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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에 등록된 동명의 정당 - 한나라당(2012년)[1]
- 2014년에 등록된 동명의 정당 - 한나라당(2014년)[2]
- 희망한나라당이라는 당명을 썼던 정당 - 개혁국민신당
- 호주에 있는 동명의 정당 - 한나라당(호주)
- 변경된 당명으로의 활동 - 새누리당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정당 | ||||||
신한국당 통합민주당(1995년) | → | 한나라당 | → | 새누리당 |
- 한국어: 한나라당(한자 혼용 시: 한나라黨
- 영어: Hannara Party 또는 Grand National Party (GNP)[3]
- 중국어
- 일본어
- 신자체 한자 사용: ハンナラ党
- 구자체 한자 사용: ハンナラ黨[4]
- 발음 표기
- 현대 가나 표기법: ハンナラとう
- 역사적 가나 표기법: ハンナラたう[5]
- 헵번식 로마자 표기법: Hannara-tō
- 일본어의 외래어 표기법: 한나라토
목차
1 개요
1997년 11월부터 2012년 2월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정당. 여기서 한은 '크다', '위대하다'는 뜻과 '한(韓)'을 동시에 의미하는 중의적 표현이다.[6] 영문 명칭은 Grand National Party.쓸데없이 간지난다 약어가 GNP다(…). GOP(Grand Old Party)를 별칭으로 쓰는 미국의 공화당과 당명이 비슷한걸 보면 이쪽을 의식했던지도?
당의 공식 노선은 반공 색채를 띈 보수주의[7]. 창당 후 아주 잠깐 여당이였다가 야당이 된 뒤[8],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10년만에 여당으로 복귀하였으나, 돈 봉투나 대표자 선발에 관련된 비리 등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졌었다.(차떼기 사건 참조) 여기에 설상가상, 혹은 사면초가라는 정도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이 벌어져 사건의 진위여부를 떠나 민심이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었고 당시 대통령 지지율이 10%대로 추락했으며, 2012년 열릴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에서 패색이 진해졌다는 분석이 주류를 이루게 됨에 따라 박근혜를 중심으로 한 당 전체 쇄신안을 발동, 결국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위해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교체하게 된다.
민주공화당(1963년) 이후, 즉 민주화 시대 이후 최장수 정당이다. 격변이 많은 대한민국 정치 풍토에서 한 개의 이름으로 정당을 15년간 유지한 것만 해도 매우 대단한 성과라고 볼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장수한 정당은 민주노동당이다.
2 계보
이 정당의 직접적인 시초가 된 것은 1990년 1월 창당된 민주자유당(민자당)이다. 당시 대통령 노태우가 총재로 있던 여당 민주정의당(민정당)과 야당이었던 통일민주당(김영삼)과 신민주공화당(김종필)의 이른바 3당 합당으로 탄생한 것. 특히 민정당의 경우 1981년 전두환이 창당했기 때문에, 한나라당을 깔 때 뿌리가 민정당(전두환)이라는 공격이 많은 편이다.[9] 다만 YS가 집권한 후엔 토사구팽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민정계가 가차없이 축출당함으로써 실질적인 민정계는 절멸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10][11]
어찌됐든 민자당은 1992년 말의 14대 대선에서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정권을 재창출하는데 성공하지만, 2년여 지난 1995년 초 김종필이 김영삼과의 갈등 끝에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이하 자민련)을 창당하면서 떨어져 나가고 그 해 말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비자금 문제와 군사반란 등의 혐의로 구속되면서 구설수에 오른다. 결국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꿨고 이듬해 15대 총선에서는 139석을 얻으며 상당한 선전을 한다.
15대 대선 국면이었던 1997년 11월 21일에는민주당[12]과 합당하면서 지금의 당명인 한나라당을 쓰게 되었다.[13]
3 '잃어버린 10년'
한나라당 초기 로고(1997~2004)
그러나 새정치 국민회의(이하 국민회의) 후보 김대중과 자유민주연합 김종필의 연대(일명 DJP 연합)에 패하면서 한나라당은 잃어버린 10년의 세월을 겪게 된다. 김대중 정부 출범 당시 161석의 과반의석을 점하던 한나라당은 철새들의 국민회의 및 자민련으로의 이적으로 과반의석을 상실하게 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후 2000년 제 16대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과반에 육박하는 제 1당의 자리를 유지하면서 사실한 승리하게 된다. 재보궐선거를 통해 다시 국회 과반의석을 확보하였으나 이어 치뤄진 16대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역비리, 그리고 병풍의혹 등으로 패하고, 특히 96년 안풍사건, 97년 세풍사건에 이어 02년 차떼기 의혹이 그야말로 결정타.[14]
이후 자기반성 차원에서 천막당사로 잠시 옮겼었다. 이후 일부러(...) 조금 허름한(?) 건물로 옮겼었다. 그 위치는 강서구 염창동 274-17, 등촌역 옆 LG전자 강서본점 자리다.
4 다시 여당이 된 후
그러나, 이런 흑역사를 뒤로 하고 천막당사 시절을 거쳐 지방 재보선의 승리로 다시 힘을 비축해 여소야대를 이루어냈으며[15], 차곡차곡 비축해둔 힘과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경제살리기 공약으로 17대선에서 승리하게 되어 10년만에 여당이 된다. 이후 총선에서도 과반수의 의석인 153석을 확보하게 된다.[16]
하지만 광우병 우려로 인한 촛불시위, 당내에서 갈라진 자유선진당과 친박(박근혜)계열, 그리고 친이(이명박)세력의 내부 다툼 등으로 인해 2009년 4/29 재보선에서 5곳의 선거구 중에서 한나라당 후보는 단 한곳에서도 당선되지 못하는 참패를 당해서 긴장 중. 같은 해 10/28 재보선 역시 5곳의 선거구에서 치러졌는데, 수도권 2곳을 민주당에 내주고, 텃밭인 경남 양산에서도 고전 끝에 신승을 거두는 등, 야당에 3:2로 패배하여 심상찮은 민심을 겪어야 했다[17]. 당사자들은 재보궐에서 이만하면 잘했다고 자축하는 모양인데, 한나라당이 확실히 승리한 곳은 민주당 후보가 출마하지 않은 강원 강릉 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안심하긴 어려운 듯.
17대 대선에서 정동영 후보의 과도한 네거티브 선전이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에 한몫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물론, 정동영은 과도한 네거티브 선거 정책이 오히려 독이 되어서(남을 까기만 하고 자신의 장점은 거의 부각을 안 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히도) 이명박에게 압도적으로 참패하는 비참한 말로를 당했지만.
- "진짜 인터넷상에서 정당에서 여론몰이하는 알바가 있다면, 민X당, 민X노X당, 진XX당 등에서 더 많은 알바를 쓰는거 아닐까?" 하는 음모론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보수진보 따지지 않고 모든 정당에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현실성이 있다. 열린우리당은 둘러서 말하긴 했지만 자기들이 직접 운영한다고(…)밝힌 적이 있었다. 한나라당 또한 알바 사례 아이피나 아이디를 추적해서 밝혀낸 사례가 두 건, 그 중 한 번은 위키백과를 반달하려다가 들통난 사건이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에서 알바짓을 하다가 걸린 선례가 한나라당이 가장 많은 사례를 보아 하면, 적어도 다른 당보단 한나라당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풀고 있거나, 아니면 IP라는 개념 자체도 모르면서 알바를 풀고 있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는다. 2008년 7~8월에 여대생 12명을 1천 349만원에 고용, 30개의 정치 기사에 9천 717개의 댓글을 단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알바 의혹이 실제로 드러났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수도권을 주축으로 혼전이 예상되었다. 야당 측에서는 단일화에 성공하면 해볼 만하다고 낙관 중이었으나, 이 단일화라는 것부터가 현실은 시궁창. 그나마 세종시 문제 등 몇가지 이슈로 인해 한나라당이 야당이었던 2006년보다는 고전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선거전까지는 상당한 우세를 자신하였으나 막상 선거가 끝나고 보니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서울시장마저 한명숙이 상당히 따라왔으며[18] 부동의 텃밭이라고 생각했던 경남과 강원도[19]에서도 져버렸을 정도다.
그리고 패배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당내 내분이 다시 불붙었다. 친이 계열은 패배의 책임을 추궁받고 있으며 친박도 사정은 좋지 않은게 박근혜가 친박 계열 후보들만 지원 유세를 해줬기 때문에 당 내에서도 이에 대한 불만이 많고 결정적으로 그렇게 지원해줬는데도 친박은 단체장 자리는 하나도 얻지 못했다. 결국 친이 친박 둘다 지지율 동반 하락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고 이것도 모자라 한나라당은 다시 친박과 친이간의 책임 떠넘기기로 다시 싸우며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한나라당 내에서는 세대교체론이 불거졌다. 사실 한나라당 중진들은 친노 열풍으로 연령이 상대적으로 낮아진 민주당에 비하면 좀 나이가 많은 건 사실이고 젊은층에 어필할 수 있는 후보가 많지 않았다[20].
결국 2010년 7월 14일의 전당대회에서도 친이명박계로 분류되는 의원들이 대거 대표와 최고위원으로 선출되면서 현황 유지로 갈 느낌이었다. 친박근혜계 의원은 하나 뿐이며 그나마도 꼴찌였다. 가능성 있던 무당파나 개혁적 후보들도 당선되지 못했다. 이후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김태호 의원[21]을 제외한 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패하고, 한나라당은 원내대표에 황우여 의원, 당대표에 홍준표 의원을 선출하며 당을 일신하려는 노력을 해 보았지만 오세훈 서울특별시장이 발의한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로 인하여 그야말로 나락의 길로 떨어지게 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측했듯이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투표율 미달로 개봉도 하지 못한 채 끝나버렸고, 오세훈 서울시장은 약속한 대로 서울시장을 사퇴하게 되었다.
이후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중구를 지역구로 하는 나경원 의원을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시켜 재기를 노려보았지만 20~40대 유권자들의 이반과 후보자에 대한 각종 의혹과 그에 대한 반박[ * 현재 재판 진행 중. 2016년 2월 현재 상황 아는 위키러는 추가바람.] 등으로 인하여 여론이 좋지 않아졌고 결국 패배하였다. 그 여파는 커서, 당 내부에서는 백가쟁명식으로 당 쇄신 요구가 분출하기 시작하였고, 도중 한미 FTA 강행 처리까지 겹쳤다. 게다가 설상가상, 혹은 사면초가라는 정도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분당설, 지도부 퇴진 등 큰 위기를 맞았다. 결국 12월 8일 남경필, 원희룡, 유승민 최고위원이 사퇴한 데 이어, 9일에는 홍준표 대표까지 사임하면서 최고위가 사실상 와해되었다.관련 기사 이에 결국 박근혜가 구원투수로 재등판하게 되었다.
2011년 12월 이후 비대위가 설치되어서 위원장에 박근혜가 임명되었으며 각종 쇄신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수습되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이 폭로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관련기사 결국 상황을 타개하고자 2012년 2월 당의 이름을 바꿔 재결성하게 되었고, 기본적인 당헌과 규칙, 당원들은 새누리당으로 옮겨가게 된다.
5 역대 당대표
- 1대: 조순(1997.11~1998.4)[22]
- 2~3대: 이회창(1998.4~2002.5)[23]
- 4대: 서청원(2002.5~2003.1)[24]
- 5대: 박희태(2003.1~2003.6)
- 6대: 최병렬(2003.6~2004.3)[25]
- 7대: 박근혜(2004.3~2006.6)[26]
- 8대: 김영선(2006.6~2006.7)
- 9대: 강재섭(2006.7~2008.7)[27]
- 10대: 박희태(2008.7~2009.9)
- 11대: 정몽준(2009.9~2010.6)
- 12대: 안상수(2010.6~2011.5)[28]
- 13대: 홍준표(2011.5~2011.12)
6 성 도덕 스탠스
동성애 차별 금지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정확히 말하면 동성애에 대한 증오발언으로 어그로를 끄는 보수정치인들은 많지 않으나 사회적 반대를 무릅쓰고 동성애 차별 철폐를 외치는 정치인들은, 더더군다나 보수 정치인들은 훨씬 더 적다. 동성결혼과 DADT까지 사실상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자포자기한 미국 공화당보다도 훨씬 강경한 입장. 적어도 공화당은 차별 금지법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21세기 미국에서 성소수자를 2등 시민으로 만들자는 발언을 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정치인은 없다. 이런 차이는 한국 사회가 전체적으로 보수적이고 성소수자 유권자의 힘이 미국에 비해 크게 약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6.1 동성애
2007년 당시 이명박 후보는 동성애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군 내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표시하기도 했다.
7 역대 선거결과
선거 년도 | 선거종류 | 출마직위 및 총 지지율 | 결과 |
1997년 | 제15대 대통령 선거 | 대통령 후보 - 이회창 | 38.7% - 낙선 |
1998년 |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 6명/16명 74명/232명 224명/616명 |
2000년 |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 | 39.8% | 133명/273명 |
2002년 |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 11명/16명 155명/232명 467명/682명 |
2002년 | 제16대 대통령 선거 | 대통령 후보 - 이회창 | 46.6% - 낙선 |
2004년 |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 | 35.7% | 121명/299명 |
2006년 |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 | 12명/16명 165명/230명 557명/733명 1627명/2888명 |
2007년 | 제17대 대통령 선거 | 대통령 후보 - 이명박 | 48.7% - 당선 |
2008년 |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 | 37.8% | 153명/299명 |
2010년 |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 | 6명/16명 82명/228명 287명/762명 1247명/2888명 |
8 각종 논란
8.1 환생경제
2004년 한나라당에서 만든 정치풍자극이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갖은 인신공격과 색깔론으로 맹비난을 받았고 당시 정당 대표였던 박근혜에 대한 자화자찬으로 빈축을 샀다.
8.2 과거사 청산 방해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이 이승만 정권 때부터 일해온 정부 관료 출신들, 박정희 정권 시절, 전두환 정권 시절 집권 여당이었던 공화당-민정당 인사로 구성됐기 때문에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시절 진행된 과거사 규명 작업의 발목을 잡아 왔다. 즉, 독재정권 시절 벌어진 간첩조작사건, 군 의문사, 정치미제사건, 부정축재 의혹, 친일청산 좌절 등의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반대해왔기 때문에 반대자들에게서 한나라당=보수정당=친일파란 비판을 받아온 주된 이유가 됐다. 결국 MB정부가 출범하자 한나라당은 과거사 진상규명위의 조속한 폐지를 요구하였으며 결국 각종 방해를 받아와 활동에 차질을 빚은 진상규명위는 모두 폐지되었다.
8.2.1 친일청산 법안 반대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 2월 24일, 노회찬 최용규 의원 및 167명이 발의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친일재산환수법)에 전원 반대하였다. 당시 국회 회의록을 보면 12월 8일 열린 제256회 국회 제15차 본회의에서 민주당, 열우당, 민노당 등에서 전원 찬성한 반면 한나라당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본회의에 전원 불참, 2005년 12월 8일자 쿠키뉴스 이에 대해 당시 한나라당이 사학법 반대 장외투쟁을 벌이고 있는 틈에 열우당이 날치기한 것이다란 반론이 있는데, 한나라당이 장외투쟁이 돌입한 시점은 12월 13일[[* #이고 해당 법안이 제안된 시점은 그보다 훨씬 전인 2월이므로 아무 설득력이 없으며, 오히려 대의적 성격을 띤 정당이 스스로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직무유기를 했다는 논리로 역공이 가능하다.
이로부터 1년, 6년 뒤인 2006년 8월 29일, 2011년 4월 29일 일부개정안이 발의되자 국회회의록 관련기사 일부가 찬성했지만 이미 발의된 법안을 폐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어쩔 수 없이 찬성한 것이다란 공격을 받았다.
반면 제16대국회 제245회 제11차 국회본회의(2004년03월02일)에서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안(친일진상법)에 관해서 본회의 당시에는 찬성인 155명 78명이 한나라당 소속이었으나, 법안 처리 며칠 전인 2월 27일에서 당 지도부가 본회의 연기를 요구하는 등 파란을 일으켰고 관련기사, 한나라당이 장악하고 있던 법사위 수정안이 ‘일본군 장교’를 ‘중좌 이상’으로 제한하고, 각 조항에 ‘전국적 차원에서’라는 문구를 집어넣는 등 친일파의 범위를 극도로 좁혀놓아 실효성을 잃고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그보다 훨씬 전인 1월에는 당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반대하여 민문연 등의 빈축을 샀다. 이후 이 법안은 열우당 비공개회의에서 '친일'을 '부일'로, 조사 대상을 한나라당의 요구대로 '지위'에서 '행위'로 변경된 뒤[[* # 12월 '부일' 명기 삭제 뒤 전면개정되어 통과되었는데, 당시 투표의원은 227명으로 찬성의원 166명 중 한나라당 의원수가 55명이었다. 하지만 법안 반대자 2명이 한나라당 소속(이강두·김광원), 기권자 10명 중 7명도 같은 당 소속(김동욱·김기춘·박진·윤두환·하순봉·이상배·정문화)[29]이어서 조롱을 받았다. 당시 국회회의록
8.3 차떼기 사건
너무나도 유명해서 별도 항목으로 분류되었다. 2002년 16대 대선 당시 한나라당이 삼성, SK, 현대자동차, 롯데 등의 대기업으로부터 각 100억원씩을 받는 등 총 823억 원의 뇌물을 받았던 불법적인 정치자금 사건으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뇌물을 수송하여 이슈가 됐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8.4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
전당대회는 한나라당의 최고의결기관이다. 한나라당은 전당대회를 통해 1) 당강령의 채택과 개정 2) 당헌의 채택 및 개정 3) 당의 해산과 합당에 관한 사항 4) 대표최고위원 및 최고위원의 지명 5) 대통령후보자의 지명 6) 기타 주요 당무에 관한 사항의 의결 및 승인을 결정한다. 그런데 당시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는 최고위원 선출 및 대선후보 지명 과정에서 돈봉투가 오가는 등 부정한 관행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2011년 고승덕 의원(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못난 애비가 미안하다' 발언으로 이슈가 된 인물)이 2008년 전당대회에서 돈봉투가 전달된 사실을 폭로하면서 난리가 났다. #
이후 고승덕이 채널A에서 관련 논란으로 대담을 진행하면서 한나라당의 부정한 관행이 언론에서 확대재생산되어 주요 정치권 논란으로 확산되었고 위기감을 느낀 한나라당은 전당대회를 취소, 박근혜에게 전권을 위임한 뒤 검찰에 수사의뢰를 하였다. 이로 인해 박희태 국회의장과 김효재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전당대회 캠프 상황실장이었음)은 각각 직위에서 사퇴하였고 박희태의 경우 혐의를 인정하며 벌금형을 선고받았지만 #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사면되었다.
8.5 법안 날치기 통과
국회선진화법이 없던 시절, 2008년 총선 이후로 원내 과반석을 차지한 한나라당은 원내 과반수의 찬성이 있으면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이를 악용해 각종 법안들을 야당과 협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처리하여 야당 지지자들의 분노를 샀다. 날치기는 주로 새해 예산안 처리 혹은 서민 생계 지원 법안과 관련되었는데, 예산안의 날치기 처리의 경우 정상적인 검토와 심사가 되지 않기 때문에 부실 예산안이라는 비판과 민의 대변 기관인 국회의 성격을 크게 더럽히는 처사란 비판, 그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국민들이 국회 전반에 대해 불신을 갖게하는 계기가 된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국회 공성전 항목에 날치기 진행 과정과 일련의 폭력사태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새해 예산안은 3년 연속 한나라당의 단독 처리로 통과되었다. 그외에 미디어법과 한미FTA재협상안, 최저임금, 4대강 관련 예산안 등도 같은 방법으로 날치기당했다. # ## 특히 2011년 예산안 날치기 사태가 가관이었는데 당시 박희태 국회의장[30]이 질서유지권을 발동하여 국회 경위들의 호위 속에 처리하였다. 결국 예산안 처리에서 이전에 야당과 합의한 내용과 다르게 처리되는 경우가 빈반했으며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고흥길 정책위의장이 사퇴하기도 하였다.
8.5.1 미디어법 날치기 통과
소위 '종편' 방송이 생기게 된 법안 통과 과정에서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대리 투표 등 갖은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여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였으나, 투표가 종료되고 보니 재적 145명, 찬성 142명으로 재적 의원의 수가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했다. 하지만 의장을 필두로 재투표라는 전례 없는 절차 무시 방식으로 법안이 날치기 통과되었고 결국 재적 153명, 찬성 150명으로 가결되었다. 한나라당의 다음과 같은 처사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헌법재판소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단 사실을 인정했지만 법적 효력 또한 인정하였다.
8.6 성추행 논란
한나라당은 2012년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기 전까지 보수정당을 자처함에도 불구하고 부적절한 성적 태도를 보여와 지탄을 받았다.
2007년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강재섭 의원의 경우, 중앙일간지의 수위소설 주인공인 '조철봉'을 언급하며 "조철봉이 요즘 왜 안 해? 하루에 세 번 하더니 한 번은 해 줘야지. 너무 안 하면 철봉이 아니라 낙지야 낙지"라고 한 발언으로 도마에 올랐으며[31] 최연희 의원의 여기자 성추행 사건,미안, 식당 아줌만 줄 알았어. 이명박 대통령의 '마사지걸' 발언, 박계동의 술집 여종업원 성추행[[* 관련기사, 2010년 7월에는 대학생들과의 뒤풀이 모임에서 벌어진 강용석의 "아나운서가 되려면 다줘야 한다", "대통령이 너만 쳐다보더라. 김윤옥 여사만 없었으면 네 휴대전화 번호를 땄을 것" 성희롱 발언 등 성추행 파문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야당 지지자들은 '성나라당', '성희롱당'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만들어 부르게 됐으며 새누리당으로 당명이 바뀐 지금도 '색누리당'이라 조소하고 있다.
8.7 2011년 재보궐선거 사이버테러 사건
검찰 수사 결과 한나라당 의원과 정부관료가 공모하여 디도스 테러를 가한 사건. 결국 책임을 지고 지도부가 사퇴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자세한 건 해당 항목을 참고.
9 그 외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 당 이름을 패러디한 듯한 '핵나라당'이 나오기도 했다. 핵나라당의 대표는 '정희원'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실제로 출마하지는 않았지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만든 공보가 뭔가 허경영스러워서(...) 인터넷에서 유머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분이 돌아온다!! 핵.나.라.당!- ↑ 창당은 2006년에 했지만 한나라당이라는 당명으로 변경 등록한 건 2012년이다.
- ↑ 창당은 2013년에 했지만 한나라당이라는 당명으로 변경 등록한 건 2014년이다.
- ↑ 외신에서는 후속 정당인 새누리당은 한국어 발음을 옮긴 Saenuri Party를 쓰는 게 일반적이지만 한나라당은 영어로 번역한 Grand National Party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이 보였다.
- ↑ 물론 구자체를 고집하는 소수의 보수파 일본인을 제외하고는 이런 표기는 안 쓴다고 봐도 무방하다.
- ↑ 물론 역사적 가나 표기법을 고집하는 소수의 보수파 일본인을 제외하고는 이런 표기는 안 쓴다고 봐도 무방하다.
- ↑ 북한과 대한민국을 통일시키겠다는 의미에서 한나라당(하나가 된 나라)인줄로 아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데, 근거가 없다. 그러나 멸칭인 딴나라당도 그렇고 사람들 인식은 하나 된 나라라는 의미가 명백한 듯.
- ↑ 다만 진보와 마찬가지로 이 노선은 한국에 들어와 의미가 상당히 변했다.
- ↑ 창당 직후부터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기 전까지
- ↑ 민정당의 인적구성은 대부분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인사들이었다. 다만, 민주공화당의 인적구성은 이승만의 자유당과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 ↑ 군부정권시절 주류는 육법당이라고 불릴 정도로 군인 출신과 법조인이 주류였는데, 한나라당의 후신인 새누리당 역시 당내에 법조인과 관료, 교수 및 전문가 출신 의원이 많다. 이는 운동권 투사 출신이 많은 민주당과 대조되는 면이다
- ↑ 살아남은 5공 인사라고 해봐야 최병렬이나 김용갑 정도였는데 이 두 사람도 2008년을 끝으로 완전히 정계에서 은퇴했다.
- ↑ 여기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 참조. 간략히 설명하자면 원래 김대중이 한축을 이루던 당이 민주당이었는데 1995년에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떨어져 나갔고 이 때의 잔류 세력이 민주당 간판을 지키다가 신한국당과 합당한 것. 현재의 민주당은 엄밀히 말하면 새정치국민회의가 2000년에 새천년민주당으로 확대 개편된 것이 이어진 정당이다.
- ↑ 초대총재인 조순이 작명했는데, 순우리말이라 처음에는 한나라당이라는 당명을 쓰는데 저항이 많았다 한다
- ↑ 비록 조직의 일부라도 하더라도 그 일부가 조직의 중추부니 욕 먹어도 싼 것은 맞지만, 그것 때문에 애꿎은 하부 조직은 아무 것도 안 해도 싸잡혀서 욕 먹는게 문제고 내부에서 불만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 ↑ 지금도 한나라당 내부에서 뭔가 일이 터지면 당의 일부에서는 '천막당사 시절을 생각하라!'는 투의 반성조의 발언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당 내부에서도 충분히 반성을 하고 되새겨 볼만한 과거였던 듯하다.
- ↑ 이후 친박연대 지역구 당선자들이 복당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현재는 180석 남짓된다.
- ↑ 그러나 민주당 역시 텃밭인 전주에서 무소속 출마한 정동영에게 참패해 이미지를 크게 구겼다.
- ↑ 개표 결과 0.6% 2만 6000여표 차이였다. 하지만 끝내 강남몰표를 이기지 못하고 져버렸다.(강남 3개 선거구에서만 12만6930표 차이가 나왔다. 참고로 다른 22개 선거구에서는 1만표 이상의 차이가 난곳은 불과 3곳이며 3만5245표 차의 관악구를 제외하면 1만 1000표 정도차이 였다.)
- ↑ 북한과 가까워서인지 친한나라당 성향이 강한 곳이다.
- ↑ 지방선거에서 20~30대가 두배 가까이 민주당을 지지했다.
- ↑ 1998년 제2회지방선거로 37살의 최연소 경남도의원에 이어 , 2002년 3회지방선거 당시 41살의 최연소 거창군수를 거쳐서 , 2004년 보궐선거 당시 43살이라는 최연소로 경남도지사를 지냈던 인물이 맞다.
- ↑ 구 민주당 계열의 수장이다. 그러다가 2000년 15대 총선에서 공천탈락해서 민주국민당을 창당하지만 낙선해서 정계에서 은퇴했다.
- ↑ 당시 한나라당의 총재로 재임했으며, 15대 총선에서는 김윤환, 조순, 한승수 등의 거물을 줄줄이 숙청하기도 했다. 이후 2002년 대선출마로 인해서 당 총재직과 전국구 의원(1번)직을 사임했다.
- ↑ 당시 5선 지역구 국회의원(서울 동작구 갑)을 맡고있었다. 이후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후 친박으로 노선을 바꾸었으며, 현재 친박세력의 수장역할을 하고 있다. 당내 직함은 새누리당 최고위원이었으나 총선 직후 패배 책임을 지고 지도부 총 사퇴로 물러남
- ↑ 노무현 대통령 탄핵여파로 사퇴했다. 공천탈락해서 정계에서 은퇴했다.
- ↑ 현재 대한민국 대통령이다.
- ↑ 저거 한번 쥐어박고 싶었어로 유명한 대표이다.
- ↑ 보온병을 폭탄으로 착각한 그 분 맞다. 인천시장을 지냈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며, 현재 경남 창원시 시장을 맡고있다.
- ↑ 나머지 3명은 박상희·박병윤·양승부로 민주당 소속 의원이다
- ↑ 2014년 코디 성추행으로 논란을 산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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