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경남고-동아대를 졸업하고 1989년 1차 지명으로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포지션은 포수.
2 프로 시절
아마 시절부터 건실한 수비력으로 인정을 받았고 주전 포수인 한문연이 노쇠화 하면서 1990년부터 주전을 꿰찼다. 타격은 멘도사 라인을 오르내리는 수준으로 커리어 하이가 0.246에 지나지 않았다. 선구안도 그저 그랬고 한방이 있는 타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1990-94년까지 꾸준히 롯데의 주전포수 자리를 지켰다. 심지어 1992년에는 김선일보다 훨씬 더 공격력이 강하며 수비력도 크게 뒤지지 않는 강성우가 데뷔했음에도 주전 자리를 지켰으며, 한국시리즈 우승 순간까지 함께 했다. 심지어 수비형 포수가 절실하던 삼성이 트레이드를 요청했다는 카더라까지 있었다.
이 때만 해도 수비형 포수로 전도유망했지만 갑작스럽게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데 그 이유는 허리부상. 부상을 당한 이유가 어처구니없게도 한국시리즈 우승 순간 세리머니를 하다가 그라운드에서 넘어지면서 당한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이 부상이 고질적인 허리통증을 야기했으며 이는 특히 포수 포지션에는 치명적이었다. 결국 이듬해인 1993시즌부터 강성우와 포수마스크를 나눠 쓰기 시작했다.
95년부터는 주전급으로 도약한 임수혁에게 백업 포수의 자리도 물려주고 제 3의 포수로 기용되었다. 그러나 풍부한 경험 덕택에 포스트시즌 엔트리에 포함되었으며 LG 트윈스와의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는 김용수에게 9회말에 끝내기 안타를 쳐내며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기도 했다. 이 경기는 수 차례 동점과 역전이 반복된 접전이었는데, 주전 3루수였던 공필성이 교체된 후 당시 백업 유틸리티 내야수였던 조규철이 3루 수비를 보고 있다가 9회초 타구의 불규칙 바운드로 안면을 강타당하여 병원으로 실려간 상황이었다. 경기 막판이라 교체할 내야수 카드가 전혀 없었던 상황. 심지어 당시 중계방송 해설을 맡은 하일성조차 돌발사태에 당황하며 엔트리에 남은 선수 중 한영준이 예전에 내야수 경험이 있다며 횡설수설하던 찰나, 김용희 감독이 뽑아든 카드는 1루수였던 마해영을 3루수로 돌리고 김선일을 1루수로 교체 투입하는 것이었다. 김선일이 타구 처리를 어떻게 할지 관심사가 쏠린 상황이었으나 천만 다행으로 1루방면 타구는 나오지 않고 9회초 수비를 마무리했고, 바로 이어진 9회말 상대투수 김용수로부터 끝내기 안타를 뽑아내 7:6 승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이 순간이 말 그대로 마지막 불꽃이 되고 말았다. 이듬해인 96년은 1군에서 단 두경기에 대수비로 출장한 것이 다였다. 허리부상의 치료와 재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별 차도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다음해인 97년 또한 1군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했다.
결국 97년 6월 26일 시즌이 한창인 시점에서 스스로 퇴단을 선택하고 임의탈퇴 형태로 방출된 뒤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3 평가
실제 1992년 롯데의 마지막 우승의 숨은 주역으로 평가 받는데 포구가 뛰어난 데다가 투수 리드도 좋았고 타자와의 심리전에도 능해서 당시 타 구단 타자들이 가장 지능적인 플레이를 하는 포수로 김선일을 지목했을 정도이다. 이만수, 장채근 같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들이 은퇴하기 전에 이미 이런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실제 김선일은 베테랑 윤학길, 신인 염종석, 윤형배, 김상현, 징벌성 출장 정지 비스무리한 것을 당하면서 후반기에나 복귀한 박동희 같은 롯데의 주축 선수들과 궁합이 좋은 편이었다.
또한 강견은 아니었지만 주자들의 움직임을 읽는 눈이 뛰어나서 도루 저지도 괜챦았고 주자를 묶는 능력도 탁월했다. 즉 수비력만 보면 당시 리그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는 것.
통산 성적은 8시즌 타율 0.204, 홈런 2개 84타점으로 눈에 띄는 성적은 아니지만, 포수난에 시달린 적이 없는 유일한 구단이라고 할 수 있는 롯데 자이언츠의 주전 포수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수임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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