 게 문제였다. 침을 자주 흘리고 음식을 씹지 못할 수준이었으니 말 다했다. 그리고 절름발이에 간질까지 앓았으며 겨우 35세에 대머리가 되기까지 했다. 또 혀도 너무 커서 말을 하기에 매우 거북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 상체가 너무 컸다는 것도 문제였다. 결정적으로 백치 수준의 지능의 소유자였다. 위에서 나온 '미치광이 왕'이라는 별명이 정말 농담이 아니었던 셈.
3 스페인의 쇠퇴
이런 경우에도 나라가 돌아가는 건 대개 섭정을 둬서 이들이 대신 통치를 하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2세도 예외는 아니라 모후 마리아나는 10년간 섭정을 했는데, 카를로스의 이복형이자 펠리페 4세의 서자 오스트리아의 후안은 이걸 아니꼽게 봤다. 결국 후안은 마리아나를 축출하고 권력을 잡았다. 그는 카를로스 2세에게 그리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서, 머리만 빗고 나오라고 하는 거 정도만 부탁했고 실질적인 통치는 자기가 했다. 1679년에 후안이 사망하자 다시 마리아나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만 19세가 되는 해인 1680년에 종교재판이 열렸는데 이 때 카를로스 2세는 교회가 종교재판을 하는 것을 묵인하여 120명이 체포되고 그 중 21명이 화형당한 것을 사실상 모른체했다. 스페인 종교 재판이라는 게 세간의 상상과 달리 종교 재판소 설립 초기와 종교 개혁 초기 시절에나 열정적으로 활동했지, 그 시대의 대부분은 대규모의 체포나 탄압을 벌일 능력도, 의지도 없는 기관이었다. 오히려 실질적으로는 당시 교회의 관할이었던 결혼 문제, 즉 상속과 이혼소송(...)을 전담하는 기관이라 평소에는 '아 그런 기관도 있었지' 하는 식으로 스페인 사회의 일상에서나 정계에서나 그리 설치지 않는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국왕의 방관 아래 교회 권력자들의 내분이 결국 종교 재판소의 대대적인 동원을 야기하여 스캔들이 된 것이다. 이후에 귀족들의 압력을 받아 진상조사 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이 위원회가 내린 결론은 무능한 카를로스 2세가 종교재판소의 말에 혹하여 무고한 사람들이 처형되도록 방조하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를로스 2세는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그의 곁에서 실제 통치를 맡는 섭정 및 관료들이 일을 제대로 안 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그래도 지능 등 전반적인 정신 상태가 통치를 아예 못할 정도는 아니었는지 섭정 모후가 물러난 후 카를로스 2세는 드디어 친정을 시작하였으나 당시 스페인은 이전 정부들의 실정과 여러 전쟁 탓에 경제가 침체되고, 기근으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상태였다. 카를로스 2세는 여러 결점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노력하여 직접 정사를 돌보기 시작했다. 이전 국왕들은 정사를 내팽겨치고 총신들에게 나라를 맡겼지만, 이 체제는 그럭저럭 나라가 돌아가긴 해도 심각한 부패로 얼룩졌었다. 이를 혁파하기 위해 카를로스 2세는 총신을 두지 않고 직접 정무를 보기 시작하였으나 고위 관료들과 각 지방의 지지를 얻지 못해 그의 정치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결국 카를로스 2세가 무능하다는 것이 유럽에 알려졌으며 프랑스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또한 카를로스 1세가 구축한 이탈리아의 점령지는 이 시기까지도 유효했으나 카를로스 2세가 자식없이 사망하면서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상실했다. 아무리 봐도 확실한 암군이며, 국력 탈진으로 안 그래도 수세에 몰려가던 스페인 제국의 몰락을 방치한 무능력한 사람이었던게 확실하지만, 이건 도저히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 자기의 탓이기 이전 이따위 개족보를 만들어 놓은 조상들의 잘못이 더 크기에 역사적으로 동정을 차라리 많이 받지 크게 비난하지는 않는 분위기이다. 왕이 일단 심각한 유전병들이 꼬이고 꼬인 지체장애인이었는데 뭘 어쩌라고... 사고로 그지경이 된 것도 아니고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난 거라 동정은 많이 받는다.
4 결혼과 후계
카를로스 2세는 루이 14세의 질녀인 마리 루이즈와 결혼했다. 둘 사이의 금슬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으나 문제는 둘 사이에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후 마리아 안나와의 사이에서도 자식이 전혀 없었음을 고려하면 문제는 누가 봐도 카를로스 2세에게 있었다. 1689년 결국 마리 루이즈가 사망하자, 카를로스 2세는 무척 슬퍼하였다.
두 번째 부인은 팔츠 노이부르크 선제후의 딸인 마리아 안나[2]였다. 그녀는 레오폴트 1세의 처제가 되었다.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도 아무런 자녀가 없었으며 이 아내에게 카를로스 2세는 그야말로 무능한 남편이 권력을 등에 업은 아내에게 당할 수 있는 온갖 수모를 당해야 했다.[3]결국 카를로스 2세는 그 스트레스에 근친상간으로 인한 유전병이 겹쳐 1700년 38살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게 된다.
1690년대 말에 이르러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면서 카를로스 2세에게 후계자를 지명하라는 압력이 강해졌으며 카를로스 2세 자신도 이 점을 의식하여 후계자 지명을 최종 결정한다. 그에게는 자식은 없었지만 친척 중에서 유력한 후계자가 둘 있었다.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와 레오폴트 1세의 차남 카를 대공이다. 카를로스 2세의 조부인 펠리페 3세의 딸 중 한 명은 루이 14세의 모친이고, 다른 한 명은 레오폴트 1세의 모친으로 둘 다 카를로스 2세의 고종사촌이다. 거기에 카를로스 2세는 이 둘의 누이들과 결혼했기 때문에, 저 둘은 카를로스 2세의 매형이 되기도 한다. 다만, 루이 14세의 아내는 카를로스 2세의 이복누이라서 혈연 관계로 보았을 때 필리프가 더 유력한 후계자였다.
본래 카를로스 2세가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던 건 바이에른의 호세 페르난도(요제프 페르디난트)였으나 그는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세상을 떠났으며 이렇게 되자 후보군은 두 명으로 압축되었다. 이에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를 이을 필요성도 자각하여 같은 가문의 카를 대공[4]에게 왕관을 넘겨줄 생각을 하였으나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이 국왕 몰래 비밀협정을 맺고 후계를 멋대로 결정한 것에 분개.[5] 마리아 안나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1700년 10월 2일 앙주 공작 필리프를 차기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였으며 이는 그가 실질적으로 내린 거의 유일한 결정 중 하나였다. 이에 오스트리아가 반발하여 전 유럽이 개입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시작된다.- ↑ 필리프는 신성로마제국 막시밀리안 1세의 장남이고 카스티아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 페르난도 왕(둘 사이도 6촌이다...)의 장녀 후아나와 결혼했지만 일찍 사망한다. 둘 사이의 장남은 카를 5세
- ↑ 펠리페 5세의 후처 이사벨 파르네제의 이모다. 여담이지만 이사벨 파르네제도 이 여자처럼 영 국민들에게 평이 좋지 못했다.
- ↑ 일례로 이 여자는 스페인에 있는 각종 비싼 그림을 훔쳐서 자기 친정에 보낸 적도 있고 이에 카를로스가 반발하자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화를 냈다. 자기 보석이 오를레앙의 마리 루이즈보다 적다는 것을 알고(...) 분노가 더 심해진듯.....이것 덕에 펠리페 5세가 이 인간을 성에 유폐시킨다. 이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승기를 잡은 덕에 풀려날 뻔 하다가 요제프 1세의 후사 없는 죽음으로 카를 6세가 신성로마 황제가 되고 펠리페 5세가 스페인 왕으로 정식 승인받자 프랑스로 쫓겨난다. 그리고 죽기 1년 전인 1739년에 74세로 돌아오게 된다.(당시 펠리페는 56세)
- ↑ 훗날의 신성로마황제 카를 6세
- ↑ 이게 중요한 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가 이제 스페인 합스부르크와는 사실상 괴리되었다는 게 입증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카를로스 2세는 분명 현대 기준으로 보면 한정치산이 필요하지 않나 싶을 정도의 얼간이었으나 이 정도도 모를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