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903년, 909~914년동안 전라도 나주를 둘러싸고 벌어진 후삼국시대의 전투.
2 전개
당시 금성이라고 불린 나주는 곡창 역할 뿐 아니라 대중국 무역의 거점 역할을 해 주었다. 이를 노린 궁예가 왕건을 보내 인근 호족들과 연합하여 진도와 나주를 공격,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사실 현대의 인식으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전투로 그 이유는 후술하겠다.
903년의 나주 정벌은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데, 903년에 나주가 이미 고려 땅이었다면 909년 이후에야 벌어진 나주 공방전에 대한 설명이 어렵기 때문이다. 학자에 따라 903년에는 기습으로 확실히 점령했고 909년에 이르러 나주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다시 투입된 거라는 주장이 있고, 이 기록은 잘못된 것이고 나주를 공략한 건 909년이라는 의견, 공략은 했으되 성 단위 점령이 아닌 주변 섬들에 영향력을 심은 정도라는 의견이 있다. 실제 그 시기에 왕건의 수군이 그 지역에 머물면서 오월국으로 보내는 백제 선박을 나포하기도 했고, 903년에 양주(현재의 양산) 지역의 호족 김인훈이 구원을 청하자 뱃길로 가서 구원하기도 했다는 걸 보면 아예 거짓은 아닌 듯. 아직 나라가 안정되지 못했고 북쪽으로도 계속 공격을 받았다는 걸 생각하면 견훤도 탈환할 계획을 쉽게 세우지 못했을 듯 하다. 드라마 태조 왕건의 경우 903년에 남동풍을 이용해서 상륙했다고 묘사되었다. (...)
후고구려의 수군이 주둔한 곳은 현 경기도 개풍군인 정주로 왕건은 수군 대장으로서 알찬 종희와 김언을 부장으로 2500의 병력으로 진도를 함락, 곧이어 고이도에 상륙하였다. 견훤은 이에 맞서 덕진포로 나아갔고 여기서 두 영웅의 전투가 벌어진다. 이 전투에서 남동풍은 개뿔 왕건은 아군의 사기를 고취시키면서 공격을 명령하였고, 백제는 이 기세에 밀려 일시 퇴각, 왕건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화공을 벌인다. 이 때 백제군의 전사자는 500, 견훤은 작은 선박을 타고 급히 도망쳤다고 한다. (909년 덕진포 전투)
하지만 이 때 제대로 된 포상이 없었는지 부하 및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특히 나주에 계속 주둔한 김언 등은 더 했던 듯. 결국 견훤이 나주를 탈환할 움직임을 보이자 다시 내려가게 되는데 이 때 첩자를 풀어 그 유명한 수달을 잡게 된다. 수달은 그 때[1] 매복해서 왕건을 잡으려 했는데 왕건의 계책에 의해 되려 사로잡히고 궁예에게 끌려간다. 이 때 궁예가 신나게 가지고 놀다가 죽인 걸로 봐서는 태조 왕건에서의 묘사수달이가 죽었어처럼 실제론 견훤의 부하였든가 이래저래 후고구려를 많이 괴롭힌 듯. 일단 기록상으론 백제와 별개의 해상세력이었다.
아무튼 이 해(910년) 견훤은 직접 보기 삼천을 이끌고 나주성을 포위하지만 이 때 왕건이 파견되어 수군으로 백제 진영을 기습, 물러나게 한다. 911년에는 무진주를 공격하는 등 기세가 등등했다. 이 때 무진주 성주 지훤은 성을 굳게 방어하여 고려군을 물러나게 하였다. 뭐 사실 정말 성 떨어뜨릴 기세로 공격하진 않았겠지만 -_-;
912년은 다시 덕진포에서 견훤의 수군을 맞서 싸웠으며 914년 다시 나주로 가서 맞서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 즈음에는 확실히 나주와 서남해의 제해권을 확실히 장악한 것으로 보이며 후에 대야성이나 강주 등에 병력을 보낸 기록 등을 보면 두고두고 잘 이용해 먹은 것 같다. 사실상 한반도 주변 바다를 완전히 지배한 것.
물론 견훤은 후에 대반격을 준비하고 성공하지만, 그 때는 이미 그가 너무 늦은 후였다. 무려 20년 후에야 철저한 준비와 노력 끝에 다시 해군력을 양성하여 나주를 빼앗은 것이다. 어찌 보면 정말 근성있어 보이는 전투였다(...). 의외로 성과는 좋아서 나주를 빼앗아 강력한 해군력을 과시한 견훤은 여세를 모아 상귀라는 장수를 보내 해로로 북상하여 개성 주변까지 군사를 보내는 등 왕건을 크게 위협하였다. 이때 고려군은 애써 키운 군마들과 병장기들을 약탈당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훗날 나주를 유금필에 의해 도로 빼앗겼다는 설이 있다.[2]
3 평가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그 시작부터 자세히 묘사하며 ( 아예 이 작전을 위해 왕건을 잠시 파직시키며 백제의 내부에 고려의 깃발을 세운다는 게 크게 대두된다. ) 왕건의 전략전술을 보여주며 고속출세하는 이유로 내세운다. 한편 나주는 사실상 왕건의 소유지로 궁예에게 의심 등 압박을 받을 때마다 백제의 위협을 핑계로 나주로 가는 모습도 보인다.
실제 학계에서의 평가도 그리 다르진 않은 편. 왕건이 직접 갔든 부하만 보냈든 한두 번의 정벌이 아닌 계속 수군력을 투입하여 서남해와 각 섬들을 점령하면서 백제를 괴롭히고 이 곳을 기점으로 남해에도 병력을 투사한 것으로 보인다. 견훤은 일차적으로 나주 평야와 그 부속도서를 완전히 잃었고, 이를 통해 중국으로 가는 뱃길이 끊겨서 외교적으로 고립된다. 드라마에서 묘사된 염전을 통한 이익은 확인할 수 없지만 당시 소금의 위상을 생각하면 이것을 잃은 손실도 제법 되었을 듯. 이후 왕건이 역성혁명을 일으키고 백제가 승승장구할 때까지 백제 수군은 없다시피 하였다.
신채호의 소설 일목대왕의 철퇴에서도 왕건이 해전은 잘 한다는 것으로 묘사되는 걸 보면 이 때의 임팩트가 크긴 컸던 듯. 이후 우리가 잘 아는 순서로 패서지역의 힘을 등에 업고 역성혁명에까지 다다르게 된다.
참고로 왕건의 첫째 부인이 수군이 주둔했던 정주 출신 류씨고, 둘째 부인이 나주 출신 오씨라는 걸 생각하면[3] 왕건 스스로에게 이 작전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느낄 수 있다. 여러모로 후삼국시대 중반 최고의 사건.
이후 백제가 승승장구할 때 나주를 재점령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후에도 친고려적인 성향이 사라지진 않았는지 견훤이 고려로 탈출할 때 나주를 이용해서 탈출할 수 있었다.
3.1 나주 정벌이 가능했던 이유
아무래도 현실적 인식과 가장 괴리가 큰 부분일 것이다. 특히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견훤의 건국 기반을 나주 호족 종례와 오다련[4], 해적 수달로 묘사하면서 그 괴리는 더 커졌다. 나주를 중심으로 한 서남해를 기반으로 그 바로 코 앞인 무진주(광주)에 도읍을 했는데, 바로 그 지역이 배반을 때려 버린 것이다. 물론 그것을 위해 견훤이 세금을 너무 걷고 호족을 무시하는 등의 연출을 하긴 했지만 그걸론 부족함이 컸다.
이건 그 시대 호족의 특성에서 나온 것으로 현재와는 달리 중앙집권이 많이 약했다. 특히 전라남도 남부는 4세기가 넘게 백제의 영토가 아니었고 마한이 그 때까지 남아 있었다. 백제 부흥이라는 명분이 전라북도, 충청도 지역에 비해서 크게 다가오지 않았던 것. 더욱이 900년에 도읍을 완산주(전주)로 옮기면서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낄 만한 시기였고 애초에 견훤의 기반은 나주 쪽이 아닌 현재의 순천 쪽이었다. 이 시기에는 군주의 직할령이 아닌 이상 봉건시대처럼 호족들의 땅에서는 그들이 왕이나 다름 없었고, 시류에 따라 왔다갔다 할 뿐이었다. 양주, 강주 등에서는 고려와 직접 영토가 닿지 않았는데도 고려에 귀순한 호족들이 있는가 하면, 패서 지역에 있으면서도 궁예 정권 말기까지 귀순하지 않은 호족도 있었다. 근성 하나는 쩐다. 쉽지는 않았겠지만 충분히 가능한 작전이었다는 것.
해적들의 경우 무정부주의적인 속성이 강한데 특히 신라 말에는 일본까지 공격하여 약탈하는 통에 신라구의 악명이 드높을 정도로 해적이 활개 치던 시절이었다. 견훤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게 순천 부근의 해적을 소탕하면서였고, 왕건 역시 해적들을 소탕해 가면서 나주를 노릴 수 있었다. 수달이 견훤의 부하가 아니면서도 서남해에서 활개쳤던 것도 이걸로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실제 견훤의 부하이긴 했는데 백제를 낮추기 위해 별개의 세력으로 서술했을 가능성도 크지만.
4 궁예가 친정했나?
근래에 들어와서 한 비석으로 인해서 궁예가 나주 공방전을 직접 참전하고 지휘했다는 정황이 나타났다. 문제의 비석은 강진 무위사에 있는 "선각대사비". 선각대사비는 고려 3대 정종때 형미대사를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
그런데 문제는 비문의 내용. 지금껏 일반적인 인식은 왕건이 나주 공방전을 총책임졌다라는 것이지만[5] 선각대사비는 우리가 아는것과는 정반대로 이야기한다. 나주 공방전을 지휘한건 바로 궁예라는 것이다.
비문에 의하면 912년 덕진포에 견훤이 직접 군을 이끌고 쳐들어 오자 "대왕"이 친히 정벌에 나서서 후백제군을 격파했으며 이 때 만난 형미대사를 황도(철원)으로 데리고 갔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대왕을 누구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비문 해석이 통째로 달라진다. 정종 시대에 세워졌기 때문에 대왕을 왕건으로 볼수도 있으나 문맥이나 정황상 왕건으로 놓고보면 해석이 맞지 않는다고 한다. 대왕을 궁예로 놓고 보면 해석이 자연스러워 진다고. 그 이유는 나주가 "대왕"에게 항복했다라는 내용때문이다. 만약 대왕이 왕건이라면 이미 903년에 나주를 평정한 왕건에게 왜 912년에 다시 항복하느냐에 대해선 이해가 힘들다. 이를 궁예로 놓고 본다면 오히려 더 자연스러워 진다. 즉 궁예가 친정을 하여 나주를 평정했다라고 보면 자연스러워 진다는것.
일반적으로 궁예는 왕이 된 이후에는 철원에 앉아있었고 전쟁은 장군들이 한것같은 느낌을 받지만 선각대사비의 내용대로라면 궁예는 왕이 된 이후에도 중요한 전투는 직접 지휘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나주 공방전은 왕건이 주도적으로 나섰지만 후백제의 공격이 계속되고 견훤까지 직접 나서자 912년에는 궁예도 친정의 필요성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 태조 왕건에서도 거의 본명으로 안 나오지만 본명은 능창이다.
- ↑ 후백제가 한창 후계자 문제로 소란스러울때 유금필이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는 설인데 기록 상에는 공격했다고만 언급되어 있지 실제로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견훤이 훗날 신검에게 폐위된 이후 고려로 도망칠 때 나주에서 배를 타고 고려로 건너간 걸 보면 아마 나주 지역의 일부 해안지대가 여전히 고려의 영향력에 있었다고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
- ↑ 이 때의 일화는 현대에서 생각해도 흠좀무
- ↑ 왕건의 둘째 부인 오씨의 아버지
- ↑ 사극 태조 왕건에서도 이런 식으로 묘사되었다. 왕건이 해상 호족출신이므로 해군을 운용해서 나주를 공략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