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의 역대 국왕 | ||||
1대 국왕 견훤 | ← | 2대 국왕 신검 | → | 고려 태조 왕건 |
묘호 | 없음 | |
시호 | 없음 | |
성 | 진[1]/견(甄) | |
휘 | 신검(神劍[2])/성(成)[3] | |
생몰년도 | 음력 | 886? ~ 936?[4] |
재위기간 | 음력 | 935년 3월 ~ 936년 9월(약 1년 6개월) |
1 개요
부왕인 견훤이 장남인 자신 대신에 아우인 금강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이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왕건과 분노한 아버지의 합동 공격에 나라가 망했다.
2 일생
2.1 초기 일생
신검의 출생이나 초기 일생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어 불확실하다. 다만 삼국사기에서는 견훤이 여러 처첩들과 관계하여 아들을 10명 얻었는데 그 중 장남이 신검이었다고 밝히고 있을 뿐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사서인 '이제가기'를 인용하며 신검의 어머니가 견훤의 아내인 상원부인(上院不人)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신빙성있는 기록은 아니다. 또한 이 기록에 따르면 견훤은 9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장남이 바로 신검이었는데, 또다른 이름은 견성(甄成)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 동국통감에 나오는 924년 7월에 군사를 이끌고 조물성을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물러났던 견훤의 아들인 수미강이 신검과 동일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혹은 수미강이 금강과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있지만, 수미강을 신검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2.2 쿠데타를 일으키다
934년, 운주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온 견훤은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결정하려 하였다. 견훤에게는 10명의 아들[5]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넷째 아들인 금강은 키가 훤칠하고 총명하여 견훤이 무척 사랑하였다. 견훤은 결국 금강을 자신의 후계자로 정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신검은 두 아우인 양검·용검 등과 함께 번민에 빠졌고 급기야 역모를 꾀하게 되었다. 당시 신검은 후백제의 수도에 머물며 견훤의 곁에 있었으나 양검과 용검 등은 각각 강주와 무주에 도독으로 발령 나 있었는데, 이찬 벼슬을 지내던 능환은 신검과 결탁하여 강주와 무주에 사람을 보내 은밀히 모의했다.
935년 3월, 파진찬 벼슬을 지내던 신덕과 영순 등이 신검에게 권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하였다. 신검은 아버지인 견훤을 폐위시켜 금산사에 감금했으며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였던 아우 금강을 살해했다.
삼국유사에서는 이 상황을 보다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른 새벽에 견훤이 잠들어있다가 대궐 뜰에서 고함 소리가 들리자 웬 소란이냐고 묻자 신검이 나타나 말하기를
왕께서는 늙으시어 군국(軍國)의 정사에 어두우시므로 장자(長子) 신검이 부왕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해서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는 소리입니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또한 신검은 아버지를 금산사에 가두고 나서 이를 감시하기 위해 파달 등을 비롯한 장사 30명을 보내 절을 지켰다고도 한다.
2.3 권좌를 잡다
아버지와 아우를 몰아내고 국정을 장악한 신검은 대왕을 자칭했다. 그러나 신검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갑작스레 아버지를 폐하고 왕이 된 탓에 주위의 반발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급기야는 금산사에 감금당했던 견훤이 935년 6월, 감금당한지 3개월 만에 탈출하여 나주를 통해 고려로 귀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6] 이에 따라 후백제의 호족과 백성들간에는 큰 동요가 일어났다.
단적인 예로, 견훤의 사위이자 심복이었던 박영규는 왕이 된 신검을 전혀 따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견훤이 고려에 귀순하자 936년 2월에 밀서를 보내 왕건과 내통하기까지 했다.
간신히 국내의 반발을 누르고 권좌에 앉은 신검은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전국에 교서를 내려 사형 이하의 모든 죄를 용서하는 사면령을 선포했다.[7]
교지의 내용은
“여의(如意)가 특히 총애를 받았으나 혜제(惠帝)가 임금이 될 수 있었고, 건성(建成)이 외람되게 태자(太子)로 있었으나 태종(太宗)이 일어나 즉위(卽位)하였으니, 천명(天命)은 바꿀 수 없는 것이고, 왕위는 돌아가는 곳이 있는 것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대왕(大王)의 신비한 무용(武勇)은 누구보다도 뛰어나고, 영특한 계책은 만고에 으뜸이라, 쇠퇴한 말세에 태어나서 스스로 경륜(經綸)을 맡아, 삼한(三韓) 지방을 순시하고 백제를 재건하여, 도탄(塗炭)에 빠진 것을 깨끗이 정리하니 백성들이 안정되었고, 바람과 우레처럼 고무(鼓舞)되어 도처에서 달려오게 되었다. 공업(功業)은 거의 중흥을 이루게 되었으나, 지혜로운 생각도 갑자기 한 번 실수하게 되어, 어린 아들에게로 사랑이 모이자, 간사한 신하가 권세를 희롱하여, 대군(大君)을 진(晉)나라 혜제(惠帝)의 혼암(昏暗)에 인도하였으니, 자부(慈父)는 (춘추전국 때 진(晉)나라) 헌공(獻公)의 미혹(迷惑)에 빠져서, 대보(大寶)를 철없는 아이에게 주게 되었다. 다행이 상제(上帝)가 정성을 내려 군자(君子)는 허물을 고치고, 나 원자(元子)에게 명하여 이 나라를 다스리게 하였으니, 돌아보건대 장자(長子)의 재질이 아니면 어찌 임금이 될 지혜가 있겠는가? 깊은 얼음을 밟듯이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마땅히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새로운 정치를 보이겠다.”
이때가 935년 10월 17일이었는데, 지난 3월에 견훤을 몰아내고 쿠데타를 일으킨지 장장 7개월만의 일이었다. 즉 신검이 반발 세력을 완전히 누르고 온전히 왕이 되는데에는 7개월이나 되는 시간이 소모된 것이다. 이 교서에서 신검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뛰어난 능력과 업적을 찬양하면서도 견훤이 나이가 들어 정신이 혼미해서 장남을 제치고 어린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실수를 범했으므로 자신이 이를 바로 잡았노라고 주장했다.
또한 국내 사서의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으나 중국의 사서인 오대사에는 936년 1월에 후백제가 후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를 보아하건데 신검은 왕위를 찬탈한 후에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에 자신이 정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리고 왕위를 책봉받으려 한 것 같다.
2.4 일리천 전투와 후백제 멸망
한편 고려로 귀순했던 견훤은 고려 조정으로부터 상보(尙父) 호칭과 많은 식읍을 받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고려의 태조 왕건이 귀순해온 견훤을 이용해 후백제를 완전히 무너뜨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936년, 견훤은 마침내 왕건에게 군사를 일으켜서 후백제를 치고 역모를 저지른 신검을 벌해줄 것을 강력히 간청했다.
왕건은 이에 호응하여 936년 9월, 견훤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후백제를 공격했다. 신검 역시 이에 맞서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일리천[8]을 사이에 두고 고려군과 대치했다. 이리하여 후삼국시대를 종결지은 일리천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후백제군은 사기는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바닥을 치고 있었다. 한때 자신들이 모시던 왕인 견훤이 적군의 선봉에 서있는 모습에 충격을 받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왕건이 이끌고 온 10만 대군의 위세가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후백제군의 장군이었던 효봉, 덕술, 원길 등은 아예 싸워보지도 않고(...) 무기를 버리고 고려군에 투항해왔다. 또한 이들은 신검이 후백제군의 중군에서 지휘를 하고 있다는 군사 기밀까지 털어놓았다.
이에 왕건은 군세를 하나로 모아 신검이 지휘하는 중군을 집중공격했다. 중군이 무너져 내리자 나머지도 저절로 붕괴되어 후백제군은 결국 참패를 면치 못했다. 결국 신검은 두 아우인 양검과 용검, 그리고 장군인 부달, 소달, 능환 등과 함께 황산에서 고려군에게 항복했다.[9] 이로써 후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는데, 신검이 쿠데타를 일으킨지 겨우 1년 남짓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2.5 최후
왕건은 쿠데타의 주모자 중 하나였던 능환이 신검을 꼬드겨 패륜을 저지르게 했다 하면서 그 죄를 물어 처형시켰다. 신검의 두 아우였던 양검과 용검 등도 같은 죄목으로 처벌받아 진주로 귀양갔다가 처형당했다.
그러나 정작 왕건은 쿠데타의 중심인물이었던 신검은 벌하지 않았다. 신검이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압박으로 인한 것이며 또한 신검이 스스로 항복해 벌을 줄 것을 청하니 비록 죽을 죄이나 용서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신검은 오히려 왕건으로부터 관위를 하사받았다.[10]
이후로 신검은 더이상 역사 기록에 등장하지 않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심지어는 그 생사도 불분명한 상황. 다만 삼국사기 견훤 열전에는 '일설에는 신검 3형제가 모두 벌을 받아 죽었다고도 한다'라는 아리송한 주석을 달아놓았을 뿐이다.
3 평가
신검에 대한 평가는 여러모로 좋지 않다. 지략과 용맹을 겸비한 영웅호걸이었던 아버지 견훤에 비해 포스있는 활약도 부족했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아버지를 감금하거나 동생을 살해하는 등 패륜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신검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사실에 있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본래 견훤도 왕건처럼 세력을 끌어모으기 위해 지방의 세력있는 호족 가문의 여인들과 혼인한 듯 한데,[11] 신검의 외가는 견훤이 나라를 일으킬 적 중심이었던 무진주로 오늘날 광주광역시지역이고 금강의 외가는 후백제에 수도인 완산주로 오늘 날 전주로 모두 큰 지역에 대호족 세력인데다 서로 그들의 자손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오랜 신경전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 신검이 쿠데타를 일으킬 적 돕기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동생 용검이 무주 도독으로서 군사들을 몰고 올 수 있었던 것도 외가가 무진주 유력 세력이었던 것이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어쨋든 견훤이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민하자 아무래도 장자라 좀 더 세력이 강했던 신검과 그 어머니 계열의 가문이 먼저 손을 쓴 듯 하다.
사실 신검이 보인 행적은 500년 후의 조선 태종 이방원과 매우 비슷하다. 당대 최강 무장이자 창업군주의 아들이면서 아버지의 후계자 선정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켜, 동생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것이라든지…[12] 황태자 형과 동생을 죽이고 황제가 된 당태종 이세민과도 비슷하다. 후백제가 통일했으면 견훤이 태조, 신검이 태종이었을 듯 그러나 상기 태종들은 일단 난이 끝난 후에는 아버지를 꽤나 극진히 모시면서 상왕 대접을 했고, 무엇보다 능력면에서 차이가 넘사벽이었기 때문에, 한쪽은 아버지의 사업을 망친 패륜아 취급을 받지만 한쪽은 국가의 기틀을 다진 명군으로 고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당대의 현실의 생각해보면 마냥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것도 옳다고는 할 수 없다. 그 이유를 들자면 우선 본인이 왕위계승권이 가장 우선인 장남이라는 것이다. 이를 반대로 말하자면 비록 견훤이 밀어준다고 하더라도 넷째인 금강이 상대적으로 왕위정통성은 더 약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므로 만약 금강이 후백제의 왕위에 올랐다면 숙청대상 0순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반대로 만약 견훤이 신검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을 경우 신검으로서는 굳이 자신보다 후순위인 금강을 죽여야 할 이유가 없다. 아니 오히려 죽이면 본인의 왕위 정통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으므로 죽이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신검의 왕위찬탈에 대한 인과를 따지자면 장남적통의 전통적인 왕위정통성의 크기를 무시하고 본인의 감정만을 앞세워 후계를 정하려 한 견훤의 고집과 권력욕에 사로잡힌 후궁 고비의 과욕이 이와 같은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또, 같은 입장이기는 하나 태종과 신검의 내외부 사정은 판이하게 달랐다.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킬 당시 이미 한반도는 고려 이래 500년동안 왕 중심의 하나의 국가로 통일이 되어있었고,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라봐야 언어도 문화도 전부 이질적인 중국의 명나라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라가 왕자의 난으로 뒤집어지더라도 당시 신흥국으로 중원에 세력을 넓혀가던 명나라로서는 태종이 명나라를 적대하지 않는 이상 굳이 동쪽 끝으로 군사를 몰아 조선을 침략할 이유가 없었다. 즉, 말하자면 이성계는 그다지 갈 곳도 없었기에 태종은 아버지의 화가 풀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는 말이다. 반면 신검이 왕이 된 후백제 시대의 한반도는 여러 호족세력으로 갈라져 있었던 것과 더불어 바로 위에 같은 언어와 동질성 강한 문화를 가진 고려라는 강대한 적국이 있었다. 만약 신검이 견훤을 연금하지 않았다면 분노한 견훤이 지방 호족들과 다시금 결탁하여 왕위탈환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다분한건 불을 보듯 뻔한 것이므로 신검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견훤은 신검이 예상치도 못했던 최악의 선택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신검은 망해가는 나라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노쇠한데다가 심각한 병환까지 시달리는 아버지가 죽는 순간 바로 숙청당할 것이 뻔한 본인의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난을 일으키고 패륜아의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던. 어찌 보면 후삼국 시대에서 가장 불행한 인물 중 하나다. 결론은 뭐? 견훤이 문제야. 견훤이
만약에 금강이 무사히 왕위를 물려 받은후 신검의 숙청을 시도했거나 혹은 견훤이 후계자 문제를 잘 처리했다면 후백제는 내전이 벌어지거나 오히려 신검이 고려로 항복을 했거나 후삼국시대가 더 장기화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4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현재까지 사극에서 조명된 건 태조 왕건 뿐이다. 해당 내용은 신검(태조 왕건) 항목을 참고.
천년의 신화에서는 고려의 영웅으로 등장한다. 미션에서는 역사대로 왕건과 견훤에게 항복하고 목숨을 구걸하는 찌질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게임에서의 활용도는 꽤 높다. 궁기병 영웅으로 연사력이 상당히 빠르다. 참고로 대사가 굉장히 건방지다. "내가 왕이다!" "나에게 군사를 다오!"
여담이지만, 과거 조선일보에서 연재되던 아동만화 '맛있는 한자' 시리즈에선 엄청 착한 놈으로 나왔다(...). 사실 원래는 모든 것을 인정한 뒤 금강에게 후계자 자리를 양보할려고 했는데, 양검과 용검이 짜고 반란을 일으킨 다음에 억지로 왕위에 올렸다고 하고, 아예 일리천 전투에서 아버지가 나오는 걸 보고 죄책감을 느낀 나머지 직접 양검과 용검을 체포한 다음에 항복한 것으로 나온다(...). 이 때 대사는 '백제는 너희가 반란을 일으킨 순간 이미 멸망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이 보면 그냥 히어로 수준으로 나온다...이후에는 신라가 항복할 때 왕건 옆에서 축사를 올리기까지(...).- ↑ 동사강목에 등장하는 성씨. 진신검, 진금강으로 표기되어 있다.
- ↑ 신검 1번 항목의 그것이다. 그야말로 이름값 진짜 못한 인간.
- ↑ 이제가기(李磾家記)에 기록된 이름이다. 그러나 이제가기라는 책이 확실한 기록이 담긴 책이 아니다.
- ↑ 삼국사기에서는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시킨 후에 신검을 살려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일설에는 죽였다는 각주도 덧붙이고 있어 생몰년도가 확실치 않다.
- ↑ 이제가기에는 9명이라 한다.
- ↑ 삼국유사에서는 935년 4월에 견훤이 절을 지키던 장사들에게 술을먹여 취하게 해놓고는 금산사에서 탈출하여 고려로 도망쳤다고 했는데 이는 사실일 가능성이 낮다. 오히려 삼국사기와 고려사의 기록이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 ↑ 이 교서는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참고로 찬탈이든 선왕의 사망이든간에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으레 하는 것이 사면령을 선포하는 것으로, 이는 새로운 왕이 즉위하였음을 널리 알리는 가장 편한 방법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국사기 본기를 찾아보면, 새로운 왕이 즉위했다는 기사의 뒤를 이어 사면령을 선포했다는 기사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 ↑ 오늘날의 경북 구미시 선산읍
- ↑ 공교롭게도 과거에 백제의 장군인 계백이 최후의 일전을 벌였던 바로 그 황산벌과 같은 곳이다(...).
- ↑ 고려사에서는 이처럼 신검이 벌을 받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가자 견훤이 울화통이 터져 병에 걸려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 대개 농경 사회에서는 타지방에서 건너온 세력에 대해 적개심이 강한 편이다. 이렇게라도 해야 왕권을 다질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견훤은 전라도나 충청도 출신도 아니다.
- ↑ 사실 난의 이유만 따지면 신검 쪽이 더 설득력있다. 5남이었던 이방원과 달리 어쨌든 신검은 장자였으니까.
- ↑ 이 만화에서는 궁예의 죽음도 태조 왕건에서의 그것과 똑같이 순화되서 나온다. 아무래도 애들 보는 만화다보니 역사만화에서 엄연히 한 나라의 국왕인 인물을 완전한 악으로 그리긴 거시기했는 듯하다.
- ↑ 여담으로, 일리천 전투에서 항복한 신검이 그 후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는 자리에 참석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신라의 항복은 935년, 일리천 전투는 936년의 일이기 때문. 게다가 이 때 항복의 의미로 바친 금관을 보는 왕건과 신검은 수염이 하얗게 변하고 주름진 걸로 묘사된다. 연출로 보면 신검이 항복하고 최소 10여년은 더 지나서 신라가 항복한 것으로 보이는데,그렇게되면 신라는 1010여년동안 존속된 국가가된다(...) 즉 편집자의 실수가 아니라 만화가가 잘못 그린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