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페 5세

통일 스페인의 역대 국왕
카를로스 2세펠리페 5세루이스 1세펠리페 5세(복위)페르난도 6세
펠리페 5세, 장 랑크, 1723년경
왕호스페인의 왕 펠리페 5세 (Felipe V Rey de España)
생몰년도1683년 12월 19일 ~ 1746년 7월 9일 (62세)
출생지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사망지스페인 마드리드
재위
기간
1차1700년 11월 1일 ~ 1724년 1월 15일
2차1724년 9월 6일 ~ 1746년 7월 9일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초대 왕. 1683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앙주 공작에 임명되었다. 그는 프랑스 왕세자인 그랑 도팽 루이바이에른 선제후의 딸인 마리아 아나 폰 비텔스바흐[1] 사이의 차남으로, 루이 15세의 숙부다.

그는 루이 14세스페인의 국왕 카를로스 2세의 이복 누나였던 마리 테레즈 왕비의 손자였다. 그는 아버지 그랑 도팽 루이로부터 부르봉 왕가의 만족할 줄 모르는 성욕을 물려받았고, 어머니로부터는 비텔스바흐 가문에서 대대로 나타난 우울증을 물려받았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그는 온순함을 장려받아 상당히 좋은 교육을 받았다.

1 스페인의 왕위 계승자가 되다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의 비밀협약에 분노해 17살 난 앙주 공 펠리페(필리프)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다. 왕실 회의에서 펠리페를 스페인 국왕으로 임명한다는 카를로스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후, 스페인 대사는 부름을 받고 새 국왕을 소개받았다. 루이 14세는 앙주 공 펠리페를 소개시키면서 차기 스페인 왕이 될 자라고 말하였다. 대사는 펠리페 앞에 무릎을 꿇고 펠리페 5세가 알아듣지 못하는 스페인어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 전까지 펠리페는 스페인어를 배운 적이 없었고, 이 날에서야 비로소 배우기 시작한 상태였다.

또 다른 유력한 후계자 후보인 오스트리아카를 대공과 그를 지지하는 이들은 펠리페 5세의 할머니가 혼인 계약서에서 자기 후손들의 스페인 왕위 계승을 포기하는 조건을 넣었다고 주장했지만, 프랑스는 스페인 왕위에 대한 포기가 지참금을 근거로 한 것이며 그 지참금을 아직 받은 적이 없다면서 오스트리아의 주장을 반박했다.

참고로 펠리페 5세가 스페인으로 떠날 때, 루이 14세의 동생의 부인인 오를레앙 공작부인은 이렇게 회상했다.

'루이 14세는 손자가 스페인으로 떠날 적에 많이 울었다. 나 또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왕은 손자와 소(Sceaux)까지 동행하였다. 객실에선 눈물과 비탄을 억누를 수 없었다. 왕세자 역시 깊이 감동하였다.'

2 스페인 왕위 계승

그랑 도팽 루이가 자신의 아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벌어진 기나긴 회의 끝에, 펠리페가 스페인 왕위에 오를 것이나 펠리페 5세와 그 후손들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은 영원히 포기할 것이라는 조건으로 동의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해서 1700년, 펠리페의 조부인 루이 14세는 비어있는 스페인 왕위에 어린 펠리페를 앉혔다. 결과적으로 펠리페 5세의 계승을 두고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과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이 벌어졌다.

1703년 안달루시아는 이제 영국군들의 처분에 달린 듯이 보였고, 이 지방이 봉기한 것은 앤 여왕의 종교적 열광 때문이었다. 카탈루냐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카를 대공은 1705년 마드리드에 입성했으나 1707년 펠리페 5세가 아라곤 왕국을 탈환하였다. 펠리페 5세는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 카스티야 사람들을 고무시킨 그 힘 덕분에 힘찬 왕(아니모소)이란 칭호를 얻었다.

171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가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고 뒤이어 카를 대공이 카를 6세로 즉위한 것이 전환점이 되었다. 영국 등의 국가들은 카를 5세의 제국이 부활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되어 펠리페는 스페인 국왕으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스페인을 합병할 수 없고, 이탈리아에 있는 영토를 상실했다.

펠리페 5세의 치세 초기 13년간 스페인 궁정에선 프랑스 사람과 스페인 사람 간에 수많은 내분이 있었다. 이는 프랑스 인들이 펠리페 5세를 보좌해 스페인 국정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걸 스페인 대신들이 아니꼽게 여겼기 때문이다.

3 결혼과 결혼생활

성욕이 대단했던 펠리페 5세는 한 여성에게만 충실하기 힘든 편이었지만, 아울러 자신의 아내에 대한 철저한 양심도 겸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펠리페는 끊임없이, 고해를 받아주는 신부의 사실에서 급하게 말을 몰아 아내의 침실로 달려가곤 했다. 펠리페는 아내 외에 다른 여자와는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마리아 루이자,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이사벨 파르네제 모두 아내 앞에서 꼼짝을 못하는 펠리페의 천성을 이용해 그를 계속 자신 곁에 두었다.

펠리페 5세가 첫 아내인 마리아 루이자 가브리엘라 디 사보이아[2]와 결혼했을 적에, 마리아 루이자는 남편인 그에게 자신과 익숙해지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그가 이틀밤 동안 계속 기다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리아 루이자는 '숨바꼭질'이나 '뻐꾸기 게임'같은 놀이를 하도록 제안하여 남편이 딱딱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기분 전환을 하게 해줬다.

1702년 이탈리아 원정 기간 동안 처음으로 아내와 떨어져 지낸 일은 펠리페의 정신 건강과 신체 건강 모두에 심한 부담을 주었지만, 의지가 있던 펠리페는 정부를 취하는 걸 거부했다.

펠리페는 아내를 달래기 위해서 서둘러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펠리페는 두 사람의 신체 기능이 동시에 이루어지게 할 정도로 낮이나 밤이나 계속 아내를 자기 곁에 두었다.

마리아 루이자는 펠리페 5세에게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리아 루이자에겐 자신이 바라는 건 뭐든지 왕이 하도록 만들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었다. 이 신사는 아내를 굉장히 좋아했고, 왕비는 이런 사랑을 십분 활용했다. 왕비는 자기 방에 바퀴가 달린 작은 침대를 두고 있었는데, 그녀는 왕이 자기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바로 이 침대에서 자게 했다. 왕비를 흡족하게 하면 왕은 왕비의 침대에서 잘 수 있었고, 그건 왕에게 최고의 행복이었다.

펠리페와 마리아 루이자는 루이 14세의 궁정에 있다가 스페인에 시녀장으로 보내진 위르생 공주에게 크게 의지했는데, 위르생 공주는 마리아 루이자와 펠리페가 프랑스의 영향을 받게 했다. 특히 마리아 루이자는 위르생과 매우 친했고 그녀를 자신의 대리 어머니로 생각한 듯하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내내, 펠리페와 마리아 루이자는 위르생의 지지를 받으며 용감하게 단결했다. 마리아 루이자는 정치적으로 기민했고 남편에게 있어 커다란 강점이었다.

하지만, 임신과 전쟁 기간 동안의 긴장, 잠 못 자는 밤들과 쌀쌀한 방은 마리아 루이자에게 버거운 것이었다. 의사들은 죽어가는 왕비를 멀리서 진찰했는데, 이는 예법상 의사가 왕비를 직접 만지는 게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펠리페 5세는 가장 애정이 깊은 남편인 동시에 가장 신중치 못한 남편이었다. 펠리페는 죄를 짓지 않는 한 오랫 동안 경험하지 못할 그 기쁨을 마지막 순간까지 즐기고 싶어했다. 펠리페 5세는 죽어가던 왕비의 침대에서 억지로 떼어내졌다.

성적으로, 정치적으로 지친 마리아 루이자는 1714년 2월, 언니이자 동서인 부르고뉴 공작부인처럼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홀아비가 된 펠리페 5세는 메디나 코엘리 궁전에 틀어박혔다. 펠리페는 울면서 마리아 루이자를 대신할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렸는데, 양심이 정부를 두는 걸 허용하려 할 만큼 그의 건강이 금욕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펠리페의 성적이고 심리적인 기벽은 외교계에서 잘 알려져 있었고 마리아 루이자가 사망하자 마자 유럽의 대사관들은 스페인의 새 왕비를 찾는 일에 착수했다. 일곱 달 후 펠리페는 파르마 공녀인 이사벨 파르네제와 재혼했고 이 거만한 여자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4 두 번째 왕비, 이사벨 파르네제[3]

이사벨은 펠리페를 완전히 독차지했고 그가 다른 사람들을 가까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사벨은 펠리페의 성적인 요구들을 일종의 통제 수단이자 거래 수단으로 이용해 그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사벨의 거부는 펠리페의 분노를 자극했다. 펠리페는 소리 지르고 위협했으며 때로는 이보다 더 심했다. 이사벨은 끝까지 입장을 고수하고, 울고, 간혹 자신을 변호했다. 그렇게 해서 이사벨은 펠리페 5세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사벨 파르네제는 옷을 차려 입는데 걸리는 20분 외에는 펠리페가 눈 앞에서 멀어지지 않게 함으로써 자신의 주도권을 확실히 했다. 펠리페 5세는 30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사벨은 심지어 펠리페가 사냥을 나갈 때도 남자 옷을 입고 동행했으며, 1719년의 군사 원정 때도 함께 했다. 이사벨은 백성들한테는 전혀 인기가 없었지만 남편에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상냥한 마리아 루이자가 매우 사랑받은 것과는 달리, 이사벨은 사랑스럽지 않은 여성이었고 백성들에게 사랑받지 못한 왕비였다. 이사벨이 스페인으로 와서 처음 마드리드에 들어왔을 무렵, 혹자는 자신의 글에서 그녀가 "22살 된 착한 여성으로 상당히 못생기고 시시하며 버터랑 파르마 치즈를 엄청 많이 먹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곧 스페인 백성들은 이사벨이 상냥했던 마리아 루이자 왕비 소생의 왕자들에게 아주 못된 새어머니라고 단언하게 되었다.

이사벨 소생의 아들들은 왕위계승과는 좀 거리가 있었는데, 이는 전 왕비 소생의 아들이 둘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이탈리아에 있던 영토를 전부 잃은 상태였고, 이사벨 파르네제의 목표는 자기 소생의 아이들을 위해 그 땅들을 되찾는 것이었다. 이사벨은 자기 아들들을 위해 작지만 독립되어 있는 나라들을 요구하였고, 오래지 않아 이사벨 왕비는 자신의 장남인 카를로스에게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을, 차남에겐 파르마와 피아첸차 공국을 얻어주었고 삼남은 장차 톨레도 대주교가 될 것이었다. 이사벨은 총신들의 규칙대로 지배했는데 그중 제일은 이탈리아인인 줄리오 알베로니로, 그는 이사벨을 왕에게 추천했었던 사람이다.

5 우을증과 발작, 퇴위와 복위

한편 펠리페 5세는 점점 깊은 우울증에 빠져들었고 여기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최초의 심각한 발작은 1717년에 일어났고, 알베로니는 광기에 가까운 히스테리 증상에 관해 기록하였다. 펠리페는 마치 내부의 사나운 불길이 자신을 삼켜버리는 것 같고 자기 몸의 정중앙에다 태양이 날카로운 광선을 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호소하였다. 펠리페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위로가 될 왕비만을 곁에 두었는데, 왕비라도 만약 그의 일시적인 생각이나, 특히 성적인 요구를 거부하면 쫓겨날 수도 있었다. 오직 고해신부만이 환영받았는데, 이는 펠리페가 용서받지 못할 죄 가운데서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펠리페의 히포코드리아증적인 망상과 '불행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결점에 대해 하늘이 내린 징벌'이란 믿음은 조울병에 따른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1718년 펠리페는 공무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회복되었지만, 갑자기 늙어서는 몸이 오그라들고 등도 구부정해졌다. 1722년 프랑스의 한 귀족은 펠리페를 만나고 이런 글을 남겼다. "그분은 아주 구부정하고 주름이 졌으며 아랫턱이 가슴보다 앞으로 돌출되어 있었다. 발을 똑바로 하고 꽤 빠르게 움직였음에도 무릎은 한 걸음 이상 떨어져 있었다. 연설은 매우 딱딱했으며 말은 아주 느리고 표현은 공허하여 난 상당히 무기력해졌다."

1724년 1월 펠리페 5세는 장남인 아스투리아스 공 루이스에게 양위하겠다는 결심을 발표하여 모든 이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펠리페의 우울증과 낮은 자아존중감, 종교적인 양심의 가책은 자신이 나라를 잘 통치할 수 없다고 믿게 만들었다. 어쩌면 펠리페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나 영세를 준비하기 위해 은둔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양위는 다른 한편에서는 루이 15세가 사망할 경우 프랑스 왕위를 주장할 수 있기 위한 책략으로 여겨졌다.

펠리페가 루이스에게 양위했을 때, 왕세자는 17세였다. 루이스가 아주 착하고 친절한 사람이어서 스페인 백성들은 루이스를 아주 많이 사랑했다. 그러나 루이스는 8월에 천연두로 갑자기 요절했다. 펠리페의 차남 페르난도는 자기 형을 사랑했고 형이 죽자 매우 슬퍼했다. 이사벨 파르네제는 다시 왕위를 차지하도록 펠리페 5세를 설득했고, 그는 다시 왕위에 올랐다. 이후 펠리페 5세가 사망했을 때 차남인 페르난도 6세가 즉위한다.

그후 펠리페 5세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나폴리시칠리아를 재정복하여 자신의 부르봉 가 친척들이 영토를 얻는 걸 도와주었다. 또한, 펠리페의 치세 말에 스페인군은 '젠킨스의 귀 전쟁'에서 영국의 침공으로부터 아메리카 내 영토를 방어하는데 성공했다. 펠리페 5세가 나라를 통치할 동안 스페인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황혼기 동안 겪은 침체에서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다.

6 생활과 죽음

조부인 태양왕 루이 14세 시절처럼 펠리페의 시대는 질서가 잡혀 있었다. 1730년 초부터 펠리페 5세는 궁정에다 다소 황당한 시간표를 강요했고, 이는 그의 치세 내내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왕은 아침 8시 무렵에 잠자리에 들었다가 정오에 일어나 가볍게 식사했다. 1시에는 옷을 차려입고 미사에 갔다가 그 뒤 방문객을 맞았고, 음악회나 연극을 할 시간이 되기 전까지는 창 밖을 보거나, 시계를 갖고 놀거나, 독서를 하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자정이 넘어 보통 2시쯤 되면 펠리페는 대신들을 불러 오전 5시까지 업무를 처리한 후 창문을 닫은 채 저녁 식사를 했다.

펠리페 5세는 주기적으로 조울증에 시달렸다. 펠리페는 1727년 봄 심하게 앓았는데, 가끔은 무기력하고, 가끔은 열정적이고 격해졌으며 의사들에게 난동을 부렸다. 이사벨 왕비가 그의 종교적인 헌신을 꾸짖으려 하자 펠리페 5세는 폭력적으로 반응했다. 그가 소리 지르고 노래 부르고 스스로를 깨무는 사이, 왕비는 몸에 멍이 들었다. 환상에 시달리던 왕은 자신의 양쪽 발 크기가 서로 달라서 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펠리페는 머리카락이나 발톱을 자르거나 면도 하는걸 거부하였다. 종이와 펜은 펠리페가 잡지 못하도록 치워져 있었는데 이는 충동적으로 퇴위할까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1728년 펠리페는 펜과 종이를 쥐었고 카스티야 평의회 의장에게 자신의 퇴위를 선언하는 문서를 보냈으나 이사벨 파르네제가 때맞춰 이를 다시 회수하였다.

한동안 펠리페 5세는 어느 정도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고 8개월만에 처음으로 면도를 했다. 그러나 1732년 8월 무렵, 펠리페는 일어나 식사하려 하지도 않았고 또 다시 외모에 무관심해졌다. 펠리페는 19개월 동안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다. 그는 대신들을 만나거나 문서에 서명하는 것도 거부했다. 1733년 부활절 무렵 정상을 되찾은 듯한 기미가 보였다. 펠리페와 첫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페르난도는 아버지인 펠리페가 면도를 하고 옷(리넨)을 갈아입도록 설득해냈다. 페르난도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이사벨 파르네제는 펠리페를 설득해서 페르난도와 그 아내인 바르바라가 공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외국 외교관들을 접견하는 걸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게 했다. 이사벨은 이제 자신의 수동적인 남편을 완전히 좌지우지하게 되었고, 그 다음해부터 펠리페가 음악이나 우울증을 덜어줄 수 있는 다른 오락에 흥미를 갖도록 하는 동시에 그녀 자신이 알려주고 싶은 정책만 남편이 알도록 했다.

1738년 펠리페 5세의 정신적인 불안정이 재발하였다. 펠리페 5세는 소름 끼칠 정도로 울부짖었고 사람들이 그의 정신나간 짓을 목격하는 걸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이 강구되었다. 펠리페 5세는 1746년 7월 9일, 62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7 기타

펠리페 5세의 작은 할머니인 오를레앙 공작부인은 펠리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루이 14세의 손자인 스페인 왕은 척추가 꽤 굽었고 다른 점에서도 그다지 균형이 잘 잡혀있진 않다. 하지만 그는 형이나 동생보다 키가 크며 체격이 좋고 얼굴도 잘 생겼다. 그의 머리칼은 매우 밝은 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눈은 아주 까만색인 게 좀 특이하다. 얼굴색은 맑고, 붉은 빛이 돌면서 하얗다. 또한 오스트리아 인의 특이한 입술을 지녔다. 목소리는 굵고 낮으며, 말이 매우 느리다. 그는 착하고 얌전한 편이지만, 한 번 그렇다고 생각하면 약간 고집이 세다. 그는 무엇보다 아내를 사랑하고 모든 일을 아내에게 맡기며 절대 간섭하지 않는다. 왕은 매우 경건하며, 불륜을 저지르면 지옥에 떨어질 거라고 믿는다.

신앙심이 없었다면 그는 방탕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그는 자기 아내를 아주 좋아한다. 그는 자신의 장점을 매우 겸손하게 생각한다. 그는 익숙한 사람이 하는 얘기는 뭐든지 현재의 사실로 받아들이고, 절대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약간 우울하고, 스페인에는 그를 즐겁게 할 만한 것이 없다...'
  1. 루이 14세의 고모인 사보이 공비 크리스틴 마리의 외손녀였다
  2. 펠리페 5세의 형이었던 프티 도팽(부르고뉴 공작)의 제수였다. 즉, 펠리페 5세의 형제는 각기 자매들과 겹사돈...
  3. 카를로스 2세의 왕비 마리아 안나의 이종조카다. 둘 다 국민들한테 평이 좋지 않았고 남편을 통제(이모는 분노로, 조카는 성적 욕구로)했다눈 공통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