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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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대 왕조의 대도시 중 한 곳으로, 문화 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유구한 지역.
南京, 한국어로는 남경이라고 한다. 중국 남부의 중요도시 및 국제도시로 중국 장쑤성의 성도이며 부성급시이다. 사진은 난징시의 번화가인 신제커우(新街口), 신제커우 한복판에는 쑨원의 동상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2007년 주민등록인구는 618만 명. 난징 대학살 사건이 일어났던 곳.

중화민국 시절(1912~1949)에는 수도였으며,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한 중국 국민당국부천대한 이후에도 현재까지 중화민국(대만)의 명목상 수도이기도 하다.[1]

1 역사

1.1 6조의 수도로 번성하다

원래 이름은 금릉(金陵)이었는데, 중원 전토를 통일한 후 순행하던 진시황이 이 지역에 도달했을 때 이 지역에서 제왕의 기운이 느껴진다 하여 소나무를 빽빽이 심어 왕기를 억누르고 이름도 말릉(末陵)으로 바꿔버렸다. 예지력 대장 선견지명의 달인

그렇게 삼국시대 이전까지 말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3세기 초 손권나라(손오)를 세워 황제의 자리에 올라 이후 6조(六朝)의 도읍이 되는 기반을 닦게 된다. 원래 오나라의 수도는 회계(會稽 : 현재 강소성 소흥시)였는데 손권의 중신 장굉이 말릉이 도읍으로 적합한 땅이라 하여 211년 수도가 되었다. 그러면서 명칭도 나라를 세운다는 의미의 건업(建業)으로 변경.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중 일부 작품에서 이 이벤트가 구현되어 있다. 내내 건업이 수도였던 건 아니고, 형주 공방전 직후와 손호 때인 265년 - 267년 두 차례에 걸쳐 잠깐 무창(지금의 무한 시 내의 무창과는 다른 곳으로, 지금의 어청 시)에 천도했지만 곧 건업으로 돌아왔다.

그 뒤 서진(西晉)이 흉노출신의 유연(劉淵)이 세운 한(漢)나라, 곧 전조에 멸망했다는 소식이 건업의 황족인 사마예(司馬睿-동진(東晉)의 초대 황제)에게 전해진 직후 휘하 심복들과 호족들의 뜻을 모아 즉위하고 동진을 세웠다.

원제(元帝-사마예)는 서진의 마지막 황제 민제(愍帝) 사마업(司馬鄴)의 휘(이름)인 (鄴)이 건업(建業)의 업과 음이 같다해서 이를 피하기 위해 건강(建康)이란 지명으로 고쳤다.

이렇게 손오(211~280) 이래 건강은 동진東晋(317~420)·송宋(420~479)·제齊(479~502), 양梁(502~557)·진陳(557~589)의 위진남북조 시대의 남조의 한족 여섯 왕조가 340여년간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이른바 육조시대의 무대.

시대에는 다시 금릉(金陵)으로 불렸다. 오대십국시대에는 남당의 수도였다. 이후에는 강남으로 쫓겨난 남송항저우를 수도로 삼았다. 건강이라는 지명은 송나라, 원나라 시대까지 계속 쓰였다.

1.2 두번의 비약과 쇠퇴

14세기 말 주원장명나라를 일으키며 황제의 자리에 올라, 비로소 명나라의 수도가 되었다. 이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강남에서 기반한 통일이다. 주원장은 이곳을 수도로 삼고 북쪽에 있는 원나라의 수도의 이름은 북경으로 바꾸었다. 이 때 북경에 대비되는 이름으로 남경이라는 이름이 생기긴 했으나, 이 당시는 엄연한 수도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건문제 시대까지 수도의 지위를 유지했으나, 영락제 시대에 그의 영역이었던 북경으로 수도가 옮겨졌다. 그리고 이름도 다시 남경(南京)으로 환원되었다(금릉(金陵)은 역사적 명칭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사용된 이름일 뿐 정식 명칭이 아니다). 정식 명칭은 응천부(應天府)이며, 남경이라고 불리었다.

이 밀고내려오자 복벽운동으로 남명이 저항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금방 함락되고 정성공 등과 함께 광둥 성, 윈난 성, 베트남, 타이완 등으로 뿔뿔히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남명의 강역엔 간신히 들어가지만 의미도 없을 수준이다.

1.3 현대

19세기 들어오면 열강에 의해 청나라가 수난을 겪는 아편전쟁난징 조약의 배경이 되어 급격한 근대화를 맞이하기도 했다. 1853년 기독교 성격의 사회운동인 태평천국 운동의 지도자 홍수전이 이곳에 들어와 수도로 삼고 황제가 되어 이름을 천경(天京)이라 하였다. 하지만 10여년 뒤 청나라의 공격과 내분으로 인해서 곧 함락되었다.

쑨원중화민국신해혁명으로 이곳에서 처음 일어났고[2] 1928년 장제스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가 되었고, 직할시로 지정되었다.[3] 두번째 강남에서 기반한 통일이었고, 북경(베이징)은 또 다시 수도에서 강등되어 북쪽을 평정했다는 뜻의 북평(北平, 베이핑)으로 개칭되었다. 이 때문에 1937년 중일전쟁 중 대참살극인 난징대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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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940년 3월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충칭으로 후퇴하면서 왕징웨이의 난징 괴뢰정권(난징 국민정부)의 수도가 되기도 했다. 근데 정작 그 왕징웨이는 나고야에서 죽음을 맞았다(...)

중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일본을 크게 무찌른 장제스 정부는 수도를 다시 난징으로 이전하여, 난징을 예전처럼 크게 발전시켰다. 하지만 영광도 잠시, 1949년 10월 1일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의 주도하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수도에서 강등되어 직할시가 되는 모욕을 겪었다. 1953년장쑤성의 부활과 함께 다시 직할시에서 성도(省都)로 강등되었고, 덩샤오핑의 지원 덕분에 1994년에야 의미가 있는 부성급시로 승격되었다.

1.4 난징 징크스

난징은 오나라, 동진, 송나라, 제나라, 양나라, 진나라, 명나라, 남명, 그리고 뒤에 나오는 태평천국, 중화민국, 왕징웨이 정권의 수도였다. 또 중국 7대 고도인 난징, 베이징 시(북경), 시안(서안=장안), 뤄양(낙양), 항저우(항주=임안), 카이펑(개봉), 안양(은허)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이 곳을 수도로 한 황조는 100년을 못 가서 망했다. 여기에 골육상쟁과 학살은 옵션으로 포함되어 있다.

동진은 100년을 넘기는 했는데(317~420), 10대 황제 안제(安帝)때 환현에게 한 번 망했다가(403) 후일 동진을 잇는 황조인 유송(劉宋)을 세우게 되는 유유가 환현을 내쫓고 안제를 복위시켜 주는 안습한 과정을 거쳤고, 이 뒤의 동진은 사실상 유유가 좌지우지하는 허수아비 정권이라고 봐야 하므로 100년을 못 간거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명나라는 예외적으로 꽤나 장수했고, 천하통일은 이룩했지만 그마저 영락제정난의 변을 일으켜 난징에 도읍하고 있던 건문제를 축출해버리고(…) 황제가 되자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북경으로 천도해 버렸다. 영락제의 아들인 홍희제가 다시 남경으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홍희제가 단명해버려서 결국 실패. 그의 아들 선덕제도 남경 복귀를 고려했지만 다시 대공사를 일으키는 것은 무리라서 포기했다. 물론 당시 연왕이었던 영락제가 명 황제인 건문제를 끌어내리면서 수 만 명을 학살했고 그 이전에 홍무제도 문자의 옥을 일으킨 것을 보아하면 이미 헬게이트는 열려있었다. 게다가 남명은 금방 망했어요 골육상쟁과 학살 옵션은 있었다.

중화민국도 멸망 직전에 타이베이로 천도하여 100년을 넘기긴 했으나(....)이건 임시수도잖아 초기 16년에는 베이징이 수도였고, 난징을 수도로 한 건 중국 국민당국민당 일당체제를 수립한 1928년부터 1949년까지 겨우 21년 뿐이다. 이후엔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난징을 포함한 전 국토를 빼앗기는 대참사를 겪었으니 난징 100년을 채우진 못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한 몇가지 해석이 있다.

  • 대부분의 황조가 중원에서 밀려 내려오거나, 강남지역에서 생긴 사실상의 지방정권이다. 즉, 애초부터 약체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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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징의 위치가 국가간 전쟁의 시야로 본다면 의외로 지키기 어려운 곳이다.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너무 양쯔강과 딱 붙어있고, 바다와도 가깝고 앙쯔강 자체가 큰 선박이 드나들 수 있으며, 앙쯔강이 바다로 흘러가기 직전에 잠깐 북쪽으로 돌출한 지형이다.
한마디로 줄이자면 적을 향해 툭 튀어나온 돌출부다.
  • 난징 자체가 강남인과 중원인이 만나는 곳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사는 곳부터 엄청나게 다른 사람들을 한 곳에 몰아넣으면 싸움이 나는 것은 안봐도 비디오.

다만 한나라 정도나 다수 통일 왕조를 제외하고는 중국에 존재했던 나라들 자체가 그렇게 오래가질 않으므로 질문 자체가 의미가 적다. 지방정권으로 남하해 약체인 왕국들이 망하는거야 다반사이다.

또 난징이 강이 직통이라 방어하기 어렵다는 말도 의미가 없는데, 난징에 세워진 국가가 침략으로 망한 경우는 오(삼국시대), 진(남북국시대), 남당, 남명, 태평천국, 왕징웨이 정권, 중화민국 정도인데 그나마도 양자강에서 바로 난징으로 도하하여 망한 경우로는 오, 태평천국, 남당, 남명, 왕징웨이 정권 등이 빠진다. 결국 진나라를 제외하면 의미가 없는 해석이다. 되려 부견전진을 디스한 비수대전 같은 사건도 있었다.

다만, 군사적 방어문제 자체는 2012년인 현재도 실존하는 문제는 맞다. 난징에 수도를 정한 대다수의 국가들이 적의 침공으로 멸망하는 경우는 보통 난징 근처의 장강방어선에 주력군이 방어선을 치고 밀집한 상태에서 서쪽에 있는 양자강 중류 지역인 형주가 무너지면서 측면공격을 받아 도미노처럼 차례로 붕괴되는 경우가 많다. 즉 한쪽을 틀어막으면 다른 쪽이 무너지는 엿같은 구조라는 것.[4] 비수대전도 도저히 현재 병력으로는 방어가 안 되니 결사적으로 소수의 군대가 장강 북안에 전진한 경우이며, 형주 지역은 별도의 군벌 군대가 철통같이 막아서 적의 우회를 불가능하게 만든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애초에 방어선 붕괴는 방어선 그 자체가 정면 공격을 받아 뚫려서 무너지는 것은 드물고, 우회하거나 주변지대가 먼저 함락돼서 발생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마지노 선이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그리고 외척과 권신에게 쉽게 휘둘리고 황위를 강탈당하는 황실 체제는 그냥 웬만한 중국사에서 대부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단지 황족간의 권력다툼이 남조의 6조시대에서 두드러지는 좀 신기한 현상이긴 하지만, 이건 서진 팔왕의 난부터 예감된 것처럼 황가의 친척들이 사병들을 지나치게 확보했던 권력구조의 문제에 가깝지, 지리 탓이 아니다.

2 그 외

난징의 명물로 난징 오리 요리가 있다. 오리소금물에 끓인 다음, 말려서 안주 등으로 먹는다. 더 자세한 사항은 난징 오리 요리 항목을 참조하기 바람.

난징에서도 항일 애국지사가 많이 배출되었으며, LG그룹(화학, 전자, 디스플레이 등), 금호타이어 등의 한국기업들이 진출해 있어 많은 교민들이 거주 중이다.

한 때 난징과 나고야가 지역 교류를 시도하려 했지만, 나고야 시장이 자민당인 탓에 역사 왜곡을 하며 난징대학살 등을 부정하여, 결국 난징 시장은 일본에 대한 항의 표시로 나고야와 지역 교류를 쿨하게 취소해버렸다. 흠좀무. 역시 자민당 클라스 또, 난징은 일본 기업도 없다고 한다.

2015년 12월 1일 개관한 친화이 구에 있는 리지샹 위안소 진열관이 있다.르포
  1. 현재 사실상 대만의 수도로 기능하고 있는 타이베이6.25 전쟁 당시 부산광역시가 몇 년 간 그랬던 것처럼 명목상 아직도 임시수도이다. 그 임시수도 역할을 반백년이 넘도록 하고 있지만
  2. 단 수도가 난징인 것은 북양군벌위안스카이 때문에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3. 이 당시 하위 행정구역은 심플하게 제1구~제15구(...) 성북동구니 성동구니 하는 건 별칭이다.
  4. 수나라가 진을 공략할 때와 원나라가 남송을 공략할 때 패턴이 딱 이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