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일기

1 개요

南漢日記. 조선시대 병자호란 당시 저술된 일기로 총 다섯 종류가 현존하고 있다.

2 석지형의 남한일기

남한해위록(南漢解圍錄)으로 유명한 석지형(石之珩)이 병자호란의 난리 당시 45일간 쓴 일기. 총 4권 4책.

조선 인조 15년, 1637년에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45일간의 농성 과정을 석지형 자신이 직접 겪으며 매일 기록하여 남긴 일기로 공성전의 과정과 성의 방어상태, 공성군의 격퇴 과정 등이 상세히 실려 있다. 또한 당시 조선 조정에 보고된 청나라 군대의 상황과 부대배치, 적장에 대한 내용 등도 기록되어 있어 병자호란 당시 양국의 모든 상황을 자세히 이해, 연구하는데 중요한 1차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아래에 있는 남급의 남한일기와 비교 연구한 논문인 우리어문학회의 고전문학 한문학 : 병자호란 실기 비교 연구 -『南漢解圍錄(남한해위록)』과 『南漢日記(남한일기)』를 중심으로에 의하면 저자 두 사람의 성격이 매우 다른데 크게 압축해서 표현하자면

  • 1. 서술자의 시점 : 석지형은 철저히 ‘나’를 감추고 당시의 상황을 제 3자적 입장에서 기록하고 있는 반면, 남급은 ‘나’가 전면에 등장하고 ‘나’의 동선에 따라 1인칭 서술자의 입장에서 사실을 기록.
  • 2. 저술 동기 : 석지형은 인조를 비롯한 조정 신하들이 당대의 정치현실과 역사에 대해 비판적 성찰 없이 역사 기록에서 이를 가리고 덮으려고만 한다고 보아 이러한 폐단을 없애고자 기록하였고, 남급은 자신이 겪었던 쓰라린 체험을 후대에 알려 다시는 이러한 일로 곤란을 겪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대하며 기록.
  • 이서의 죽음에 대한 관점 : 석지형은 이서의 죽음에 대해 군주와 신하 사이의 의리 관계를 더 중시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남급은 이서에 대해 그가 민심을 무시하고 자신과 인조의 뜻을 관철하여 남한산성을 축조했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평가.
  • 전쟁 중 열녀에 대한 입장 : 석지형은 공적 역사와 여타 기록에서 무시되고 외면당한 비자발적 열녀의 양산에 대해서는 강박에 의한 살인과 과도한 자기희생을 억지 순절이라 비판하고, 아예 열녀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 반면, 남급은 열녀에 대해 대장부도 쉽게 결단하지 못한 기개와 용기로 ‘인간이 실천해야 할 정당한 행위, 가치 있는 행위’를 실행하였다고 칭송하고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기록함.

등으로 나뉘어진다고 한다.

3 정지호의 남한일기

인조대의 문신인 정지호(鄭之虎)가 병자호란 도중 쓴 일기.

1636년 12월 13일부터 다음해인 1637년 2월 15일까지의 정지호가 직접 쓴 일기이다. 병자호란 당시 임금을 호종(扈從)하고 남한산성에 들어갔던 일과 남한산성 안에서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소상하게 기록하였다.

정지호의 문집인 5권 3책의 무은문집(霧隱文集)에 수록되어 있으며, 무은문집에는 남한일기 외에도 병자호란 때 임금을 호종하고 남한산성에 들어갔던 신하들의 명단을 기록한 호종록(扈從錄)이 수록되어 있다. 정지호의 남한일기와 호종록은 병자호란 연구에 중요한 1차 참고 사료 중 하나다.

4 박황의 남한일기

인조대의 문신인 박황(朴潢)이 병자호란 도중 쓴 일기.

박황이 쓴 일기는 크게 심중일기, 신사서행록, 남한일기, 정원일기, 춘방일기, 심중기문으로 나뉘어진다.

심중일기는 1637년 1월 30일 왕세자를 모시고 남한산성 서문을 빠져나가 삼전도(三田渡)에 차려놓은 청영(淸營)의 축단처(築壇處)에 도착한 일과, 이후 인조가 환궁하고, 박황 자신은 왕세자를 모시고 탄천변(炭川邊)의 구왕진영(九王陣營)에 머물게 된 일, 그 뒤 왕세자와 함께 심양에 볼모로 끌려가서 있었던 일 등을 하루도 빠짐없이 날짜별로 상세하게 기록한 일기이다.

신사서행록은 1641년 또 다시 심양에 불려가 소현세자(昭顯世子)를 호종하며 겪은 일들을 적은 일기이고, 남한일기는 1636년 12월 16일부터 약 한달간에 걸쳐 병자호란의 남한산성 공성전 도중 산성 안에서 자신이 겪었던 일을 상세히 기록한 일기이다. 정원일기는 1624년의 1년간의 일기이고, 춘방일기는 1638년의 1년간의 일기, 심중기문은 중국 심양에서 지낼 때 견문한 내용들을 기록한 일기이다.

이 중 박황의 남한일기는 남한산성 농성전 당시 왕세자와 주변 인물들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이해할 수 있는 1차 사료이다.

박황의 문집인 6권 3책의 나헌집(懦軒集)에 수록되어 있으며, 나헌집에는 위의 일기들 외에도 인조 22년, 1644년에 심기원(沈器遠)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김해로 유배되었을 때 쓴 김해적중작(金海謫中作)이나, 정묘호란 때 척화(斥和)의 입장에서 올린 상소들인 논화사불가소(論和事不可疏) 등의 여러 작품들이 추가되어 있다.

5 나만갑의 병자남한일기

병자호란 당시 나만갑(羅萬甲)이 지은 일기. 일명 '병자호란기의 난중일기'라고 불린다. 총 3권 1책.

석지형의 남한일기와 함께 병자호란기의 일기서적류를 대표하는 두 사료 중 하나이다. 책의 정식 명칭은 병자록(丙子錄)이며, 병자남한일기(丙子南漢日記), 백등록(白登錄)이라고도 부른다.

자세한 내용은 병자록 항목을 참조.

6 남급의 남한일기

인조대의 문신인 남급(南礏)이 병자호란 도중 쓴 일기.

병정일기(丙丁日記), 남한일기, 난리일기(亂離日記) 등으로 불리는데 정확한 명칭은 확실하지 않다.

규장각 소장본과 이를 기반으로 작성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난리일기(亂離日記)라고 되어 있고, 연려실기술에는 난리잡기(亂離雜記)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미국 하버드 엔칭도서관 소장본에는 남한일기(南漢日記)라 되어 있다. 영양남씨 문중문집인 신안세고(新安世稿)에 수록된 본은 병정일기라고 되어 있다. 원문부터 이러다보니 학계의 논문에서도 사용되는 명칭이 각각 다르다.

현재 남급의 일기를 표현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명칭은 남한일기이지만 이 블로그에 따르면 병정일기(丙丁日記)라는 명칭이 가장 올바를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후의 자세한 내용은 병정일기 항목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