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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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의 당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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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의 상징[2]
중국공산당
中國共產黨 [3]
中国共产党 [4]
Zhōngguó gòngchǎndǎng
Communist Party of China
약칭중공당, 中共党, CPC, 중공
중앙 총서기시진핑
정치국 상무위원시진핑, 리커창, 장더장, 위정성,
류윈산, 왕치산, 장가오리
창당1921년 7월 1일
창단자천두슈陳獨秀[5], 리다자오李大釗[6]
중앙 당사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시 중난하이
당보인민일보
청년조직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중국 소년 선봉대
군사조직중국 인민해방군
국제조직공산당-노동당 국제회의
당원88,760,000명
슬로건中国共产党万岁!
중국공산당만세 !
전국인민대표대회총 2,987석 중 2,157석 차지(72%)
이념&정치노선공산주의&중국특색사회주의
상징색빨강
중국공산당뉴스포럼(중국어)
창당 95주년 TV광고[7]

1 소개

1921년 7월 23일[8] 상하이에서 천두슈에 의해 설립된 공산당.

1949년부터 중화인민공화국집권당이자 사실상 유일한 정당[9][10]. 약칭은 중공(中共)[11]. 중국 현지에서는 더 줄여서 그냥 "당"(党)이라고도 부른다.[12] 당원은 약 8,876만 명[13][14]이다.

전국대표회의라는 5년마다 열리는 전당대회가 있다. 공산당 주요 인물들이 대거 참석하는데 여기서의 결정이 다음 회의때까지의 중국 정책방향을 결정한다.[15]

당원 선발 절차는 매우 엄격하고 까다로워서 약 3년이 걸리는 능력검증절차를 밟는다. 하지만 거꾸로 실력있는 사람들을 당원으로 받아서 어떻게든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는 기능도 있다고. 실제 사례로 중국 베이징대학 학생들은 1991년에는 5%, 2009년에는 10%가 공산당 당원으로 입당하는 등 점점 증가추세. 심지어 처음엔 차단되었던 자본가들도 많이 입당했다. 그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는 '꽌시', 즉 인맥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지만. [16]

일단 2010년대에 들어서 당의 중추를 과거 공산당의 주축을 이끌던 초기 혁명공신들의 후예들이 상당부분 장악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긴 어렵다. 물론 공청단이나 상하이방 같은 세력들도 있지만 현 주석인 시진핑 시대에 들어서 유독 이런 소위 태자당 출신들이 다른 파벌을 누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때문에 적어도 파벌간 권력의 분배가 어느정도 이루어지던 과거와 달리 이런 추세를 우려하는 시선도 적지 않다.

2 역사

2.1 중화민국 시기의 역사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이후, 소련볼셰비키당에 영향을 받고 5.4 운동의 시류를 탄 여러 지식인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제1차 당대회는 1921년 7월에 있었는데, 이때 마오쩌둥을 비롯한 13명의 중국인과 2명의 외국인(코민테른에서 파견)이 참가하였다[17]. 중국공산당은 쑨원과 연합한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아 국민당에 개별 입당하는 식으로 국공합작에 나서게 된다. 이어 소련 군사고문단이 중국에 파견되어 국민당군의 재건을 도왔다.

이후 장제스는 국민당군을 이끌고 군벌이 장악한 북양정부를 토벌하기 위한 북벌을 거의 성공시키지만, 국공합작을 꺠고 국민당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일으킨 4.12 상하이 쿠데타로 당원 70% 가까이가 학살되고, 구추백이나, 이대교 등의 당 지도부가 처형되는 위기가 있었으나, 당시 당지도부와는 어느정도 아래 있었던 마오쩌둥의 봉기가 성공하여 중국 남부에 거의 5천만을 지배하는 서금 소비에트를 세우게 된다.

장제스의 국민당은 이런 눈엣가시를 가만 돌 수 없었고독일 군사고문단과 200만 병력을 동원하여 소비에트를 함락시키게 되었고, 공산당은 8만의 병력을 이끌고 중국 대륙을 시계방향으로 반바퀴 돌아서 1년동안 대장정 끝에 산시성에 도착한다.

이어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장학량은 시안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를 체포하고 국공합작을 강요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장제스가 이를 받아들여 중일전쟁당시에는 어쨌든 느슨하게나마 연합해 있었다.

일본과의 전쟁이 중국의 승리로 끝나자, 미국의 중재로 잠시 휴전상태가 되지만, 장제스는 공산당을 토벌하기 위해 먼저 군사를 일으켰다가, 1948년 겨울에 만주에서 참패하면서 전세가 기울어 1949년 중국 국민당을 대만으로 밀어내고 대륙을 통일한다. 이어 건국된 나라가 바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완전히 새 되어버린 중국 국민당은 후퇴하면서 중화민국 정부를 대만으로 이전시켰다.

2.2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집권 중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 등의 병크를 저지르기도 했으나, 장제스 정권시절보다는 뛰어난 행정력을 가지고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며 대륙을 그럭저럭 운영한다고 평가받고 있다. 덩샤오핑 이래 보여주고 있는 중국의 고속성장은 공산당의 집권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다. 공산당이면 어떠냐,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18] 그 와중에 생기는 빈부격차나 부정부패, 오염문제도 상당히 크고, 정치에 관한 불만도 크지만 조금씩 통치의 경직을 풀어주는 방법으로 그 불만을 교묘히 컨트롤하면서 정부에 대한 불만을 낮추고 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정부 비판이 조금도 허용되지 않았지만 현재는 언론의 웬만한 비판은 눈감아주는 추세이다. [19] 말하자면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배합하여 국민들을 통제하고 있다.

현재까지 이런 방법은 성공적이었고 여기에 중국 공산당의 통치 능력도 괜찮은 편이라[20] 아직까지 중국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만족도는 전체주의적인 선전에 힘입어 면도 있겠지만 높은 수치이다. 미국의 피우(Pew) 연구소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국을 비롯한 민주주의 국가들은 30에서 50% 수준인 반면 중국은 70%이다.

3 비판

일당 독재에 대한 반대나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경직된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정부에 비판적인 인권 운동가들을 "국가전복 혐의" 또는 "허위사실 유포"로 몇년간 가두는 건 예사이다.

종교에 대해서는 법적으로는 자유를 보장한다고 규정하지만 알게모르게 푸대접이 있고 특히 국가적으로 사교로 지정된 파룬궁은 엄청난 탄압을 받고 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체제가 뒤집힐뻔한 엄청난 종교민란을 겪었기 때문에(황건적, 홍건적, 태평천국), 교주를 신격화하는 사이비 종교에 대해서는 엄격한 면이 있는데다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간주하는 공산주의 특성도 한몫 한다. 여기에 서방과 이어진 외래종교인 가톨릭개신교는 불교나 이슬람교에 비하면 더더욱 경계하는 편이다. 근대 서양의 침략을 받았고 현대에도 미국을 위시한 서방 진영과의 대립 때문에 기독교를 서방 프로파간다의 일환으로 보는 것. 불교야 인도에서 기원되었지만 이미 오랜 시간동안의 로컬라이징을 거쳤기 때문에 단순한 종교가 아닌 문화와도 연결시켜 홍보하는 분위기고 이슬람교는 위구르 족 등의 소수민족들을 다독일 필요가 있기 때문에 관대한 편이다.

대부분의 개발 도상국과 마찬가지로 내부적으로 부정부패가 상당한 형국이다.참고 중국 공산당은 정치 사회 문화 경제를 다 컨트롤 할 수있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어 공산당 고위 관료랑 잘 통하면 엄청난 이권을 챙길수 있다. 이 때문에 정경유착과 부패가 심하다. 중국 당국도 이에 대한 문제점을 알고 있고 반부패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이것이 시진핑 1인 독재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중국/문화 검열, 중국/인권, 중국/정치 참고.

4 관영언론

  • 인민일보 (런민르바오)
  • 환구시보 (환추스바오) - 인민일보에서 출자해서 만들었지만, 반관영이다. 그러니까 꼭 인민일보나 중국 공산당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좀 더 국수적인 논조이다.

환구시보에 대한 중앙일보의 기사 #

5 파벌

6 기타 등등

2016년 기준으로 창당된 지 95주년을 맞이하였다. 백 년을 바라보고 있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중앙일보의 관련 기사

중국 공산당이 마치 중국 공자당되는 것처럼 유교화되고있다는 중앙일보 기사 #

모택동 시절 이후 다시 재조명받고 있는 공자 #

7 관련 문서

  1. 소련 국기와 비슷하긴 하지만 낫 모양이 다르다. 그리고 별도 없다.
  2. 당사국 헌법에 정의됨
  3. 정체
  4. 간체
  5. 진독수, 간체: 陈独秀
  6. 이대교 또는 리대소, 간체: 李大钊
  7. 이 문단은 중국 공산당의 선전이 아닌 현재 중국 공산당이 어떻게 선전하는지 보여주는지 드러내기 위해 문서에 넣었다. 절대 선전을 퍼트리는 것이 아니다!
  8. 중국 공산당은 7월 1일이라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7월 23일에 열렸다.
  9. 1949년 10월 1일까지는 중화민국의 정당(야당)이기도 했다.
  10. 정확히 말하면 중국엔 공산당 말고도 8개의 민주당파 정당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정치활동만 하고 있는 구색 맞추기용 위성정당이며 정권 교체는 실질적으로 할 수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다. 그나마 중국 민주당 등 여러가지 정당이 있긴 하지만 금순공정 등으로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으며 사실상 소규모 정치모임이나 다름없다. 툭하면 국가전복죄로 감옥에 집어넣고.
  11. 1988년 이전까지 대한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공'이라고 불렀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일개 국가가 아닌, 그냥 중국 공산당 당국, 혹은 중국 공산당 정권이라는 의미로.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당시 수교중이던 중화민국 때문이었다. 한국-대만 관계 참고.
  12. 중국 정부가 곧 중국 공산당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자국 정부를 단순히 "정부"라는 것과 같다. 중국 국내에서 중국인들이 "당"이라고 하면 높은 확률로 중공을 가리킨다. 당나라와 햇갈리면 어쩌나 하겠지만 당나라의 당(唐)는 중국 발음으로 "탕"(Táng)이니 햇갈릴 일은 없다.
  13. 중국 인구의 약 6.3%를 차지하며 세계에서 2번째로 규모가 큰 정당이다. 심지어 독일 인구보다도 크다!
  14. 1위는 인도의 바라티야 자나타으로 약 1억 1000만 명의 당원이다. 중국 콩산당
  15. 서성, <한 권으로 읽는 중국 문화>, 넥서스, 2005, p38-40
  16. 중국 입장에서 약간 실드를 치자면, 이점은 딱히 중국 자체의 문제보다는 전근대사회의 특징으로 보면 된다. 인도나 필리핀은 아예 정치를 가업으로 삼는 가문이 있으며, 선진국이라고 볼 수 있는 일본이나 한국도 유명정치인의 자녀나 친인척은 쉽게 정계에 진입하고, 부시 일가나 힐러리 클린턴을 보면 미국도 이점에서 자유롭지 않다.
  17. 여담이지만 제1차 대회 참가자 13명 중 1949년 중공이 정권을 수립할 때까지 공산당에 남아 있었던 사람은 마오쩌둥과 둥비우 2명이었고, 4명은 혁명활동중 전사, 그리고 나머지 7명은 중국 국민당이나 일본의 괴뢰정권으로 전향하였다.
  18. 실제로 바이두에 "왜 중국이 일당제여야 하느냐"라는 질문에 "공산당이 모든 걸 다 해주는데 다당제가 왜 필요하냐"는 답변이 올라온 사례가 있다.
  19. 1980년대만 해도 어떠한 경우의 정부비판도 금지되었지만, 현재는 중앙정치와는 거리가 먼 하급공무원 비리, 환경오염, 행정부조리 등은 보도가 가능하다.
  20. 중국의 경제성장만 봐도 의외로 통치능력이 상당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기회를 잘 잡은 게 크긴 하지만 기회를 잘 잡는 것도 능력과 판단력이 좋아야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