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독립전쟁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넘어옴)

1 개요


단일전투로는 역사상 가장 긴 전투인 사카르야 전투(Sakarya Savaşı)

터키어: Kurutuluş Savaşı (해방전쟁)

Türk İstiklâl Harbi(터키 독립 전쟁) 혹은 Millî Mücadele (인민투쟁)이라고도 불린다.

1919년 5월 19일부터 1923년 7월 24일까지 터키 대국민회의군(Türkiye Büyük Millet Meclisi)과 그리스, 프랑스, 영국, 아르메니아를 주축으로 한 연합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제1차 세계대전의 패망 속에서 오스만 제국을 끝내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터키를 구해 오늘날의 터키 공화국을 만든 전쟁.

2 전쟁의 발발원인

1918년 10월 30일, 오스만 제국과 연합국이 무드로스 정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오스만 제국이 통치하던 중동 지역 내 전선들이 소강상태로 들어간다. 연합국은 이 협정을 통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제할 권리와 더불어 오스만 제국 영토 내에서 발생할 소요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국 내의 영토를 점유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결국 같은해 11월 12일, 프랑스군이 이스탄불에 입항해 도시의 점령을 선언했으며 영국군은 터키 동부의 일부 도시를, 프랑스군은 시리아에서부터 올라와 서부 아나톨리아일대의 도시들을, 그리스군이 바다를 건너와 이즈미르와 트라브존일대의 룸(rum)[1]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영역들을 점차 점령해나가기 시작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이후 연합국은 1915년부터 1917년 사이에 비밀리에 체결된 오스만 제국 영토 분할안에 따라 계획을 차곡차곡 실행해 왔으며, 이는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을 통해 굳어진다. 이 조약에 따르면 옛 오스만 제국의 속령 중 터키인들에게 남는건 중앙 아나톨리아 일부뿐으로 나머지는 연합국들이 나눠 먹는, 사실상 해체나 다름없는 잔인한 조약이었다.

세브르 조약으로 결정된 오스만 제국 분할안. 이미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오스만 제국령이었지만 전쟁 중 프랑스와 영국이 점거한 오늘날의 이라크,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은 논의대상에서 빠져 있다.

3 독립군 일어서다

한편 이러한 꼴들을 보다못한 터키 민중들은 사소한 방법으로든 무장봉기로든 점령군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리스군이 이즈미르에 상륙한 1919년 5월 15일, 젊은 기자인 하산 타흐신(Hasan Tahsin)은 점령군의 기수에게 기습적으로 총알을 발사했고, 그리스군의 즉각적인 대응에 따라 즉시 사살되면서 독립전쟁의 첫번째 전사자가 되었다. 이 총알은 곧 이즈미르에 남아있던 전직 병사들과 민간인들을 자극했으며 그날 하루 시내 곳곳에서 무력충돌이 벌어져 3,500여명의 전사자를 내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즉각 터키 전국에 알려졌다. 점령군에 의해 무력화된 이스탄불에서도 점령군에 대항하는 시위대가 조직되어 투쟁에 나섰으며, 오스만 제국의 많은 공무원들도 파수대(Karakol Cemiyeti)라는 이름의 조직을 구성해 점령군으로 하여금 독립운동의 상황이나 행정상태파악등을 방해하거나 숨기는 등의 소극적인 저항과 함께 연합군에 의해 압수된 제국의 병기나 물자들을 몰래 빼돌려서 독립운동단체에 넘기는 등의 활동을 했다.

산발적인 민간인과 해산된 군인들의 저항 끝에 1919년 5월쯔음에는 크게 두개의 저항조직이 생겨나는데, 하나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에르주룸(Erzurum)을 본거지로 하는 캬즘 카라베키르(Kâzım Karabekir)의 군대와 또 하나는 앙카라를 본거지로 하는 알리 푸아트 제베소이(Ali Fuat Cebesoy)의 군대가 그것이었다. 이스탄불에서 사실상 열강의 볼모 신세가 된 술탄 메흐메트 6세는 아직 제국에 충성하는 장군들을 구슬리고자 아직 오스만 제국의 행정력이 남아있는 아나톨리아 내부 요충지의 태수로 임명하게 된다. 이 행동은 메흐메트의 입장에서 독립군이 자신을 옭아매는 열강들을 몰아내는데 유용할 수도 있지만, 이들이 자신에게 총칼을 되돌릴 수도 있으므로 양다리를 걸친 것으로 해석된다.

4 아타튀르크의 등장

한편 갈리폴리 전투의 영웅이자, 1차 세계대전 내내 혁혁한 전과를 세웠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오스만 술탄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VI Mehmet Vahidettin)의 명을 받아 오스만 제국의 남은 군대의 해산을 감찰하는 직책을 수행하고, 독립운동을 무마시키기 위한 임무를 띄고 1919년 5월 16일 이스탄불을 떠나 4일 뒤 흑해연안의 도시 삼순(Samsun)에 도착한다. 터키 역사교과서에는 이날 아타튀르크가 영국국기를 달고 출발한 증기선 반드르마호가 항구를 벗어나자 공해상에서 월성기를 게양하게 했다는 일화를 소개한다.

하지만 삼순에서 캬즘 카라베키르와 알리 푸아트등의 인사들과 대면한 이후 아타튀르크는 반란을 선언한다. 하지만 남부 아나톨리아는 이미 영국해군이 장악하고 있는 상태였고, 이스탄불의 술탄정부는 아타튀르크의 배신을 파악하고는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때린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이들은 보다 안전한 시와스(Sivas)로 이동해 최초의 의회를 연다. 이때가 1919년 9월 4일의 일이다. 이후 보다 많은 독립 군벌들을 규합한 의회는 1920년 4월 23일에 앙카라에서 대국민회의(Büyük Millet Meclisi)로 개칭하면서 오늘날 터키국회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대국민의회에서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선출한다.

5 제군들! 그대들의 첫 목표는 지중해다. 앞으로! [2]

하지만 터키 대국민의회로 명명된 독립군은 사방이 적에 둘러싸인 채 고립되어 있었다. 당장 동부에서 아르메니아가 고토수복을 명분으로 진군하고 있었으며, 남부에서는 프랑스군이 약속받은 땅을 받기 위해 북진하고 있었으며 서부에서는 그리스군과 터키군의 대치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대국민의회의 병력으로는 사방의 적을 상대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우선 가장 세력이 크고, 아나톨리아의 곡창지대를 장악하고 있는 그리스군을 상대로 병력을 집중한 상태였다. 그리고 이들의 빈자리는 결국 민병대가 맡게 되었다.

5.1 안텝 전쟁

터키 남동부의 요충지 가지안텝(Gaziantep)은 아이은탑(Ayıntap) 혹은 안텝(Antep)이라는 이름으로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오늘날 시리아의 알레포(Halep) 도에 속해있었으며, 튀르크, 아랍, 아르메니아, 쿠르드 등 다양한 민족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19세기 말, 가지안텝은 프랑스와 미국의 선교사의 활동과, 도시의 주생산품인 동과 밀, 카페트, 그리고 목화무역으로 유럽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때문에 남동부 아나톨리아에서는 동방의 파리라는 별명도 붙을만큼 드물게 서구식 교육시설과 병원을 갖추고 있었으며 주민들의 근대교육 수준도 높았다. 문제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라는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자 주민들간에 민족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차 세계대전 후, 1918년 12월 17일에 영국군은 안텝에 진입해 대략 1년동안 군정통치를 했다. 하지만 1919년, 영국과 프랑스는 협약을 체결해 시리아와 남동 아나톨리아의 위임통치권을 프랑스에게 넘겼고 같은 해 11월 5일에 프랑스군이 진입했다. 한편 1919년 초부터 도시의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인근의 마라쉬(Maraş, 오늘날의 카흐라만마라쉬), 킬리스의 아르메니아 주민들과 더불어 독립을 꿈꾸기 시작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항목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전쟁시기 이 지역은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의 강제이주지로 설정된 곳이었기 때문에 전쟁중에 이곳으로 이주한 반 오스만 성향이 배가된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갑자기 늘자 원래 안텝에 거주하던 튀르크멘, 아랍, 쿠르드계 주민들과 충돌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프랑스군과 연합해 독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군에 합류해 튀르크 민병대와 대치했던 아르메니아계 민병대의 구호는 "아르메니아가 아니면 무덤을!"(Ya Ermenistan, ya mecaristan!)이었다. 프랑스군은 오늘날 가지안텝 시립 박물관 및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는 베야즈한(Beyazhan)에 사령부를 마련했고, 그 지역은 대체로 부유한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근처에 미국 선교사가 세운 아메리카 병원과 아르메니아인을 위한 여학교가 있었다. 프랑스군을 등에 업어 기세 등등해진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오스만인들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의 행동도 오스만계 주민들의 분노를 샀는데, 결정적으로 이들이 봉기하게 된 계기는 이 베야즈한에 위치한 사령부 근처에서 일어났다.

1920년 1월 21일 금요일 저녁, 당시 14세였던 메흐메트 캬밀(Mehmet Kâmil)은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베야즈한 앞을 걷고 있었다. 그때 근처를 순찰하던 프랑스군은 그들의 길을 막으며 캬밀의 어머니의 히잡차림을 조롱하기 시작했고, 그중 한 군인이 그녀의 히잡을 잡아채 떨어뜨렸다. 그러자 화가 치민 캬밀은 돌을 집어들어 그 군인에게 던져서 맞추었고, 그러자 군인들은 캬밀을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다음날 캬밀의 장례식에는 모스크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만큼 많은 분노한 안텝의 주민들이 참석했고, 이들은 집에 가지고 있던 고물 엽총과 칼을 긁어모아 오스만 군대의 옛 무기고를 털어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 당시 예멘 전선에서 싸운 참전용사 샤힌 베이(Şahin bey)와 마라쉬 출신의 카라 이을란(Kara Yılan)이 이들을 이끌었다.[3] 1920년 4월 1일부터 1921년 2월 9일까지 샤힌베이가 이끄는 300여 민병대는 그보다 10배는 도시내에 주둔한 많은 프랑스군과 프랑스군에 합류한 아르메니아계 민병대를 상대로 농성전을 벌인끝에 이들을 저지하는데 성공했으며, 인근 도시인 카흐라만마라슈와 샨르우르파에서도 민병대들에 힘입어 프랑스군을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남동부지방의 대프랑스 전선은 앙카라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에 터키 대국민의회가 신경써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고, 때문에 이 전선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안텝 전쟁"(Antep Savaşı)이라고 따로 분리하기도 한다. 본 항목에서는 소문단 형식으로 추가했다.

결국 프랑스는 1921년 10월 20일에 앙카라 협약[4]을 체결하면서 제일 먼저 전쟁에서 빠지게 되며, 동부전선의 아르메니아군도 3개 보병사단과 1개 기병여단을 동원해서 동부국경을 침공하나 1920년 9월 24일부터 12월 2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캬즘 카라베키르가 이끄는 독립군 4개사단에 밀려서 오히려 과거 제정러시아에 오스만 제국이 할양한 카르스(Kars), 반(Van), 아르다한(Ardahan)을 다시 터키에 넘겨주게 된다.

1921년에는 이미 서부전선을 제외한 다른 전선들은 소강상태에 들어간 상태였다. 하지만 그리스군은 대국민의회가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상대였으며, 아나톨리아 내부에 거주하는 그리스인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리스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었기 때문[5]에 연합군의 장비까지 지원받아 막강해진 그리스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6 전쟁은 그리스쪽으로 기울고

때문에 대국민의회가 결정한 주된 전략은 게릴라전이었다. 터키 민간인에 의한 테러나 소요사태, 무장봉기는 이미 1919년 전쟁 발발시기부터 계속 되어왔지만, 앙카라에서 들어온 공작원과 교관들에 의해 그리스군 점령지 내의 무장군은 점점 더 격렬하고 과감한 공격을 감행해왔다. 때문에 그리스군은 빠른 시일내에 아나톨리아 중심부로 진격해서 앙카라 정부를 끝장내기로 작정하고 그동안 대치상태였던 형국을 무너트리고 1921년 새해를 기점으로 빠른 속도로 앙카라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한다.

대국민의회군은 이스멧 파샤(İsmet Paşa)가 이끄는 병력 6천으로 아나스타시오스 파풀라스 장군이 이끄는 그리스군 2만여를 이뇌뉘강에서 막아섰으며 비록 대국민의회군이 패하긴 했지만 두차례에 걸친 전투 끝에 그리스군의 진격속도를 늦추는데 성공했다. 이후 터키에서 성씨사용법이 통과되자 이스멧 파샤는 자신이 분전한 전선인 이뇌뉘강의 이름을 따서 자신의 성을 이뇌뉘(İnönü)로 정한다. 이스멧 이뇌뉘는 아타튀르크의 가까운 친구이자 전우였으며 아타튀르크 사망후 터키공화국의 제 2대 대통령이 된다.

대국민의회가 그리스군을 막아서는 동안 후방에서는 터키인들의 집요한 항쟁이 이어졌다. 그리스군의 짐을 운반하는 짐꾼들이 방심한 틈을 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다음에 독립군에 합류한다거나, 길 안내를 자처한 터키인들이 장교들이 방심한 사이에 수류탄을 터트려 장교와 함께 동귀어진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여자들은 공장에서 총알을 만들고, 아이들은 어머니를 도와 물자를 전선으로 날랐다.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터키인들은 끊임없이 항쟁했으며, 결국 이는 독립전쟁을 터키의 승리로 굳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921년 8월에 그리스군은 드디어 앙카라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앙카라에서 불과 200km정도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아피욘-카라히사르 전선(Afyon-Karahisar)이 붕괴되어 그리스군은 사카리야강까지 이르렀으며 이곳에서 8월 23일부터 9월 13일까지 장장 21일에 걸친 전투가 벌어진다. 대국민의회는 필사적으로 이 곳을 지켜내야만 했지만 그리스군의 수가 너무 많았다.

서부전선의 상황도, 사카리야 전투 당시 터키 대국민의회는 그야말로 풍전등화 상태에 몰려있었다.

7 기적!

장장 21일동안 전투는 밤낮없이 벌어졌다. 당시에 해당 방면으로 돌릴 수 있는 군대란 군대는 다 투입했기 때문에 앙카라 수비군도 전원이 이 전투에 투입되었으며, 아타튀르크는 말을 타고 최전선으로 나와서 장병들을 독려했고, 다른 장군들과 함께 직접 총을 들고 싸우는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와같은 노력 끝에 비록 전사자수는 터키군이 더 많았지만 어쨌든 그리스군의 진군을 최종적으로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여기서 다 이겨놓은 전쟁을 왜 그리스군이 멈췄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당시에 그리스군도 전병력을 사카리야에 꼴아박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또한 보급선이 너무나 긴데다가 그나마도 민병대에게 지속적으로 습격받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공세를 계속 할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주류해석이다. 즉 그리스와 터키의 주력군이 대규모 전투를 벌인 끝에 간신히 터키가 승세를 잡은 것이다. 그리고 이 전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동부, 남부전선의 상황이 종결되었기에 대국민회의군은 모든 전력을 서쪽으로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며, 결국 1922년에 이르면 도리어 터키군이 그리스군을 청소하는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된다.

이렇게되자 이스탄불에서 사건을 관망하던 열강들은 다시금 저울질을 시작한다. 대국민회의는 영국의 요청에 따라 이스멧 파샤를 특사로 파견했으며, 스위스의 로잔에서 장장 1년여에 걸친 회의를 거듭한다. 이스멧 파샤는 우리 민족의 완벽한 독립이 아니면 회의 따위 때려치워라.라는 초강경자세로 일관하고 있었으며, 소련은 물자까지 지원해줘가면서 독립군을 돕고 있었다. 대국민회의군은 1922년을 기점으로 터키 전국에서 그리스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1922년 8월 30일 퀴타햐 인근의 둠루프나르에서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터키군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면서 더 이상 열강들도 시간을 끌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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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에서 대기 중인 터키 국민회의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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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직전 아타튀르크(왼쪽 앞)과 이스멧 이뇌뉘의 모습(오른쪽 앞)

8 전쟁은 끝나고

둠루프나르 전투에서 승리한 터키군은 기세를 몰아 그리스군의 아나톨리아 본거지였던 이즈미르까지 점거하기에 이른다. 결국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그리스도 평화에 동의하게 되었고, 결국 1923년 7월 24일 로잔조약이 체결되면서 비로소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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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에 독립기념으로 제작한 아타튀르크와 그의 전우들의 사진이 담긴 포스터

연합군은 이스탄불에서 철수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술탄인 무함마드 6세 바히데틴은 영국 군함에 올라타 몰타로 망명을 떠난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연합군에 이용당하는 술탄정부를 '터키민족의 반역자'로 규정했으며, 때문에 공화국 건국 이후 오스만제국의 남은 왕족들은 죄다 국외추방당하는 신세가 된다. 이후 1923년 10월 29일에 대국민의회는 공화국을 선언하며 오늘날의 터키 공화국을 건국하고 이 전쟁의 가장 큰 공로자이자 총사령관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를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세우게 된다.

한편 가지안텝옆에 위치한 작은 도인 하타이(Hatay, 안타키야 Antakya라고도 부른다.)는 터키인이 다수인 지역임에도 전쟁후 프랑스령 시리아에 자치주 형태로 속해있다가 1938년 9월 7일 하타이국(Hatay Devleti)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1년 후인 1939년 6월 29일에 국민투표를 통하여 터키와 합병해 오늘날의 국경을 갖추게 되었다. 반면 독립된 시리아에서는 하타이 합병을 인정하지 않아 이후 아사드 정권시기 하타이를 공식적으로 포기하기까지 터키와 영토분쟁을 겪게된다...만 해당 항목과는 관련이 없으므로 이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9 전쟁이 남긴 영향

터키 독립전쟁은 아직도 터키 공화국에 큰 영향을 발휘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의 가장 큰 영향은 아타튀르크를 국부의 위치까지 올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가령 터키의 가장 큰 국경일인 국권기념일 겸 어린이날(4월 23일), 승리의 날(8월 30일)과 공화국 건국기념일(10월 29일)은 각각 1920년 4월 23일 터키대국민의회가 개설된 것과 1922년 둠루프나르 전투에서의 승리, 그리고 공화국의 건립을 기념하는 날이며, 무스타파 케말 파샤가 이즈미르를 재탈환한 날인 1922년 9월 9일을 기념하는 행사나 시와스 회의가 열린 9월 4일, 아타튀르크가 삼순에 도착한 날인 5월 19일은 각 도시에서 기념행사가 열리며, 아타튀르크가 사망한 날인 11월 10일은 비록 국경일은 아니지만 터키 전체가 9시부터 그가 사망한 시각인 9시 5분까지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맞춰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묵념하는 시간을 갖는다.

아타튀르크가 독립전쟁시기에 남긴 연설들, 이를테면 오늘날에까지 터키인들이 의무적으로 외우는 '우리의 맹세'(Andımız)나 '오 터키 청년들이여!'(Ey Türk gençler!), 그리고 각종 어록들[6]은 오늘날까지도 터키인들에게 중요한 행동지침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전쟁 이후 아타튀르크가 주창한 조국에서의 평화, 세계에서의 평화는 현대 터키공화국의 주된 국시로 자리잡혀있다. 터키공화국의 국가인 독립행진곡(İstiklâl Marşı)도 절체절명에 몰린 시기에 군대의 사기를 고취시키고자 만들어진 노래다.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적 근대화 개혁이 급진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원인도 이 전쟁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전쟁에 여성들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참여하면서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었으며, 터키의 페미니즘 운동도 전쟁 이후 영향력을 넓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기존의 울레마를 비롯한 이슬람 지도자들이 메흐메트 6세의 퇴위와 오스만 제국의 멸망, 그리고 1924년 칼리파의 지위만 가지고 있던 압듈메지트 2세가 퇴위함과 더불어 영향력을 잃었기 때문에 그 빈자리를 세속주의정부가 장악할 수 있었다. 공화국정부는 터키공화국 종교부(Türkiye Cumhuriyeti Diyanet İşleri Başkanlığı)를 설치하고 주류종교(이슬람 수니파)를 정부에 예속시킴으로써 급진적인 개혁으로 인해 일어날 이슬람 우파의 반발을 권위적으로 억누를 수 있었다. [7] 심지어 터키어 문자를 라틴문자로 개혁하면서 아랍 문자를 사용하지 않게 되고, 그만큼 이슬람의 영향력으로부터 대중들을 유리시키는 결과도 낳았다.

끝으로 아타튀르크가 주창한 케말리즘(Kemalizm)의 6대원칙인 공화주의(Cumhuriyetçilik), 민족주의(Milliyetçilik), 인민주의(Halkçılık), 국가주의(Devletçilik), 세속주의(Laiklik), 혁명주의(İnkılapçılık)를 통해 사회주의적인 계획경제와 민주주의적인 요소를 흡수하면서 당시 일고 있었던 공산주의적 움직임 또한 사전에 차단해 훗날 터키가 소련에 대항해 반공노선을 걷는데에 큰 역할을 했다.

터키에서 군대가 신뢰받는 이유도 이 전쟁에서 찾는 학자들이 있다.

또한 이 전쟁으로 터키 거주 쿠르드족은 날벼락을 맞았다. 셰브르 조약을 맺을 당시 영국은 쿠르드족을 회유하기 위해 영국 점령지 중 일부를 쿠르드족에게 넘겨서 독립을 약속했다. 하지만 터키가 전쟁에 승리하면서 셰브르 조약을 무효화하고 해당 점령지를 터키 영토로 돌려주면서 쿠르드족의 독립국가 건설도 불가능해졌다. 또한 이 때의 경험 때문인지 터키 정부는 이후 쿠르드족에 대해 강경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외 디테일한 상황들에 대해서는 추가바람
  1. 터키국적을 갖고 있는 그리스인을 일컫는 말로, 그리스 국적을 가진 그리스인인 yunan과 구분된다.
  2. Ordular! İlk hedefiniz akdenizdir. İleri! - 아타튀르크가 사령관으로 취임하고 나서 제일 먼저 내린 명령
  3. 때문에 가지안텝 도의 중심을 이루는 두개의 군의 이름은 안텝 전쟁의 첫번째 전사자인 캬밀과, 봉기군을 지도한 샤힌 베이의 이름을 따서 각각 셰히트캬밀(Şehitkâmil), 샤힌베이(Şahinbey)가 되었다.
  4. 시리아를 프랑스에 할양하고 터키 남동부지방의 국경선을 정한 협약으로 아직 하타이 지방을 프랑스령으로 남겨놓았지만 이것도 1939년에 돌려받게된다.
  5. 이로 인하여 오스만인들은 그리스인들은 적이라고 선포하고 나중에 오스만군이 아나톨리아 내부를 탈환하자 미처 달아나지 못한 그리스인들은 마구잡이로 학살당한다. 누레딘 이브라힘이 내린 명령으로 어림잡아도 20만에서 그리스가 주장하기론 90만 가까이 학살당했다.
  6.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항목을 참고할 것.
  7. 오늘날에도 터키의 이슬람은 종교부에 예속되어있으며 각 모스크에 파견되는 이맘이나 뮤에진들은 전부 정부의 임명을 받아 전국에 배치된다. 다른 이슬람 국가에서는 찾기 힘든 터키만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