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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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두산 베어스의 초청으로 시구자로 나온 김유동.

이름김유동(金裕東)
생년월일1954년 4월 9일
출신지서울특별시
학력동대문상고-한양대
포지션외야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82년 OB 베어스 창단멤버
소속팀OB 베어스(1982~1983)
삼미 슈퍼스타즈(1984)
청보 핀토스(1985)
1982년 한국시리즈 MVP
김유동(OB 베어스)김봉연(해태 타이거즈)

1 소개

전 프로야구 선수이자 정치인. OB 베어스의 원년 멤버로 포지션은 외야수였다. 등번호는 8번을 달았다.

2 선수 시절

동대문상고와 한양대를 졸업하고 실업야구 한국화장품에서 뛰다가 1980년 현역 은퇴. 이후 가업인 건축회사 에서 일하던 중 프로야구가 출범한다는 소식을 듣고 OB 유니폼을 입었다. 그러나 원년 성적은 타율 0.245, 6홈런, 23타점으로 평범 이하였다.

정작 그의 이름이 유명하게 된 계기는 1982년 한국시리즈.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주로 5번 타자로 나온 김유동은 시리즈 6차전까지 줄곧 맹타를 퍼부으며 25타수 10안타, 3홈런, 11타점으로 OB 타선을 이끌었고, 6차전에선 4-3으로 박빙의 리드를 잡은 9회초 2사 만루 상황에 타석에 등장, 이선희의 초구를 잡아당겨 좌월 만루포를 날리며 그 경기에서만 혼자 6타점을 쓸어담았다. OB의 원년 우승 최대의 공로자인 그는 당연히 초대 한국시리즈 MVP를 거머쥐었다.[1]

6차전 만루홈런 영상.

그러나 넉살좋고 호탕한 성격으로 "넉제비"란 별명으로 통했던 김유동은 평소에 술을 굉장히 좋아했고 술값은 무조건 자신이 지불해야 직성이 풀린 탓에, 술집 외상이 많이 밀린 것이 구단 관계자 귀에 들어가며 미운털이 박히고 말았다. 이게 화근이 되어 급기야 1983년 7월 OB에서 임의탈퇴로 방출당했다. 이듬해 삼미 슈퍼스타즈로 이적했지만 이렇다 할 성적은 거두지 못한 채 1985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야구계를 떠났다.

3 은퇴 후

가락시장에서 채소 도매상을 한다는 것이 세간에 알려지며 다시 한 번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고, 이후 인천에 고기집을 차려 쏠쏠하게 돈을 벌었는데...

1996년 정치판에 뛰어들어 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민련 후보로 출마한 것을 시작으로 몇 차례 나섰으나 낙선크리를 먹었다(...). 특히 2000년 16대 총선 때에는 자유민주연합을 탈당해 한나라당으로 갔으나 공천에서 탈락하자 자민련으로 되돌아가기 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식당 운영으로 번 돈을 대부분 날렸다 카더라. 18대에는 자유선진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며, 19대에는 새누리당 소속으로 출마하려 했으나 공천에서 탈락했다. 정치하느냐고 돈 꽤 날려먹었을듯

4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96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인천 부평 을)자유민주연합8,851 (9.8%)낙선 (3위)
2000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인천 부평 을)자유민주연합5,755 (6.8%)낙선 (3위)
2004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인천 계양 갑)자유민주연합1,736 (2.5%)낙선 (5위)
2008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인천 계양 갑)자유선진당3,021 (5.5%)낙선 (3위)
득표율이 참으로 안습하다.(...) 심지어 선거비를 반액이라도 보전받는 10% 득표라도 한 적이 없다.(...) 정치적 호오를 떠나, 한국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양당이 아닌 충청기반의 지역정당에서 활동하면서 수도권 출마를 강행하다보니[2] 성적이 좋을 래야 좋을 수가 없다.
  1. 그는 그날 경기 후 인터뷰에서 "경기 전 낮잠을 자다 꿈을 꿨는데 친구 4명과 함께 상가집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 오늘 만루홈런의 예지몽 이었는듯?" 하고 소감을 밝혔다 한다.
  2. 그래도 인천에 충청도 출신이 많은 편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