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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우
박영희(성우)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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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문학인
박영희(朴英熙, 1901년 12월 20일 ~ 1950년)는 한국의 시인, 소설가, 친일파 문학평론가이다. 호는 회월(懷月), 송은(松隱)이며, 일본식 이름은 '요시무라 고도(芳村香道)'이다.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상실한 것은 예술 자신이었다."
- 카프에서 탈퇴하며 동아일보에서
1901년 12월 20일 서울 태생으로 아명은 '거복(巨福)'이다. 배재고보를 거쳐 동경 세이소쿠(正則)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21년 황석우와 함께 동인지 장미촌을 발행. 1922년에는 <백조>동인이 되어 당시의 대세에 따라 낭만주의 사조(이상화 등으로 유명한 퇴폐적 낭만주의)에 빠져 있었다. 이때까지는 시인이었다.
그리고 1925년, 당시 일본 유학파를 통해서, 그리고 러시아 혁명 이후 건국된 소비에트 연방, 즉 소련을 통해 밀려오는 사회주의 사상의 유행에 따라 박영희와 동료들은 신경향파에 가까운 작품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김기진에게 박영희가 배우고 박영희는 백조 동인들에게 이를 전파하였다. 박영희의 '사냥개'는 이 때 쓰여진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사회주의 문화 단체를 표방하고 있던 염군사(焰群社, 1922년 창단)와 파스큘라[1]의 통합으로 만들어진 카프에 가담하게 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카프는 염군사와 파스큘라가 통합됨과[2] 동시에 출범한 것이 아니다. 염군사의 이념성과 파스큘라의 경향성이 합쳐지는 기간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우선 잡지 문예운동(1926년 2월 창간)을 창간하여 지면을 확보하고 조직을 결성한 후 일년이 지난 1926년 12월, 조선프로예맹 임시 총회를 통해 강령과 규약을 공표해 조직의 실체를 드러낸다. 당시 이기영, 김영팔, 이량, 조명희, 홍기문, 김경태, 임정재, 양명, 이호, 김온, 박용대, 권구현, 이적효, 김기진 , 이상화, 김복진, 최학송, 최승일, 박팔양, 박영희, 김동환, 안석주 등 22명이 회원이었다. 최남선과 이광수 등의 기존 문단의 문인들은 완전히 외면하였으며 사회주의 운동을 표방하고 있었으나 사회주의만이 아닌 아나키스트 계열의 문인과 공산당 운동에 가담하고 있던 문필가들이 서로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1927년 다시 조직을 개편하면서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문단에서 카프의 열풍을 주도하게 된다.
1927년에 박영희의 '철야'와 '지옥순례'라는 글에 대한 김기진의 짧은 평에서부터 그에게 사회주의 문학을 소개화 김기진과 초기 카프의 방향을 설정할 중요한 논쟁을 겪게 된다. 내용-형식논쟁이라고 하는 이 논쟁은 문학에서 형식이 주가 되는가 내용이 주가 되는가 하는 것인데, 쓸모없어 보일 수도 있으나 당시 계급문학을 쓰던 문인들 사이에서는 이것이 중요한 논쟁이었다. 이 논쟁의 결과 다소 형식, 그러니까 문학의 미적형식(작품 구성, 묘사 등 기법)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내용, 그러니까 문학의 주제의식, 여기에서는 계급문학을 통해 계급적 투쟁 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으로 귀결되게 된다. 그래도 문학의 기법도 보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유화적인 의견을 피력했던 김기진은 이 일로 카프에서의 입지가 줄어들게 된다. 그리고 이 논쟁에서 승리한 박영희는 카프의 주도적 인물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 논쟁의 결과 카프가 추구해야 할 방향을 수정한 이 사건을 제1차 방향전환이라고 한다.
1927년 9월 전국대회를 열고, 철저한 계급의식의 체제를 갖춤으로써 혁명적·전투적인 성격과 함께 볼셰비키적인 문학으로 방향 전환을 하게 된다. 이데올로기를 중시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논쟁에서 박영희의 편을 들었던 임화 등이 새로이 카프 내에 새로이 출현하였고 김화산 등의 아나키스트들은 제명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그는 신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게 된다.
박영희는 신간회의 활동이 활성화 됨에 따라 기존의 계급 운동, 즉 인텔리 계층에 국한된 기존의 계급문학운동에 반성하고 실천적 노력이 부족했음을 자인하게 된다. 즉 대중적 조직과 기반 조성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이념 논쟁을 거듭했다는 비판을 스스로 내렸던 셈이다. 이를 확인한 박영희는 '목적의식론'을 주창하며 계급의식의 추종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실천적 구체성을 획득해야 함을 강조한다(박영희 <문예운동의 방향전환>, 1927년 4월, <조선지광> 65쪽). 그리고 이것은 '예술운동의 영역'과 '대중적 정치 투쟁'을 별개의 것으로 구분한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의식론'이 제기되자 카프 내부에서는 심각한 갈등이 야기되었다. 1927년 이후 카프는 경성 지부(박영희 등)와 동경 지부(이북만, 임화 및 제3전선파)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났다. 이의 대부분은 계급문학운동의 방향 전환과 그 실천방향에 대한 것. 요점은 '계급문학운동이 대중적 정치 투쟁의 전면에 나설 것인가 말 것인가'하는 것이었다. 박영희와 경성지부는 의식 투쟁으로 그 한계를 정해둔 것과는 반대로 이북만 및 동경지부에서는 정치적 진출과 대중 투쟁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카프는 질적으로는 성장하지 못하였으나 양적으로는 성장해서 전국에 지부를 결성하고 조직을 확대하게 된다.
그리고 1928년 2월과 7월에 공산당 검거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각각 3차, 4차 공산당 사건이라 불리는데 이 두 차례의 검거 사건으로 모든 사회 운동은 위축되고 만다. 심지어 민족 단일당이라고 불리우던 신간회조차도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던 공산당원들의 검거로 활력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동년 1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국에서는 조선공산당의 재조직에 대한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나중에 이것을 12월 테제라고 한다.
그리고 이 12월 테제에 카프의 동경 지부가 반응하면서 박영희 등이 결정하고 있던 신간회 노선 지지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다. 공산당이 힘을 잃어 민족 개량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신간회를 지지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들은 1929년 5월 독자적으로 무산자사(無産者社)라는 출판사를 설립하고 정치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29년 11월에 카프 동경 지부 해체를 정식으로 발표하게 된다. 이들이 외치는 것은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론이었다.
그리고 박영희는 이때부터 카프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무리 봐도 제 맘대로 안되니까 삐진 것으로 보인다.
카프도 박영희의 손에서 떠나 무산자사를 세운 기존 동경지부의 주장대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먼저 신간회가 1931년에 해체되었고 평양 등에서 파업을 선동하여 노동 계급의 조직과 투쟁 역량을 확대시킨다. 그리고 공산당 재건 운동의 기반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상황을 일본 경찰이 주목하기 시작한다.
일본 경찰은 일단은 합법적이었던 신간회의 해체를 카프가 주도하였고 이들의 행동의 배후에는 공산당 재건이라는 목적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카프 제1차 검거 사건으로 활동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연루된 것은 35명이고 총 17명이 복역하게 되었는데 박영희도 여기에 속하였다. 이 사건으로 조선공산당 재건은 실패로 돌아갔고 카프의 계급문학운동이 정치적 진출을 하는 것도 무산되었다. 그리고 총독부에서는 이 일을 계기로 조선 내의 모든 사상운동을 철저히 금지하게 된다. 박영희는 구속수감 후 3개월만에 풀려나오게 된다.
그리고 1932년 5월, 조직을 장악하고 있던 동경 소장파들은 카프 제1차 검거 사건 이후 대중적 지지를 잃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고 검거 사건으로 타격을 입은 조직을 재건한다는 명목으로 조직을 개편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리고 중앙 위원회를 담당할 10인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서 박영희와 김기진이 제외된다. 경성 본부파의 주도권 상실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 대해 동경 소장파들이 승리했다 보기에도 애매한 것이 소장파는 조직에 대한 장악력을 완벽하게 발휘하지 못하였고 이후로 카프는 서서히 와해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임화가 대단하다 한들 박영희가 카프의 창립 초기부터 이론적인 지도자 역할을 한 것을 무시할 수는 없음을 밝혀주는 예이다.
그리고 박영희는 1933년 12월 10일 카프에서 탈퇴한다. 그리고 박영희는 탈퇴원을 제출하며 그 유명한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카프는 타개책을 찾기 위해 노력하다가 1935년 5월 20일. 전주사건, 혹은 신건설(新建設)사건(1934년, 38명 구금)이라 불리는 2차 검거 사건의 여파로 해체된다.
그리고 1935년 카프가 해체된 직접적인 원인이 된 신건설 사건에 휘말려 1년여의 옥고를 치른 박영희는 사상범으로 보호관찰소에 수용되어 감시를 받았으며, 순수 문학과 예술주의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1938년 전향자 대표로 선출되어 도쿄에서 열린 시국대응전국위원회라는 행사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친일 활동에 앞장섰다. 귀국한 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결성하였고, 1939년 조선문인협회 간사,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3년에는 조선문인보국회 간부를 지냈다. 김동인, 임학수와 함께 황군위문작가단에 포함되어 중국 전선에 파견된 뒤 기행문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요시무라(芳村香道)라고 창씨개명을 하였다. 완벽한 친일파. 이 시기 박영희는 친일행적이 너무 뚜렷하고, 여기다 기술하기에는 너무 내용이 많으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광복 후 친일 경력 때문에 강원도 춘천에 숨어있다가 이후 좌익활동을 했던 것 때문에 보도연맹에 가입해 간부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6.25가 터지면서 재빨리 피난을 떠나지 못하여 조선인민군에 체포되어 납북당했고,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