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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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한영준(韓英俊)
생년월일1962년 11월 14일
출신지부산광역시
출신학교부산진초 - 부산중 - 부산고 - 고려대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85년 1차지명(롯데 자이언츠)
선수경력롯데 자이언츠 (1985~1996)
지도자경력더 니든 블루제이스 수비코치(1997)
롯데 자이언츠 1군 수비코치 (1998~2001)
두산 베어스 2군 수비코치 (2004~2010)
고려대학교 감독 (2011~2013 )
고려대학교 야구부 감독(2011~2013)
양승호(2007~2010)한영준 (2011~2013)우경하(2014~2015)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15번 (1985~1996)
한영준 (1985~1996)이동욱 (1997~2001)
롯데 자이언츠 역대 주장
?한영준
(1995)
김응국
(1996)

1 소개

원조 악바리
롯데 자이언츠의 야구선수이자 코치. 고려대학교 야구부 감독.

2 선수시절

2.1 아마추어 시절

부산고등학교 야구부 시절부터 상당히 주목받던 선수였다. 171cm이라는 야구선수로서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손목 힘으로 장타를 만드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 고3 시절에는 7개의 홈런을 몰아치는 등 부산고의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다. 고려대학교에서도 이런 모습은 여전하여 1984 LA 올림픽에 시범 종목으로 발탁된 야구 국가대표로 선발되기도 하는 등 활약하자 1985년 롯데가 그를 1차지명하며 프로 생할을 시작하게 된다.

2.2 프로 시절

1985년 롯데에 1차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입단당시부터 김용희의 뒤를 잇는 자이언츠의 3루수가 될 것이라고 모두가 기대했다.

1987년부터는 노쇠한 김용희를 백업으로 밀어내고 당당히 주전을 차지하여 1988~1990년에는 올스타전에서 스타팅 3루수로 나왔을 정도였다. 1987~88 두 시즌동안 각각 .301의 타율을 기록해 방망이에서도 쏠쏠한 활약을 해줬다.

그의 플레이는 아마시절처럼 근성으로 똘똘 뭉친 플레이였고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악바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손목힘이 좋다는 아마때의 평가도 그대로 이어져서 작은 체구에도 적지 않은 홈런을 치기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고 공필성이 3루로 옮기며 비중은 줄었지만 포지션을 바꿔가면서 백업으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했다. 1992년에는 주장으로 롯데의 2번째 우승을 이끌었다. 이 시점부터 내야수보다는 주로 외야수 겸 지명타자로 출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93시즌 .219의 타율이라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이듬해인 1994년 롯데의 주전 선수들 중 상당수가 방위 복무에 걸려 자신에게 많은 기회가 올 것이라는 걸 인지한 듯, 시즌을 앞두고 동계훈련에서 어마어마한 노력을 쏟았다고 한다. 시즌 들어가기 전 소감이 "노력한 만큼만 결과를 기대하겠다"였을 정도. 흠좀무. 그리고 자신의 장담대로 주전과 백업을 오가며 시즌 내내 3할 이상의 타율로 빈약한 전력의 롯데가 나름 선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시즌은 .291의 타율로 마무리.

1995년에는 다시 한 번 주장으로 롯데의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이끌고 본인은 통산 1000경기 출장의 기록을 세운다. 그러나 마해영박현승 등 유망주의 입단과 노쇄화 때문에 출전 기회도 크게 줄어들었고 타율도 .200에 간신히 걸치며 현역 연장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1996년은 고작 네 경기동안 대타와 대수비로 기용된 것을 제외하곤 줄곧 2군에만 머물러 있었고, 시즌 후반에 은퇴를 결심했다.

1996년 9월 8일 해태전에서 같은 해 은퇴를 선언한 김민호와 더불어 은퇴식 겸 은퇴경기를 치렀으며 이 때 구단으로부터 순금으로 된 기념배트와 공로패를 받았다. 이 때만 해도 KBO에서 은퇴경기는 고사하고 은퇴식조차도 굉장히 드물었던 시기라[1] 매우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2016년인 지금까지도 롯데에서 은퇴경기를 치른 선수는 김민호 한영준 둘 뿐이다. 은퇴경기 성적은 2번타자 우익수로 선발출전하여 1이닝동안 수비를 맡고 타석에선 중견수 플라이로 아웃된 후 교체되었다.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자이언츠 3루수 계보에서 그의 이름은 빛나고 있다.

3 코치 시절

1997시즌은 마이너리그에서 연수를 했으며 1998년부터 롯데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1루코치를 맡았다. 1999년 플레이오프에서도 선수들이 관중들의 행패에 반발하자 같이 나서서 싸워주기도 했다.

그리고 2001년 마산 삼성전에서 펠릭스 호세배영수패는 사건이 발생하자 살신성인의 정신을 발휘해 호세를 제지했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는 두산 베어스 코치를 맡았다. 코치로서 한국 수비의 트렌트를 바꾼 장본인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오늘날 두산의 끈끈한 수비의 상당 부분은 한영준의 공이 크다는 평가.

그의 특별한 지도법으로 코치로서 직접 선수와 함께 훈련하는 점을 강조한다. 손바닥은 웬만한 선수들 못지 않게 단단한 굳을 살로 뒤덮여 있기로 유명할 정도다. 한 때 백핸드 그립 캐치는 종종 ‘멋부리는 것처럼 보인다’며 폄하되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는 “백핸드는 독이 아닌 약”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백핸드 캐치가 화려해 보이지만 상황에 따라 오히려 ‘안정적’일 수 있다며사고의 전환을 선수들에게 주문했다.

수비의 정답은 ‘안정성’이라며 개별 상황에 대한 무한상상과 도전, 이미지 트레이닝을 강조하는 지도 철학을 가지고 선수들을 지도했다고 한다.

2012년부터 고려대 감독으로 재직중이다.

2013~2014년 사이에 고려대 감독에서 물러났고 후임자로는 전 한화코치인 우경하가 왔다. 그런데 그 우경하가 비리를 저질러서 출국금지를 먹은 상황.(....) 전임자와 후임자가 모두 금지어가 되었다
  1. 한영준과 김민호의 이날 은퇴경기는 당시 전 구단을 통털어 3번째 사례였다. 2016년인 지금까지도 은퇴경기를 치른 선수는 고작 16명에 불과할정도로 은퇴경기는 매우 희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