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산 왕조의 역대 황제 | |||||
6대 바흐람 3세 | → | 7대 나르세스 1세 | → | 8대 호르미즈드 2세 |
사산 왕조판 조선의 세조 또는 신라의 헌덕왕 천하의 개쌍놈[1]
1 개요
호르미즈드 1세와 바흐람 1세의 동생이다. 생전에 퇴위하고 이후에도 생존했지만 호르미즈드 2세의 퇴위 이전에는 이미 사망한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2 정권 탈취
계유정난의 원조
바흐람 1세의 치세에는 왕들 중에서 가장 권위있는 아르메니아의 왕이었다. 또한 바흐람 2세 때에는 사산 왕조의 황제에게만 인정된 화폐를 발행하고 자신의 이름과 초상을 새겨 넣어 자신이 정당한 계승자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바흐람 2세는 단순히 로마를 이용한 이이제이책만 폈을 뿐 이후의 조치가 미흡하였고, 결국 이걸 빌미로 정국 혼란을 초래하는 불씨를 초래하였다.
바흐람 3세가 즉위하자, 나르세스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쿠데타를 도울 것을 맹세하였고, 여기에 이전 나르세스의 즉위를 막았던 조로아스터교의 지도자 카르티르도 협력하였다. 그렇게 쿠데타가 일어나 바흐람 3세는 재위 4개월만에 폐위된다.
3 막장스런 치세
이후 즉위한 나르세스 1세의 치세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나르세스는 즉위 후, 로마에 빼앗긴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의 탈환에 착수했다. 당시의 로마 제국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의 양자 갈레리우스의 시대였는데, 그들과 8년에 걸친 전쟁을 치르게 된다.
페르시아군은 296년에 아르메니아에서 독립한 티리다테스를 왕위로부터 추방했다. 297년에는 로마에서 티리다테스를 돕기위해 갈레리우스가 출진했다. 하지만 갈레리우스는 3번의 교전 뒤 패배하여 로마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2만 5천의 군사를 다시 일으켜 아르메니아로 향했다.
결국 갈레리우스는 아르메니아인의 도움으로 나르세스의 군대에 피해를 입히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수복했다. 나르세스는 초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결국 수도 크테시폰을 빼앗기고 후궁과 아내 및 자손들을 인질로 잡혔다. 동시에 티리다테스는 다시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복위했다. 이윽고 로마는 니시비스를 가르지르는 선을 중심으로 아르메니아와 크테시폰을 교환하는 것을 제안했다. 나르세스는 승낙했으며 이후 40여년동안 굴욕적인 평화가 지속되었다. 에라이!
본거지 아르메니아를 완전히 잃은 나르세스 1세는 생전에 왕위를 호르미즈드 2세에게 넘기고 은퇴하였다.
4 평가
애시당초 정통성이 부족한 상태에서 단지 힘의 논리로 정권을 탈취하였기에 까여 마땅하다. 이점은 조선의 세조나 명의 영락제도 해당되는 사안이겠지만, 명의 영락제야 명나라 최고의 명군이였고, 세조 또한 후반에 말아먹긴 했어도 나름 훌륭한 정치를 하였기에 어느정도 실드가 쳐지는 인물들이다. 나르세스 1세와 가장 비슷한 군주는 신라의 헌덕왕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에 반해 나르세스는 지리적인 이점을 활용해 1차 반란[2]을 일으켜 국가혼란을 초래하여 로마와의 전쟁에서 페르시아를 불리하게 만들었을 뿐더러 나르세스 본인 또한 로마와의 줄타기 협상질을 하여 로마의 야욕을 부추긴 점도 있었다. 그렇게 불필요한 허세로 결국 페르시아가 아르메니아를 포기하게 함으로서 국력약화를 초래하게 한 장본인인 셈.
그렇다고 정권 탈취 후 아르메니아를 수복했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가만있었어도 중간을 갔을 것을 무리하게 어그로만 끌다가 굴욕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더욱이 중앙정부를 능욕하는 플레이를 벌이면서 왕조가 멸망할때까지 불안요소를 지는 요인을 초래하였다. 그렇게 막장 드라마는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