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북한의 군인, 정치인
Kim Book
Seaweed Book
金策
본명 - 김홍계(金洪啓)
1903.8.14 - 1951.1.31
강건, 최용건, 최현 등과 함께 1930년대 만주빨치산 시절부터 김일성과 함께한 대표적인 심복 중 하나. 그의 이름을 따서 김책시, 김책제철소, 김책역과 김책공업종합대학이 있다.[1]
1.1 개요
만주 출생. 중등학교에 다니던 당시 지하청년단체 활동에 참여하며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일제의 눈에 띄어 몇 번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중국공산당이 조직한 만주 동북항일연군의 무장항일운동에 참여하여 관동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성실하고 입이 무거운 성격이었고, 신중하면서도 온화한 성격으로 중간에서 조정자 역할을 잘해서 당시 속해있던 중국 공산당내에서도 매우 평이 좋아 중국 공산당내에서도 계급도 김일성보다 높았다. 당시 김책은 소좌(소령), 김일성은 대위였다. 하지만 당시 보천보 전투로 유명해진 9살 연하 김일성을 이른바 만주빨치산파(갑산파)의 1인자로 추대하고 평생 충성을 바쳤다. 성격이나 행동이 중국에서 많이 존경받는 주은래 총리와 비슷했다는 평.
해방 직후 북한 요인들에 대한 소련의 평가에서도 실질적인 능력이 가장 우수하다고 인정받은 바 있다[2]. 요지는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상황에 대한 임기응변이 좋으며 동시에 냉정한 분석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 물론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한국전쟁 직전의 당시 한국에 있어서는 김일성, 최용건과 함께 최고의 위험인물이었다.
1.2 정치 군사 활동
미군정 초기 남한에서 박헌영 등 좌익 세력이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처럼, 해방 직후의 소련군 치하 북한에서도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우익 세력도 상당수 존재했다. 하지만 남한에서 지속된 정치적 혼란과 달리 북한은 신속하게 여론을 통일시키고 정부를 세웠는데, 이런 북한의 수립 과정에서 좌익 계열의 여론을 통합하는데 김책의 공이 크다고 한다. 또한 북한 정부 수립 이후에는 초대 민족보위부(국가안전보위부의 전신)장으로서 암약했다. 당시 북한 정계에서 '이름부터가 타고난 '책'략가다.' 이런 말이 있을 정도로 정치 공작에 뛰어났다고 한다. 이후 조선인민군을 창설하는데 공헌했고 부수상 등 요직을 역임하며 김일성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파일:FB IMG 1474744992635.jpg
1949년, 북한의 최대 난관이었던 평원선 개통 후 테이프를 끊는 김책 부수상
한국전쟁에서도 명목상 인민군 총사령관 및 북한 수상을 맡으며 상징으로서 평양에 죽치고 있던 김일성에 비해 김책은 전선사령관으로서 전선 전역에서 실질적인 악명을 떨쳤다. 개전 초기 총참모장 강건과 함께 중서부 전선의 북한군 침공 작전을 계획해 서울을 3일 만에 함락시켰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한 퍼레이드에 직접 참여했다. 이후 충청, 전라 지방을 점령하는데도 성공해 수안보에 북한군 전선사령부를 세우지만, 다부동 전투에서의 큰 피해,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유엔군의 기세에 밀려 조치원을 통해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후퇴했다.
1.3 사망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과 UN군이 평양을 향해 진격할 때, 김책 스스로 평양에 남아서 싸우겠다고 자청하여 전선사령관으로서 남았으며, 1951년 1월 31일[3] 사망하였다. 지뢰에 폭사한 강건과 더불어 김일성의 동지로서 한국전쟁때 사망한 몇 안되는 사람. 이 소식을 들은 김일성은 매우 괴로워했으며 평생동안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그의 사망 원인으로 전사, 일산화탄소(연탄 가스) 중독, 심근경색, 교통사고, 암살 등이 거론되었으며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과로사(아마도 심근경색인듯)로 기록되어 있다. 김일성이 자기 숙소에서 자고 가라고 했는데, 이를 거절하고 집무실로 가서 철야 업무를 하다가 사망했다고. 이것이 북한에서 발표한 공식적인 사망 원인이다. 한국에서는 항공폭격으로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1.4 김책에 대한 김일성의 특별대우
갑산파 최연장자이자 혁명 선배인 최용건에게도 뻣뻣하게 굴던 김일성이 김책에게만은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드러냈다고 한다. 혁명 선배들 중에 유독 김책에게만은 존경을 표했으며, 광복 후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어도 길에서 김책과 마주치면 먼저 차에서 내려서 김책에게 먼저 깍듯이 인사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후일 자신의 평생 심복이었던 김창봉, 김광협[4] 등도 가차없이 숙청했던 자였건만, 김책만은 특별히 대우했다.
일단 그의 사망 직후 김일성이 직접 장례식을 주관했다. 휴전이 성립된 후에는 북한 최고의 영예인 공화국영웅 칭호와 제1급 국기훈장을 수여했으며, 그가 부수상으로 재직하던 당시의 내각집무실 전체를 통째로 옮겨서 평양전승기념사적관에 보관하게 했다고 한다.
몇 년 후 행정구역 개편시 함경북도 성진시를 김책시로, 학성군을 김책군으로 개칭하고[5][6] 북한 최고의 공업대학과 최대의 제철소 이름을 각각 김책공업종합대학, 김책제철소(청진소재)로 지었고, 평양에 주둔한 제4사단을 통칭 '김책 사단'으로 칭하도록 했다. 그리고 김책의 두 아들을 직접 후원하여 만경대혁명학원[7]-김일성종합대학-소련 모스크바대학교 유학-당 간부의 북한 엘리트 코스 테크 트리를 밟게 했다.[8] 이 중 장남 김정태는 국가안전보위부 정찰국 국장이었으나 1.21사태의 실패로 숙청당했다. 하지만 차남 김국태는 요직을 두루 거쳐 김일성이 살아있던 90년대 초반 당 비서를 역임했고 2000년대 김정일을 보좌했으며, 2010년 김정은의 차기 내각 명부에도 이름을 올리며 2013년 12월에 노환으로 죽을 때까지 요직에 있었다. 또한 김국태의 딸 김문경 역시 조선로동당 선전부에서 간부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 김정일이 김국태에게 사석에서 형님으로 존칭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3대를 잇는 최측근 심복이자 로열 패밀리의 일원인 셈이다.
김일성의 사무실에는 수십 년 동안 커다란 금고가 하나 있었는데, 모두들 그 안에는 굉장한 보물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1994년에 김일성이 사망한 후 김정일이 그 금고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딱 하나, 누렇게 변한 옛날의 김책과 자신이 찍은 사진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9] 이와 비슷한 일화로 역시 김일성 사망 당시 주석궁의 집무실 창가에는 그가 항상 쓰던 망원경이 놓여있었다고 한다. 그 창가로 밖을 내다보면 대성산 혁명열사릉[10]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생전의 김일성은 망원경을 가지고 이 곳을 자주 둘러보며 항일 빨치산 시절을 추억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김정일에게 유언 비슷하게 내가 죽으면 동지들과 함께 혁명열사릉에 묻어달라는 말을 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김정일은 아버지의 기대를 야멸차게 배신하고 김일성의 묘를 금수산기념궁전에 건립하여 세습제 정당화 선전에 써먹었다. 지도 거기에 묻혔고 어쨌간에 무소불위의 신성 공산 주체교주 김일성에게 인간적인 미를 느낄 수 있는 몇 안되는 에피소드들이라 할 수 있겠다. 참 병맛나는 갭 모에다. 김르히아이스
하지만 북한에서 '열심히 하면 수령님께서 알아주신다' 운운하는 찬양 프로파간다에 이 이야기를 너무 많이 써먹은 나머지 식상해졌으며, 이상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기에 그저 동화의 일종이나 지나간 옛일정도로 여겨지는 듯하다. 60년 묵은 동화
1.5 여담
한국의 미디어에서는 잘 등장하지 않지만 반공드라마에 등장해도 하나같이 천하의 개쌍놈으로 나온다. 최용건에 비해서는 의외로 저돌적이고 악역전문 배우들이 나오는데... 극우세력이 김일성을 미화한다면서 반발해서 13회만에 조기종영 당한 KBS 대하드라마 여명의 그날[11]에서조차도 김책의 성격은 고스란히 김흥기가 주연한 최용건이 가져가고 그냥 저돌적인 김일성 빠돌이로 묘사되고 있다. 그럼에도 북한 미화로 욕먹었다
야인시대에선 태조 왕건에서 능애역으로 등장했던 전병옥 씨가 김책 역할을 맡았다. 그렇게 비중있는 역할은 아니고, 1컷 등장해서 대사 몇마디 하는게 전부이긴 하다. 다행이 형이 안나와서 벼루에 머리를 맞는 일은 없었다
과거 남로당 출신 전향자들의 경우 김책의 죽음은 김책의 전공을 시샘한 김일성의 암살(...)이라고 말하긴 하는데 이건 그들의 이야기일뿐이고 80년대만 해도 그냥 비행기 폭격에 맞아 전사로 기록되는 경우가 많았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의 며느리 중 한 사람은 러시아인이었는데 북한 당국에 의해 강제이혼당했다. 김책의 아들이 출장을 간 사이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모조리 체포되어 소련으로 추방당했고 가족은 다시는 재회하지 못했다.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에 의해 스탈린주의가 제거되어가는 소련과 북한의 관계가 악화되어가는 것도 한가지 이유였지만 국가스탈린주의가 강화되어가던 북한 내부에서 이 러시아인 아내들이 '못된 물'을 들인다고 북한에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국가스탈린주의 하의 북한 체제를 비판하던 작가 소만일, 시인 김철 등도 러시아인 아내가 있었는데 비슷한 전철을 받아야 했다.
북한 영화에서는 주로 사람좋고 인상좋은 동네 아저씨같은 캐릭터로 나온다. 북한에서 선전하는 대로 "머리 좋고, 인심 좋은 수령님 심복"의 캐릭터를 재현하기 위해 많이 신경을 쓰고있다. 간혹 영화상에서 김일성이 자문을 구하는 장면도 나올 정도다!
2 북한의 행정구역 함경북도 김책시
통일되면 즉시 이름을 갈아치워야 하는 행정구역 No. 4
근데 다른 동네와 달리 김책으로 하도 유명해져서;;
- ↑ 단 김책공대는 김책시가 아니라 평양에 있다.
- ↑ 심지어 소련군이 '무적의 독립투사 김일성 장군'으로 내세우려던 것이 김성주가 아닌 김책이었다는 카더라도 있었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 ↑ 13일, 30일이라는 설도 있다.
- ↑
그런데 이 양반은 숙청당할만 하다. 북한군 제2군단 군단장이었는데 한국전쟁 개전 초기 한국군 제6사단을 제 시간에 못 밀어버리고 오히려 피해만 입은 까닭에 강원도 등지의 동부전선 진격 속도가 현저하게 둔화되어 전선이 고착되었고, 지구전 양상으로 흘러가는 계기가 되었다. 춘천-홍천 전투 참조김광협은 한국전쟁 때의 실책으로 잠시 좌천당하긴 했지만 숙청까지 당하진 않았다. 그가 숙청된 건 1970년대 초반이다. - ↑ 이후 김책군이 김책시에 통합되었다.
- ↑ 북한의 시/군 단위 이상의 행정구역에서 사람 이름을 딴 지명은 김형직군, 김정숙군, 김형권군, 김책시 넷뿐이다. 참고로 김형직은 김일성의 아버지, 김정숙은 김일성의 첫 아내이며, 김형권은 김일성의 숙부다. 김일성 일가가 아닌데도 이 정도의 대우를 받는 인물은 없다. 다만 리 단위에서는 몇몇이 더 있는데, 은덕군 아오지읍을 학송노동자구로 개칭한 것이 그 예. 김학송에서 딴 것이다.
- ↑ 항일빨치산과 한국전쟁 전사자들의 유가족을 위한 교육기관. 인민무력부가 직접 관리하며 현재 북한 최고의 초중고교 학원으로 이 학원 졸업생은 당 초급 간부 임용이나 김일성종합대학을 위시한 중앙대학 입학이 보장된다.
- ↑ 중국을 움직이는게 공산당 초창기 지도자들의 2세,3세로 이루어진 태자당이듯이, 북에는 빨치산과 한국전참전자들의 2세,3세들이 만경대혁명학원을 거쳐서 당-정-군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이들이 현재 북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 ↑ 아마 영화 '시민 케인'를 배껴서 선전용으로 짜집기 한듯. 만화 '떠돌이용병 아레스'에 이와 같은 에피소드가 삽입돼 있다. 작가가 이 얘기를 알았는지는 불명.
- ↑ 항일 빨치산과 한국전쟁 유공자(어디까지나 북한 입장에서)들이 합사된 북한판 국립현충원.
- ↑ 이 드라마에서 전광렬이 김일성으로 나오는데, 훗날 북한을 방문해서 자기가 너무 멋져서 강제종영 당했다고 인터뷰한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