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진

김기진(金基鎭, 1903~1985)

1 개요

한국의 비평가이자, 시인, 소설가이다. 본명보다 필명인 팔봉(八峰)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일본식 이름은 가네무라 야미네(金村八峯)이다. 카프의 이론가 겸 소설가로 초창기 계급문학을 주도하며 맹활약했다.

2 생애와 문학

1903년 충청북도 청원군(현 청주시) 남이면 팔봉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고위 관료이고 대지주 집안이라 유복하게 자라났다. 서울 배재고보에 입학하였고 여기서 카프의 맹우인 박영희를 만나 교유하여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되고, 그에게 계급주의 사상을 이식해 주게 된다. 유학 초기에는 영국, 프랑스 상징주의에 경도되어 심미주의적 작품에 관심을 기울였고, 박영희와 함께 백조 동인을 결성하였다. 1921년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는데 이때부터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에 본격적 관심을 가지면서 계급문학을 예비한 것으로 보인다.

1923년 김기진의 귀국과 함께 백조의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이때부터 <개벽> 지 등에 프롤레타리아 문학 관련 평문을 기재하면서 본격적으로 신경향파 문학의 시대가 시작된다. 1924년 박영희 등과 함께 계급주의 문학단체인 파스큘라(PASKYULA)를 조직하였고, 1925년 염군사와 파스큘라를 합병하여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을 조직하였다.

카프의 이론가로서 김기진은 계급의식의 전달을 위해 기본적인 문학적 형상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꾸준히 견지하였다. 이는 유명한 박영희와의 내용 형식 논쟁과, 조중곤과의 '낙동강' 논쟁, 임화와의 대중화 논쟁 등에서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신경향파 문학에서 방향전환을 거쳐 볼셰비키 문학으로 넘어가면서 카프 문학은 문학 그 자체로서의 가치보다는 정치성과 대중 선동을 위한 도구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작품'이라고도 부르기 어려운 수준의 선동문구의 나열과 생경한 관념이 그대로 노출된 작품들이 창작되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김기진의 문제제기는 비교적 정당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계급 의식이 선명하지 않음, 예술지상주의자, 현실추수주의자 등의 비난을 받으면서 결국 주도권을 잡는 데에 실패하고 만다.

김기진의 계급소설은 객관 현실 묘사보다 이데올로기가 우선하여 관념적, 추상적 성격이 강한 임화가 분류하는 박영희적 경향에 해당한다. 이는 김기진을 비롯한 대다수 카프 작가들의 성장 배경과도 관련이 있고, 청년기의 낭만적 지향성이 현실로 육화되지 못한 채로 일종의 도그마로 극화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931년 카프 1차 검거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었고, 신건설사 사건으로 인해 임화와 함께 1935년 카프 해산계를 제출하면서 계급문학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만다.

이후 김기진은 노골적인 친일 성향의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1944년에는 대동아문학자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는 등 매우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하였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이름이 올라와 있다.

해방 이후 출판업에 종사하였으나 한국전쟁 당시 인쇄공들의 고발로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즉결처분을 받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이후는 반공주의, 친정권 문인으로 노선을 전환하였는데, 한국전쟁 당시 종군작가단으로 참전하였고, 5·16 군사정변 직후 관제 조직인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회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3 작품

  • 붉은 쥐
  • 젊은 이상주의자의 사

4 여담

1930년대에 조선 사회에서 열풍이었던 금광 사업에 일확천금을 노리고 뛰어들었으나 실패하고 만다. 자신이 근무하던 조선일보를 금광 재벌 방응모가 인수하자 자극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농민, 노동자, 지식인을 가리지 않은 광풍과도 같은 금광 열풍은 김유정의 금 따는 콩밭에 잘 나타나 있다.[1]
  1. 김유정도 금광 사업에 투자했다가 전재산을 털어먹었고 말년을 비참하게 보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