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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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문고보 졸업사진의 모습.

김유정(金裕貞, 1908년 1월 11일 ~ 1937년 3월 29일)

1 개요

대한민국소설가. 강원도 춘천 태생으로 소설 소낙비(황순원소나기가 아님)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1935년에 등단했다. 특히 농촌을 소재로 한 소설들이 크게 호평받았다. 참고로 유정은 여자 이름에 주로 쓰이지만 소설가 김유정은 남자다.

2 생애

본관은 조선시대의 명문 양반 가문 중 하나인 청풍 김씨. 10대조가 대동법 실시에 크게 공헌한 명재상 김육이고, 9대조는 현종의 비 명성왕후의 아버지이자 숙종의 외할아버지인 청풍부원군 김우명이다. 거기에서 계보는 김우명의 넷째 손자 도택(道澤)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고향에서는 꽤 명망있는 지주였다.[1] 하지만 신분이 낮은 소작인들에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다. 이읃고 집안의 후원으로 김유정은 휘문고등학교연희전문에 차례로 입학하여 현대식 교육을 배우게 된다.

연희전문 시절, 소리계에서 유명한 박녹주 명창에 대한 사생팬짓이 유명하다. 1928년 봄, 조선극장에서 열린 8도 모창대회에 출연한 박녹주 명창을 보고 한 눈에 반한 김유정은 대회가 끝난 후 수소문하여 박녹주의 대기실에 찾아갔다고 한다. 참고로 기록에 따르면 당시 관계자를 제외하고 박녹주의 대기실에 출입한 사람은 훗날 부통령까지 되는 일제시대의 기업가 김성수의 부친인 김경중과 김유정 단 2명이었다고 한다(...) 이후 김유정은 하루가 멀다하고 편지, 자신의 음성을 녹음한 레코드 등으로 박녹주에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그것을 못마땅해한 박녹주는 김유정을 직접 불러서 "자신은 연예인이고 당신은 학생이니 공부나 열심히 하라"며 거절했다.[2]

1931년 5월 2일, 박녹주가 조선극장 지배인이었던 신모씨와 애정문제로 1931년 5월2일 자살소동을 벌였다는 소식이 대한매일신보에 대서특필되자 김유정은 다니고 있던 학교를 자퇴하고(...) 다시 박녹주를 찾아가서 고백하지만 이번에는 남자를 못믿겠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때 김유정은 박녹주의 집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고 나왔다고 한다.[3]

이후, 김유정은 일주일간 박녹주를 스토킹 한 끝에 박녹주가 타고 있는 가마에 접근, '오늘 너의 운수가 좋았노라. 그 길목에서 너를 기다리기 3시간, 만일 나를 만났으면 너는 죽었으리라.' 라는 내용의 혈서를 보낸다. 이에 식겁한 박녹주는 사건이 벌어진 다음날 김유정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서 “저는 나이도 돈도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단지 당신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 것도 제 잘못입니까?” 라며 타이르고 돌려 보냈는데 그것이 김유정이 박녹주에게 마지막으로 연락한 것이었다고 한다.

김유정은 평생동안 박녹주를 잊지 못했는지 김유정의 장례식을 치룬 직후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인 안회남[4]이 술에 만취한 채로 박녹주의 집에 나타니서 "당신이 박녹주요? 친구는 당신이 죽인거요. 죽을 때 까지 당신을 잊지 못하고 갔소!"라며 원망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런 일을 낭만으로 보아 주던 예전 사회라서 가능한 에피소드들이다. 박녹주 입장에서는 끔찍했을 것이다.

박녹주와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한 김유정은 이후, 시인 박용철의 여동생 박봉자의 글이 자신이 쓴 <어떤 여자를 신부로 맞이할까?>라는 글 옆에 실려있다는 이유로 얼굴도 모르는 박봉자에게 우발적으로 수십 통의 연애 편지를 쓰는 등의[5] 행동을 하면서 방 안에 틀여박힌 채로 폐인 생활을 하다가 늑막염과 치질에 걸리게 되고 집안의 권유로 고향 춘천으로 낙향한다. 이후 춘천에서 들병이[6]들과 어울리고 금광 사업에 몰두하는 등[7] 두문불출하다가 몸을 해치게 되고 그 결과 늑막염이 악화되어 폐결핵으로 발전하여 실레마을에서 요양을 하게된다. 요양 도중 김유정은 실레마을의 낙후된 환경을 목격하고 야학을 설립, 교사가 되어 주민들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얼마 못가서 야학이 강제로 해체되고 유산을 상속받은 형 유근의 방탕한 생활로 경성과 춘천의 집을 팔지경에 이르렀을 정도로 집안이 기울자 경기도 광주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는 큰누나에게 얹혀 살게 된다.

서울로 돌아온 김유정은 본격적으로 문학에 대한 열정을 품고 구인회에 가입한다. 하지만 구인회는 친목단체 성향이 강했기에 실질적인 수익은 전무했고 공장에서 돌아온 김유정의 누나는 병으로 누워 있는 김유정에게 "내가 고생해서 벌어 온 돈이 아깝다. 네 놈은 돈은 못 벌어 오고 집에 가만히 누워있기만 하냐!"며 히스테리를 부리며 김유정을 압박했다. 당시 김유정의 절친한 친구인 안회남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차라리 밖에 나가서 소설을 쓰는것이 어떻겠니?" 하고 제안하였고 김유정은 비로소 본격적으로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등단한 지 2년 만인 1937년에 폐결핵으로 인해 2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 2년동안 김유정은 그야말로 목숨을 불태운 집필 활동을 했는데 단편작들은 모두 이 때 집필한 것은 물론, 결국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장편도 하나 만들었고 심지어는 번역본까지 한 권 만들었다. 이렇게 그가 2년 동안 남긴 작품은 무려 30여 편이나 된다. 그의 열정이나 문학적 재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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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배경의 토속적 작품이 많다 보니 착각하기 쉬운데, 당대 다른 젊은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시크한 도시인이다. 당시 신문에 실린 문답 등을 보면 그야말로 "무심한 듯 시크하게"라는 말이 어울리는 수준. 김유정은 구인회의 회원으로 소설가 겸 시인 이상과 특히 친한 친구였는데[8] 서로 병고로 고통을 겪자 동반자살하기로 약속했으나 김유정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 후 이상은 자신의 소설에서 "유정! 유정만 싫다지 않으면 나는 오늘밤으로 치러버리고 말 작정이었다. 한 개 요물에게 부상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27세를 일기로 하는 불우의 천재가 되기 위하여 죽는 것이다. 유정과 이상 - 이 신성불가침의 찬란한 정사·····." 라고 표현할 정도로 아쉬움을 드러냈다. 비록 살고자 하는 욕구가 보다 더 강했던 김유정에 의해 무산됐다고 하나, 그 두 사람은 실제로 1937년 3월 29일에, 이상은 4월 17일에 죽어 18일을 간격으로 함께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인 1937년 3월 18일에 친구 안회남에게 보낸 편지는 처절함 그 자체다.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있다. 그리고 맹열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되겠다. 달리 도리를 차리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는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 다시 탐정 소설을 번역해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 되고 흥미있는 걸로 두어 권 보내 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역(譯)하여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 주마. 하거든 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필승아.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그 병을 위하여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나의 몸이다. 돈이 생기면 우선 30마리를 고아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10여 마리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쏘구리 돈을 잡아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필승아.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렸다. 나로 하여금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하여 다오.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오. 기다리마.

3 주요 작품

유명한 작품으로는 금 따는 콩밭, 봄봄, 동백꽃, 만무방, 소낙비 등이 있다.

적잖은 사람들이 일제의 지배하에 놓여있는 암울하기 그지없는 조선의 현실을 외면하고 연애소설이나 썼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인 금 따는 콩밭의 경우 물질에 눈이 먼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을, 봄봄 등에서는 농촌문화와 부조리를 해학적으로 풍자한다. 봄봄이나 동백꽃은 당시 농촌의 계급 관계가 은연 중에 잘 드러난다. 남자 주인공보다 우월한 집안의 여자 주인공[9]과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잘해야 하는 남자 주인공의 구도가 바로 그것.

사실 김유정이 일제강점기 농촌의 현실을 외면했다는 비판은 해학 속의 비참함이라는 이질적인 소재를 다루는 김유정의 작풍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만무방에선 제 논의 벼를 떳떳이 거두지 못하고[10] 몰래 훔쳐 거둬야 하는 비참한 상황이 나온다. 만무방의 경우 처음엔 그리 비극적으로 와닿지 않으나, 한 번 더 생각하고서야 글 속의 심각함을 눈치채게 된다.[11] 소낙비에서는 이 해학 속 비극이 더욱 두드러진다. 남편이 도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아내에게 매음을 종용하여 동네 유지에게 보내는 줄거리가 해학적이고 향토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그 중심에는 생존을 위해 윤리마저 버린 일제강점기 농촌의 비참한 현실이 깔려 있다.

오히려 유명한 작품들인 동백꽃이나 봄봄이 유명하거나 교과서에 실릴 수 있었던 이유도 덜 암울하고 노골적이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김유정이 쓴 다른 글을 읽어보면 농촌사회의 암울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김유정의 단편들에서는 가난 때문에 매춘을 하거나 가정폭력이 발생하는 장면들이 자주 나타난다. 금 따는 콩밭만 해도 해학적이지만 상황은 정말로 허탈할 정도로 망한 상황에 친구며 부부끼리 치고 박고 싸우며, 위에서 언급된 만무방이나 소낙비 같은 부류는 아예 등장인물이 도둑질, 매춘을 권하는 내용이 있는데다 밝다고 꼽히는 동백꽃과 봄봄도 엄밀히 말하면 지주의 횡포와 착취에도 저항할 수 없는 계층의 상황이 그대로 그려져있다.[12] 산골 나그네에서는 술집 작부까지 하다가 혼인 혼수를 들고 본남편과 도망가는 이야기[13]라던가, 따라지나 땡볕 같은 작품은 아예 작품의 설정부터가 눈물이 앞을 가린다. 따라지는 셋방살이하는 인간군상들과 주인집과의 기싸움을 그리고 있고[14], 땡볕은 남편이 병든 아내를 지게에 짊어지고 병원을 찾아가는 이야기[15]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해학적이고 풍자적일 뿐, 아예 이야기의 시작점에는 당시 농촌~도시 하층민의 비참한 생활과 현실들이 그대로 녹아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대체적으로 작품에 해학적 요소가 많고, 구수한 사투리와 아름다운 순 한국어 단어를 잘 사용한다. 무엇보다도 글이 상당히 재밌다. 봄봄의 장인과 나의 고자되기 뿐 아니라 만무방, 금따는 콩밭, 동백꽃 등도 실감나는 서술로 읽는 맛이 좋다.[16]

또한 그의 단편작 속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봄봄의 주요 등장인물 3인은 실존인물로, '점순이' 할머니는 TV에도 출연하셨다고 한다. 배경도 대부분 그의 고향 실레마을이다.

봄봄동백꽃의 경우가 모의고사에서 자주 출제되는데, 내용에 대한 이해를 물어보는 문제보다는 되려 순 우리말의 뜻을 묻는 문제가 더 많다.

짧은 기간 동안 창작열을 불태운 탓에 거의 모든 단편 작품이 한 권의 단편집으로 집약되어 있다. 1938년 출간된 <동백꽃>에는 표제작을 비롯하여 <봄봄>, <만무방>, <금 따는 콩밭> 등 김유정의 대표작이 모두 실려 있다.[17]또한 2007년에는 김유정의 모든 소설과 수필,편지,일기와 번역한 소설을 모두 담은 김유정 전집이 발간되기도 했다. 다만 현대어로 번역되있지 않아서 가독성은 약간 떨어진다.[18]

4 기념 사업

작품의 주 배경이 되는 춘천시 신동면 증리(실레마을)에 김유정 문학촌이 조성되어 있다. 기념관 외에도 소소한 재밋거리들이 많고, 잘 짜여진 행사도 자주 하고 있으니 근방에 갈 일이 있다면 들러 보자. 촌장은 우상의 눈물로 유명한 소설가 전상국이다.

이 김유정 문학촌에서 5분만 걸어가면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경춘선 김유정역이 나온다. 원래의 이름은 신남역으로, 마을 주변이 김유정 관련 관광지로 조성되다 보니 그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역명까지 바꿔 단 케이스.[19] 인물 이름을 역 이름으로 사용한 한국 최초의 사례이기도 하다. 2010년 12월 21일 경춘선 복선전철 개통과 함께 바로 옆에 새로 지은 한옥 스타일의 역사로 옮겼다.

5 조선 신문학의 선구자?

대표작인 동백꽃의 경우는 순수 국산 츤데레물. 봄봄의 경우에는 리얼 고자되기. 두 작품 다 지금 읽어도 재밌다. 또한 동백꽃의 경우 점순이란 캐릭터가 요즘 러브 코미디 라노베에 즐겨 나오는 츤데레 기믹이 다분하고, 내용도 답답하도록 눈치없는 나와 민폐를 끼치며 주위를 빙빙 도는 점순이란 구도가 해학과 맞물려 매우 유쾌한 연애소설이 되었다. 점순이의 매력(?)은 점순이 문서와 동백꽃 문서를 참조.
  1. 그 유명한 만석꾼 집안이다. 할아버지가 사마좌임금부도사(司馬座任禁府都事)를 지냈는데 이게 도지삽니다. 아버지도 사마좌임금부주사(司馬座任禁府主事)를 지냈다.
  2. [1].
  3. [2].
  4. 소설가이자 문학 평론가로 금수회의록으로 유명한 안국선의 아들이다. 김유정이 닭과 뱀을 고아먹고서야 살아날 것이다. 라고 하였던 아래의 처절한 편지가 바로 안회남에게 보낸 편지였고 (이 편지에는 안회남의 초명이었던 필승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되고 있다.) 김유정의 장례식 비용 일체를 부담하고 김유정의 미완성 유고를 유족으로부터 전달받기도 했다. 한국전쟁 시기에 월북했다.
  5. 물론 모두 반송당했다. 박봉자는 같은 해 김유정 자신도 알고 지낸 사이였던 문학 평론가 김환태와 결혼한다.
  6. 농촌에서 병에 담긴 술을 갖고 다니며 농민들에게 술을 파는 여성. 물론 술만 팔지는 않았다.
  7. 금광에 몰두하다가 그나마 남아 있던 돈을 다 써 버린 김유정은 이후 말 그대로 빈털털이나 다름없는 여생을 보낸다.
  8. 이상은 김유정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인 '김유정'을 지었을 정도로 특히 김유정을 존경했다고 한다. 안타까운 점은 소설속의 김유정은 아주 건강하고 활동적인 청년이었으나 현실의 김유정은 이 작품 발표 후 한 달 뒤 사망했다.
  9. 대표적으로 마름집 딸 '점순이'와 소작인의 아들 '나'.
  10. 수탈을 막기 위해서.
  11. 형은 날백수로 지내고, 동생은 아픈 아내를 데리고 농사를 짓지만 수탈 문제로 날이 갈수록 사람이 피폐해져간다. 오히려 일을 안 하고 손가락질 받는 형이 마음은 편한 역설적인 상황.
  12. 더 슬픈 사실은, 동백꽃과 봄봄에서의 소작농이 마름을 대하는, 즉 갑이 을을 대하는 태도가 현대인들에게도 쉽게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학생들마저도 주인집 딸이라서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라는 설명에 별다른 의문없이 수긍한다...
  13. 애초에 혼인까지 하게 된 것도 산골주막 주인집이 선채금 30원을 못 줘서 원래 혼인이 파토났기 때문에 오갈 데 없는 여자를 데리고 살 생각을 했던 것이다. 돈 없으면 결혼도 할 수 없는 세태를 배경으로 깔고 있는 것.
  14. 신경질적인 누나에게 얹혀사는 가난한 문인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김유정 자신이 겪었던 일화를 투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지 라는 말은 요즘도 쓰이는 은어의 뜻 그대로 가장 보잘 것 없는 물건이나 사람들을 의미한다.
  15. 희귀병이면 대학병원에서 돈도 주고 병도 고쳐준다(연구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함)는 말에 병든 아내를 지게에 짊어지고 힘든 길을 가지만, 아내의 뱃 속에 죽은 아기가 있다는 진단을 받고는 제 병 고치는데 돈을 왜 주냐는 핀잔만 듣고 돌아선다. 죽어도 배는 못 째겠다며 집에 가자고 하던 아내는 빌린 쌀과 남편 빨래 걱정 등을 하며 당부를 하고, 남편은 그것을 유언마냥 들으며 묵묵히 지게에 아내를 짊어진 채 땡볕 아래를 다시 걸어 돌아간다는 이야기다.
  16. 이는 앞서 서술된 박녹주의 영향으로 보인다. 생전 김유정은 박녹주의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였던 흥보가춘향가의 대사를 외울 정도로 즐겨 들었다고 한다.
  17. 그 외에도 <아내>, <산골>, <산골 나그네>, <따라지>, <떡>, <솟>, <두꺼비>, <봄과 따라지>, <금>, <정조>, <야앵>, <가을>, <심청>, <이런 음악회>, <연기>, <슬픈 이야기>, <땡볕> 등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총 수록작의 수가 21편이다.
  18. 김유정의 모든 소설이 담겨있고 심지어 미발표 원고도 들어있다. 총 31편
  19. 역 이름이 지역명과 맞지 않았던 탓도 있다. 개통 당시에는 신남면이었으나 얼마 후 신동면으로 바뀌면서 지명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