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선진당

대한민국의 충청지역 보수정당
국민중심당자유선진당선진통일당
개요
로고
정식명칭자유선진당
한자명칭自由先進黨
영문명칭공식 : Liberty Forward Party(LFP)
설립일2008년 2월 1일
해산일(개명)2012년 5월 29일
해산일(새누리당에 합당)2012년 10월 24일
주소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70길 23, 용산빌딩 3·4층
마지막 대표이인제(비상대책위원장)
6선(13,14,16,17,18,19대)
원내대표성완종
초선(19대)
19대 국회 의석수(최종)5석 / 300석
홈페이지

1 개요

대한민국의 과거 정당. 심대평 전 충남도지사 세력인 국민중심당17대 대선이회창 후보 지지 세력이 합쳐져서 2008년 2월에 탄생했다. 약칭은 '선진당'.

그 해 4월 18대 총선에서 18석을 확보하였고 창조한국당과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했으나 2009년 9월 교섭단체가 해체되었고, 이후 2010년 지방선거2012년 4월 19대 총선에서 연달아 참패하면서 2012년 5월 당명을 선진통일당으로 교체했으나 6개월 뒤인 2012년 11월 새누리당에 합당되었다.

2 역사

2.1 창당과 교섭단체 구성

데뷔 이후 처음 치러진 총선인 18대 총선에서 지역구 14석, 비례대표 4석(비례 득표율 6.8%) 총 18석을 획득, 20석이 기준인 원내교섭단체 지위 획득에 아슬아슬하게 실패했다. 하지만 충남과 대전의 16석 가운데 13석을 확보하는 등 이정도의 확보도 크게 선전한 것으로 여겨지는 판이었다.[1] 이회창 후보는 이로서 정계 복귀에 안착했다. 2008년 촛불집회에서 여당을 비판하는 등 제3지대 위주로 "보수 야당"으로서의 입지를 세우려고 했다.

2008년 8월 6일 당시 3석의 문국현의 창조한국당과 "선진과 창조의 모임"을 걸고 원내교섭단체를 하게 되었다. 이때 선진을 교섭단체명의 앞으로 하는 대신 1년씩 교대롤 하는 원내대표는 4개월만 권선택 의원이 하고 문국현 의원이 2009년 1년 짜리 원내 대표를 맡기로 하였다. 다만 창조한국당의 이한정 의원(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과 이를 승계한 시민세력 출신 유원일 의원은 여기에 불참하였다. 그리고 이 선택은 문국현 의원의 정치생명에 결과적으로 큰 악수가 되었다. 자유선진당이 교섭단체를 자치하면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보건복지부를 감사)의 위원장은 자유선진당에게 넘어갔고 이후 18대 국회 내내 이어겼다. 당시 각 분과 위원장은 한나라당 11명, 민주 6명, 선진 1명이었다.

2009년 8월 30일 갑작스러운 심대평의 탈당선언(이회창 대표와 불화가 있었다)으로 19석이 되면서 창조한국당과 합쳐도 20석이 안되어 교섭단체구성은 결국 시망. 부족한 1석을 급히 채우기 위해 소속만 창조한국당일 뿐 사실상 독자 행보를 보이고 있던 유원일 의원과 접촉했으나 거절당했고, 당적 그랜드슬램 달성을 노리는 무소속 이인제 의원에게 입당을 제의했지만 무산. 거기에다가 창조한국당의 문국현마저 의원직 상실 크리를 맞는 바람에 제대로 안습상태가 되어 버렸다.자민련 시절의 영광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결국 9월 1일 원내교섭단체는 해체되었다.

이후 이회창은 스스로 비판받던 '제왕적 총재'직에서 물러나 대표로서 이름을 바꿨다. 정부의 세종특별자치시 건설계획 수정안(즉, 행정기관 이전 취소)에 반발해 소속 의원들의 전원 사퇴서를 결의했으나 이회창 대표의 측근인 이영애 의원(비례대표)이 수정안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사퇴서를 찢어버리는 해프닝을 빚고, 충청북도에서 도지사 후보 공천을 하지 못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충청도의 자존심'을 슬로건으로 2010년 지방선거를 치른다.

2.2 2010년 지방선거의 참패

그리고 결과는…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서울특별시, 충청남도, 대전광역시 세 곳에 광역단체장 후보를 냈지만, 대전의 염홍철 후보만이 당선되었고, 충남은 당 원내대표를 지낸 박상돈 후보가 민주당의 풍운아 안희정 후보에게 역전패당하면서 대전 자민련 인증을 확실히 했다.[2] 서울에서 히든카드로 출마한 지상욱 후보(심은하의 남편)는 진보신당 노회찬 후보보다 득표율이 낮았다.

앞서 말했듯이 충북지사는 후보도 못내는 안습한 꼴을 겪었다. 거기에 충남에서도 기초단체장 절반을 비 선진당에 내주기까지 했다(선진 7, 한나라 4, 민주 3)[3]. 충북에서 3곳의 지역구를 확보했으나 이것은 이용희 의원의 남부 3군 세력권이었으므로 의미가 크지 않다.

이런 참패 속에 이회창이 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당 대표에서 물러나는 듯 했지만 1주일 만에 도로 복귀했고, 박상돈 전 원내대표의 도지사 출마로 치뤄진 2010년 7월의 천안을 보궐선거에서는 14%의 지지율로 3위에 그치는 등 (선거는 한나라당이 승리) 같은 선거에서 역시 참패한 은평구의 창조한국당과 함께 공멸할 징조를 보인다. 한편 당의 생명을 걸었던 세종시 문제는 결국 한나라당 친박계의 힘으로 수정안이 부결되었으나, 이것은 박근혜 의원의 승리였지 선진당의 승리가 아니었다.

2011년 9월 8일 지방선거 당시 탈당했으나 공주에서만 승리를 거둔 심대평의 국민중심연합과 다시 합당을 하고, 이름도 '자유선진당' 그대로 가기로 결의했다. 덤으로 무소속인 피닉제이인제 의원도 같이 입당하여 어느정도 세를 불린 편이다. 하지만 의석은 18석

2.3 19대 총선의 참패와 정당 개명


자유선진당 19대 총선 광고. 광고만 좋았다 뒤에 여자는 웃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맞이하게 된 19대 총선…. 안그래도 어려운 상황에서 심대평과 이회창이 내분까지 일으키는 최악의 조건하에 선거를 치뤘다. 이회창 의원은 불출마를 선언했고, 이에 반발해 탈당하라는 발언까지 나오는 등 사실상 심대평의 독자 세력 선거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선진당은 50석 이상을 얻겠다는 허황된 꿈에만 빠져 있었으니... #[4]

그 결과 세종특별자치시에서는 원래 연기군 출신 의원이던 심대평 대표가 민주통합당 이해찬 전 총리에게 큰 차로 밀려 떨어졌고, 달랑 5석 건졌다. 17대 총선 당시 자민련의 4석보다 1석 많기는 한데, 그때 자민련은 비례대표 3% 득표에 실패, 즉 4석이 다 지역구였다. 그렇게 김종필 전 총리도 의원이 못됐고 반면 2012년 자유선진당은 지역구는 필사의 이인제를 포함한 3석으로 줄고, 비례대표 선거에서 간신히 3.2%를 차지해서 2석을 추가했다. 그나마 3%를 차지한게 신기하다 그쵸

충북에서는 역시나 이용희 의원이 민주통합당으로 가버리면서 힘을 못쓰고 전멸했고, 정당득표율에서는 통합진보당에도 밀리는 안습한 꼴을 겪었다. 4년 전 5석을 쓸어담은 대전은 민주통합당과 새누리당에게 모조리 뺏기고 말았으며, 당의 존립기반이라는 충남에서도 천안과 공주 등 도시권을 민주당에, 농촌권을 새누리당에 다 뺏기고 말았다.

이 총선 패배는 스스로 자멸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애초에 텃밭이라는 충청남도에서도 30%대 후반의 허약한 지지도가 2010년 지방선거 이래 계속되어왔고, 그 이후 2년 간 자유선진당은 충청권의 자존심 운운 이외에는 별다른 노력을 한게 없었다. 사실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5]

재보궐 선거에서도 자유선진당은 2008년 재보궐선거연기군수와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태안군수만 승리를 거두었다. 애초에 자유선진당이 나설 지역구 자체가 없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서산시장에서 0.6% 차로 패했다. 그나마 당황스러운 것은 연기군은 심대평의 오랜 텃밭이고, 태안-서산 지역구는 19대 총선에서 선진당이 승리한 3곳 가운데 하나다. 재보궐이 터지는 원인도 생각해보면 그렇게 좋지도 않고 말이다.

따지고 보면 공천 과정도 엉망이었다.

  • 우선 현역으로 있던 의원 대부분을 공천했다. 불출마한 사람이래봤자, 이회창이나 변웅전 정도였고[6] 공천 탈락한 사람이래봤자 부여군, 청양군'딱','딱' 이진삼 정도였다.그러나 이진삼의 경우는 이미 75세나 되어 고령일대로 고령이라 어디에서라도 쳐냈어야 할 인물이었다. 또한 하나회 출신이기도 했으니 잘리지 않는게 이상한 인물이다.(...)[7]
  • 가장 황당한 경우는 대전 유성구에 공천되었던 송석찬 후보의 경우였다. 그는 이인제 뺨치는 아주 화려한 정치경력으로 유명한데, 18대 총선에는 민주당으로 나온 사람이었다(...)[8] 한편 민주통합당의 후보는 자유선진당으로 승리했다가 막판 탈당해 경선에서 승리한 이상민이었다. 즉 후보는 같은데 당이 바뀐 괴상한 케이스가 되었다(...) 송석찬은 민주당 경선에서 패배하자 자유선진당으로 왔고 자유선진당은 어차피 후보가 없으니까 옳타꾸나 하고 받은 것. 결국 이상민 의원이 다시 승리.
  • 한편 이회창 의원의 원 지역구였던 홍성군, 예산군에는 서상목을 공천했는데.... 아시다시피 세풍 사건으로 한나라당에서도 밀려난 인물이라 퇴물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었다. 당연히 새누리당 홍문표 후보에게 참패하고 낙선.

심대평 전 대표 역시 총선 패배에 한몫했다. 애초에 역량이 없는 경륜과 신뢰의 지도자[9] 정치인으로서 지역주의 읍소 밖에 남은 카드가 없었는데다가, 선거대책본부를 자신이 출마한 세종시로 옮기는 병크를 저지른다. 이건 누가 봐도 자신의 정치생명 더 늘리기 위한 꼼수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총선을 전력으로 도와도 모자란데 자신의 원 지역구였던 연기군(세종시)로 출마해버렸다(...) 당장 상대 후보는 그래도 명색이 텃밭 관악을을 버리고 온 이해찬이었는데 말이다!

결국 이 패배 여파로 심대평은 대표직에서 사퇴했고, 이인제가 비대위원장을 맡았다.

5월 20일, 말 그대로 올 것이 왔다. 이회창 전 대표가 탈당을 선언한 것이다. 당내 두 축중 하나인 이회창 전 대표의 탈당으로 자유선진당은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았으며, 미비하게나마 남아있던 비충청권의 세도 완전히 상실되었다. 심대평 대표야 총선에서 참패를 했으니 재기불능.

이런 상황에서 껍데기만 남은 당을 이번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는 정당 브레이커 이인제가 접수했다. 자유선진당은 선진통일당으로 당명을 바꾸게 되어 자유선진당이란 이름은 5월 29일로 사라지게 되었다. 다만 영문 이름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선진통일당은 대선 과정에서 일종의 역할론을 펼쳐보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하였고 이회창 전 대표와 함께 새누리당에 앞다퉈 손을 잡고, 그 해 11월 합당하여 소멸된다. 합당에 반발한 일부 인사들은 민주통합당으로 들어갔다.

3 역대 당 대표

3.1 총재

이회창 총재(2008.2.1~2010.3.17)

3.2 대표최고위원

4 세력과 이념 분석

선진당은 초기부터 끝까지 충청도의 자존심을 내세웠지만, 창당 당시의 실상은 김종필의 정계 은퇴 이후 세가 줄어든 구 자유민주연합 출신 중 대전광역시-충청남도 지역 인물들이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충남 연고를 주장했던 전국구급 인물인 이회창을 중심으로 뭉친 것에 가까웠다.

충남(대전도 범충남권이다)만 거론되는 이유가 있다. 충청북도 지역은 애초부터 자민련의 1995년~1998년의 전성기를 제외하고는 자민련의 텃밭이 아니었으며(멀티나 앞마당에 가깝달까?), 자민련의 몰락 이 후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2파전이다. 자유선진당은 창당 직후인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충북지역 8개 선거구 중 6개 선거구에만 후보를 냈으나 1개 지역구 승리에 그쳤다. 더군다나 그 1개 지역구도 민주당에서 탈당하여 보은군, 영동군, 옥천군 남부 3군의 지지가 확고한 이용희 의원이 당선된 것. 당시 충북은 민주당이 총 8석 중 6석이라는 17대 총선에 이은 대승리를 거두었다.

당 역사에서 보듯 크게 이회창, 심대평, 이인제 세력이 이합집산을 계속했다. 자유선진당이 이런 복잡한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것은 자유선진당의 탄생 배경 자체에 있다. 실질적으로 한나라당과 이념상의 큰 차이는 없지만 충청권 정당으로 오래 딴 살림을 차려왔던 사람들과 여러 사정으로 인해 한나라당(혹은 민주당)과 한 배를 타기엔 무리가 있어 독자적 세력화를 꾀하려는 사람들이 뭉쳤던 것.

전자의 경우 근원격인 신민주공화당 이후 지역감정 구도 아래에서 전통적으로 충청도를 차지해왔기에 당의 인물들 상당수가 충청도 지역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고, 그나마 자민련에서도 쓸만했던 사람들은 다 양당으로 빠졌기 때문에 남은 인물 중 네임드 인물이 적었다.

자유선진당 인물난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현재 당 대표를 맡고 있는 심대평 의원의 경력을 보아도 심히 빈약한 인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전문 행정공무원 출신인 심대평은 17대 국회의원 보궐선거로 처음 국회의원이 되기 전까지는 민선 충남도지사를 3번 역임했다. (지방자치제 이전에는 관료로 임명직 관선 지사를 한 경력도 있으며 청와대 행정수석비서관을 역임한 적도 있다.) 물론 충남지역에서는 지역을 대표하는 정치-행정가라고 해줄 수는 있겠지만, 철저하게 지방 인물일 뿐이다.

당 출범 이후부터 중심인물격인 심대평과 이회창이 계속해서 충돌하는 것도 이 배경을 감안하면 설명이 가능하다. 이른바 '충청의 맹주' 로서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과 국회의원직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심대평과 보다 큰 그림, 곧 전국 정당화를 꿈꾸었던 이회창은 지향이 다르다. 이회창의 인지도와 장악력, 독단적이란 평을 들을 수준의 행보에 따라 당은 의도대로 움직이는 편이었지만, 이에 반감을 가진 심대평의 세력 등이 이탈을 하게 되면서 이회창의 리더십도 점차 흔들리게 되었던 것이다.[12]

이외의 국회의원 명단을 살펴봐도 (정치에 아주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닌 이상) 알 만한 인물은 이회창, 이인제, 박선영, 조순형, 변웅전, 류근찬 의원 정도에 불과하다. 이들 중에서도 변웅전은 전 MBC 아나운서, 류근찬은 전 KBS 뉴스9 앵커 출신으로 친숙한 얼굴이었고, 박선영은 헌법학 교수 출신으로 탈북자 관련 행보와 자유선진당의 붙박이 대변인으로서 알려진 것 뿐이다. 즉,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정치적 거물이라 할 사람들은 이인제와 이회창, 조순형 의원 뿐이다. 그나마 조순형은 18대 국회의원 중 최다선(7선)의원이었지만 원래의 지역구 및 정치적 기반이 서울이고, '미스터 쓴소리'라는 기존 별명과 다르게 대통령 탄핵에 앞장섰다가 민주당을 망친 인물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출당에 가깝게 민주당을 나와서 그동안의 정치적 행보와 상반된 정당에 입당한데다 그나마 지역구도 아니고 비례대표제로 얻은 의석이라 당내에서의 발언권이 그리 크지 않았다.[13]

염홍철 시장이나 권선택, 이상민 의원 등 열린우리당 출신 충청권 거물들도 많이 합류했던 건 사실이다. 조순형 의원과 함께 이들의 성향은 크게 드러나진 않았지만, 막판에 이회창 총재의 권력이 줄어들면서 의원들의 개개인의 활동 폭이 넓어져 정치성향에서 (중도 성향의) 의외성을 드러낼 때도 있었다. [14] 대표적인 경우가 앞서 말한 촛불 시위 정국에서의 여당 비판을 들 수 있고, 또 하나의 큰 사례는 2011년 한미자유무역협정 통과 반대와 재협상를 당론으로 설정한 것이었다. (그 외 의료민영화에 반대하기도 했다.) 이런 자유선진당의 변화에서도 이회창 의원은 유일하게 여당에 동조해 찬성표를 행사했고, 결국 탈당 행보의 시작이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이런 복잡한 사정은 당의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초반의 자유선진당은 정치적 노선을 보수주의로 하되 보수주의이지만 한나라당과는 다른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으며, 창조한국당과의 교섭을 통해 1년 반 동안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누리기도 했다. 물론 자유선진당과 창조한국당은 원내교섭단체라는 한 배를 타고 있었지만, 사실 남이나 다를 바 없었다. 단적인 예로 2008년박왕자씨 피격사건 때 창조한국당은 청와대의 대북 강경책을 비판하는 논평을 내놓았지만, 자유선진당은 이 기회에 북한의 해상에 쳐들어가야 한다고 논평을 내놓았을 정도였다.

이회창이 2선으로 물러나게 된 이후 자유선진당이 어떤 정치적 사안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거나 정책을 내놓는 일은 크게 줄어들었다. 뭐 애초에 원내3당으로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 신민주공화당 이래의 전략이었으나, 이렇게 이미지가 줄어들면서 그보다 의석이 적은 민주노동당은 물론 원외정당인 진보신당, 국민참여당보다도 의제를 점하는 일이 없어 정치적 비중이 창조한국당이나 미래연합과 동급이라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되었던다.

정당의 정의가 공공 이익의 실현을 목표로 하여 정치적 견해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집단 이고 그 목적이 지지층을 대변하고 정권을 창출하는 데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자유선진당은 원내 3당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에 기반한' 지지층은 있되 이념적인 지지층은 희박했고, 심지어 의원별로 색이 달랐다. 한마디로 구시대적인 지역 분할 구도에 안주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19대 총선 당시 변웅전 전 대표의 발언이었던 "경상도에는 당이 하나 밖에 없는데, 충청도에는 당이 여러 개 있다"는 발언도 자세히 곱씹어 보면 병맛이 충만한 발언이 아닐수 없다...

물론 애초에 해외를 포함해서 정당이 이념적인 지향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초창기엔 정당은 지역이나 인맥 중심의 '당파'에 가깝다가 점차 이념적으로 해쳐모이게 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이념이 생긴 뒤에도 지역적인 지지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단순히 특정 지역에서 표를 몰아준다고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길게는 공화당-자민련까지 이어지는) 자유선진당은 한국적인 측면에서 양당제가 완성되는 시기에 소멸되어야 했던 과도기적인 정당이었다. 자민련이 '원조 보수'론과 내각제를 지향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신한국당의 개혁 행보와 이에 따른 자민련의 충분한 입지 확보로, 내각제 개헌시 가장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롭게 변한 정치환경에서 이회창이 선택할 수 있었던 스탠스는 '(원칙은 세우는) 보수 야당'이었다. 이것은 여당 내 소수파였던 박근혜계와 정확히 겹쳤다. 더구나 200석에 가까운 압도적인 여당의 의석 수 앞에서, 캐스팅보트의 지위는 애시당초 상실했으며, 그렇다고 자유선진당이 민주당과 강력하게 결합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또한 이회창 총재가 17대 대선 후보 시절부터 내세웠던 지방 세력의 확보를 위한 '강소국 연방제 개헌' 연방제 통일안이 아니다! 역시 같은 최후를 맞았는데, 여당 친이파의 개헌 계획이 다음 대선의 후보로 이미 확고했던 친박파의 반발과 함께 무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회창 총재의 의원 장악력도 '제왕적 총재'라는 비판과는 별개로 상당히 떨어졌다. 남의 말을 안 듣는거랑 남을 휘두르는건 다르다 결국 여러모로 자유선진당의 입지는 좁아질 수 밖에 없었고, 새누리당에 흡수 되는 운명을 맞게 된 것이었다.

5 역대 선거결과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18/299 6.9%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광역단체장 1/16 기초단체장 13/228 광역의원 41/76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5/300 3.2%
  1. 당시 충남에서 자유선진당이 아닌 지역구로는 2석이 있었다. 민주당이 1석을 확보했고, 나머지 1석은 무소속의 이인제였다. 대전에서는 민주당이 1석을 차지했다. 충북에서는 8석 중 1석만을 획득하는데 그쳤다.
  2. 그나마도 염홍철 후보는 민선 3대 전직 시장으로 2006년 지방선거에서도 아깝게 패배한 독자적 인물이었다. 박근혜의 '대전은요?'에 당한 그 분
  3. 심대평의 국민중심연합이 공주에서 1곳 승리.
  4. 이는 단순히 구호상의 허세에 가까운데, 15대 총선 당시 자민련이 얻었던 의석을 재현 하겠다는 뜻이다. 그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 건지는 뻔할 뻔자고... 과거 자민련이 50석이 되는데 일조했던 대구는 이미 철저한 새누리당 지지세로 돌아섰고, 수도권은 택도 없고, 그나마 비벼볼 언덕인 충청권도 제대로 잡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19대 총선에서는 자유선진당의 공천 신청자는 겨우 32명이었다.
  5. 사실 그렇지도 않았다. 통합진보당의 예를 보듯이 자유선진당도 비슷한 성향의 정당인 새누리당과의 연대로 충청권에서 자유선진당 단일후보를 내고, 그 이외 지역은 새누리당에게 양보하던가, 아니면 반대로 수도권에서 일정 지역구를 양보받는 대신 자유선진당도 충청권 일부를 양보해주던가 하는 방식으로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고 그것도 아니라면 정책이라던지 대북 이슈를 선점해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방법 등이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새누리당에서 지속적으로 제의해왔지만 자유선진당은 모두 거절했고 후자의 경우는 박선영 전 의원이 탈북자 강제북송 반대로 단식투쟁을 벌이는 등 대북 이슈 자체는 먼저 선점했지만, 자유선진당은 여기에 거의 관심도 주지 않았고, 그마저도 후반가서는 새누리당 의원들이 여기에 대거 동참하는 바람에 결국 이 이슈조차도 뺏기고 말았다.실제 자유선진당 인사들중 여기에 그나마 관심을 보인 것은 이회창뿐이었고 그 이외에 관심을 보였거나 지원해준 것은 전부 새누리당이었다. 이런 점으로 보았을때 할 수 있는것이 없었다는 말은 틀린 말임이 자명하다.
  6. 그나마도 변웅전은 비례대표로 공천하는 병크를 저지른다.
  7. 그나마도 그는 공천 탈락에 반발해 무소속 출마를 했다. 그러나 선진당 후보와 아예 한 자리수를 득표한(...) 이진삼 후보의 표를 합쳐도 당선된 후보보다 한참 밀리는 안습한 일을 겪었다.
  8. 송석찬 전 의원은 원래는 오랜 동교동계였다. 16대 총선 전후로 새천년민주당 소속. 그러나 당시 자민련은 참패하여 교섭단체를 구성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민주-자민련, 즉 DJP 공조는 일단은 한번 깨진 상태였으나 과반을 확보하지 못한 민주당은 한나라당을 견제하기 위해 '공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송석찬 후보와 충청권 2명의 의원을 탈당시켜 자민련에 입당시키는 '의원 꿔주기'를 시전한다. 이때 송석찬이 남긴 불후의 유행어가 '한마리 연어 되어 (민주당으로) 돌아가겠다'(...) 나중에 자민련의 강창희 의원(19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역임)이 이에 반발해 출당되면서 한명 더 보내야했다. 송석찬은 나름 충정으로 맡은 고육지책이었으나 결국 이로서 철새 정치인으로 이미지를 구기고 줄도 끊어져, 이리저리 원외 신세를 돌다가 간신히 민주당에 복당한 상황이었다. 왜냐면 이상민 의원이 나가서(...)
  9. 17대 대선에 중도 출마했던 슬로건 드립이다.
  10. 이회창 총재가 총재직을 대표최고위원으로 명칭을 바꾸기 전 까지는 대표최고위원직이 없었다.
  11. 비대위원장 포함
  12. 이회창이 '축출'되었다는 견해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회창은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대표적 사례로, 19대 총선에서 이회창 전 대표의 오랜 측근이었다가 심대평 대표와 손을 잡고 이회창의 정계 은퇴를 주장한 사람이 있었는데, 논란이 불거지자 심대평 자신이 무시하고 이회창을 칭찬하며 무마해버렸다(...)
  13. 19대 총선에 서울 중구에 출마하려다가 '2세 정치인의 대결'이란 말에 스스로 사퇴, 양보하고 의원직 임기를 종료한 후 정계를 은퇴했다. 사실 조순형 의원은 이인제와도 악연이 있다. 민주당(2005년) 참조.
  14. 다만 충남 지사로 출마했던 박상돈 의원의 경우 열린우리당 소속이었으나 당시부터 가장 보수적인 의원으로 손꼽혔고, 그래서 특별한 돌발 행보를 보이진 않았다. 지방선거로 정계를 은퇴하기 까지 의원 기간이 짧기도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