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1943년생으로, 1958년 프로에 입단했고, 이후 1962~63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기타니 미노루 도장에서 수학했다.
귀국 후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 국수전 6연패, 패왕전 7연패를 기록하는 등 조남철 이후 한국바둑의 최강자로 군림했다. 일본바둑과 두 점 이상 차이가 났던 당시 한국바둑계에서 그나마 조남철과 함께 정선 정도의 치수로 버틸 수 있는 기량을 보유한 프로기사였다.[1] 1970년대 중반 이후로는 조훈현과 서봉수에 밀려 점차 하락세를 보였다. 1983년 승단대회를 통해 九단으로 승단함으로써 한국 바둑 사상 두 번째 九단이 되었다.[2][3]
현재는 세계사이버기원 이사로 재직중이며, 그의 고향인 전라남도 강진군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국제 아마추어 바둑대회[4]가 매년 열리고 있다.
세계 2위 연승기록인 40연승을 가지고 있다. 김인 9단보다 더 많은 연승기록이 있는 기사는 이창호(41연승) 한명 뿐이다.
2 주요 경력
제10기 ~ 제15기 국수전 우승
제6기 ~ 제12기 패왕전 우승
제8기, 제12기, 제13기 최고위전 우승
제1기 ~ 제7기, 제9기 왕위전 우승
제2기 명인전 우승
제1기 백남배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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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에서 프로 입단 직후 일본으로 유학한 조훈현 九단의 경우 처음에는 일본의 소년기사들과 석 점 정도 실력차가 났다고 한다.
- ↑ 첫 번째는 조훈현, 세 번째는 추대를 받아 특별승단한 조남철.
- ↑ 바둑평론가 박치문씨의 회고에 따르면 원래는 김인 九단이 첫 번째 九단이 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승단대회에서 진작 승단 점수를 채웠지만 본인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고, 한국기원측의 행정처리도 그리 체계적이지 않던 시절이라 조훈현이 이미 九단으로 승단한 이후에야 자기가 승단 요건을 충족했음을 알았다고...
- ↑ 공식 명칭은 '김인국수배 국제시니어바둑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