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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 다이노스 No.82 | |
한문연(韓文埏) | |
생년월일 | 1961년 4월 10일 |
출신지 | 경상남도 창원시 |
학력 | 성호초 - 마산동중 - 마산상고 - 동아대 |
포지션 | 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83년 1차 지명(롯데 자이언츠) |
소속팀 | 롯데 자이언츠 (1983~1992) |
지도자 | 롯데 자이언츠 코치 (1993 ~ 2001) SK 와이번스 코치 (2001~2002) 롯데 자이언츠 코치 (2003.02 ~ 2010) SK 와이번스 배터리 코치 (2011) NC 다이노스 배터리 코치 (2012) NC 다이노스 2군 수석, 배터리코치 (2012~2013) NC 다이노스 2군 감독 (2014~) |
1 소개
2 선수시절
마산상고 출신으로 동아대를 거친 포수다. 아마 시절 포수로서 명성이 높아 동아대학교 4학년이던 1982년 대한민국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발탁되었고, 대한민국이 우승하면서 우승 멤버로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198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해 같은 해 입단한 최동원과 함께 배터리를 구성하면서 롯데의 주전 포수로 뛰며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의 공을 받아 내었고, 7차전에서는 7회초 추격의 발판이 되는 3루타를 때려내는 등 우승에 한몫한 선수였다. 장태수를 삼진으로 잡고, 최동원이 환호할 때, 그와 얼싸안는 포수가 바로 한문연이다. 당시 팀에 뛰어난 포수였던 심재원 선수가 있었음에도 최동원이 직접 자신의 전담포수로 지목할 정도로 최동원에게 인정받았던 인물이다.[1] [2]
1986년 6월 5일, 김정행이 당시 빙그레 이글스를 상대로 프로야구 사상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을 기록할때 포수로서 그의 공을 받기도했다.
초창기 롯데의 확고부동한 주전으로 뛰던 한문연은 1987년 스프링캠프 도중 어깨에 이상을 일으켰으며 이 과정에서 그 해엔 25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다음 해부터는 김용운에 이어 김선일(1989년 입단)과 마스크를 나눠 쓰는 경우가 많았다.
강병철 감독이 재부임한 1991년에는 3년차 김선일에게 주전포수 자리를 빼앗겼으며, 1992년에는 플레잉코치로 뛰면서 사실상 선수 생활을 정리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엔트리에 들어 롯데가 차지한 우승반지 2개는 모두 챙기고 은퇴했다는 점이다.
3 지도자 시절
은퇴 후에는 롯데와 SK의 배터리 코치를 거쳐 2011년부터 NC 다이노스에 합류했고, 2013년부터 고양 다이노스 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이미지와는 달리 딱히 포수를 키웠다고 보기어렵다. 롯데시절 강민호도 공격형 포수이지 프레이밍이나 수비가 뛰어난 포수는 아니다. 엔씨로가서 김태군이 있지만 엘지에서 받지못한 출장수를 엔씨에서 주전을 하면서 많이 경기를 뛰어 성장한 느낌이 강하다.
4 기타
이순철은 방송에서 선수 시절 가장 프레이밍이 뛰어나서 상대하기 힘들고 얄미웠던 포수로 주저없이 한문연을 꼽은 바 있다. 프레이밍에 능해서 볼이 되는 변화구도 스트라이크처럼 잡아서 스트라이크 판정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당시 프로야구가 시작된지 얼마 안 되던 시기라서 그 시절 심판들 수준상 스트라이크 판정시에 공이 오는 궤적보다 포수가 공 잡은 위치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걸로 추정된다. 거기다가 저 유명한 최동원의 전담 포수였기 때문에 시너지 효과가 더 어마어마했다고. 최동원이 그를 자신의 전담포수로 괜히 지목한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순철이 직접 "최동원 선배와 한문연 선배를 상대 배터리로 만나는 날에는 정말 경기장도 가기 싫고 타석에서도 삼진 좀 덜 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한문연 선배는 커브가 떨어지는데 볼이라서 (제가) 안 치면, 그 뚝 떨어지는 걸 이렇게 잡아서 신기하게 들어 올려버리니까~ 심판이 그걸 자꾸 스트라이크를 준다니까요. 그럼 또 삼진 먹고. 최동원 선배 공을 치는 거 자체도 어려운데 한문연 선배가 잡는 것까지 그래버리니까~ 너~무 얄밉고 타석에도 너무 가기 싫었어요. 그러니까 저는 아주 얄미워 죽는 거죠. 정~말 상대하기 싫은 포수였어요."라고 할 정도로 한문연의 프레이밍이 뛰어났다고 한다. 참고로 이순철은 코치나 감독으로서의 능력을 제하고 선수시절 경력만 보면 엄연히 공수주 모두에서 뛰어났던 KBO 레전드 선수였다. 그런 뛰어난 선수가 그렇게 힘들어 했다는 건 분명 한문연이 포수로서의 능력이 뛰어났다는 것이다.
선수 시절 최동원의 전담 포수였기 때문에 함께 숙소방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최동원의 성격이 워낙 철두철미한 자기관리를 중시하는 유형이라 다음날 저녁에 경기를 해도 꼭 그전날 밤 9시 전에 잠자리에 들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하는 원칙을 지키는 선수였다고 한다. 다른 선수들은 술마시러 가는 경우도 있고 놀러 나가지 않더라도 자기들끼리 숙소에서 잡담도 하고 그러다가 늦게 자기도 했는데 최동원은 절대 그런 걸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답답했던 한문연이 8시~9시쯤에 "선배님 내일 저녁 경기인데 TV라도 좀 보다 잡시다~"라고 하소연하면 최동원이 "쓰읍, 마 시끄럽다. 빨리 불 끄라!"라고 했고 후배였던 그는 찍소리도 못하고 불끄고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한문연은 이에 대해 회상하며 그때는 답답하기도 하고 잠도 안 오고 했지만 점점 적응이 되어가면서 그렇게 억지로라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다보니 본인도 컨디션이 좋아져서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걸 느꼈고 역시 대투수 최동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아들인 한주석도 야구 선수였다. 부경고를 거쳐 동국대학교에 진학했으나 군 입대를 했는지 그만 두었는지 2016년 선수 등록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와는 반대로 포지션은 투수.- ↑ 한문연은 최동원이 선배인 심재원보다 후배인 자신을 좀 더 편하게 생각해서 지목한것 같다며 인터뷰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으나 이는 겸손의 표현에 가깝다고 할 수 있고, 한문연은 그 자체로 충분히 뛰어난 포수였다.
- ↑ 아마시절에는 4번 타자를 맡았을 정도로 공격력도 준수했다. 동아대 4번 타자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하던 당시 아저씨팬들이 많았다. 그러나 프로에서는 1984년을 정점으로 타격 성적이 지속적으로 하락했으며 딱히 인상적인 공격력을 보여주지는 못 했다. 그러나 1984년에는 0.291의 타율을 기록하는 등 심재원보다는 훨씬 더 공격력이 좋은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