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 상하이 쿠데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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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4월 12일 장제스를 중심으로 한 국민당 우파가 중국 국민당 좌파들과 중국 공산당에게 날린 정치, 군사적인 대역습

이 사건으로 붕괴 직전에 다다른 국민당 우파는 좌파와 공산당을 위시로 하는 반대파들을 분쇄하고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제스는 국민당 내에서 권력을 확고하게 잡는다.[1] 이 사건으로 제1차 국공합작은 끝나게 된다.

2 배경

2.1 국민당의 분열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질 당시, 중국 공산당은 불과 200명도 못되는 군소 정당이었다. 그러나 국공합작 이후로 국민당 명의로 여러 활동을 하면서 자신들의 발언력을 확장해나갔고 이 과정에서 국민당의 정체성이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반발을 품은 국민당 일부 세력이 국공합작을 끝내고 공산당을 추방해야한다는 강경론적인 입장이 대두되게 되었다. 그러나 쑨원이 이에 반대하였기에 쑨원이 살아있을때에는 이에 대한 반발이 터져나올 수 없었다.

그러나 1925년 3월 쑨원이 사망하자 이에 대한 반발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쑨원 사후 구심력을 잃은 국민당은 공산당의 공작에 대처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후에는 국민당 좌파[2]와 연합한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을 완전히 공산화시킬려고 마음을 먹게 된다. 한편 1925년 8월 국민당 좌파 중 하나인 랴오중카이가 암살되자 중국 공산당은 이 사건의 범인이 우파의 영수인 후한민으로 결정짓고 그를 추방시켰다. 이에 반발한 국민당 우파 40여명이 베이징의 서산에 모여서 국공합작을 끝내기로 결정짓는데 이들을 서산회의파라고 한다. 그러나 광동의 국민당 본부는 이미 공산당이 과반수를 차지한 상황이라 그들을 오히려 당에서 제명하기로 결정지었고 이에 국민당 우파의 불만은 극에 달해있던 상황이었다.

2.2 장제스의 위기

한편 1926년 7월에 시작된 장제스의 북벌은 성공적으로 흘러갔고 1927년 3월 상하이와 난징이 국민혁명군의 손에 떨어졌다. 1927년 3월 26일 아침에 장제스는 군함을 타고 상하이에 입성했다. 상하이의 군벌 세력들은 노동자들의 폭동[3]에 타격을 입고 거의 싸우지도 않고 달아나버린 것을 접수한 상황이라 상하이에서의 장제스의 입지는 좋지 않았다. 장제스에겐 3천명의 병력이 있었는데 이들의 충성심은 상당히 의심스러운 상태였다. 상하이의 대중은 반장, 반외세, 공산주의 성향을 매우 강하게 띄고 있었고 이들은 상하이의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해 독자적인 실력 행사에 나서고 있었다. 장제스는 외국인들을 보호하는 한편 상하이의 통제권을 확보하려고 했지만 장제스가 당장 활용할 수 있는 힘은 부족했다.

노동조합과 공산당원들은 무력 충돌을 빚으며 자신들의 집권에 방해되는 반대파들을 처단했고 매우 강력해진 공산주의자들은 저우언라이를 보내 장제스에게 공산당원들에게 치안권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장제스는 이 요구를 당연히 거부했다. 장제스의 정적인 왕징웨이는 국민당 좌파들을 규합하여 다시 장제스를 권좌에서 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기적적인 전환점이 발생했다. 상하이를 방문한 왕징웨이가 상하이의 혼란상을 보고 장제스를 지지한 것이었고 장제스를 이 기회에 완전히 실각시켜야 한다는 일부 극단적인 주장은 공산당과 좌파들 사이에서도 기각된 것이었다. 장제스는 최악의 순간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3월 26일 상하이 폭력단의 3대 거두 중 한 사람인 황진룽이 장제스를 찾아왔다. 그는 이미 천치메이의 소개에 따라 1926년 장제스와 만난 적이 있었는데[4] 황진룽은 장제스에게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곧 이어 상하이 암흑가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인 ‘큰 귀’ 두웨성이 장제스를 찾아왔다. 두웨성은 상하이 내부의 공산당을 경계한 프랑스의 법적,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받아 공진회라는 민병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두웨성은 프랑스 경찰국장 피오리와 영미 공동조계지 공부국장 스털링 페선든과 회동하여 만약 더 많은 무기를 준다면 공산당을 제압해주겠다고 제안하여 양국의 승낙을 받은 바가 있었다. 두웨성 역시 장제스에게 협력을 약속했고 청방의 지원을 등에 업은 장제스는 상하이의 군 지휘권을 바이충시에게 넘겨주었다.

한편 이러던 와중에 상하이의 노동규찰대는 점차 독립적인 권력을(상하이 소비에트 정권) 수립함으로서 궁극적으로 상하이를 공산화 시키려고 하였다.[5] 이에 불안감을 품은 상공계층과 조계에 주둔한 외국인들은 장제스에게 치안을 확보해줄 것을 요구받았고 이에 장제스는 공산당을 제압할 명분까지 확보하게된다.

3 쿠데타의 시작

4월 11일 밤 8시 두웨성은 상하이의 가장 큰 노동조합의 지도자인 왕숴화를 초대했다. 그날 밤의 모임에는 두웨성 뿐만 아니라 상하이 암흑가의 3대 거물 중 또 다른 한 사람인 장샤오린[6]도 참석했다. 장샤오린은 왕숴화에게 규찰대를 해산하고 전향할 것을 요구했다. 왕숴화가 거절하자 청방 조직원들이 왕숴화를 구타한 다음에 생매장해버렸다. 4월 12일 새벽 4시, 두웨성의 민병대 2천명이 백색 완장을 두르고 길거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장제스의 군대는 그들에게 적극 협조하면서 길을 터주었다. 공격을 알리는 나팔과 군함 사이렌 소리가 들리자 남색 옷을 입은 자들이 노동조합 지부와 노동자들의 요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민병대들과 장제스의 군대들은 좌익분자들을 보이는 족족 총살하거나 참수했다. 목에 8만 위안이나 되는 현상금이 걸린 저우언라이도 상무인서관의 종업원 클럽에서 체포되었지만 가까스로 탈출했다.[7] 날이 밝자 경찰은 400명이 죽고 300명이 체포되었다고 발표했는데 사망자는 족히 두배가 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국민당 측은 후일 이 때 사망자는 90여명이었다고 주장한다. 청방 깡패들이 노동조합 본부로 몰려들어 자신들이 새로운 노동자 조직을 결성하겠다고 선포했고 상하이의 60여개 상업 단체가 장제스와 바이충시에게 축하 전보를 보냈다.

노동자들이 공격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전단지와 포스터를 붙여 장제스를 규탄하는 매우 소극적인 대응을 했다. 여자와 아이들이 포함된 시위대가 군 총사령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자 군대가 기관총을 발사해 3백 명의 시위대를 죽였다. 장제스는 공산당 폭동을 진압하고 상하이의 평정을 찾았다고 일기에 적었다. 두웨성의 조직원들과 장제스의 병사들이 온 상하이를 수색하여 공산당원들을 색출하였다. 다섯개 좌익 조직이 공격당해 1천명이 체포되었고 집회와 행진이 금지되었다. 당시 상하이에 있었던 에드거 스노우는 오천명에서 만명이 죽었다고 추정했고 작가 한쑤인은 8천명이 죽고 노동자들의 딸과 아내 6천명이 매음굴에 팔려나갔다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3만 4천명이 죽고 4만명이 부상당했으며 2만 5천명이 사로잡힌 것으로 판정되었다. 장제스의 비서 천리푸조차도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시인했다.

학살은 상하이에서만 벌어지지 않았다. 광저우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끌려가서 총살당했고 단벌머리를 한 여자들은 과격분자로 낙인 찍혀 처참하게 죽었다.[8] 항저우에서도 병사들이 장제스를 욕하는 사람들을 잡아서 죽였다. 공산당이 많이 침투한 후난성의 시골에선 농민 봉기들이 진압당했고 수많은 농민들이 처형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장제스의 칼날은 공산당 토벌을 보며 좋아하던 상하이의 자본가들에게로 돌아갔다. 북벌자금을 확보해야했던 장제스는 금융위원회를 결성하여 자본가들에게 자금을 요구했다. 거부한 많은 자본가들이 실종되었다가 거렁뱅이가 되어서 다시 나타나곤 했다. 백만장자라 하더라도 장제스의 요구를 거부하면 순식간에 빨갱이로 몰렸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안 총상공회는 청방 우두머리들을 불러 극진히 대접하며 상황을 중재해줄 것을 청했지만 자본가들에 대한 수탈은 멈추지 않았다. 거대 백화점 주인들의 아들들은 유괴되었고 공장주들은 막대한 재화를 약탈당했다. 겁을 먹고 상하이를 탈출한 자본가들이 남긴 재산은 장제스가 접수했다.

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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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군에 의해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공산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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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청방에 의해 참수되는 공산당원

이후 장제스는 외국으로 갔던 후한민을 복귀시켜 그를 국민당의 영수로 삼았다. 한편 우한의 좌파 국민당 당원은 경제,군사적으로 극히 곤란한 상황에 빠져있었고 결국 국민당의 공산화시킬려는 코민테른의 비밀 지령을 읽은 왕징웨이는 7월 17일 모든 공산당원의 직무해제를 명령하였고 이로서 1차 국공합작은 종결되었다. 이후 왕징웨이를 위시로 한 좌파 세력은 대부분 난징 정부에 합류했으나 쑹칭링을 위시로 한 일부 세력은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의 명의로 계속 저항했다. 그러나 아무런 기반도 없던 혁명위원회는 일부 인사들이 암살당하자 쑹칭링의 모스크바 외유로 흐지부지되었고 이때를 계기로 국민당 좌파는 소멸하게 된다.

5 여담

중국 공산당의 선전에선 이 공산당원과 규찰대를 상하이를 장제스에게 곱게 바쳤음에도 권력욕에 찬 장제스에게 배신당한 순진무구한 인물들로 묘사하는데[9] 사실이 아니다. 덩샤오핑 평전에서조차 상하이 쿠데타가 장제스의 일방적인 무력행위가 아니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상하이는 왕징웨이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의 무정부 상태였다.

이원복은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 현대사 편에서 이 쿠데타가 서구 열강의 사주란 주장을 하고 있지만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 현대사편은 사실 관계 자체는 그럭저럭 잘 서술했어도 해석에 있어서 80년대에 최고조를 달렸던 혁명사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한계가 있다. 오히려 4.12 상하이 쿠데타 당시의 국민당은 반서구, 반제국주의 감정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으로 난징을 점령하고 서양인 외교관, 선교사, 학자, 기업인들을 습격하여 상당수를 살상한 난징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에 분노한 열강이 함대를 보내 난징 시내를 포격하여 많은 사상자가 났으며 장제스는 이것이 군벌 잔당과 공산당의 행위라고 책임을 떠넘겨야 했다. 실제로 장제스의 지시는 아니었고 우발적인 일로 추정된다.

한편 이 쿠데타는 장제스가 자신의 대가 끊어질 것을 각오하고 벌인 쿠데타였다. 왜냐하면 장제스의 유일한 아들인 장징궈가 당시 소련 유학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제스는 공산당을 쓸어버린 후에 소련에서 당연히 보복으로 장징궈를 처형할 것으로 알고 자신의 대가 끊어졌다고 한탄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자신의 일기에 "(물론 가족의 대를 잇는 건은 중요하지만) 국가에 해가 되는 자식이라면 없는 편이 더 낫다."라고 서술하였는데, 고자인 탓에 유일한 자식이었지만 (장제스 입장에서는)국가를 위해 자식을 위험에 빠뜨리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장제스는 얼마 후 프라우다에 장징궈가 장제스를 맹비난하는 편지를 올린 것을 보고 "소련이 장징궈를 죽이진 않겠구나"하고 매우 기뻐했다.

6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2014)
  • 중국국민혁명운동의 구조적 분석, 민두기, 지식산업사(1990)
  • 덩샤오핑 평전, 벤자민 양, 황금가지(2004)

7 미디어

  1. 이러고도 국민당은 너무 복잡했고 장제스의 힘도 부족하여 장제스는 이후 후한민과의 장호합작을 형성하거나 정적 왕징웨이와 손을 잡는 등 여러 분야의 합작과 이합집산을 반복하여 중원대전에서 승리한 다음에야 어느 정도 독재적 권력을 확보하게 된다.
  2. 부연설명을 하자면 국민당 좌파,우파는 코민테른과 중국 공산당이 임의로 지칭한 것으로 당사자들은 자신들을 좌파,우파라고 한 적이 없다.
  3. 무력을 동반했기 때문에 단순한 파업으로 보기는 어렵다.
  4. 장제스가 처음으로 따랐던 천치메이는 혁명가인 동시에 상하이 암흑가의 거물이라서 장제스에게 청방의 조직원들을 많이 소개시켜주었다.
  5. 출처 중국국민혁명운동의 구조분석.
  6. 황진룽, 두웨성, 장샤오린 이 세 사람이 상하이 암흑가의 3대 거물이었다. 장샤오린은 이후 중일전쟁이 터지자 일본군에 붙었다가 두웨성에게 암살된다.
  7. 이상하게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후일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거짓 전향했다는 설이 붙기도 했지만 저우언라이 본인은 부정했으며 이밖에도 간신히 탈출헀다는 설, 가명을 댄채 거짓전향했다는 설, 지인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는 설이 있지만 정설은 없다.
  8. 쑨촨팡도 그렇고 단발머리는 당시 중국에서 공산주의나 급진 좌파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9. 가령 저우언라이 문서도 그런 시각에 기초한 서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