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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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1927년 공산당의 폭동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1937년 발생한 난징대학살 환상파들의 주장에 대해서는에 대해서는 난징대학살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 개요

1927년 3월 24일. 중국 공산당장제스의 북벌을 가로막기 위해 벌인 폭동. 이 사건으로 중국 국민당국공합작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고 4.12 상하이 쿠데타을 발동한다.

2 전개

배경에 대해서는 장제스의 북벌 참조.

1927년 3월 24일 국민혁명군은 북양군벌을 격파하고 난징에 입성한다. 오전 7시경 약 30명의 혁명군이 일본 영사관에 찾아와 적병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에 영사관 직원은 일본인밖에 없다고 해 혁명군은 물러갔다. 그런데 30분이 지난 후 50명의 제복차림 정규군이 소총을 겨냥한 채 영사관의 사무소와 숙소에 난입했다. 당시 영사관에는 10여명의 병사가 있었으나 무장은 하지 않았기에 대응이 불가능했다. 이들은 영사관 경찰관에게 발포해 부상을 입힌 다음, 주재 무관을 총대로 구타했다. 이후 관사 식당에 실탄을 발포하고, 영사관을 3시간동안 약탈했다. 이때 병사들은 "일본 제국주의 타파, 중국과 소련은 한 가족, 일본인의 재산은 중국인에게서 뺏은 것이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여기에 수백 명의 민간인이 약탈에 가담해 마루 판자,변기,빈 병까지 모조리 약탈되었다.

한편 오전 9시 경에는 영국 영사관이 역시 제복을 입은 국민혁명군에게 포위되었다. 이들은 마침 밖으로 나온 영국 총영사에게 부상을 입히고 난입해 관원을 살해하고 약탈을 자행했으며 미국 영사관 역시 약탈되었다. 또한 비슷한 시간대에 동시다발적으로 교회, 외국인이 운여하는 병원, 상점들도 약탈되었다. 이에 놀란 민간인들은 피난을 가 큰 소동이 벌여졌다. 이에 상하이의 외국인들은 시내의 언덕으로 피신했고 오후 3시경 장강에 정박중인 미국,영국의 포함이 폭도들의 접근을 막기위해 구릉지대 근처를 발포했다. 2시간 후 발포는 중단되었고 국민혁명군이 사태수습에 나섰다. 이 사건으로 국민혁명군은 24명의 사망자와 7명의 중상자가 발생했고 민간인은 사망자가 17명, 중상자가 19명에 달했다. 외국인 사망자는 총 6명이었다. 또한 포격으로 상하이 시내의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다.

조계지의 열강들은 이 사건이 국민혁명군이 조직적,계획적으로 나선 사건으로 보고 강경한 입장으로 나서 당시 난징에 주둔하던 국민혁명군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1. 강우순 제2군 4단장은 긴급명령을 발동해 외국인을 보호할 것

2. 사단장은 병사들의 발포를 금지시킨 다음에 미국군함에 출두해서 외국 거류민의 손해배상에 대해 협의할 것.
3. 25일 오전 10시, 시내의 외국인 거류민을 군대의 보호 아래 양자강 강변까지 호송하라. 이와 같은 요구가 실행되지 않을 경우에는 즉각 엄중히 대처하고 남경과 하관(下關)을 군사구역으로 지정하게 될 것이다.

이에 25일 장제스가 직접 난징으로 달려와 4명의 장군에게 치안유지를 책임지게 했고 요구사항에 대해 조치해 사건의 확대를 막았다. 이후 31일 공식적인 기자회견을 열어 전후 책임을 질 것과 열강들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발포한 것에 대해서 항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3 결과

이후 국민당 측의 조사결과 해당 사건은 당시 중국에 체류하던 소련 고문인 보로딘이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아 국민혁명군을 와해시키기 위한 고의적인 폭동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당시 약탈에 나선 부대는 공산당원인 이부춘(李富春)의 제2군과 제6군이었다.

그러나 보로딘은 이후에도 왕징웨이와 연합해 장제스를 견제하려했고 결국 장제스는 공산당과 결별할 것을 결정하게 된다.

이 조서결과를 접한 소련은 중화민국과의 국교를 1차로 단교했고, 영국 역시 소련과 단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