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의 북벌

북벌(장제스)
날짜
1926년 7월 9일 ~ 1928년 12월 29일
장소
중국 전역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중국 국민당
(국민혁명군)
북양정부
북양군벌
지휘관장제스
리쭝런
탕성즈
옌시산
펑위샹
장쭤린
우페이푸
쑨촨팡
장쭝창
병력약 25만약 100만
피해 규모불명불명
결과
장제스중국 대륙을 통일(형식상)
기타
난징 시에서 통일된 국민정부수립

1 개요

12.jpg
(1926년 북벌 출정을 선포하며 국민혁명군을 사열하는 장제스. 오늘날 장제스를 대표하는 사진들 가운데 하나다)

장제스의 북벌(Northern Expedition, 중국어: 北伐, 병음: běi fá)은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장제스와 중국 국민당의 주도로 군벌들의 군웅할거로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벌어진 일련의 군사작전을 말하며 중국 역사에서는 이를 국민혁명이라 칭한다. 하지만 1926년에서 1928년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1926년 7월 1일에 선포된 장제스의 북벌 동원령을 기준으로 하는 것으로 그 전에 국민당은 광둥에서의 기반 확보, 중국 남부의 군벌 제거를 위해서도 1922년부터 활동하였으므로 이 항목에선 장제스의 남정(南征)에 관련한 것도 서술하도록 하겠다. 이래서야 항목명을 장제스의 북벌이 아닌 장제스의 중국통일로 하는 것이 맞지 않겠나 싶지만서도

2 배경

2.1 쑨원의 북벌과 실패

1916년 스스로 중화제국의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가 실패로 돌아간 위안스카이가 죽은 이후 중국 전역은 군벌들의 지방정권이 난립하여 난세에 돌입했다. 이 시기 쑨원(손문)은 자신의 고향인 광저우에서 돤치루이(단기서)에게 축출된 국회의원들의 지지를 받고 광둥정부의 수반으로 선출되어 대원수 칭호를 받고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쑨원의 북벌 호소에 광둥의 군벌들은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쑨원은 중앙정부도 북벌도 대원수도 필요하지 않다는 군벌들의 공격에 궁지에 몰렸고 이내 실각하고 만다. 1918년 쑨원은 광둥정부와 결별했는데 1920년 '객가 장군' 천중밍(진형명)이 광저우의 지배자가 되면서 쑨원을 초청하게 된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계속 북벌을 주장하는 쑨원과 광둥을 중심으로 한 남방정권을 세우려는[1] 천중밍이 격렬한 의견충돌을 빚으면서 크게 악화된다. 천중밍은 아편을 근절하고 광둥을 개발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북벌을 촉구하는 의회의 지지를 등에 업은 쑨원과 장제스(장개석)는 천중밍에게 북벌을 위한 거액의 예산을 거듭 요구, 천중밍은 이를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다. 천중밍과 그의 참모들은 쑨원을 허풍선이라는 뜻의 대포라고 조롱했고 이에 장제스는 천중밍을 광둥정부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고 있었지만 천중밍의 지지가 필수불가결이었던 쑨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천중밍은 천중밍대로 자신을 내쫓으라고 날뛰는 장제스를 고깝게 여겨 측근들에게 그를 '땅콩'이라고 하면서 비꼬았고 쑨원에게 '무뢰배 장씨'를 내쫓을 것을 요구하는 등 쑨원이 장제스를 곁에 두는 것을 불만스러워했다.

그러던 중 1922년 쑨원은 첫번째 북벌을 결정하고 후난 성 군벌들과 연합하여 광둥성 북부를 장악하려 했는데 후난 성 군벌들의 배신과 천중밍, 예쥐를 비롯한 광둥 군벌들의 반발로 실패로 돌아간다. 결국 쑨원과 완전히 틀어진 광둥 군벌들은 1922년 6월 16일 쑨원의 대원수부를 공격한다. 이때 위기에 처한 쑨원을 군함을 이끌고 달려가 구조한 것이 바로 장제스[2]로 이때부터 장제스가 쑨원의 최측근 중 한명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 사태에는 영국이 개입하여 쑨원의 안전한 퇴로를 보장받게 해주었고 이후 천중밍은 대군벌 우페이푸(오패부)에게 광둥과 장시의 총독으로 인정받게 된다. 쑨원은 상하이에서 국민당을 재건하기 위해 소련 및 공산당과 접촉했다. 코민테른에서 네덜란드 공산당원 헨드리퀴스 스니블릿이 중국공산당원들에게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하는 것을 허락하자고 제안했고 채택되면서 국공합작의 근거가 마련되었다. 소련은 국민당이 공산주의를 실행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으나 국민당을 혁명정당으로 인정하고 국민당과 협력하기로 결정, 중국 공산당에게도 국민당과 협력할 것을 지시했다.

2.2 광둥 점령과 국공합작

1923년 쑨원은 윈난과 장시의 반 천중민 군벌들과 동맹을 맺고 룽윈(용운), 리쭝런(이종인)을 비롯한 여러 군벌들에게 40만 위안의 군비를 지원하여 광저우를 쳤다. 이 싸움에서 패배한 천중밍은 광둥 동부로 밀려났고 쑨원은 1923년 2월 다시 광저우에 입성하여 3차 광둥 정부를 수립했다. 그해 9월 장제스가 직접 모스크바를 방문해 트로츠키와 만났고 소련의 군사고문단 지원 및 군사적, 경제적, 기술적 원조를 승인받았다. 하지만 소련은 장제스가 역설한 북벌의 필요성에 광둥 정부는 구 청나라의 토대를 계승한 범국민적인 조직이 아니라면서 북벌이 시기상조라고 지적했다. 이에 장제스는 매우 불쾌해하며 소련인들은 믿을 수 없는 자라고 쑨원의 비서인 랴오중카이(료중개)에게 주장했다. 장제스는 쑨원에게 소련인들은 구 러시아 제국 시절의 제국주의를 포기하지 않았으니 협력하면 안된다고 주장했으나 소련은 국민당을 지원하는 유일한 열강이었고 쑨원은 소련과의 협력을 포기할 수 없었다. 쑨원은 소련에서 특별고문인 미하일 보로딘을 초빙하였는데 보로딘은 쑨원을 개명한 지방총독 정도로 매우 저평가했지만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성심성의껏 국민당에 협조하였다.

1923년 말 광둥 동부로 밀려났던 천중밍의 반격이 시작되자 보로딘은 토지 분배, 최저임금제, 휴일 보장을 통한 국민당의 볼셰비키화를 통해 농민, 노동자 대중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것을 권유했지만 쑨원은 상인과 향신 지지자들을 잃을까봐 두려워하여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쑨원은 보로딘의 주장에 따른 레닌주의 노선을 국민당 노선에 상당수 포함시켰고 천중밍 군대를 격퇴한 1924년 1월 20일부터 10일 간 국민당 1차 전국대표회의를 열고 정식으로 국공합작을 이루었다. 종신 대총통에 선출된 쑨원은 공산당원들의 국민당 가입을 정식으로 허락했고 삼민주의를 대표이념으로 채택했다.[3]중국 국민당의 중앙집행위원회에는 예비위원을 포함하여 41석의 위원직이 있었는데 그 중 10석이 중국공산당에게 할당되었다.

2.3 황푸군관학교의 설립

소련은 약속대로 군사 고문들을 파견했는데 이들은 가장 시급한 문제로 국민당의 자체적 군사력을 확보하는 것을 지적했다. 소련 고문들은 군벌들을 언제 배신할 지 모르는 믿을 수 없는 자들이며 그들의 자질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데 이는 매우 옳은 판단이었다. 이들 군벌군을 제외한다면 국민당의 군사력은 쑨원의 호위병력 200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황푸군관학교가 세워졌다. 소련은 학교 운영 자금과 소총 8천자루, 탄환 400만발을 보내주었고 파벨 파블로프를 군사 고문으로 보내주었으나 그는 1924년에 사고로 익사했고 그를 대신하여 바실리 블류헤르 장군이 새로 부임했다. 사관 후보생 교육은 장제스가 청나라 군관학교와 일본 사관학교에서 받았던 군사교육, 일본의 군사교범, 중국 전통전략, 장제스가 본 붉은 군대의 전법을 참고했으며 기본 교과과정은 붉은 군대의 것을 참고했다. 저우언라이(주은래)가 공산당의 자체 무장을 갖추게 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보로딘은 스탈린의 교시에 따라 이를 거부했다.

황푸군관학교는 군사교육 뿐만 아니라 사상교육에도 힘쓴 고도로 정치화된 학교였다. 장제스는 군관 후보생들을 위해 훌륭한 처우를 마련하는 동시에 군관 후보생들의 기강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고 연좌제와 명령 없는 후퇴를 사형으로 다스리도록 하는 규칙을 확립했다. 장제스는 군관 후보생들에게 혁명에 타협이 없음을 설파했으며 동시에 전선에서 유용할 각종 훈련에도 매진했다. 그리고 이러한 엄격한 규칙을 자기 자신에게도 칼같이 적용했다. 하지만 황푸군관학교에서 양성하는 군사들은 소규모 부대에 어울리는 지휘관들이었지 군사 행정, 병참에 어울리는 인재들이 극히 적었다. 만약 대규모 부대를 운용해야 하는 시점이 온다면 지식의 부족함으로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장제스와 러시아 교관들의 충돌도 시작되었다. 러시아 교관들은 18개월 과정을 주장했고 단기간에 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싶었던 장제스는 6개월 속성 훈련을 주장했다. 장제스는 이 분쟁에서 상하이나 저장성으로 훌쩍 떠나는 시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켰다. 그리고 황푸군관학교의 정치위원인 랴오중카이로부터 황푸군관학교의 경비를 자유롭게 쓸 권리까지 얻었다. 1924년 4월 21일에 광저우로 돌아온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 교장 겸 광동군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24년 6월 16일 황푸군관학교의 개학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는 2년 전 예쥐와 천중밍이 쑨원을 습격했던 날짜였다. 전국의 국민당 당원들은 18세에서 25세 사이의 중학교 내지 고급소학교 졸업생을 후보로 추천하기 위해. 지원자들은 나라에 봉사하고자 하는 이유를 쓴 글을 제출해야 했고 최소 3년간 복무해야 한다는 조건에 응해야 했다. 총 645명의 1기 생도가 모집되었고 1926년에는 생도의 수가 3천 명에 달했다. 몽골, 티베트, 베트남[4], 타이완, 조선[5]에서도 생도들이 몰려왔다. 하지만 황푸군관학교의 정치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황푸군관학교는 무산계급의 훈련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도의 75%가 지주와 중농, 관료 집안의 자제였다. 상하이의 지원자들은 천치메이의 조카 천궈푸를 비롯하여 우익 조직이나 청방의 조직원들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황푸군관학교 내부에는 소련 고문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강력한 반공 그룹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황푸군관학교의 생도들은 교장 장제스에게 충성하면서 장제스의 파벌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3 장제스의 집권

3.1 동정(東征)

1925년 2월 천중밍이 다시 광저우를 공격하자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 생도들을 중심으로 소련인 고문들을 대동하여 반격에 나섰다. 광저우 동쪽의 소도시 몐후에서 장제스는 천중밍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700명 이상의 포로가 잡았으며 1000자루의 소총과 6정의 기관총을 노획했다. 국민혁명군의 전사자는 고작 10명이었다. 국민당은 몐후에서 천중밍 군대를 물리친 여세를 몰아 산터우 항을 점령했고 천중밍 군대를 푸젠성까지 밀어냈다. 동정의 결과로 국민당은 1만 3천 자루의 소총과 110정의 기관총, 800만발의 탄환, 구식 캐논포 30문, 신식 산포 6문 통신기 6대를 노획했다. 이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물품이 황푸군관학교에 배당되었다.

장제스는 약탈을 엄격히 금지하는 한편 국민당을 선전하는 집회를 열어서 민심을 얻었다. 국민당의 이러한 행보에 중국의 대중과 지식인들은 크게 고무되었고 중국 공산주의의 거두인 천두슈(진독수)는 장제스를 반대하는 자는 곧 반혁명분자라고 공언하기도 하였다. 국민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농민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정치위원들을 시켜 토지 개혁 정책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당연히 농민들의 지지로 이어졌다. 군벌군대들이 강제 징병, 강제 징용, 약탈을 일상적으로 한 반면 국민당은 어느 것도 빼앗지 않았고 이에 곳곳에서 노동자와 농민들이 국민당에 자발적으로 협조하여 길과 지역정보와 물자를 제공했다. 또한 군사들에 대한 엄격한 상벌제도, 부상병에 대한 후한 복지, 전사자들에 대한 예우로 인하여 국민혁명군의 사기도 크게 올랐다. 소련도 국민당의 군사력과 장제스의 지휘력에 대해 높이 평가하였고 국민당과 장제스의 명망은 중국 전역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3.2 쑨원의 죽음

한편 쑨원은 우페이푸와 베이징 정부의 싸움이 벌어지자 이에 개입하기 위해 광둥성 북부로 떠났다. 쑨원은 봉천군벌 장쭤린(장작림)과 동맹을 맺어 북방을 도모하려 하였다. 1924년 11월, 상하이를 거쳐 일본에 도착할 즈음엔 그가 개입하려던 북방 전쟁은 우페이푸가 패배하고 만주 군벌들이 득세하는 결과로 끝났지만 쑨원은 그 정도로 실망하지 않았고 일본에서 쑨원은 서구 열강은 중국에서 일어난 모든 비극을 책임져야 하며 아시아는 러시아, 인도와 연합하여 서방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런데 중국에 귀환한 이후 쑨원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쑨원은 복통을 호소했고 졸도하기도 했다. 1924년 12월 31일 베이징에 도착한 쑨원은 1925년 1월 26일 베이징협화의원에서 개복 수술을 받고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2월 중순에 그는 퇴원하여 베이징의 국민당원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쑨원은 요양하면서 마지막을 준비했다. 그리고 중국과 소련이 연맹하여 전 세계의 압박받는 인민들의 해방을 위한 위대한 투쟁에서 함께 전진하자는 내용의 문건도 작성하여 보로딘의 편을 통해 모스크바로 보냈다.

1925년 3월 12일 쑨원이 사망했다. 쑨원의 아내인 쑹칭링(송경령)은 기독교식의 장례식을 원했다. 하지만 국민당은 중국의 혁명가에게 외국 종교의 의식이 어울리지 않다고 반발했고 결국 기독교식 장례와 중국 전통 장례가 의학대학 교회당과 자금성에서 각각 동시에 거행되었다. 소련 대사관은 조기를 게양했고 모스크바에서 레닌의 죽음 때 썼던 것과 같은 유리를 씌운 청동관을 공수해왔지만 사용되진 않았다. 쑨원은 3주간 안치되었다가 베이징 서산의 비윈사에 안장되었다.

3.3 왕징웨이의 집권

쑨원을 잃은 국민당은 주도권을 놓고 분열하기 시작했다. 우익성향의 원로들이 중심이 된 노(老)동지파, 왕징웨이(왕정위)와 후한민(호한민)의 당권파, 쑨원의 아들인 쑨커(손과)가 이끄는 태자파가 쑨원의 빈 자리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는데 그 중에서 당권파가 제일 유력했다. 당권파의 거두인 41세의 왕징웨이는 과거 순친왕 암살사건에 연루된 사람으로 대단한 미남으로 유명했다. 그는 보로딘과 소련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국민당 대리 주석 및 정치군사위원회 수뇌에 올랐다. 청나라 관료 출신으로 고전학문에 능통한 45세의 후한민은 왕징웨이와는 반대로 우익적인 성향으로 반공주의자였다. 당권파 내부에선 왕징웨이와 후한민이 서로 당권을 놓고 다투었다. 장제스는 이 중에서 왕징웨이를 선택하고 왕징웨이에게 동정을 통해 얻은 문서들을 보여주며 국민당과 연합한 군벌들이 실제론 우페이푸, 천중밍과 내통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1925년 5월 국민당은 군벌들과의 관계를 단절했고 이에 반발한 군벌들이 광저우 동쪽을 점거하여 봉기하자 6월 6일 장제스가 반격에 나서 6월 12일에 이들을 모두 축출했다. 군벌들은 홍콩으로 도주했고 국민당은 군벌들이 버리고 간 막대한 양의 장비를 손에 넣었다.

1925년 7월 1일 이러한 여세를 몰아 더욱 좌경화된 국민당 정부가 광저우에서 공식적으로 수립됐다. 대원수 제도가 폐지되었고 왕징웨이가 주석 겸 군정위원회 수뇌로 취임했다. 랴오중카이가 재정부장, 황푸군관학교, 군대의 당대표를 겸했고 장제스는 8인 군사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우파 성향의 후한민은 실질적으로 업무가 없는 외교부장으로 좌천되었다.[6] 이에 후한민을 비롯한 국민당 우파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홍콩 총독과 결탁하여 국민당 좌파들을 제거하려 했지만 영국 본국이 국민당 우파 지원 계획을 거부하면서 이는 실패했고 천중밍과도 접촉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이에 국민당 우파들은 더욱 과감한 행동에 나서게 되는데 1925년 8월 20일 당사로 출근하던 랴오중카이 부부와 소련 고문 체르파노프를 공격한 것이다. 랴오중카이는 끝내 숨지고 말았다. 그리고 사살된 암살범 하나의 옷에서 후한민의 동생인 후이민이 결성한 우익 비밀 결사체 요원들의 명단이 나오면서 수사는 급진전되었다. 보로딘, 왕징웨이, 쉬충즈(허숭지), 장제스로 이루어진 전권위원회가 100명의 용의자를 체포했다. 장제스가 직접 용의자 한명을 쏴죽였고 두명의 군인이 황푸군관학교 동교장에 끌려가 총살되었다. 후한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되었고 후이민은 도주했다. 후한민은 암살범들의 정신적 지주로 규정되었고 보로딘과 장제스는 후한민에게 ‘공산주의의 위대함’을 가르쳐 사상적으로 교화하기 위해 그를 모스크바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9월 22일 후한민은 모스크바로 떠났다. 쉬충즈도 곧 후이민의 비밀 결사에 가입한 것과 천중밍과 내통하던 사실을 들통나면서 기소되었고 뇌질환 치료를 빙자하여 상하이로 추방되었고 그의 부하들은 모두 장제스의 군대에 편입되었다.

3.4 천중밍의 몰락과 동정의 완료

국민당 우파 숙청 이후 장제스는 38세의 나이로 국민혁명군의 수장이 되었다. 장제스는 2만명의 병력으로 2차 동정을 실시하여 쉬터우 항구로 돌아온 천중밍을 공격, 천중밍 군대를 또 다시 쳐부쉈고 6천명의 포로와 6천정의 소총을 손에 넣었다. 천중밍은 암살자들을 보내 장제스를 저격하는 등 발악했으나 민심을 얻은 장제스의 군세는 우수한 장비와 기량으로 천중밍 군대를 몰아내었고 철도 노동자들이 국민당에 협조하면서 천중밍은 열차조차 쓸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천중밍은 홍콩으로 망명, 1933년 그곳에서 티푸스로 죽었다. 국민당은 이것으로 광둥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동정의 결과로 국민당은 넓은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는데 새로운 재정부장 쑹쯔원(송자문)이 실시한 재정개혁으로 1924년에서 1926년 사이에 정부 수입이 2배로 늘었다. 국채 수입도 크게 증가했고 은행 저축액은 6배로 늘었다. 유가증권도 성공적으로 유통되었다. 수입이 늘자 당연히 국민당의 군사력도 크게 증강되었고 국민당의 성공을 목도한 우차오수(오조추), 천궁보(진공박)를 비롯한 중국 각지의 젊은 지식인과 엘리트들이 잇달아 국민당에 합류했다. 국민당은 중국 각지의 민족주의자, 진보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1926년 장제스는 하이난 섬을 정복했고 황푸군관학교를 중앙육군군관학교로 개명했다.

3.5 중산함 사건

하지만 정적들의 양산으로 곧 장제스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당하기 전에 먼저 친다는 각오를 한 장제스는 자신의 기반인 군대의 충성도를 점검하며 사태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중산함 사건이 발생하면서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보로딘을 제치고 국민당의 지도자로 급부상하게 된다. 자세한 것은 해당항목 참조.

국민당을 영도하게 된 장제스는 군벌들로 넘치는 중국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4 1차 북벌

4.1 준비과정

1926년 7월 1일 장제스는 북벌 동원령을 선포했다.

“우리 국민혁명군은 대원수의 유지를 받들어 혁명 이념을 철저하게 관철해야 한다. 인민의 번영을 지켜내기 위해 반드시 모든 군벌들을 무너뜨리고 반동 세력을 숙청하고 난 뒤에야 삼민주의를 실행하고 민족 혁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당 중앙위원회는 장제스에게 당을 제외하고 민사, 군사, 사조직, 공조직을 아우르는 모든 통제권을 양도했다. 7월 9일에 장제스는 북벌군 최고 사령관에 취임했다. 장제스는 3주 후에 출병을 거행했다. 당시 장제스가 우선적으로 상대해야할 군벌들은 75만에 이르는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우선 우페이푸는 25만명을 거느렸고 장쭤린은 35만명을 거느렸다. 펑위샹과 옌시산은 북벌에 가담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국민당에 적대하진 않았다.

국민혁명군은 총 8개 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선 황푸군관학교 출신들이 몰려있고 장제스의 직할 부대인 최정예 부대인 1군, 사령관은 허잉친(하응흠)이었고 병력규모는 2만명이었다. 모든 부대 중에서 가장 무장이 잘되어 있었고 경험도 많았다. 2군은 1만 5천명으로 후난성의 전 성장인 탄옌카이(담연개)가 이끌었다. 탄옌카이는 원래 쑨원의 사람이었는데 중산함 사건 때 장제스의 편에 붙었다. 윈난성에서 소집된 3군은 1만명 규모였고 ‘우익 장군’ 리지선(이제심)이 지휘하는 4군도 1만명 규모였다. 장제스는 공산당원들과 국민당 좌파들을 이 부대에 몰아넣었다. 5군은 광저우의 수로 보호 공사를 맡고 있는 자치부대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북벌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6군은 광둥 장군이 이끌었고 7군은 광시성의 군벌인 리쭝런(이종인)이 이끌었는데 개혁적인 성향의 리쭝런은 진작에 국민당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7군엔 이슬람교도인 바이충시(백숭희)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지막 8군은 청나라 군인 출신인 ‘불교도 장군’ 탕성즈(당생지)가 지휘했는데 원래 후난 남부를 지배하던 세력으로 후난성 성장과의 분쟁에서 패배하여 국민당에 합류했다.

4.2 우한 공략

첫번째 공격 목표는 우페이푸의 거점인 우한이었다. 우한은 한양, 한커우, 우창 세 도시로 이루어진 대도시로 80만의 인구에 공업과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고 우페이푸의 무기고가 위치해 있었다. 소련 고문인 블류헤르 등이 이곳을 우선 공격목표로 지목한 것도 당연했다. 선봉으로 탕성즈와 광시성 군벌들이 앞장섰고 장제스는 후난성과 장시성 군벌들을 이간질하는 작업에 몰두했는데 이러한 이간질 작전은 이후로도 장제스의 전매특허가 된다. 장제스의 공작은 성공적이 되어서 쑨촨팡을 전선에서 이탈시켰으며 6개 군벌 세력을 포섭했다. 탕성즈는 후난성 남부를 점령하고 창사에서 우페이푸 군대를 항복시켰다. 구이저우의 군벌들이 이 시기에 합류하면서 9군과 10군이 신설되었다. 8월 18일에 국민혁명군은 후난 북부에 진입했고 우페이푸의 군대를 포위섬멸했다. 그리고 웨양의 우페이푸 기지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국민혁명군은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민심 확보에 열심이었는데 약탈과 일탈행위가 엄격히 금지되었고 주민들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가 취해졌다. 8월 26일 장제스는 추가적인 공격명령을 하달했고 국민혁명군은 우한으로 진군했다.

우한 공격에 앞장선 것은 4군과 여러 독립연대들이었다. 우한으로 쾌속 전진했다. 농민들의 자발적인 협조로 국민혁명군은 우한 남부의 철교 탕쓰챠오에 도달했다. 그곳은 우페이푸의 병사 1만명이 사수하고 있었는데 우페이푸가 몸소 방어에 나섰다. 24시간 동안의 전투에서 우페이푸의 병사 7천명이 전사하거나 사로잡혔다. 우페이푸는 퇴각하는 군관들을 즉결처분하면서까지 버텼지만 결국 패주했다. 우페이푸는 쑨촨팡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광시와 후난의 군벌들은 우페이푸의 몰락을 바라보면서 어부지리를 바랄 뿐이었다. 9월 2일에 국민혁명군은 우창 남부에 이르렀고 공세가 시작되었다. 첫 공세에서 국민혁명군은 후난과 광시의 군대의 비협조 및 장비 부족으로 인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다음날 한양의 수비대 지휘관이 안전을 담보받고 항복했으며 한양의 수비대는 두당 10위안을 받고 가진 무기를 모두 내놓았다. 한양이 함락되자 한커우도 무혈점령되었다. 국민혁명군의 좋은 평판에 주민들은 국민혁명군을 환영했다.

한커우를 점령한 장제스는 쑨촨팡의 영지인 장시성을 공격하기로 했는데 이는 전공을 세워 독자적인 전략적 주도권을 확립하기 위한 장제스의 욕심 때문이었다. 소련 고문 바실리 블류헤르(당시에는 갈렌(galen)이라는 가명을 썼다.)의 군사적 능력은 매우 탁월했고 장제스는 그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참이었는데 장제스는 그것이 불만이었던 것이다. 장제스는 초반에는 장제스의 편에 붙은 군벌들의 협조로 난창과 장시성 남부를 쉽게 장악했지만 쑨촨팡의 반격으로 곧 점령지에서 밀려났다. 쑨촨팡은 포로들과 짧은 머리를 한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했으며 장제스의 고향인 저장성이 반란을 일으키자 거기서도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당황한 국민혁명군은 와해되었고 일부 부대는 장제스의 명령을 거부하고 독단적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블류헤르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장시성으로 달려간 블류헤르는 쑨촨팡 군대를 박살내고 4만명의 포로를 잡았으며 다시 장시성의 성도 난창을 점령했다. 이 무렵 우창도 함락되면서 우한 삼진이 모두 국민당의 손에 들어왔다. 이 소식을 들은 광둥 정부는 우한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해 북상하기 시작했다.

4.3 결과

후난, 후베이, 장시, 광둥, 광시, 구이저우가 국민당의 영역에 들어왔고 허잉친의 푸젠성 정벌이 성공되면서 푸젠성도 국민당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국민당은 13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총 7개 성, 1억 7천만 인구를 통치했다. 총 2만 5천명의 병사들이 전사했고 그중 1만 5천명이 광시 전역에서 소모되었으나 24개 군벌이 국민당에 합류하면서 국민당의 병력은 26만으로 늘었다. 하지만 급격한 숫자로 늘어난 군대 때문에 재정적 문제가 심각해졌다. 급료를 받지 못한 군사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고 재정 문제 때문에 장제스와 쑹쯔원의 관계가 최악으로 악화되어 관계 단절을 선언하기도 했다.[7]

어쨌거나 아직까지 혁명정당의 기질이 강했던 국민당은 점령지에서 개혁을 위해 몰두했고 국민당의 통치에 대해 평소에 적대적인 자림서보도 ‘자유와 안전의 왕국’이 도래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치안의 확보로 다시 상업이 활성화되었고 여권의 신장으로 여자들의 행동이 자유분방해져서 보수적 남정네들이 여편네들이 골목길 고양이같이 되었다고 항의할 정도였다. 수많은 집단들이 저마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 협회를 결성했고 혁명 이념에 기초한 수많은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예컨대 노동자 권익 증진, 학생 인권 증진, 부녀자 인권 증진 등이었다. 농촌에선 소지주와 농민 협회가 결성되어 크게 발전했는데 후난과 후베이만 해도 회원이 100만이 넘었다. 농민위원회를 이끈 사람 중 한명이 마오쩌둥이었다. 마오쩌둥은 혁명은 농촌에서 온다는 신념하에 대지주 타도를 외쳤다. 이러한 행보는 여러 사람들을 자극했는데 국민당 우파들은 다시 불안해한 거야 말할 것도 없었고 스탈린도 국민당 지역의 농민 운동에게서 트로츠키 냄새가 난다고 우려했다.

국민당을 개무시하던 열강들도 태도가 전향적으로 바꾸었다. 영국은 원래 우페이푸를 지지했지만 국민당의 북벌이 대승으로 끝나자 한커우에 주 베이징 영국 대사를 보내 국민당과 회담을 가졌고 다른 열강들에게 중국에서의 안정적 이권을 위해 기존의 조약을 개정할 의사가 있음을 중국의 신정부에게 보여줘 신정부의 호감을 사야 한다는 의견을 보냈다. 하지만 국민혁명군은 매우 반외세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고 병사들이 선교사와 외국인들을 공격하면서 서구 열강과의 접촉이 엎어졌다. 곳곳에서 기독교를 비난하는 포스터가 붙었고 불안해진 영국인들은 무기를 사들여 자경단을 결성했다. 한커우에선 반외세 시위대와 영국 해군 육전대가 충돌하여 소요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시위자들이 조계지로 난입하자 정무회의는 조계지의 행정을 국민당에게 임시로 이양했고 머지않아 영국은 국민당 정부에게 상하이 조계지를 반납하고 말았다.

4.4 국민당의 분열

한편 여러 혁명적 사업의 성공에 고무된 국민당 좌파들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고 차차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용감해진 좌파들의 공격 대상은 중산함 사건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장제스였다. 우한 곳곳에 장제스를 폭군이라고 비난하는 벽보들이 나붙었고 장제스의 반대파인 사법부장 쉬쳰이 임시연석회의의 의장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 국민당 내부의 최대 쟁점은 신수도를 어디에 두냐는 것이었는데 난창파와 우한파가 대립했다. 장제스는 난창을 지지했고 좌파들은 우한을 지지했다. 장제스는 북벌군 총사령부에 임시 중앙정치위원회를 세워 난창 수도론을 강변했고 또 다른 군사적 옵션의 필요성을 대비하여 자신의 직속인 북벌 제1군에 군수물자들을 비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제스의 정적은 좌파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 탕성즈가 자신이 장제스를 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필하면서 장제스의 자리를 위협하였고 장제스의 고문인 바실리 블류헤르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한 공작에 들어갔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블류헤르는 장제스와 같이 우한을 방문하였다가 장제스를 따르지 않고 우한에 잔류했다. 장제스가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안 좌파들은 장제스의 기를 확실히 꺾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는데 쉬쳰이 장제스를 비판하기 위한 당 회의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때 마침 왕징웨이도 귀국하면서 장제스는 궁지에 몰렸다. 장제스는 자신이 왕징웨이와 친하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선전하면서도 왕징웨이에겐 당신은 국민당에 필요하지 않다는 전보를 보내 오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에 우유부단한 왕징웨이는 베를린과 파리까지 오가며 갈팡질팡했지만 결국 중국으로 돌아왔다.

4.5 장쭝창의 역습과 위기에 처한 장제스

이 무렵 산동 군벌인 ‘개고기 장군’[8] 장쭝창이 장시성에 밀려난 쑨촨팡과 안국군 동맹을 맺고 장쑤와 안후이 지역에서 공세를 개시했다. 장제스는 자신의 직속 부대인 1군으로 저장성 방면을 통해 반격에 나서려 했지만 누적된 피해 때문에 공세종말점에 달해 곤경에 처했다. 국민당의 군사적 위기에 장제스가 패배하면 국민당 정체가 위험해진다는 것을 인정한 국민당 좌파는 정쟁을 멈추고 장제스를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보로딘은 블류헤르를 다시 장제스의 고문으로 파견했다. 블류헤르는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발휘해서 장강 연안의 안국군을 잇달아 격퇴했다. 수세에 몰린 안국군은 다리와 둑을 폭파하면서 맞섰지만 저장성장이 배신하고 현지 상인들의 철수 로비에 저장성을 내주고 철퇴할 수밖에 없었다. 위기를 이겨낸 장제스는 이러한 군사적 업적에 힘입어 이제 자신의 반대파로 전락한 보로딘을 소환해가라는 요구를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장제스의 정치적 공세에 보로딘과 왕징웨이도 반격하여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장제스에게 위임되었던 예외적 권력에 대한 회수를 주장했다. 결국 장제스는 최고사령관 직위는 유지했지만 예전보다 제한된 권력을 가지고 위원회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을 통고받은 장제스는 집기들을 때려 부수고 한 시간이 넘도록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보로딘을 저주했다. 장제스는 우한에 이 결정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줄 것을 요구했고 랴오중카이의 미망인 허샹닝을 장제스에게 파견하여 우한에서는 그가 새로운 군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품고 있다는 우려를 털어놓았다. 왕징웨이는 장제스를 토벌할 것을 선동하고 있었고 보로딘도 군사독재를 용납할 수 없다고 장제스를 공격하고 있었다. 이 소식에 장제스는 다시 랴오중카이 부인과 천제루 앞에서 집기들을 때려 부수고 광분하여 울부짖었고 하루동안 업무도 중단하고 아무것도 먹지도 않았다.

하지만 장제스는 다음날 진정을 찾고 심복들을 불러 반공의 취지를 담은 연설을 한 다음에 안후이, 장쑤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60만 위안의 뇌물을 받은 안후이 성장이 중립을 선포한 덕에 쑨촨팡 군대는 안후이에서 더 이상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쑨촨팡의 부하 3개 사단이 장제스의 부대에 합류했다. 상하이와 장쑤 곳곳에서 장제스의 소속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었다. 장제스의 부대가 항저우에 이르자 상하이에서 10만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정부수립, 군벌소탕, 임금인상, 언론자유, 노동조건 개선, 출산휴가 보장을 요구하며 대규모 파업을 일으켰다. 상하이 지척에 다가온 장제스의 부대가 곧 상하이에 입성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겠지만 장제스의 부대는 아직 상하이 입성을 준비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무리해서 사이도 좋지 않은 공산당의 파업을 도울 생각이 없었다. 덕분에 쑨촨팡의 부대들은 파업 노동자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했다. 이 소요에 긴장한 서구 열강은 상하이의 조계지에 병력을 증파했다. 일련의 사태를 본 바실리 블류헤르는 장제스의 혁명정신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고 장제스의 고문을 그만두고 그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주장, 난창, 허베이, 항저우에서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졌다.

4.6 상하이와 난징의 함락

국민혁명군의 진격은 순조롭게 이루어져서 1927년 3월 18일 상하이의 남부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었다. 상하이 경비 사령관은 장제스와 내통하여 군사기밀을 알려준 대가로 국민혁명군의 관직을 제의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고향인 산동성으로 돌아갔다가 처형당했다. 결국 상하이는 매우 쉽게 장제스의 수중에 떨어졌는데 자림서보는 상하이에서 저항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상하이의 저항이 분쇄되었다는 것도 거짓말이라는 투로 빈정거렸다. 겁에 질린 난민들과 패잔병들이 영국 조계지로 몰려들자 영국군이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결국 바이충시가 지휘하는 국민혁명군은 4일만에 상하이에 입성했다. 그 동안 노동조합 총연합회, 즉 총공회가 총파업을 실시하여 상하이를 마비시켰다. 파업 노동자들은 경찰서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자베이 지역을 점령했다. 공산당은 이 파업이 상하이를 국민당에게 넘겨주려는 무산 계급의 협조라고 주장했다. 의도가 어찌되었건 간에 총파업으로 상하이의 방어선이 작동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공산당 지도자들은 상하이에 소비에트 정권을 세우려 했지만 바이충시에 의해 모든 시도가 무산되었다. 바이충시는 파업을 멈추고 상하이의 무정부 상태를 제어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지만 총공회는 고용주들을 죽이고 자체적인 치안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소요 사태는 프랑스 조계지와 일본인 거류지로 퍼져 외국군과 폭도들의 교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교회와 전도사들도 공격당했다.

한편 국민혁명군은 상하이를 점령한 다음날에 난징도 접수했는데 난징을 지키던 군벌군들은 난징으로 접근하던 국민당 6군에 맞서 싸우긴커녕 대대적인 약탈과 강간을 자행한 다음에 달아나버렸다.[9] 일부 사소한 저항이 있었지만 금방 그쳤다. 난징 시민들은 국민혁명군을 환영했고 중국 공산당난징 사건을 통해 훼방을 놓았으나 오히려 국민당의 분노만을 키웠다.

4.7 4.12 상하이 쿠데타

장제스는 1927년 3월 26일 상하이에 입성했지만 상하이의 노동자들은 장제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다. 상하이는 연일 파업과 시위로 혼란을 빚고 있었고 공산주의자들은 상하이에 독자적인 무장과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상하이의 혼란상은 국민당 좌파인 왕징웨이도 불안하게 여길 정도로 심각했고 국민당 좌파는 장제스에게 일시적으로 협조하게 되는데 이 틈을 틈타 장제스는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일소하기 위한 쿠데타를 감행하게 된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4.8 적과의 동침

장제스의 역습에 넋이 나갔던 우한 정부는 4월 17일이 되어서야 장제스에게 인민 학살의 책임을 물어 출당 조치를 취했고 반혁명의 수괴라고 비난하고 25만 위안의 현상금을 걸었다.그간 협력 관계였던 소련도 장제스가 반역자라고 비난했고 소련의 기관지인 이즈베스티야에는 소련 유학 중이던 장징궈가 장제스에게 당신은 아버지도 아니라고 비난하는 편지가 개재되었다.[10] 이때 스탈린은 장제스를 즙을 다 짜낸 레몬이라고 불렀다. 보로딘은 외신 기자들에게 장제스는 반혁명 분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이 꾸민 음모의 희생양이 되었으며 반드시 제명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우한 정부의 위세는 실질적으로 장제스와 맞설 힘이 부족했다. 우한과 상하이의 경제력 자체가 비교가 되지 않았을 뿐더러 우한 정부는 인플레이션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장제스의 친자본가 성향에 반색한 세금 징수인들과 상인들이 장제스를 지지하면서 경제적 궁핍이 심화되었다. 장제스가 난징 정부를 수리하고 우한 정부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면서 국민당은 반으로 갈라졌다. 소련에서 귀국한 후한민도 난징 정부에 합류했다. 난징 정부는 자신들이 중산 계급과 향신의 이익을 대변하다고 선언했고 공산주의를 두려워하던 중도파들이 대거 난징 정부를 지지했다. 난징 정부는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여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토벌하기 시작했고 후한민은 이를 군국주의의 서막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우한 정부와 난징 정부는 일단은 협력하는 상태였다. 장제스는 산둥의 장쭝창과, 왕징웨이가 만주의 장쉐량과 각각 대립하고 있었기 떄문이었다. 양 정부는 잠시 원한을 잊고 임시로 협력하기로 했다. 하지만 우한과 난징이 모두 힘을 합쳐도 장쭝창과 장쉐량을 동시에 상대하긴 어려웠고 이에 국민당은 기독교도 정군 펑위샹을 동맹군으로 끌어들였다. 5월 초부터 국민당 연합군이 군벌들에 대한 공격을 실시했다. 장제스는 산둥에서 장쭝창의 군대를 분쇄했고 일본의 조차지인 칭다오까지 밀어붙였다. 이에 긴장한 일본은 칭다오에 주둔군 6천명을 증파했는데 이 때문에 중국인들은 극도로 분노했고 일본인들을 압박한 모양새를 취한 장제스의 인기가 올라갔다. 한편 탕성즈가 지휘하는 우한 군대는 막대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장쉐량의 군대를 대파했고 결국 장쉐량은 황하 이북으로 후퇴했다. 불리한 전황에 전전긍긍하던 장쉐량은 마약에 중독되었는데 그는 이후로 마약 중독으로 크게 고생하게 된다. 펑위샹은 많은 숫자의 군벌 병사들이 우한 군대에게 유인된 이후에야 다소 늦게 참전했다. 펑위샹의 군대는 우한 군대와 싸우느라 무주공산이 된 만주군벌들의 배후를 쳐서 정저우를 함락시켰다. 우한 군대가 1만 4천명을 잃는 동안 펑위샹은 고작 40명을 잃으며 어부지리를 제대로 취하게 된다.

4.9 국공합작의 종말

한편 우한 정부의 주력이 허난 성에서 고생하는 동안 장제스는 우한 정부와의 협력 관계를 깨고 공세에 들어갔다. 장제스군은 창사를 점령하자 보로딘은 공산당 소속 독립 여단을 조직하여 저항을 시도했지만 이미 우한군이 입은 피해가 막대했고 공산당과 우한 정부의 밀월관계에 자신들의 사유 재산이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한 군관들이 집단으로 배신하고 장제스의 편에 서기 시작했다. 왕징웨이는 급히 펑위샹에게 원조를 청했다. 우한 정부는 펑위샹에게 17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영지와 전쟁 지휘권과 경제 원조, 북방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약속했다. 이에 펑위샹은 장제스를 늑대의 심장과 개의 폐를 가진 냉혹한 놈이라고 욕하여 우한 정부 대표단을 만족시켰지만 펑위샹이 우한 정부에게 내준 것은 그것 뿐이었다. 반공성향을 가졌던 펑위샹은 공산당과 소련 고문들을 우한 정부에서 축출할 것을 요구했다. 펑위샹의 도움이 간절했던 왕징웨이는 그의 요구를 수용해야 했고 이때부터 우한 정부도 반공적인 성향을 띠기 시작한다. 어쨌거나 왕징웨이는 이제 펑위샹이 우한 정부의 편이 되었다고 확신했지만 우한 정부와 펑위샹의 동맹은 겨우 2주일동안 유지되었다. 2주일 후 펑위샹은 쉬저우에서 장제스와의 동맹을 선포하고 그 댓가로 매달 200만 위안의 원조와 허난 성의 통치권을 보장받았다. 펑위샹은 여기서 더 나아가 우한 정부에 보로딘을 추방하고 우한 정부의 여러 요인들에게 '쉴 것'을 요구했다.

펑위샹과 동맹을 맺은 장제스는 보로딘을 포함한 주요 좌익 인사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난징 정부 군대는 기세좋게 우한으로 진군했다. 상하이 자본가들로부터 다시 금일봉을 강탈하고 자신들을 도운 청방 우두머리들에게 막대한 보상을 내린 장제스는 장쭤린, 옌시산 등과 협상하여 북방을 정리하려 했으나 장쭤린은 장제스의 반공 성향이 진심인지 의심이 간다면서 회담을 거부했다. 거기에 산둥의 쑨촨팡의 반격이 시작됨에 따라 장제스는 난징을 방어하기 위해 우한 공격을 잠시 미뤘다. 펑위샹이 자신들을 내쫓으라고 요구한 줄 전혀 모르고 있던 공산당원들은 펑위샹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고 있었다. 보로딘은 펑위샹이 공산당의 친구라고 치켜올렸다. 이때 국공합작이 난징 정부 뿐만 아니라 우한 정부에서도 외면받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이 도래했다. 코민테른의 새 대표인 인도 출신 공산주의자 마헨드라나트 로이가 중국에 도착하여 크렘린의 새로운 노선을 통보한 것이다. 1927년 6월 1일 스탈린은 전문을 내려 2만명의 공산당원과 5만명의 노동자, 농민을 무장시켜 군대를 조직하고 혁명법정을 세워 장제스 지지자들을 처벌할 것이며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를 장악하라고 지시했다. 공산당원들은 갑작스러운 노선 변화에 당혹해했고 천두슈는 스탈린의 전문을 똥통에서 씻어낸 것같은 전문이라고 평가했다. 지금껏 그토록 공산당이 자체 무장을 갖추고 국민당 좌파와 연합해야 한다고 한 건의를 트로츠키나 하는 짓이라고 그간 모두 거절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말을 바꾸다니 공산당원들 입장에선 어이가 없을 법도 했다. 보로딘도 미친 지령이라고 혀를 찼다. 거기에 어리석은 마헨드라나트 로이가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그는 왕징웨이가 이미 스탈린의 새 노선에 대해 아는 줄 알고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스탈린의 지령을 보여준 것이다. 경악한 왕징웨이는 다음날 이 지령이 쑨원과 소련 간의 협의를 무시한 것이라고 항의했다. 소련은 이 지령이 최후통첩이라고 경고했다. 로이는 국민당이 협조하지 않으면 맹우가 아니라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위협했다.

우한 정부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6주를 허비했다. 쑹칭링은 국공 통일 전선을 유지할 것을 주장했지만 왕징웨이는 펑위샹과의 합의를 이행하기로 하고 탕성즈의 군대를 소환하여 7월 15일에 정치위원회를 통해 공산당을 축출하고 소련인들을 추방하기로 했다. 이 결정을 전해들은 공산당 지도부는 즉시 우한을 떠났다. 모스크바에서 온 특사인 베소 로미나제는 스탈린의 새 노선을 강요하면서도 국공합작을 지지했는데 이미 국민당 좌파와 우파 모두가 공산당과 척을 진 상황에서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스탈린은 9월에 국공 통일 전선을 중단할 것을 명령했다. 보로딘은 아내가 석방되어 일본으로 떠난 것을 확인하고 마헨드라나트 로이와 함께 중국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1927년 7월 27일 왕징웨이와 우한 정부 관리들은 송별회를 열고 보로딘을 떠나보냈다. 고비 사막을 지나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철도에 올라탄 보로딘은 국민당을 다른 모든 부르주아 정당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물을 끼얹어도 악취가 나는 변기통과 같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다가 1949년 숙청되어 1951년에 수용소에서 죽었다.

8월 1일, 공산당원들이 장시 성의 수도 난창에서 기의를 일으켰다. 저우언라이와 주더가 포함된 그들은 난창의 주요 호텔을 총본부로 삼고 봉기했지만 1주일만에 진압당했다. 이 기의의 생존자들이 홍군의 핵심 전력이 되었다. 한편 군사고문인 바실리 블류헤르도 중국을 떠났다. 소수의 관리들만이 그를 배웅하는 가운데 그는 매우 초라하게 떠났다. 그는 자신과 인연이 있는 장제스를 마지막으로 만나기 위해 상하이에 들렀다. 장제스는 그에게 이별에 너무 낙담할 것이 없다고 위로했고 블류헤르는 오늘이 마지막으로 만날 날이 아니길 바란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1937년 라브렌티 베리야에 의해 일본의 스파이로 몰려 가족들과 함께 처형된다.

4.10 장제스의 하야와 복귀

장제스는 총과 칼로 국민당의 지존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의 잔혹함과 성공은 수많은 정적들을 양산했다. 장제스의 정적들은 쑨촨팡과의 싸움에서 장제스가 벌인 전략적 실수를 문제삼으며 정치적 공세를 전개했고 장제스는 이 책임을 부하들에게 전가하며 맞섰지만 최종책임자인 그가 공격을 피할 수는 없었다. 장제스를 해임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자 장제스는 우한 정부와 난징 정부를 합치는 조건으로 국민혁명군 최고사령관에서 순순히 사퇴했는데 이에 온 중국이 놀랐다. 아무도 장제스가 순순히 자리를 내놓으리라고 예상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국민당의 지도자 자리에 걸맞는 인물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제스의 계획이었다. 장제스가 상하이를 거쳐 고향인 저장성으로 떠나자 장제스의 사람들이 전부 다 사직했고 국민당의 돈줄이던 청방이 자금 제공을 중단했다. 그리고 장제스가 하야한지 10일만에 쑨촨팡이 공세를 재개했다. 이 공세는 장제스의 반대파인 광시성 국민당에 의해 저지되었으나 군벌들의 공세가 계속되자 장제스의 정적들은 곧 군사적, 경제적 위기에 몰렸다. 장제스의 세력권인 난징에선 장제스 지지 시위가 벌어졌고 장제스의 복귀를 위한 포석이 깔리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을 장제스는 고향인 시커우 마을의 절에서 구경하며 즐기고 있었다. 총사령관직을 사직한 그였지만 그는 자신이 혁명의 일부분이며 아직 은퇴할 생각이 없다는 말을 흘리며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장제스가 다시 정치적 행보에 들어갔다. 장제스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광시성 파벌에 대응하기 위해 왕징웨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제스는 상하이에서 왕징웨이와 만나 국민당을 다시 합치기로 논의를 모았다. 때마침 공산당의 입지를 좁혀주는 사건도 발생했다. 1927년 12월 11일 광저우에서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공산당원들이 다시 기의를 일으킨 것이다. 국민당은 기의를 매우 잔혹하게 진압하고 부역자, 혐의자, 포로들을 학살했다. 또한 기의를 뒤에서 부추긴 소련도 공격 대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소련 외교관들은 처형되었고 소련 외교기관들도 공격당했으며 국민당은 공식적으로 소련과 단교했다. 4만명에 가까운 공산당원들이 처형되었고 장제스의 정적들은 더 이상 장제스에게 반대하기 어려워졌다. 마침 광저우에 머물고 있었던 왕징웨이도 더욱 궁지에 몰렸다. 장제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두번째 아내 천제루와 이혼하고 중국의 최고 명문가인 쑹씨 가문의 막내 쑹메이링과 결혼함으로 자신의 권위를 더욱 탄탄하게 했다.[11] 장제스는 신혼여행을 끝내고 복귀하여 광시파벌을 물리치자는 뜻을 전국에 전했고 장제스의 복귀는 초읽기에 들어갔다. 허잉친을 비롯한 국민당 거물들이 앞을 다투어 장제스의 복귀를 청했고 1928년 1월 난징 정부는 장제스에게 전권을 맡아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장제스는 탄옌카이의 환대를 받으며 난징으로 돌아왔고 다시 국민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5 2차 북벌

5.1 국민정부의 수립과 북벌의 재개

1928년 1월 4일 국민정부가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왕징웨이는 자신의 전매특허인 와병을 위한 유럽 출국을 한 상태였는데 그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말았다. 장제스는 장쭤린이 차지하고 있는 베이징을 점령하기 위해 2차 북벌을 선포했다. 1차 북벌 때엔 방관하던 입장이었던 기독교도 장군 펑위샹과 산서왕 옌시산이 장제스에게 합류했다. 장제스는 상하이 자본가들에게 막대한 군자금을 얻어낸 다음에 독일에 군사고문을 요청했다. 장제스는 에리히 루덴도르프 원수를 초빙하려 했지만 루덴도르프는 장제스의 고문 자리를 거절한 대신에 극우파 장교인 막스 바우어 대령을 추천해주었다. 막스 바우어는 장제스의 고문 자리를 수락했고 여러 장교단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다. 1928년 4월 7일 장제스는 자그마치 100만 대군을 거느리고 2차 북벌의 개시를 알렸다. 펑위샹의 군대가 31만(제2군), 장제스의 군대가 29만(제1군), 리쭝런을 비롯한 광시 파벌 군대가 24만(제4군), 옌시산의 군대가 15만(제3군)이었다. 첫번째 목표는 산둥반도였다. 산둥 반도의 장쭝창은 장제스의 공세를 목전에 두고도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결국 5월 1일 장제스 군대가 황하를 건너자 장쭝찬 군대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장쭝창은 베이징으로 달아났고 지난 수비대는 항복했다. 지난에 입성한 장제스는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병사들을 단속하는 한편 여러 잡세들을 폐지하겠다고 선전했다.

5.2 지난 사건

하지만 장제스의 군대는 일본군과 마주쳤다. 산둥에는 일본이 독일로부터 뺏은 조차지가 있었고 1800명의 일본 민간인과 2300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일본을 자극하여 베이징 입성이 지체되는 일을 바라지 않았고 군대를 일본인 구역에서 철수시켰지만 결국 일본군과 국민혁명군의 교전의 발생했다. 일본군들은 교전이 국민당의 탓이라고 주장하며 산둥성 외무관과 그의 직원 16명을 살해했다. 일본은 장제스가 일본인 300명을 죽였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명백한 날조이고 과장이었고 이 수치는 나중에 13명으로 정정되었다. 장제스도 이에 맞서 일본군이 1천명의 중국인을 학살했다고 실제 피해를 열배 정도 부풀렸다. 이 시기부터 장제스의 반일감정이 촉발되었는데 장제스는 일본인들이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하고 압제적이라고 비난받았다. 장제스는 짐짓 일본과 일전을 벌일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영국과 미국의 중재에 군대를 철수시켰다.

한편 일본군과 장제스의 충돌에 온 중국이 열광했다. 5월 8일 일본군 사령관 후쿠다 히코스케가 중국군에게 24시간 내로 철수할 것을 요구했고 중일 충돌에 책임이 있는 군관 처벌과 반일 선전 금지, 중국군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그리고 철수시한이 끝나기 직전에 포격과 공습을 퍼부어 많은 중국 시민을 죽였다. 그리고 철수하는 중국군에게 매복 공격을 가해 중국군들도 많이 죽였다. 3천에서 6천에 달하는 중국인들이 죽었다. 난징 정부는 국제 연맹에 일본을 제소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대부분의 열강은 중국에 조차지를 두고 있었고 이 상황에서 일본의 편을 들지 않기 어려웠다. 일본은 도리어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고 군관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분노한 장제스는 강력한 반일 선언문을 발표하여 일본에 맞서 치욕을 씻고 자유와 독립을 쟁취할 것이라는 의지를 밝혔다.

5.3 장쭤린의 죽음과 동북역치

한편 옌시산과 펑위샹은 베이징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자신이 베이징을 점령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옌시산이 나을 것이라고 보았고 결국 옌시산이 베이징에 입성하기로 결정됐다. 펑위샹과 옌시산의 공격을 받은 만주 군대는 만주 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1928년 6월 3일 만주 대원수 장쭤린이 펑톈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다음날인 6월 4일 아침 5시 그를 태운 기차가 펑톈 교외의 황구툰에서 폭발했다. 심각하게 부상당한 장쭤린은 일본인 고문의 부축으로 기차에서 빠져나와 포드 자동차를 타고 관저로 이동했다. 영국인 의사가 그를 돌봤지만 그의 부상은 너무 심각했고 장쭤린은 4시간 만에 사망했다. 이는 만주를 병탄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던 관동군 군관들의 소행이었다.

장쭤린 사망 직후 암살 계획을 몰랐던 일본 총영사가 장쭤린의 죽음으로 일본 국민들을 보호해야할 특별한 행동을 취할 것까진 없다고 보고하여 암살자들의 계획에 훼방을 놓았다. 관동군은 중국인 셋을 체포하여 장쭤린 암살범으로 지목했는데 이들 중 한명이 탈출하여 장쉐량에게 자초지종을 고해바쳤다. 하지만 관동군의 만주에서의 위상은 막강하여 일본은 타격을 입지 않았다. 다나카 기이치 수상은 군사 법정을 열어 암살자들을 처벌하려 했지만 오히려 자신이 중국에 너무 무르다는 비난 속에서 실각하고 말았다. 일본은 장쉐량에게 ‘친공산당적인’ 난징 정부와 절대 협의하지 말 것이며 국민당을 막기 위해 뭐든지 할 것이라는 내용의 협정을 강요했다. 장쉐량은 일본인들에게 “당신들이 한가지 잊은 것이 있습니다. 내가 중국인이란 겁니다.”라고 쏘아붙였다. 장쉐량이 분노하여 독설을 퍼부은 탓에 결국 통역가가 통역을 거부하기까지 했다. 결국 분노한 장쉐량은 7월 1일 장제스에게 평화적 통일을 원한다는 제안을 보내며 장제스에게 붙게 되는데 이를 동북역치라고 부른다.

5.4 베이징 함락

한편 국민혁명군은 베이징에 입성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시 밖의 이화원에서 교전이 벌어졌지만 그곳을 돌파한 국민혁명군이 도시에 당도하자 더 이상의 저항이 없었다. 베이징 함락 소식을 들은 장제스는 자신의 할 일이 없으니 이제 사직하겠다는 쇼를 했다. 장제스는 쑹메이링을 데리고 승전 축하 여행길에 올랐다. 부부는 우한을 거쳐 베이징으로 향했다. 장제스는 베이징의 명사들이 같이 사진 찍자는 요구를 거절함으로 자신에게 베이징보다 난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보여주었다. 이틀 후 장제스는 쑨원의 영전을 참배하여 추도사를 읽은 다음에 그의 관을 껴안고 오열했다. 펑위샹이 그를 부축해서 자리를 떴다.

이젠 장제스의 부하가 된 장쭝창의 부하 한명이 청나라 황가의 능묘를 약탈했고 장제스의 맹우들도 가담했다. 톈진의 일본 조계지로 피신한 아이신기오로 푸이는 치를 떨었다. 하지만 장제스는 이 약탈을 제어하지 않았고 오히려 능묘에서 약탈한 진주를 쑹메이링에게 주었다는 소문만 돌았다. 베이핑 호텔이 거처를 정한 장제스 부부는 장쉐량을 불러 같이 차를 마셨다. 이후 장제스는 서방 외교관들과 접견했다. 장제스가 국민당 내부 좌파들을 쓸어버리자 즉각 미국이 국민당과의 관세 협정에 동의했다. 7월 21일에 외교 사절단에게 연회가 베풀어졌고 며칠 후에 영국 대사와의 만찬이 열렸다. 장제스는 중영 협의를 공포하고 난징 사건에서 영국인들이 살해된 일에 대해 ‘이게 다 공산당 때문이다’를 시전했다. 이후 장제스는 난징으로 떠났고 다시 충치 치료를 위해 상하이로 갔다. 이를 뽑은 다음에 그는 고향인 시커우 마을에서 잠시 휴양했고 가을이 되어 난징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중국 대륙은 비로 형식적이긴 하지만 다시 통일되었다.

6 평가

북벌은 중국 역사에서 남부에서 북쪽으로 진군하여 중국을 통일한 두 번째 사건이다. (첫 번째는 명나라원나라 다)

외형상으로 중국을 통일시킨 중국 국민당 정부는 내면적으로는 '혁명적 장령'또는 '국민정부위원 겸 각 성의 주석'이라는 직함을 가진 군벌들의 불안정한 연합이었다. 재정부장 송자문은 1929년 1월 "중앙의 재정권은 겨우 강서, 절강, 안휘, 강소에만 미칠 뿐이고 그 가운데 안휘, 강서의 조세수입은 중앙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라고 보고했다. 나머지 각 성의 조세수입은 장쉐량, 옌시산, 펑위샹, 리쭝런, 백숭희, 이제심 등 지방 군벌들의 직접 사병양성 등에 사용하고 있었다. 국민당 내부에도 왕징웨이 등 개조파, 후한민 등의 원로파, 추로 등의 서산파를 비롯해 장제스에 대립하는 파벌이 다수 있었다.이런 대립은 곧바로 반장전쟁으로 이어지고 뒤이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큰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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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벌 후의 중화민국의 정세. 지도에서 남색 부분은 장제스가 이끄는 난징국민정부의 지배가 강한 영역. 핑크색 부분은 지방 군벌의 지배가 강한 영역이다. Li는 리쭝런, Feng은 펑위샹, Yan은 옌시산, Zhang은 장쭤린, 장쉐량 부자를 뜻한다.

7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저, 민음사(2014년)
  • 1928년 장학량 정권의 동북역치, 송한용, 전남대(1998).
  • 중국군벌의 성쇠와 초기 국민정부에 미친 영향, 오수열, 조선대(2013).
  1. 이를 연성자치론이라고 한다.
  2. 음모론에 의하면 상하이 검은 손의 원조를 받았다고 한다.
  3. 이때 삼민주의는 대폭적으로 개조되면서 오늘날의 삼민주의가 확립되었다. 외국의 통제를 받지않는 자주 국가건설(민족주의), 민족자본에 의한 경제 건설(민생주의), 민생의 권리 향상을 통한 궁극적 민주국가 완성(민권주의)이 그것이다. 그러나 쑨원 사후 중국 공산당은 1차 전당대회 당시의 소련의 지원을 받아 반제국주의 국가 확립(민족주의), 공산주의와의 연대를 통한 민중 해방(민권주의), 노동자와 농민운동 지원(민생주의)가 정통 삼민주의라고 주장하였다.
  4. 호치민도 이때 황푸군관학교에 잠시 몸을 담은 적이 있었다.
  5. 예를 들어, 의열단을 이끌어 활약했던 김원봉이 1926년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하고 졸업한 뒤 국민혁명군 장교 신분으로 국민당의 북벌에 참여했다. 이외에 많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이 학교를 졸업했다.
  6. 광저우 정부를 인정하는 국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7. 하지만 이들 군벌들은 군벌군이 다 그렇듯이 기량이 영 좋지 않아 사고를 많이 쳤고 반국민당 세력의 비난거리가 되었다. 중국 평균을 보면 더 막장인 군벌들이 많긴 했지만.
  8. 이는 그가 개고기를 즐겨서가 아니라 도박중독자여서 붙은 별명이다. 개고기에는 망나니를 의미하는 뜻도 있었다. 요즘은 잘 안 쓰지만.
  9.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국민혁명군이 범죄를 저지르고 그걸 군벌군에 뒤집어씌운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일부 존재한다.
  10. 그러나 장징궈는 소련의 강압떄문에 서술하였다고 변명하였다.
  11. 자세히 말하자면 결혼식 자체는 1927년 12월 1일에 있어 광저우 기의보단 시기적으로 더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