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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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5 ~ 1970?

북한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한국전쟁 당시 제2군단장으로 참전했으며 1970년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에 반대했다는 명목으로 숙청당했다.

2 생애

2.1 광복이전

1915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했으며 이후 만주에서 김일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 활동을 했다.

1940년 3월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총지휘부 경위부대 정치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소련 하바롭스크로 월경하여 소부대 및 공작 활동을 하였다. 이후 1944년 동북항일연군 교도려 제4영 제7연장으로 임명되며 군사훈련을 지휘하였다.

1945년 7월 말 신동북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2 광복이후

1945년 8월 광복 이후 류창권·리청송·황동하·조명선 등과 함께 목단당분견대를 인솔하고 목단강 지역에 파견되어 경비사령부 부사령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1947년 동북민주연군 연변분구 사령원이 되었으며 1948년 초 북한으로 입북하여 조선인민군 제3사단장이 되었고 1948년 3월 열린 조선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 같은 해 8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그후 1949년 1월 북한 총참모부 작전국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1949년 5월 김웅과 함께 중국공산당의 조선인 부대의 이관을 중국공산당 중앙에 직접 요청하여 인민해방군 제164사단과 제166사단 병사 1만2000여 명을 입북시켜 조선인민군으로 개편하였으며, 다시 1950년 1월 중국에 재차 파견되어 1만4000명의 조선인 중공군을 입북시키는데 성공하는 등 북한군의 초기 설립에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전쟁 발발 직전 제2전선사령부 참모장으로 전쟁을 준비하였으며 전쟁 초기 제2군단장을 맡아 동부공세에 가담하게 된다.

2.3 한국전쟁

2군단장으로 임명받은 김광협에게 김일성이 지시한 작전은 중부-동부전선의 공세에 가담하여 1일만에 춘천, 홍천을 점령후 3일만에 수원을 점령하여 서부전선의 공세를 보조하는 한편 국군을 포위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주었는데 이는 그동안 김광협의 외교적 성과와 이에 따른 김일성의 기대로 보인다. 그렇게 그는 춘천의 6사단을 격파시키기 위한 공세를 가했으나 그는 북한에겐 불행히도, 남한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군사적 역량은 부족했다. 게다가 당시 6사단장은 한국전쟁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는 김종오 대령이 이끌고 있었다. 그는 3개사단 2만의 병력과 압도적인 화력우세에도 불구하고 춘천에서 3일이나 지체하며 보기좋게 깨져버렸고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음에도 국군의 후퇴를 바라만 봐야 했으며 결정적으로 서울에서 3일이라는 시간을 허비했다. 이에 빡친 김일성은 그를 전격 해임해버렸다.

그렇게 무정에게 군단장직을 물려주고 대신 제2군단 참모장으로서 참전하였으며 1951년 김책이 사망하자 그 후임으로 전선사령관에,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2.4 한국전쟁 이후

김광협은 이후 1953년 8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에서 당 중앙상임위원회 위원, 당 규약개정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1956년 4월 열린 조선노동당 제3차대회에서는 상무위원회 위원,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고 1957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군인으로서의 경력은 같은 해 9월부터 1962년 10월까지 제2차 내각의 민족보위상 재직을 마지막으로 마쳤으며, 1958년 2월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고 1961년 9월 열린 조선노동당 제4차 대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고 1964년 6월 조선노동당 부위원장에 선출되는 등 이후 조선노동당의 핵심인물로 활동하였다.

1966년 10월 제2차 노동당 대표자회 기간 중 열린 제4기 14차 전원회의에서 신설된 정치위원회 상무위원, 비서국 비서에 뽑혔고, 같은 해 12월 부수상이 되었다.

2.5 숙청

그러나 출세가도를 달리던 그는 돌연 1970년 김일성 유일사상체계 구축에 반대했다는 명목으로 숙청당했으며 이후 행방은 불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