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image/001/2008/05/15/AKR20080515203900005 01 i.jpg
1 개요
전 명성그룹의 회장, 1938년 ~
한국 레저산업의 선구자이자 최초의 콘도 사업으로 대규모 그룹을 일군 사업가. 동시에 제5공화국 시절 대표적인 기업 길들이기의 희생자.
2 생애(명성그룹 설립 전까지)
1938년 전라북도 임실군에서 태어났다. 전주공업고등학교, 한양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였고, 호남비료에 입사한다.
이 때 능력을 인정받아 입사 2년만에 안전과장으로 초고속 승진하였다[1].
김철호가 본격적으로 사업가로 변모한 것은 1966년 전라남도 광주시[2]에서 금강운수라는 택시회사를 세우면서 시작된다. 당시 택시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동차의 수급이었다.[3] 지금처럼 자동차를 생산하는 기업이 많지 않았고, 자동차 생산량마저 한계가 있었기 때문. 따라서 김철호는 당시 택시 자동차로 보편적으로 쓰이던 '코로나' 승용차 확보를 위해 당시 승용차를 독점적으로 생산하던 신진자동차 김제원 회장 집으로 매일 아침 찾아가 사정했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이 통해서 김철호의 운수업체는 130여대의 택시를 거느린 대형 운수업체로 발전하였다. 운수업 뿐만 아니라 코로나의 판매 중개까지 사업 영역을 확장하게 된다.
사업을 확장해 나가던 김철호는 1968년 서울로 상경, 퇴계로 동양빌딩에 금강개발을 설립하고 건설업에 진출한다. 또한 아신산업을 설립하고 식품 사업까지 사업 영역을 확장한다. 여기까지는 좋았으나...
그러나 1969년 자동차사업 면허가 개방되면서 독점기업이던 신진자동차 외에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아세아자동차가 만든 승용차들이 쏟아져 나오자, 코로나 판매중개에 상당부분 의존하던 금강운수가 도산하고 만다. 그가 서울에서 벌인 다른 사업들도 다 실패, 한때 빚쟁이들을 피해 잠적하기도 했다.
그는 1971년 고향인 임실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기도 했으며, 호구지책으로 2년 간 목재회사에서 월급쟁이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잘 나가다가 한순간에 몰락하는 평범한 자영업자의 테크를 타나 했는데...
3 명성그룹을 세우다
김철호는 1976년 명성관광을 세우며 관광레저사업으로의 첫발을 내딛는다. 1978년에는 '남태평양레저타운'을 설립, 그해 북제주군 애월에 매입한 1만여평의 부지에 780유닛(1560실) 규모의 콘도미니엄 건설계획 허가를 제주도청에 신청, 주무 부서인 교통부가 콘도라는 새로운 관광숙박시설을 국내 처음으로 도입하게 됐고 콘도시대를 열게 됐다.
1979년 9월 경기도 오산에 있는 오성골프장을 19억1300만원에 인수한다. 오성골프장은 예비역 장성 5명이 일본자본을 끌어들여 공사에 착수했으나, 일본기업의 철수로 자금난에 직면해 공사가 중단된 상태였다. 그러나 인수 후 68억원을 들여 고작 6개월만에 36홀 65만평 규모의 국제적 골프장으로 갖추어 이듬해 4월에 개장하였고,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골프 코스를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것이 명성컨트리클럽이며, 재계 전반에 명성그룹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된다.
확실한 자금원을 확보하자 김철호의 행보는 거침이 없어진다.
1980년 6월경 명성이 제출한 설악레저타운 건설 계획서를 놓고도 교통부는 무척 당황했다. 그건 관 주도로 건설한 경주 보문단지와 당시 진행 중이었던 제주도 중문단지뿐 한 번도 민간주도로 70여만평 규모의 대단위 레저타운 건설을 시도한 바 없어 관련 법적 조례마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교통부는 '종합관광 휴양지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고 이듬해인 1981년 5월 사업인가를 내주어 '명성설악레저타운' 공사가 착수하기에 이르렀다. 1981년 설악타운을 개발할 때 이미 독일의 트란스레피드사와의 기술제휴로 서울~설악 간 시속 300Km의 고속전철을 완성, 88올림픽 이전에 관광상품으로 내놓을 마스터플랜을 갖고 있었다. 설악타운을 포함한 전국 15개 지역의 2,300여만평 부지를 확보, 관광레저타운 체인계획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자녀에 대한 불법상속으로 세법 체계를 완전히 뒤바꿔놓은 모 기업과는 달리 신사업 개척으로 법을 새로 만들었다. ㄷㄷ KTX가 80년대에 생길 뻔했다.
또한 경기도 양평에 540만평 규모의 올림픽 레저타운 건설과 케이블카 설치를 포함한 지리산권 개발 등을 위해 스위스의 본놀하베거사와 합작 계약을 맺고 명성본놀하베거 주식회사를 세웠다.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한 결과, 금강개발, 현대중건, 현대미건, 남태평양산업, 명성관광, 명성컨트리클럽, 명성콘도미니엄, 산(山)건축연구소, 남태평양레저타운, 스타월드, 명성엔지니어링, 명성종합특산농원, 명성올림픽레저타운 등 방대한 계열사들을 거느린, 국내 최초이자 최대의 관광레저전문그룹을 형성하게 되면서 그룹사로서의 위용을 갖추게 된다.
4 명성그룹 사건, 그리고 몰락
1979년 12. 12 쿠데타로 신군부가 집권하고 1980년 5. 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잔인한 진압으로 완전히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경제적 권력을 잡기 위해 '재벌 길들이기'에 나선다. 이 시기에 무너진 재벌은 동명목재 그룹, 삼화그룹, 국제그룹 등 수도 없이 많았으며, 명성그룹도 이를 피해가지 못했다.
전두환 정권은 1982년 국세청 직원을 대거 투입해 명성을 세무 사찰한다. 당시 명성은 양평올림픽레저타운 540여만평, 설악레저타운 110여만평, 용인컨트리클럽 70여만평 등 제주에서 설악에 이르기까지 관광명소 15군데와 해양관광시대를 겨냥한 화진포, 속초, 울릉도, 남해 한려수도, 부산 수영만, 통영, 여수, 거문도, 흑일도, 서해 무창포, 천리포, 남양 등의 레저타운 부지 2000여만평을 보유하고 있었다. 결국 세금 탈루 추징금 17억원 징수 처벌로 결론짓는다. 1차 세무사찰이었다. 이후 1년에 걸쳐 안기부와 보안대 요원의 감시와 공작이 이어지고 제1금융권과 거래가 힘들어지자 회사가 보유한 부동산을 담보로 제2금융권과 사채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시시각각 조여들어오는 정권 차원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김철호 회장은 주요 일간지에 '강호제현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고 전두환은 명성그룹을 날려버릴 생각을 하게 된다.
1983년 8월 17일 대검 중앙수사본부는 명성그룹회장 김철호를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탈세·조세범처벌법 위반·업무상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하고, 김철호에게 1천여억 원의 사채자금을 변칙 조달해준 상업은행 혜화동지점 대리 김동겸을 업무상 횡령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에 따르면 김철호는 79년 4월부터 김동겸을 통해 은행예금을 빼내 기업을 확장하기 시작, 원리금 상환도 하지 않은 채 1,066억 원에 이르는 거액을 횡령, 21개의 기업군을 거느리는 재벌회장으로 행세하면서 사기극을 벌였고, 탈세액만도 46억 원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명성그룹은 시작할 때 자본적 기반이 매우 미약했다(김철호 회장이 사업 망하고 빈털터리로 시작했으니...). 따라서 대출이 무엇보다 필요했는데 한번 망했던 사업가에게 거액을 빌려줄 은행은 아무데도 없었다. 고심하고 있던 김 회장에게 한 줄기 구원의 빛이 돼 주었던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바로 상업은행의 김동겸 대리였다. 김철호는 김동겸에게 부도 직전의 명성관광 발행어음 교환자금 부족액에 대한 연장결제를 부탁하면서, 각별한 친분을 쌓았다. 1979년 4월말에는 자금부족으로 공사를 중단한 '예그린'의 건설자금 2억원의 융통을 부탁하기도 했다. 김동겸은 사채중개인인 이명률에게서 사채예금을 끌어들여 가명으로 계좌를 개설하고 입금시킨 후, 김철호에게 그 자금을 융통해줬다. 당시에는 금융실명제가 없었기에 일반인들도 자기 이름이 아닌 가명 통장을 만들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김동겸이 조성해준 자금으로 명성그룹은 사세를 확장하여 단기간에 그룹사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명성그룹이 빚더미 위에 세워진 모래성은 아니었다. 김철호 회장이 2주 동안 법정 구속되고 정권 차원에서 돈줄을 죄었음에도 전혀 부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는 명성그룹의 경제적 기반이 탄탄한 편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결국 법정에서 김철호는 17년 3개월 형을 선고받고 1983.8.16부터 9년 7개월간 복역했다.
5 그 이후
수감 생활 중 3천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고 한다. 이 덕분인지 나중에 시인으로 등단하기도 한다.
출소 후에도 관광 사업의 꿈은 버리지 않았는지 여러 일에 손을 댔다. 태백산 폐광지역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다가 20억원 규모의 사기 혐의로 2000년 다시 기소됐다.
2016년에는 한국산업은행의 자회사인 산은캐피탈 인수전에 참여하여 화제가 됐었다. 김 회장이 직접 참여한 것은 아니고 김 회장의 아들이 대표로 있는 '태양의 도시'라는 회사가 인수전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