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23년 그리스와 터키 공화국과의 합의로 총 2백만명 가량의 인구이동이 일어난 사건을 말한다.
그리스가 오스만 투르크로 부터 독립한 후, 고도(?)인 콘스탄티노플과 풍요로운 아나톨리아를 수복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 망해가는 오스만제국을 상대로 스미르나(이즈미르)를 중심으로 작전을 펼쳐 승승장구 하기도 했지만, 널리 알려져 있다 시피 먼치킨에 의해 규합된 터키 공화국군에 의해서 모두 실패하고 만다. 결국에 그리스는 스미르나를 내주고 아나톨리아에서 물러나야 했다.(대신 에게해 섬들은 보전할 수 있었다.)
그리스-터키 전쟁이 1922년에 끝나고, 두 국가는 스위스 로잔에서 협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은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두 국가가 그리스인은 그리스로, 터키인은 터키로 추방하기로 합의 했다는 것이다. 터키 정부는 그리스인들을 자기땅에서 보기가 싫었고, 개발지에 정착시킬 인구가 필요했다. 그리스 정부도 나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2 결과
문제는 인종을 구분하는 기준이었다. 언어도 아니고, 외관도 아니고! 오스만제국 시절만 쳐도 500년 가까이 그리스인과 터키인은 같이 살았는데, 실제로는 만지케르트 이전부터 터키인은 아나톨리아에 들어와서 그리스인과 살았다! 무작정 치고박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동로마 제국은 튀르크인들은 개종시키고 용병으로 쓰기도 했다. 그러니 실제로는 1000년 가까이 좋든 싫던 그리스인과 터키인은 나란히 살았던 것이다. 이렇게 오랜기간 두 민족이 비슷한 영토에 살았는데, 통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 따라서 터키인과 그리스인은 외관으로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1]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수단은 소속 종교 밖에 남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정교회인이라면 그리스인으로, 무슬림이면 터키인으로 판명하기로 했다.
문제는 저런 종교로 구분 짓는게 당장은 간편해 보여도 꼭 현실의 인구, 사회상과 일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 2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상호 통혼과 문화적 교류는 굉장히 깊었고, 따라서 동네는 이오안니나, 테살로니키 같은 그리스쪽에 살며 그리스어를 쓰면서도 종교는 무슬림이고, 반대로 사는 곳은 아나톨리아이고, 언어도 터키어를 쓰지만 종교는 정교회인 경우도 엄청나게 많았는데, 이를 나머지 요소는 전부 다 무시하고 종교 하나만으로 터키인, 그리스인으로 선을 그어 하루아침에 그 동네에서 수 백년간 뿌리 내려 살던 사람들은 '외국인'으로 규정하고 추방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터키에서 150만 명 가량의 "그리스인"이, 그리스에서 50만 명 가량의 "터키인"이 추방되었다. 물론 민족주의의 열풍에 따라 이미 이전부터 정교회인들은 대다수 아나톨리아를 떠나고, 반대로 그리스와 발칸 반도에서는 무슬림들이 터키로 대량으로 이주하고 있었다.
터키에서 추방된 "그리스인"들 중 40만 명 가량은 그리스어를 할 줄 몰랐다... 카라만, 카파도키아 지방에서 주로 거주하였으며, 왜 이들이 터키어를 쓰면서 정교회인 이었는지는 의문에 싸여있다. 이들이 살던 지역에 있는 교회에 가면 전례문을 그리스문자로 썼는데, 그리스어가 아닌 것들이 있다.[2] 이것은 비록 근대 이전에도 그리스어 모어 화자는 정교회를 믿고, 터키어 모어 화자는 이슬람교를 믿는게 일반적이긴 했지만, 꼭 반드시 그렇게 깔끔하게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점으로 설명 된다. 이즈미르, 트라브존 같은 문화적 동화가 상당히 깊었던 지방은 구어로는 터키어를 쓰면서도 막상 이를 표기하는 문자는 그리스어로 쓰는 경우도 흔했고, 코렐리의 만돌린을 쓴 저자인 루이 드 버니어의 소설, 날개 없는 새에서 이런 사회상이 잘 묘사되어 있다. 콘스탄티노플에 거주하던 50만명 가까이의 그리스인들은 협약에 따라 예외로쳐, 당장 추방당하지는 않았다. 다만 1950년대 민관의 조직전인 박해(이스탄불 포그롬)로 인해 급격히 그리스인이 줄어들었고, 현재는 터키내 그리스인은 5000명 가량 밖에 되지 않는다. 당장 '본토'인 그리스 왕국도 난민들을 막 받아줄 만큼 부유한 것도 아니고, 이들이 또 그리스 사회에 갑작스럽게 떨어져도 먹고 살만한 재력이나 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 마치 훗날 알제리에서 쫒겨난 프랑스계 삐에누아처럼 아나톨리아 출신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사회에 잘 융화 되지 못하고 걷돌다가 많은 수가 30년대, 40년대를 걸쳐 그리스 공산당에 투신했고, 결국 그리스 내전의 도화점이 되었다.
그리스에서는 비교적 적은 50만 명이 추방되었다. 그리스를 비롯한 오스만 지배에서 독립한 발칸 반도 국가들은 19세기 말부터 강경하게 무슬림들을 추방하고, 공민권을 박탈하고, 오스만 통치의 흔적을 지우려고 했음에도 막판에 찾아 보니 50만이나 더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 추방된 "터키인"들은 19세기 오스만 제국 위축기의 정책에 따라서 오스만 제국과 후신인 터키 공화국이 학살, 추방한 아르메니아인들과 폰토스 그리스인들이 집중적으로 살던 동부 지방에 재정착시켰다. 오스만 제국과 터키 공화국 입장에서는 저렇게 쫒겨난 사람들을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벌어졌던 동네에 재정착 시키면 다시는 고향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지 않기위해 치열하게 저 동네에 뿌리 박아서 추방한 민족들이 돌아오는걸 막을수 있으리라는 계산에서 내린 결정이다. 씁쓸하지만 이 정책은 나름 효과를 거두어 지금까지도 동부 아나톨리아를 비롯한 이 재정착 터키인들이 뿌리를 내린 곳들은 아르메니아 대학살 인정이나 옛 아르메니아 문화 유산 복원, 아르메니아, 그리스 등과의 관계 회복이나, 쿠르드족과의 관계 개선 등 터키 정부의 유화책을 가장 강경하게 반대하는 지방들이다. 콘스탄티노플내 그리스인을 추방하지 않은 조건으로, 트라키아 지방의 무슬림들은 추방되지 않았다. 사실 이들은 무슬림이지만, 그리스인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고. 그리스 정부가 조직적인 박해를 하지 않아 트라키아 지방의 무슬림 유출은 일어나지 않았다. 현재도 그리스 인구의 1.3%는 무슬림이며, 대부분이 그리스어를 모어로 한다. 이들은 10만 명 가까이 되는 터키계 그리스인과는 구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