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노 중학생 이지메 자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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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건 개요

中野富士見中学いじめ自殺事件
나카노 후지미 중학교 이지메 자살 사건.

1986년 일본나카노 구에 위치한 중학교에서 발생한 어느 남자 중학생의 이지메(따돌림) 자살 사건. '장례식 놀이 사건' 이라고도 불리며, 담임 선생까지 이지메에 가담하였던 사건으로 일본첫 이지메 자살 사건으로써 사회적 여파가 무척 컸던 사건이다.[1]


1986년 2월 1일, 이와테 현의 쇼핑센터 지하 1층 화장실에서 도쿄 나카노 구 후지미 중학교[2] 2학년생 시카가와 히로시(鹿川裕史) 군의 목을 멘 시체가 경비원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바닥에는 '이대로 있으면 생지옥이 되고 말 거야' 라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됨에 따라 이지메에 의한 자살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2 이지메의 경위

피해자인 히로시 군은 1985년 2학년으로 진급하여 이전까지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다른 반이 되었다. 하지만 같은 구의 초등학교에서 그대로 중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이 90% 가까이로 상당히 많았던 덕분에 학급 친구들과는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온화한 성격에 152cm의 작은 체구였던 히로시 군은 얼마 안 있어 친구들의 간식을 대신 사 오거나 하굣길에서 가방을 나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지메는 점점 더 심해져 가해자 그룹인 2학년 A반뿐만 아니라 다른 반 학생들까지 가담하게 되었다.

얼굴에 지워지지 않는 펜으로 수염을 그려 복도에서 억지로 춤을 추게 시켰고, 모형 총기의 과녁이 되거나 야구권(가위바위보에서 진 사람이 옷을 벗는 게임)을 강요당하여 옷을 벗게 시키는(그런데, 히로시 군 외의 상대방은 지더라도 옷을 벗지 않았다) 등의 가혹한 따돌림이 이어졌다. 프로레슬링 놀이에서 맞는 역할까지 강제로 맡을 만큼, 히로시 군은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10월 들어 이지메 그룹은 밴드를 만들고 히로시 군을 보컬과 드럼 담당으로 배정한 것도 모자라 매니저 직책까지 겸임시키는 등 여전히 하찮게 여기고 있었다. 히로시군은 점점 더 소극적으로 변해 가다가 당월 중순 이틀 간 가출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교사에게는 가출 사유를 '아버지가 무서워서' 라고 답했다고 한다.

11월이 되자 A반 학생들은 '히로시가 죽었다고 치자'면서 칠판 앞에 히로시 군의 책상을 놓고 교실에서 향을 피우며 히로시 군의 사진을 영정 사진처럼 만들고는 빈 우유병에 꽃을 꽂아 이른바 장례식 놀이를 하였다. 그 옆에 있는 색지에는 '시카가와 군에게. 잘 가. 2학년 A반과 그 외 일동이. 쇼와 60년 11월 14일'라는 글과 함께 반 학생들의 방명록 비스무리한 것이 있었는데 '바보', '사라져서 잘 됐다', '그것 봐라' 따위의 악의로 가득 찬 욕설이 잔뜩 쓰였다. 교실에 있던 히로시 군의 명찰은 이제는 죽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검은 매직으로 칠해놓았다. 색지 내용에는 교사 4명 또한 동참했는데, 학생들에게는 몰래카메라를 꾸미고 있다는 식으로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히로시 군은 스케이트보드를 타다가 다쳐서 자주 지각했는데, 이 날도 교실에 늦게 도착한 뒤 위와 같은 광경을 보게 되자 "뭐야 이게~" 하며 웃어 보였지만, 이내 침묵하였다고. 색지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에게 "이거 어떻게 생각해? 여기 선생님도 써 놨다고!" 하며 울분을 토했다고 한다. 이후에 다른 친구에게 "나 저번에 한번 죽었었어" 하고 털어놓은 적도 있다고 한다.

이전부터 히로시 군은 반에서 무시당하던 상황이었고, '장례식 놀이'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었으니 그 충격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이지메 사실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알 수 없으나, 교사까지 참여하였던 이 끔찍한 놀이는 아무리 장난이라 하더라도 상식적으로 도가 지나친 장난이었다.

11월 26일, 히로시 군이 그룹의 멤버인 3학년생 3명과 있을 때 1학년생이 히로시 군을 가리키며 "넌 약한 놈이야, 내가 더 강해" 라고 시비를 걸어왔고 이에 다른 멤버들이 싸움을 부추기자 싸우게 되었는데, 크게 다치지는 않았으나 집으로 돌아온 히로시 군의 상처를 본 히로시 군의 아버지가 무슨 일인지 경위를 묻자 히로시 군은 같이 있었던 3학년생들의 이름을 털어놓았고, 부친은 즉시 3학년생들을 찾아가 직접 다그쳤다. 그러나 그 뒤에 고자질했다는 이유로 그룹 멤버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11월 28일, 이지메의 주범인 A가 히로시 군에게 주스를 사 오라며 1000엔을 건넸는데 히로시 군은 주스를 사고 남은 650엔을 주지 않은 채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며칠 후 A가 잔돈을 찾자 히로시 군은 돈을 다 써버렸다 말했고, 이에 A는 히로시 군을 빈 건물로 데려가 또 다시 폭행했다. 이 일은 가족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낌새를 눈치챈 히로시 군의 부친은 A의 집을 찾아가 "당신 아들 잘 관리해라. 이 이상 내 아들한테 들러붙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 는 식으로 격하게 따졌고, A의 부모는 A를 추궁하였다. 히로시 군에게는 "시카가와 히로시, 죽여버린다" 는 내용의 전화가 걸려왔으며, 폭행이 계속되자 12월에 또 다시 히로시 군의 부친이 A의 집에 따지러 갔는데 이 때문인지 그룹 내에서 이제 그만 괴롭히자는 의견이 거세졌으나 괴롭힘은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새해를 맞아 그룹 일행들과 함께 첫 일출을 보러 산에 올랐는데, 자살 후 현상한 사진에서 히로시 군은 웃고 있지 않았지만 밝은 표정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룹 친구에게 받은 연하장에는 "목욕하고 머리 감고 다음 주에 보자!" 라는 내용이 있었으며, 담임 교사에게는 "근하신년 61년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시카가와 군은 훌륭한 인성을 갖추고 자기 주장이 뚜렷한 심지 있는 청년이 되길 바래요. 우리 힘내자!" 라는 연하장을 받는 등 이때까지 히로시 군의 상황이 아주 심각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학년이 되어서도 이지메는 계속되었다. 히로시 군의 결석이 잦아졌고 이지메당하는 모습을 다른 교사가 목격하여 해당 학생들에게 주의를 주기도 했으나, 이지메를 방지할 만한 엄격한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잦은 결석도 꾀병인가 하는 정도로 넘어갔을 정도로.

히로시 군이 마지막으로 등교한 날은 1월 마지막 날으로, 5교시가 시작한 늦은 오후에 얼굴을 내밀었다. 2학년 교사와 상담실에서 3~40분 정도 상담하던 도중 이지메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교사는 이야기를 듣고 히로시 군의 모친에게 전화를 걸어 히로시 군을 마중 나왔으면 하는 의사를 전했고, 이 와중에도 이지메 주범 3인은 히로시 군을 찾으며 히로시 군의 신발을 화장실 변기에 버리면서 괴롭힘이 여전했음을 보여주었다. 어머니와 함께 귀가하는 길에 '이젠 다 싫다' 하며 마지막 울분을 토했다.

다음 날 아침 집을 나선 뒤 히로시 군은 그대로 행방불명되었고, 부모가 도심의 게임 센터 등을 찾아 다녔으나 히로시 군은 보이지 않았다. 히로시 군은 그 시각 이미 부친의 고향인 이와테 현에 도착한 뒤였다.

3 죽음의 장소

2월 1일, 이와테 현의 쇼핑 센터 'Fesan'의 지하 화장실에서 히로시 군이 발견되었다. 이미 쇼핑센터 영업이 끝났음에도 화장실 문이 닫혀 있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경비원이 시체를 발견하여 경찰에 통보하였다. 옷걸이에 비닐 줄을 묶어서 목을 멨다. 화장실 바닥에 놓인 그의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家の人へ そして友達へ

가족들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
突然姿を消して申し訳ありません
갑자기 사라져서 정말 죄송합니다
(原因について)くわしい事については
(원인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とか・・・とかにきけばわかると思う
...이나 ...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俺だってまだ死にたくない。
나도 아직 죽고 싶지는 않아.
だけどこのままじゃ「生きジゴク」になっちゃうよ。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생지옥'이 되고 만다고.
ただ俺が死んだからって他のヤツが犠牲になったんじゃ、いみないじゃないか。
그저 내가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녀석이 희생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잖아.
だから、もう君達もバカな事をするのはやめてくれ、
그러니까 이제 너희들도 바보같은 짓거리 그만해,
最後のお願いだ。
마지막 부탁이다.

昭和六十一年二月一日
1986년 2월 1일
   鹿川裕史
시카가와 히로시

히로시 군의 가방에는 사복 여분, 접는 우산, 연하장 2장, 사진 3장과 집을 나올 때 부친에게 받은 이케부쿠로 선샤인 시티 60층 전망대 입장권이 있었는데, 이를 통하여 죽기 전날에 그곳에 들렀던 사실이 밝혀졌다. 히로시 군이 처음부터 죽을 생각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가출 도중에 생각이 바뀐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부친은 "히로시는 죽기 전 마지막 이틀 동안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전하고 있었을 것이다. 전철 안에서도 마음 속으로는 계속 방황했을 것이다" 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4 교사들의 행적

사건 직후 취재에 나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학교 교장은 '자살의 원인을 들은 적은 있으나 이지메라고 해도 친구끼리 프로 레슬링 놀이나 심부름을 시키는 정도그게 이지메지 뭔가'라고 발언한 것으로 보아, 이지메 행위를 교사들에게 보고받은 것은 확실하지만 그냥 가벼운 장난 정도로 치부했던 모양이다. 더욱 더 환장할 만한 인간은 담임으로, 인터뷰에서

  • "굴욕감에 참을 수 없었던 거겠죠. 정신적으로도 지쳐있었고 어느 쪽이냐 하면 기운 없는 애였으니까요"
  • "친구들이 심부름을 시키고, 소동을 일으키고 장난스러운 행위를 강요하는 등 정신적인 압박이 주 요인입니다"
  • "맞는 일은 적었으며 당사자도 히죽히죽거리고 있었다"

라며 자살의 원인을 이지메가 아닌 피해자인 히로시 군의 문제로 돌리는 주옥같은 발언으로 고인의 명예를 훼손하기까지 하였는데, 이 교사는 이전에도 이지메의 주범에게 얻어맞아 다친 사건으로 학생들에게 무시받아 수업 중에 학생들이 소동을 일으켜도 모른 척하는 무책임한 교사였다. 사건 이후 '장례식 놀이'에서 자신이 글을 썼던 걸 '없었던 일로 하라며 학생들에게 입막음까지 시켰다고 한다.

5 사건 이후

학교의 학생들이 받은 충격이나 불안의 정도가 심해져 일련의 사건도 일어났다. 옆 반의 2학년생 L군이 수업 중에 지적받은 것을 계기로 M군에게 "넌 시카가와 2세다. 시카가와처럼 자살해" 하고 싸움을 부추기며 앞자리의 N군과 M군을 때린 것이다. 이어 M군은 교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교사는 아랑곳 않고 칠판에 필기를 계속했으며, 싸움이 심해지자 그제서야 겨우 말렸다. M군은 "선생님 너무하다, L을 죽이고 나도 자살하겠다, 칼을 가져오겠다"며 그 자리에서 뛰쳐나갔고, 당황한 교사가 M군을 뒤쫓아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발생, 그 모습을 지나가던 경찰이 발견하여 주동자인 L은 폭행 혐의로 경찰에 넘겨졌다.

또한 유서에 이름이 거론되었던 가해자 2명은 심한 충격을 받았으며자업자득이지만 그 중 한명은 종교 집단에 빠졌다고 한다. 비난받은 건 가해자 측 뿐만 아니라 히로시 군의 가정도 포함되었는데, 어째서 가족이 말리지 않았냐는 식의 악성 장난 전화도 쏟아졌다고.

6 사건 처분

담임 교사인 F는 무단으로 학원 아르바이트 일을 겸했던 건까지 합해서 교직 정지, 즉 파직당했고, '장례식 놀이'에 가담하였던 교사와 교장에게는 감봉 처분이 내려졌다. 처분을 받은 교장과 교사 2명은 3월 말에 스스로 퇴직하였다. 히로시 군의 이지메에 가담한 16명도 상해와 폭행 혐의로 서류 송청되었으며 주범 A와 B의 부모에게 2,200만 엔의 손해 배상이 청구되었고 도쿄 지부는 보호 감찰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1994년 도쿄 지부는 '장례식 놀이'는 인정하지만 사망 직전에 일어난 폭행이 자살로 이어졌다며 이지메 자체를 부정하였다.폭행은 이지메 아닌가? 증인으로 참석한 교장과 교사들도 자살의 원인을 이지메가 아닌 가정 문제로 돌리면서 유서에 적힌 '바보같은 짓거리 그만해'는 부모에게, '다른 녀석'은 동생을 뜻하는 것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해석을 내세웠으며, 이에 유족들과 공판을 열어 2달 뒤 도쿄 고등 법원에서 "'장례식 놀이'는 보통 사람이라면 충분히 고통을 느낄 일이니 이를 멈추지 못한 학교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지메와 자살의 결과는 불명이다"라는 다소 안이한 판결로 가해자들에게 1,150만엔의 배상 청구를 명했다.
  1. 오죽했으면 한국의 신문에서도 사건 발생 직후 바로 보도될 정도였다.
  2. 해당 학교는 2009년에 문을 닫았으며, 2011년에 KBS 시사기획 10에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