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1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산성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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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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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한글남한산성(南漢山城)
영어Namhansanseong
프랑스어Namhansanseong
국가·위치대한민국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등재유형문화유산
등재연도2014년
등재기준(ⅱ)[1], (ⅲ)[2], (ⅳ)[3], (ⅵ)[4]
지정번호1439

1.1 개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옛 중부면) 산성리에 위치한 남한산의 산성이다. [5]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어 경기도에서 도립공원으로 관리하고 있다. 조선 인조 때에 쌓은 성곽이며, 해발 497m의 청량산(淸凉山)[6]을 서쪽 끝으로 하고, 해발 514m의 벌봉을 동쪽 끝으로 하는 긴 장방형의 돌로 쌓았다. 서쪽은 경사가 가파르고 높아서 험난하며, 다른 쪽은 능선이 긴 반면, 성안은 낮고 평평한 분지를 이루고 있다. 북한산성과 함께 한양을 지키는 2대 산성이었다.

남한산성 행궁 바로 옆에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기념관이 있으니, 남한산성에 방문할 사람은 같이 가보면 좋을 것이다. 만해기념관 공식 홈페이지

1.2 역사

그 역사는 한강을 두고 삼국이 각축전을 벌이던 시기까지 올라간다. 처음 성을 쌓은 것은 672년(신라 문무왕 12)에 당나라 군사를 막기 위해 지금의 남한산 주위에 성을 구축하여 주장성이라고 불렀다. 그 후 임진왜란 중인 1595년(선조 28)에 산성을 축조했고, 1621년(광해군 13)에 다시 증축을 했다. 1624년(인조 2)에는 인조가 총융사 이서에게 명하여 남한산성을 다시 개축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강화를 맺은 이후 재침에 대비하여 수축되었다. 수축 완료 후 광주목의 읍치(邑治)가 성내로 이전되었으며[7] 다시 광주부로 승격되었다. 이는 남한산성이 기본적인 수도 방어 목적 외에도 행정 중심지이자 유사시 임시수도로서 기능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조선시대 당대에는 광주성이라고도 불리었다.

주요한 전투로는 병자호란에서 인조청태종군대를 상대로 벌인 농성전이었다. 산세는 지금 봐도 험준하고, 그런 만큼 막강한 청군 앞에서도 한달 이상을 버텨냈다. 40여일 동안의 공방전에서 청군은 수 차례의 대규모 공격에도 불구하고 성을 돌파하는데는 실패했지만, 농성 중인 성 내부의 물자가 고갈될 때까지 포위를 풀지 않으면서 서서히 조선군을 조여갔다. 결국 조선군은 식량이 다 떨어지자 결국 청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이후에도 군사상 요충지로 광주군청이 산성 안에 있었으나, 1917년에 군청이 경안(현 광주시내)으로 이전한 뒤로는 쇠락하기 시작해,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산성의 일부와 행궁이 완전히 매몰됨에 따라 완전히 망했어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산사태 당시 행궁이 정말 완벽하게 매몰되어 주추 등 유구의 보존상태가 굉장히 훌륭하다는 것.
이를 토대로 1975년부터 성벽을 복원하기 시작했고, 행궁의 복원은 2002년부터 시작되어 2014년 마무리되었다.

1.3 주요 문화 유적

1.3.1 남한산성의 4성문

  • 동문(좌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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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좌익문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왕이 행궁터를 중심으로 남쪽을 보고 나라를 다스리기 때문에 동쪽이 왼쪽이 되어 그렇다고 한다. 남문과 함께 사용빈도가 가장 높은 문이다. 동문은 일반 성돌에 비해 덜 가공된 약 2배 정도 크기의 성돌을 사용하여 쌓았다. 다른 문에 비해 낮은 지대에 축조했기 때문에 성문을 지나는 길에 계단을 만들었으며,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 했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 있는 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현재 이 문은 보수공사로 인해 헐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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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문(우익문)

산성의 동쪽 모서리 부분의 450m 지점에 위치한다. 동문이 좌익문이므로 서문은 우익문이라고 부른다. 경사가 급하여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려웠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병자호란 때 성문을 넘으려는 청군과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인조가 소현세자와 함께 서문을 통해 청나라 진영으로 가서 화의를 맺고 항복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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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문(지화문)

성의 서남쪽 곡저부의 해발 370m 지점에 위치한다. 왕이 다니는 문 답게 4대문 중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다. 인조도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으로 들어올 때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지금의 문루는 1976년 화강석 장주초석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주초석 대부분을 새로 보충하여 복원하고 현판을 단 것이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동문에 비해 비교적 그 규모가 크다. 장초석을 사용하여 기둥높이는 낮지만 건물의 전체 높이는 약간 더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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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문(전승문)

성곽 북쪽의 해발 365m 지점에 있으며,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상사창리로 이르게 되는데 조선시대에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으로 이 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운반했다. 전승문이라는 명칭은 1779년(정조 3)에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고 지어진 이름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인데 현재 편액은 걸려있지 않다. 무지개 모양의 홍예식 문이며, 홍예기석 위에 10개의 홍예돌을 쌓아 구축하였다.

1.3.2 남한산성 행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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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행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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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궁 구조도

현재 사적 제480호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에 20개소 정도의 행궁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남한행궁은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두었다.(좌묘우사) [8]비상시에 예비 수도로서의 기능을 하였기에 필요한 시설을 모두 갖추어 놓았다. 원래 건물은 상궐 72.5칸, 하궐 154칸으로 모두 226.5 칸의 규모였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 대부분 붕괴되거나 헐리고 터만 남아있어 복원 중이다. 2002년에 내행전을 비롯하여 일부 부속건물들의 복원이 이루어졌다. 부속건물로는 재덕당[9], 내행전[10], 남행각[11], 북행각[12], 좌전[13], 좌승당[14], 외행전[15], 일장각[16], 한남루[17] 등이 있다.

1.3.3 수어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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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장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이다. 남한산성에 구축된 5장대 중 하나이다. 5장대 중 하나인 동장대를 제외한 4장대는 17세기 말엽까지는 단층 누각 건물의 형태로 남아있었지만, 18세기 중엽에는 5장대 모두 붕괴되어 터만 남아있었다. 그 후 18세기 중후반에는 서장대와 남장대를 2층 누각형태로 건립하여 19세기 후반까지 남아있었지만, 현재는 서장대인 수어장대만이 남아있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에 세워져 있으며 지휘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세워진 누각이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왼쪽에는 청량당이 있으며, 뒤편에는 우물이 있어 장대에서 근무하는 장졸에게 음료수를 공급했다고 한다.

1.3.4 숭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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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사당이다. 원래는 '온조왕묘' 또는 '백제 시조묘'라고 부르던 것을 1795년(정조 19)에 숭렬전이라는 이름을 지어서 편액을 내려 그 때부터 부르기 시작했다. 숭렬전에는 또한 인조 때의 총융사로서 남한산성의 축성을 맡았던 이서 장군의 신주도 함께 모셔져 있으며, 매년 음력 9월5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1.3.5 청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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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이다. '맑고 시원하다'라는 뜻을 가진 청량이라는 산봉우리에 세워진 건물이다. 산성을 쌓을 당시 동남쪽 책임을 맡았던 이회가 모함에 의해 억울하게 수어장대에서 참수형을 당한 후, 그의 억울함이 밝혀지자 그 혼백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이회 장군의 영정 뿐만 아니라 서북쪽 책임자인 벽암각성대사와 이회장군 부인의 영정도 함께 모셔져 있다. 이회 장군, 벽암대사, 이회장군 부인의 초상화는 한국전쟁 때 없어진 것을 다시 봉안한 것이다.

1.3.6 현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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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호이다. 병자호란심양에 끌려가 충절을 지키다가 그곳에서 비운을 맞은 삼학사(三學士)[18]인 오달제, 윤집, 홍익한의 영혼을 모신 사당이다. 이들은 소현세자, 봉림대군과 함께 청에 인질로 끌려가 충정을 지키다가 결국 1638년(인조 15)에 심양의 서문에서 처형되었다. 후에 좌의정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의 위패도 함께 배향되었다.

1688년(숙종 14)에 광주유수 이세백의 주도로 세워졌으며, 1693년 봄에 현절사라 사액하였다. 사당은 본당과 좌우에 있는 부속 건물을 합하여 3동으로 구성되었는데, 산등성이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본당과 부속건물이 단을 이루고 있고, 단 위에는 담을 둘러 그 중앙에 솟을대문을 내었다. 지붕양식은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이며 이출목이익공의 주심포 형식이다. 본당 좌우의 방풍막은 아래를 직선으로 자르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크기이며 정면 각 칸에는 4쪽의 여닫이 격자문을 달았다. 솟을대문이 2개 있는데 밖의 것은 사당을 출입할 때, 또 하나는 본당과 부속 건물을 구분하는 담의 중앙에 위치하여 본당을 출입할 때 사용했다. 대문은 여닫이 2쪽문으로 2개의 대문 모두 태극무늬가 그려져 있다.

부속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인데 본당과 같이 맞배지붕과 홑처마 양식의 건물이다. 2동의 건물이 모두 중앙의 1칸에는 우물마루가 배치되고 좌우에는 2쪽 여닫이 격자문을 한 방이있고, 자연석을 주춧돌로 한 단아하고 소박한 인상을 주는 건물이다.

1.3.7 침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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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이다. 건립시기는 알 수 없지만 무기 제작을 관장했던 사무소로 추정된다. 정확한 명칭은 "창을 베게 삼는다"는 뜻인 침과정이지만, 현재는 침괘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1.3.8 연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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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호이다. 연무란 무예를 펼쳐 보인다라는 뜻으로 군사들의 무술을 연마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이곳에서 군사훈련과 무술 시합을 열어 뛰어난 인재를 뽑아 중앙으로 보냈으며, 맞은 편에 과녁이 있어 활쏘기 연습도 이루어졌다. 정조 재위 3년인 1779년 8월에 문무과 과거시험을 이곳에서 거행하고 장사들에게 술과 음식을 베풀었다고 한다. 인근의 활터가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다.

1.4 가는 길

지하철로 가기에는 8호선산성역이 가깝다. 여기서 9번, 9-1번(주말), 52번을 타고 올라가면 된다. 남한산성입구역에 하차할 경우 연계버스로 462, 4419(서울), 30, 30-1(하남), 51, 55, 70(성남)등의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두 역 모두 2번출구로 나온 뒤에 버스로 환승한다. 단 순수하게 전철역에서 내려서 걷는다고 가정하면 산성역을 추천한다. 기타 등산로로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마천동[19],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에서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다. 광주시에서 이동할 경우 15-1번을 이용하면 된다.

1.5 기타

1985년 이전까지는 군인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육군교도소가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군 내에서는 교도소를 뜻하는 은어로도 쓰였지만, 이천시의 장호원으로 옮겨가면서 사용 빈도가 줄어들었다.

학군교괴산군으로 이전하기 전 성남시에 위치해 있을때는 지리적인 가까움으로 4학년 후보생들의 40km 산악행군을 이 남한산성에서 했다. 매년 미묘하게 코스가 바뀌긴 하지만 거의 이 산성 성곽을 안이나 밖을 따라 돌았으며, 중간중간 7사단 GOP를 연상케하는 미친 경사가 있어서 장교후보생들 뿐만 아니라 훈육관들도 매우 싫어했다. 또한 중간에 수어장대에서 교육대별 단체사진을 찍는 이벤트도 있었다. 학군교가 통합 이전된 지금은 옛날 이야기.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후로는 당연히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기능은 전무하다. 현대전에서 성은 어지간한 상황이 아닌 이상 그닥 쓸모가 없다. 대신 현재는 각종 먹거리, 볼거리들이 밀집된 관광지로서 애용되고 있다. 서울 거주자로 어딘가로 가고 싶은데 멀리 갈 여유는 없고 하면 대부분 남한산성으로 간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하철역에서 버스만 타고 가면 둘러볼 수 있다. 가서 둘러보다 보면 볼거리나 먹거리가 생각 외로 많다. 다만 산이다보니 여름철에도 서늘한 편이니 옷차림에 신경쓰자. 여담이지만 조선시대 때는 해장국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해장국 항목 참조.

2014년 6월 22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제38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 등재가 최종 결정되었다. 7세기 신라시대 유적부터 17~19세기 조선시대의 축성기술이 모두 보이며, 비상시 산성도시라는 독특한 점이 큰 점수를 얻었다고 한다. 자연스러운 산세와 지형지물을 그대로 살린 한국 특유의 건축양식 그리고 서양식 무기에 대항하기 위한 다양한 군사기술이 접해지고, 당시 중국과 일본의 축성양식도 들여와 더해진 것이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었다.

이로써 2014년 현재 대한민국은 11개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가지게 되었다. 남한산성의 안전등급이 D E급으로 안전대책이 부실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기사참조

남한산성 도립공원 내에도 대인지뢰 매설지역이 있다. 2001년부터 3회에 걸쳐 지뢰 제거 작전이 실시되었다고는 하나 지금도 미확인 또는 유실지뢰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에 과거 지뢰지대 등 표시판이 곳곳에 있다. 지뢰 표시판이 있는 곳에는 들어가지 말자.

2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김훈소설

남한산성(소설) 문서로.

3 임진왜란,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권가야만화

임진왜란부터 병자호란까지를 견뎌냈던 우리 민중들의 격정어린 이야기로 '2009 오늘의 우리만화상' 대상을 수상했다. 총 4권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4.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5. 사실 성남시에서 남한산성을 많이 홍보하고 있지만, 수어장대를 비롯한 성곽 내부와 주변은 전부 광주시 관할이다. 다만 교통편은 성남시 쪽이 편리하다.
  6. 여기서 청량산은 경상북도의 청량산이 아니라, 경기도 하남시 학암동, 성남시 수정구 양지동, 서울특별시 송파구 마천동에 걸쳐 있는 산이다.
  7. 이전까지는 현 하남시 교산동 일대에 있었다.
  8. 궁궐이 있는 도성을 배치할 때에는 도성배치 기준에 따라 궁궐의 왼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두었는데 이러한 원리를 '좌묘우사'라고 한다.
  9. 현재 복원된 건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추정된다.
  10. 현재 복원된 건물로, 왕의 생활공간이었다.
  11. 현재 복원된 건물로, 요즘의 경호원 비슷한 곳이다.
  12. 현재 복원된 건물로, 요즘의 비서실 비슷한 곳이다.
  13. 현재 복원된 건물로, 역대 왕과 왕비의 제사를 지내던 공간이다.
  14. 현재 복원된 건물로, 광주부에서 제일 높은 책임자가 업무를 보던 공간이다.
  15. 현재 복원된 건물로, 왕과 신하들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16. 현재 복원된 건물로, 문서를 보관하던 곳이다.
  17. 현재 복원된 건물로, 남한행궁의 외삼문루이다.
  18. 남한산성이 청 태종의 12만 대군에 완전 포위당한 상황에서도 최후의 1인까지 끝까지 싸울 것을 강력히 주장한 인물들
  19. 5호선 마천역에서 하차하거나 3416, 3314, 3318, 3313, 3315(이상 서울), 5(성남)등의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