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대 국회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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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민주노동당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
국민통합21
무소속
152석121석10석9석4석1석2석
제17대 국회의원 목록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SBS 선거방송 광고. 저 당시는 탄핵 정국이었기 때문에 선거방송 광고에 대해서는 특히 중립성에 만전을 기울였다.

1 개요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는 2004년 4월 15일[1]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이다. 투표율은 60.6%였다.

2 배경 -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노무현 대통령의 새천년민주당 탈당과 열린우리당 창당 및 입당, 한나라당불법 대선 자금 수수, 그리고 결정적으로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소추안 처리까지 치러지면서 선거의 쟁점이 되고 만다.

과거 지역구 투표율에 따라 전국구 의석을 배정하던 방식을 없애고 지역구 투표와 비례대표 투표를 분리한 1인 2표제를 최초로 도입했다.

3 선거과정

열린우리당은 정동영이 당의장에 선출되면서 새천년민주당의 지지율을 따라잡았고,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근소한 차이지만 한나라당도 제치고 1위가 되는 등 최소한 총선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는 거둘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거기다 잘하면 제1당도 차지할지 모른다는 희망섞인 전망이 나오자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새천년민주당은 대통령의 친 열린우리당[2] 발언을[3] 가지고 선거법과 선거 공정 위반으로 탄핵을 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고 한나라당이 이에 동조하면서 선거 약 한달 전 그 유명한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하지만 정작 3월 가결된 탄핵 과정을 보면 소수의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다수의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의원들이 밀어내고 힘의 논리로 탄핵결의안을 처리하는 그야말로 다수의 횡포나 다름이 없었다. 여기에 "그래 니들도 시전한 다수의 힘의 논리 한번 똑같이 당해봐라 새끼들아!!!" 정도로 요약될 수 있는 시민들의 분노 여론이 터지면서 17대 총선 선거판 자체가 말그대로 탄핵 선거의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거국적인 비판 여론에 힘입어 열린우리당의 지지도가 더 치솟으면서 과반수가 확실시되는 상황이 되고 만다.[4] 여기에 마지막에 개헌을 노리고 합류한 자민련은 가장 강력한 벼락을 맞았다. TV토론회에서 당시 민주노동당 소속 노회찬 후보가 자민련 측 참석 패널의 공격을 받자 "가만히 좀 계십시오. 지금 자민련 상대할 시간 없습니다. 자민련은 어차피 선거 끝나면 없어질 당 아닙니까"라고 데꿀멍시켰을 정도.안습[5]

그러나 이후 한나라당이 당시 박근혜 대표를 앞세운 천막당사 선거운동을 펼치며 뒷심을 발휘하기 시작했고,[6][7] 여기에 정동영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의 노인들은 투표하지 말라는 뉘앙스의 노인 폄하 발언이 구설수에 오르면서 선거판이 막판 갈수록 요동친다. 이 여파로 정동영은 책임을 지고 선대 위원장직과 비례대표 후보에서 사퇴했는데, 어쨌든 이 노인폄하 발언이 탄핵 역풍을 다소 잠잠해지게 만들었던 것은 사실이었고 당시 한나라당이 이 발언 덕분에 본의아니게 어부지리를 취하긴 했다. 정확히 8년후 벌어진 김용민 막말사태와도 비견된다 선거기간엔 입조심이 상책

거기에다 사실 간과하기 쉬워서 그렇지 민주당계 정당표가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으로 갈렸고, 게다가 민주노동당이 새로운 정치를 이끌 진보측 대안정당으로 뜨면서 열린우리당에 갈 표가 꽤나 많이 분산된 면도 있었다. 실제 꽤 많은 민주당계 정당 후보들이 낙선하기도 했고.

4 결과

제17대국회의원 선거
한나라당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자유민주연합민주노동당국민통합21기타합계
서울16032000048
인천309000012
경기14035000049
강원60200008
대전00600006
충남105400010
충북00800008
광주00700007
전남057000113
전북0011000011
부산1701000018
대구1200000012
울산30101106
경남1402010017
경북1400000115
제주00300003
지역구10051294212243
비례21423080-56
총합121915241012299
비례대표
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인
한나라당7,613,66035.8%21
새천년민주당1,510,1787.1%4
열린우리당8,145,81438.3%23
자유민주연합600,4622.8%0
국민통합21119,7460.6%0
가자희망208031,5010.15%0
민주공화당24,3600.11%0
구국총연합9,3300.04%0
기독당228,8371.08%0
노권당37,0840.17%0
녹색사민당103,8450.49%0
민주노동당2,774,06113.0%8
민주화합당39,7850.19%0
사회당47,3110.22%0
총합17,415,920100.0%56

4.1 분석

KBS 출구조사 영상. 역시 총선 출구조사답게(?) 오차 범위내에서 가까스로 맞추긴 했다만 들쭉날쭉하다. 화질이 구려도 이해하자

열린우리당은 152석을 확보하면서 당초 출구조사보단 좀 못한 턱걸이 과반확보를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당계 정당 최초로 선거에서 집권당으로 과반수를 차지하게 된다. 선거 초반 탄핵 역풍을 타고 최대 200석 이상 차지할 것이라는 예상에 비해선 결과가 다소 신승이었는데, 상술했듯 선거 몇일전 터진 정동영 전 의장의 노인폄하발언으로 노인층이 이탈한 점이 컸다는 분석들이 많았다.[8]

그럼에도 선거 당일 출구조사에서도 170석대는 확보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기에[9] 152석을 확보한건 기쁘면서도 약간 아쉽기도 한 결과였다. 민주당계 정당표가 열린우리당/새천년민주당/민주노동당으로 뿔뿔이 갈린 탓도 한 몫 한듯. 실제 비례대표 선거에선 표가 꽤 갈렸다.

한나라당은 박근혜조차 80~100석 정도만 차지해도 좋겠다고 말할 지경이었던 당초 예상보단 선전했다는 평. 121석으로 개헌저지선은 지켜냈다. 세부적으론 호서호남, 제주 지방에서 참패하며 털렸지만, 기존 텃밭이던 영남권을 사수하는데 성공했고, 수도권[10]과 강원도 지역에서도 생각보다 선전했다. 사실 다 필요없고 영남빨이 크긴 하다.

새천년민주당자민련은 말그대로 폭망했다.(...) 지지기반인 전남과 충남[11]에서 지역구 5석, 4석을 힘겹게 확보하긴 했지만, 비례대표 득표율에선 민주노동당한테조차 밀리며 원내 교섭단체도 못 만들 정도로 과거에 비해 처참한 군소정당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특히 자민련의 비례대표 1번[12]이었던 김종필은 자민련이 득표 3%에 미달해 낙선하고 이 충격으로 길고 길었던 정치생명을 끝내고 정계에서 은퇴한다.[13] 그리고 그 빈자리는 공교롭게도 민주노동당 비례 8번인 노회찬 의원이 차지했다.

민주노동당은 지역구에선 울산과 경남 1석씩을 얻으며 총 2석을 확보하는데 그쳤지만, 비례대표에서 무려 13%의 정당 지지율을 얻으며 8석을 챙겨 총 10석으로 원내3당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 외 정몽준 의원의 국민통합21이 울산에서 1석을 얻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 당을 해체한다. 그리고 한국노총계의 녹색사민당도 출마한 선거였지만 1% 득표에도 못미치는 쓴 맛을 맛보았다. 그와중에 가까스로 1% 넘긴 기독당

5 국회의원 목록

제17대 국회의원 목록 항목 참조.

6 트리비아

총선이 끝난 이후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에 대한 심판을 내리게 되는데, 여론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는 소문대로 적절하게 탄핵 기각[14] 판결을 내렸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는 무소속 당선자가 가장 적었던 선거였다. 경북, 전남 각각 1명으로 총 2명 뿐이었는데 흥미롭게도 이때 무소속 신국환, 최인기 의원은 서울법대 동문(신 의원이 3년 선배)이자 고시(행시 4회) 동기라는 인연도 있었다. 이후 국민통합21정몽준 의원이 당선 뒤 당을 해체했고, 이로서 무소속 당선자는 3명이 되었다. 참고로 경북 문경시/예천군의 무소속 당선자 신국환 전 산업자원부 장관은 과거 자유민주연합으로 지역에서 3번(총선 2회, 재보궐 1회) 출마했던 경력이 있었는데, 자유민주연합이 공중분해되면서 2005년 10월 창당된 국민중심당 공동대표가 되었다가 2007년 탈당, 중도개혁통합신당(대통합민주신당의 전신)에 합류 후 정계를 은퇴했다.

열린우리당 안티진영에선 이후 이 당시 탄핵역풍의 영향으로 대거 당선된 열린우리당 초선의원을 탄돌이라며 낮추어 부르기도 했다.

전라남도 지역은 당시 열린우리당과 새천년민주당이 그야말로 진검승부를 벌인 선거판이었다. 결과는 5:7로 열린우리당 승. 여담으로 목포에서는 열린우리당이 호남의 대표 정치인인 김대중과 동명이인인 김대중 전 목포시의회 의장을 공천했으나 낙선했다. DJ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새천년민주당은 자신들의 보스격인 DJ에게 지지를 바랬지만 DJ는 중립을 지키며 사실상 새천년민주당을 외면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열린우리당 지지를 보이는듯한 모션을 취했다. 대북송금특검 논란으로 참여정부와 사이가 어정쩡해 있던 상황에서 측근들을 외면하는 대신 화합을 도모한 셈. 실제 사망 직전까지 했던 얘기도 절대 당내에서 (영호남) 분열하지 말고 단합하라는 메시지였고.

6.1 사실상 마지막 대규모 낙선 운동 선거

선거법 개정으로 낙선 운동이 허가되면서 16대 총선부터 시작된 낙천, 낙선 운동은 이번 선거에도 꾸준히 지속되었다. 하지만 2004년 총선시민운동의 가장 특징적인 점은 바로 탄핵 참여자들을 모두(!) 낙선 대상자로 넣은 것. 그야말로 시민단체가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 한쪽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준 것이기 때문에 일부 논란을 빚기도 했다.물론 탄핵 자체가 엄청난 병크이긴 했지만 특히 새천년민주당의 김상현 의원 같은 경우엔 본인이 직접 시민단체에 방문하여 선거법 위반으로 자신을 구태 정치인으로 몰아간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을 정도. 이러한 낙선 운동은 열린우리당의 승리로 인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후 도리어 시민단체들이 여당 정책에 각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사실 이게 올바른 거지만 이 선거를 마지막으로 광범위한 낙천, 낙선 운동은 좀처럼 보기 힘들어지게 된다.

  1. 참고로 선거일 당일이 으레 선거가 치러지는 수요일이 아니라 목요일인데, 이는 당해 공직선거법이 개정되어 선거일이 국회의원 임기만료일전 50일이후 첫번째 목요일에서 수요일로 개정되었기 때문. 이전의 총선들은 하나같이 목요일이었다.
  2. 아직 입당 이전이었기도 하다.
  3. '민주당 찍으면 한나라당 된다'고 말했다.
  4. 손석희 항목에서 "알면서 왜 하셨습니까?" 일화가 흥미롭다. 다만 정확한 발언은 "그렇다면 안하면 되지 않습니까?"였다. 항목 참조.
  5. 여담으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이때부터 노회찬 의원이 각종 토론 프로에 나오며 촌철살인과 함께 일명 대중을 웃기는 유머러스한 컨셉의 토론으로 인기를 끌게 되고 이후 대중적인 인지도의 진보 정치인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6. 이때 1당 독재를 막아달라는 의미로 노란색과 파란색이 균형을 이루는 일명 시소 TV광고가 나오기도 했고, 아예 대놓고 잘못했으니 봐달라고 사정하는(...) 일명 회초리 광고도 유명했다. 심지어 당 내부에선 김정일과 박근혜가 만나는 남북정상회담삘의 광고까지 고려했다니(실제로 2002년에 16대 대선을 앞두고 개인적으로 만났다) 당시의 급박함을 알 수 있다.
  7. 근데 재미있는 사실은 차떼기 항목에도 나오지만 이 천막당사도 일종의 정치쇼라고 볼 수 있는게, 당시 한나라당은 천막당사를 차린 구 중소기업전시관 터 자리를 50일 빌리고 전체 임대료로 4200만원을 주었는데, 당시 열린우리당의 여의도 당사 건물의 임대료가 월 2500만원이었다. 즉, 계산해보면 열린우리당은 하루 임대료가 83만 3천원 정도지만 한나라당은 84만원으로 더 비싼 셈. 물론 저 돈은 국민의 세금이었다.(...)
  8. 다만 노인 폄하 발언은 한나라당 고정표들이 남에게 이야기 할 명분일 뿐, 노인 발언이 없었어도 한나라당 고정투표층은 한나라당 찍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래도 날려먹은 표가 아예 없진 않아보인다.
  9. 물론 1996년 총선과 2000년 총선 출구조사와는 다르게 범위를 넒게 표시하기는 했다. 하지만 범위가 너무 넓어 의미가 없는 KBS 조사(142-188석)를 뺀 나머지 조사는 여전히 빗나갔다는게 함정.(...) MBC 조사는 155-171석, SBS 조사는 157-182석으로 나왔다.
  10. 강남권 방어를 해냈다.
  11. 원래부터 충북은 자민련이 큰 재미를 못봤다.
  12. 이 시점에서 비례대표 남녀 비율은 50%만 채우면 되었다. 그래서 자민련은 상위순번 대부분을 남성으로, 하위순번 대부분을 여성으로 채워서 50 대 50을 맞췄다. 그래서 선거법이 다시 개정되어서 '비례대표의 홀수번호를 여성에게 할당'하도록 되어 있다.
  13. 참고로 이때 김종필이 9선을 했는데, 이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최다선이다. 요번만 넘겼으면 10선으로 YS를 넘을 수 있었는데
  14. 정확히는 "탄핵 사유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