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공식명칭한글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
한자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
영어[1]
분류번호국보 76호
소재지대한민국 충청남도 아산시 현충사길 48
분류기록유산/전적류/필사본/일기류
시설9책
지정연도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조선시대, 1592~1598년
정보문화재청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파일:Attachment/unesco-memoryoftheworld.gif
이름한글난중일기
영어[1]
프랑스어[2]
국가·위치대한민국 충청남도 아산시
소장·관리현충사
등재유형기록유산
등재연도2013년
제작시기1592~1598년

1 개요

난중일기(亂中日記)조선 선조 시기의 무신(武臣)이었던 충무공 이순신(忠武公李舜臣)이 임란 7년 (1592 ~ 1598년)동안 군중에서 쓴 일기를 말한다. 정확히는 1592년(선조 25) 정월(1월) 1일부터 전사하기 전 인 1598년 11월 17일까지 2,539일간 기록한 일기이다.

현재 충남 현충사(顯忠祠)에 비치되어있고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으며[3] 2013년 6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본디 출판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 아니고 이순신 개인의 사적인 일기(Diary)지만 국내에서 이순신과 그의 전공이 크게 알려짐에 따라, 또 사료로서 주목받아 따로 연구, 출판되기 시작하였고 조선조의 기록물치고는 한국 대중에게 매우 인지도가 높다.

난중일기(亂中日記)라는 제목은 '전란 중의 일기'라는 뜻이다. 영어로 번역하면 War diary 정도. 이순신 사후 200년이나 지나서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 때에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집할 시 거기에 수록하면서 붙여진 이름이고 원래는 연도 별로 여러 권으로 나뉘어 임진일기, 을미일기, 정유일기등 당년의 간지가 붙어 있었으나, 지금은 이순신이 쓴 초고본, 편집본 할 것 없이 그저 '난중일기'라는 이름이 통용되고, 번역본의 제목도 전부 난중일기이다.

2 내용

난중일기는 주로 당일의 기상 변화, 군무 내용, 진중의 군정 등이 기재되어 있고, 본가에 대한 걱정, 자식과 아내, 모친, 류성룡에 대한 그리움 등의 사적인 정서도 적지 않다.

2.1 보기[4]

보기로서 난중일기 가운데 극소수 일부만을 발췌해 실은 것이며 오역이 있을 수 있다.
  • 1592년 1월 1일. '난중일기의 첫 일기'.
初一日壬戌。晴。曉。舍弟汝弼及姪子菶,豚薈來話。但離天只。再過南中。不勝懷恨之至。○兵使軍官李敬信。來納兵使簡及歲物,長片箭雜物。

초1일 임술.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汝弼)과 조카 봉(菶), 아들 회(薈)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만 어머니[5]를 떠나서 다시 남쪽에서 설을 보내니 지극한 회한을 이길 수가 없다. 병마절도사의 군관 이경신이 와서 병마절도사의 편지와 선물, 장전(長箭)[6]편전(片箭)[7]과 그외 여러가지 잡물을 바쳤다.

  • 1592년 1월 16일 일기.
十六日丁丑。晴。出東軒公事。各官品官色吏現謁。防踏兵船軍官,色吏。以其兵船不爲修繕决杖。虞候假守。亦不檢飭。至於此極。不勝駭恠。徒事肥己。如是不顧。他日之事。亦可知矣。城底土兵朴夢世。以石手往先生院鎖石浮出處。害及四隣狗子。故决杖八十。

16일 정축.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각 관아의 관리들과 색리들이 알현하러 왔다. 방답의 병선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을 수리하지 않았으므로 장형에 처했다. 우후(虞候)와 가수(假守)들 또한 점검하고 경계하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해괴함을 이길 수가 없다. 헛되이 제 한 몸 살찌우기만 일삼고 이리 돌보지 않으니, 다른 날의 일도 알 만한 것이리라. 성 밑의 토박이 병사인 박몽세는 석수로서 선생원(先生院) 쇄석에 쓸 돌 뜨는 곳에 가서 이웃 강아지에 해를 끼친 고로 장형 80에 처했다.

  • 1592년 2월 4일 일기
初四日乙未。晴。出東軒公事後。上北峯築煙臺處。築處甚善。萬無頹落之理。李鳳壽之勤事。可知矣。終日觀望。當夕下來。廵視垓坑。

초4일 을미. 맑음.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본 후에 북봉의 연대(煙臺) 지은 곳으로 올라갔다. 지은 곳이 너무 훌륭해서 무너질 리가 만무했다. 이봉수가 정말 부지런히 일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루종일 구경하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내려왔다. 해자 구덩이를 순시했다.

  • 1592년 2월 19일 일기
十九日庚戌。晴。發廵到白也串監牧官處。則昇平府伯率其弟來待。妓生亦來。雨後山花爛開。景物之勝。難可形言。暮到梨木龜尾。乘船到呂島。則瀛洲倅與呂島權管出迎。防備點閱。興陽以其明日行祭先行。

19일 경술. 맑음. 순시를 떠나 백야곶 감목관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승평 부사가 그 아우를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생도 데려왔다. 비 온후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훌륭한 경치를 가히 형언하기가 어려웠다. 날이 저물어 이목구미에 이른 뒤 배를 타고 여도에 가니 영주 현관과 여도 권관이 나와서 맞이하였다. 방비를 검열하였다. 흥양 현감은 명일 제사지내는 것 때문에 먼저 갔다.

  • 1592년 4월 13일 일기. (임란 발발 당일)[8]
十三日壬寅。晴。出東軒公事後。射帿十五廵。

13일 임인.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본 후 십오 순의 활을 쏘았다.

  • 1592년 4월 15일 일기. (임란 개전, 전황이 이순신에게 최초로 고지됨.)
十五日甲辰。晴。以國忌不坐。修廵使答簡及別錄。卽令驛子馳送。日沒時嶺南右水使傳通內。倭船九十餘出來。釜山前絶影島駐泊。一時又到水使關。倭賊三百五十餘隻。已到釜山浦越邊云。故卽刻馳啓。兼移廵使,兵使,右水使處。嶺南方伯關。亦到如是。

15일 갑진. 맑음. 국기일(國忌日)이므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순사(巡使)[9]에게 보내는 답장과 별록을 고친 뒤 즉시 역자(驛子)[10]로 하여금 가게 하였다. 일몰 때 영남우수사가 보낸 통문을 보니 왜선 구십 여척이 나와 부산 앞 절영도 앞에 정박하였였다고 한다. 동시에 온 수사(水使)의 관문(關文)[11]을 보니 왜선 삼백 오십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로 즉각 장계를 써서 보냈고 순사, 병사, 우수사에게도 공문을 돌렸다. 영남 방백의 관문 역시 왔는데 같은 내용이었다.

  • 1592년 4월 16일 일기.
十六日乙巳。二更。嶺南右水使移關。釜山巨鎭。已爲陷城云。不勝憤惋。卽馳啓。又移文三道。

16일 을사. 이경(二更)[12]에 영남우수사가 관문을 보내왔는데 부산 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한다. 분하고 한스러움을 이길수 없다. 즉시 장계를 올렸고 삼도에 공문을 돌렸다.

二十九日戊戌。晴。右水使不來。獨率諸將。曉發直到露梁。則慶尙右水使來會。問賊所泊處。則賊在泗川船滄云。故直至其處。倭人已爲下陸。結陣峯上。列泊其船于峯下。拒戰甚固。余督令諸將。一時馳突。射矢如雨。放各㨾銃筒。亂如風雷。賊徒畏退。逢箭者不知幾百數。多斬倭頭。焚滅十三隻。軍官羅大用中丸。余亦左肩上中丸。貫于背。不至重傷。

29일 무술. 맑음. 우수사가 오지 않아 홀로 제장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발진하여 곧장 노량에 이르니 경상우수사가 와서 합류하였다. 적이 정박한 곳을 물었더니 사천(泗川) 선창에 있다 하여 곧바로 그곳에 이르렀는데 왜인들은 이미 상륙하여 산 위에 진을 치고 있었고 산 아래에 전선을 줄지어 대놓았다. 거전(拒戰)이 매우 완강했는데, 나는 제장들을 지휘하여 일시에 돌진하게 하였다. 화살을 비처럼 쏘아댔고 각양의 총통을 쏘아대니 그 대란이 폭풍 우레와 같았다. 적의 무리는 두려워하며 달아났는데 화살에 맞은 자가 몇백인지 부지기수였다. 왜인의 수급을 많이 베었고 적선 십삼 척을 불살랐다. 군관 나대용이 탄환을 맞았다. 나 역시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아 등까지 관통했으나 중상에 이르진 않았다.

初二日庚子。晴。朝發直到唐浦前船滄。則賊船二十餘隻列泊。回擁相戰。大船一隻。大如我國板屋船。船上粧樓。高可二丈。閣上。倭將巍坐不動。以片箭及大中勝字銃筒。如雨亂射。倭將中箭墜落。諸倭一時驚散。諸將卒一時攢射。逢箭顚仆者不知其數。盡殲無餘。俄而。倭大船二十餘隻。自釜山列海入來。望見我師。奔入介島

초2일 경자. 맑음. 아침에 발진하여 곧장 당포(唐浦) 앞 선창에 이르렀다. 적선 이십여 척이 줄지어 정박해있었다. 엉켜서 교전하였는데 큰 배 한 척은 크기가 우리나라 판옥선과 같았다. 배 위의 장루(粧樓)는 높이가 이 장(丈)쯤 되었고 누각 위에 왜인 장수가 위엄있게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 편전과 대(大), 중(中) 승자총통을 비처럼 난사했다. 왜인 장수가 화살을 맞고 추락하니 모든 왜군이 일시에 놀라 흩어졌다. 모든 장졸들이 일시에 집중하여 쏘았다. 화살을 맞고 고꾸라지는 자가 부지기수였고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였다. 잠시 후 큰 왜선 이십여 척이 부산으로부터 줄지어 바다로 나오다가 우리 군을 보고는 다투어 개도(介島)로 들어갔다.

十五日癸卯。晴。數小舟師。不可背鳴梁爲陣。故移陣于右水營前洋。招集諸將約束曰。兵法云。必死則生。必生則死。又曰。一夫當逕。足懼千夫。今我之謂矣。爾各諸將。勿以生爲心。小有違令。卽當軍律。再三嚴約。是夜。神人夢告曰。如此則大捷。如此則取敗云。

15일 계묘. 맑음. 소수의 수군으로는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는 까닭에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제장들을 불러모아 약속하며 말하였다.

"병법에 이르길 '반드시 죽으려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 하면 죽는다'고 하였다. 또 '한 사람이 좁은 길을 지키면 천명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우리를 이르는 것이다. 너희 각 제장들은 살 마음을 먹지 말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면 즉시 군율로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하며 두세 번을 엄히 약속하였다.

이 밤에 신인(神人)께서 꿈에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이리하면 크게 이길 것이요 저리하면 패할 것이니라"라고 하셨다.

十六日甲辰。晴。早朝。別望進告。賊船不知其數。直向我船云。卽令諸船。擧碇出海。賊船三百三十餘隻。回擁我諸船。諸將自度衆寡不敵。便生回避之計。右水使金億秋。退在渺然之地。余促櫓突前。亂放地玄各㨾銃筒。發如風雷。軍官等簇立船上。如雨亂射。賊徒不能抵當。乍近乍退。然圍之數重。勢將不測。一船之人。相顧失色。余從容諭之曰。賊雖千隻。莫敵我船。切勿動心。盡力射賊。顧見諸將船。則退在遠海觀。望不進欲回船。直泊中軍金應諴船。先斬梟示。而我船回頭。則恐諸船次次遠退。賊船漸迫。事勢狼狽。卽令角立中軍。令下旗。又立招搖旗。則中軍將彌助項僉使金應諴船。漸近我船。巨濟縣令安衛船先至。余立于船上。親呼安衛曰。安衛欲死軍法乎。汝欲死軍法乎。逃生何所耶。安衛慌忙突入賊船中。又呼金應諴曰。汝爲中軍而遠避。不救大將。罪安可逃。欲爲行刑。則賊勢又急。姑令立功。兩船直入交鋒之際。賊將指揮其麾下船三隻。一時蟻附安衛船。攀緣爭登。安衛及船上之人。殊死亂擊。幾至力盡。余回船直入。如雨亂射。賊船三隻。無遺盡勦。鹿島萬戶宋汝悰,平山浦代將丁應斗船繼至。合力射賊。降倭俊沙者。乃安骨賊陣投降來者也。在於我船上。俯視曰。着畫文紅錦衣者。乃安骨陣賊將馬多時也。吾使金石孫鉤上船頭。則俊沙踴躍曰。是馬多時云。故卽令寸斬。賊氣大挫。諸船一時皷噪齊進。各放地玄字。射矢如雨。聲震河岳。賊船三十隻撞破。賊船退走。更不敢近我師。此實天幸。水勢極險。勢亦孤危。移陣唐笥島

16일 갑진. 맑음. 이른 아침 별망군이 와서 고하기를 "적선이 부지기수이며 곧바로 우리 배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즉시 전 함대에 명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삼백삼십여 척이 우리 전 함대를 감쌌다. 제장들은 스스로 중과부적이라고 헤아려 거듭 피하고 도망갈 궁리만 하였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가 탄 배는 아득한 곳으로 물러나 있었다. 나는 노(櫓)를 재촉하여 앞으로 돌입한 뒤 지자, 현자, 각양의 총통을 폭풍 우레처럼 난사했고 군관들은 배 위에 빽빽히 서서 비 오듯 난사했다. 적의 무리는 당해내지 못하고 잠깐 다가오다 잠깐 물러나곤 하였는데 우리를 수 겹으로 에워싼 탓에 전세를 예측할 수가 없었고 나와 같은 배의 병사들은 서로 돌아보며 실색(失色)이 되어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타이르며 말하였다.

"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우리 배를 대적할 순 없으니 결코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전력을 다하여 적을 쏘라"

제장들의 배들을 돌아보니 먼바다로 물러나서 관망(觀望)만 할 뿐 나오려 하질 않았다. 배를 돌려 곧장 중군 김응함(金應諴)에 배에 댄 뒤 참수, 효시하고 싶었으나 내 배가 선두를 돌리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러 배들이 차차 멀리 물러날 터이고, 적선이 점차 압박해와서 사세는 낭패가 될 터였다. 즉시 중군영하기(中軍令下旗)를 세우라고 명하고 또 초요기(招搖旗)를 세우니 중군장 미조항(彌助項)과 첨사 김응함의 배가 점차 내 배로 가까이 왔고 거제 현령 안위(安衛)의 배가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하였다.

"안위야 군법에 죽으려 하느냐? 네가 군법에 죽으려 하느냐? 도망가면 어디서 살 것이냐?"

안위가 황망해 하며 적선 안으로 돌입하였다. 또 김응함을 불러 말하였다.

"너는 중군(中軍)이 되어 멀리 피하기만 할뿐 대장(大將)을 구하지 않았으니 어찌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세가 또한 급하니 일단은 공을 세우라"

두 배가 교전의 틈으로 곧장 돌입하니 적장이 그 휘하 전선 세 척을 지휘하여 일시에 개미떼처럼 안위로 배로 달라붙었고 매달려서는 다투어 안위의 배로 올랐다. 안위와 안위 배 위의 병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미친 듯이 공격하여 거의 힘이 다할 지경에 이르렀다. 나도 배를 돌려 곧바로 돌입해 비 오듯 난사했고 적선 세 척을 남김없이 멸하였다. 여도 만호 송여종(宋汝悰)과 평산포대장 정응두(丁應斗)의 배가 속속 이르러 힘을 합쳐 적을 쏘았다. 항왜(降倭)[14] 준사(俊沙)는 안골의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인데 이때 내 배 위에 타고 있다가 (바다를)굽어보며 말하기를 "그림 무늬의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안골 진영의 적장 마다시(馬多時)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김석손(金石孫)으로 하여금 갈고리로 그 자를 선두 위로 끌어올리게 하였다. 그러자 준사(俊沙)가 보곤 뛰면서 말하기를 "이 자가 마다시입니다!"라고 하였다. 고로 즉시 참수하게 하였고 이에 적의 사기가 대폭 꺾였다. 전 함대가 일시에 쩌렁쩌렁 북을 치면서 일제히 전진했고 각 지자, 현자총통을 쏘아대고 화살을 비 오듯 쏘아대니 그 소리가 강산을 진동하게 하였다. 적선 삼십 척을 쳐부수자 적 함대가 물러나 달아났으며 다시는 감히 우리 군에 접근하지 못했다. 이것은 실로 천행(天幸)[15]이었다. 수세(水勢)가 극히 험하고 아군의 세력도 지쳐 위태로웠으므로 당사도(唐笥島)로 진을 옮겼다.

2.2 이순신의 체질

기(氣)가 불편하다, 즉 '몸이 좋지 않았다'는 내용이 매우 많다. 설사병이 너무 심해 하루종일 화장실을 들락거리느라 아무 것도 못했다든지, 탈이 나거나 병을 앓았다는 내용이 많아 강건한 무장으로 인식되는 이순신을 쇠약한 체질로 오해할 수 있지만 이순신은 절대로 약골이 아니다. 당시엔 이미 쉰에 가까운 나이여서(임진왜란 발발년인 1592년 기준으로 48세)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짧은 당시로서는 노장 소리를 들을 연령대였다. 백의종군 이후엔 고문에 시달리면서 급격히 신체가 약화. 그 외에도 수군통제사로서의 격무까지 처리했으니 몸이 망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특히 사천 해전 때 어깨에 총상을 입었는데, 해전 1년 후 류성룡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어깨뼈가 많이 상했고 상처에서 늘 진물이 흘러 밤낮 없이 뽕나무 잿물과 바닷물로 소독한다"고 밝히고 있어서 사천 해전 때의 총상도 그의 건강 악화에 한몫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순신의 약골설은 이우혁의 왜란종결자에서 기인한 바가 있다. 다만 백의종군 전에도 며칠에 걸쳐 아팠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니 "그 전엔 심하게 아픈 적 없다"고 하는 것도 무리. 여기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검증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지만 그 때는 쉰 살 전후의 나이였다.

2.3 개인적인 면모

내가 일찍이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니 어머니를 그리워해서 밤낮으로 애쓰고 지성으로 슬퍼했음이 사람을 감동시킬 만했다. - 다산 정약용, 경세유표

당일의 기상변화, 전황, 군정 외에도 이순신의 개인의 사사(私事)와 자잘한 감정, 번민이 많이 적혀있다.

홀로 앉아 촛불을 밝히고 밤을 새며 국사를 걱정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이나, 백의종군 이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여 몰락한 수군의 꼴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아무도 없는 구석의 잘 안보이는 곳에 털썩 주저앉아 이제부터 뭘 어째야 하는지 한참을 고민했다는 이야기 등 알려지지 않은 번민이 그대로 적혀 있다.

가족에 대한 애틋함을 표현한 구절이 많다. 특히 '어머니께서 무탈하시니 다행이다'라는 서술은 난중일기에서 꽤 자주 등장하는 표현. 1593년 6월 12일 일기를 보면 충무공이 흰머리를 뽑았다고 기록한 일기가 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라고 적었을 정도였다[16]

1594년 1월 12일에는 이순신이 잠깐 본가에 왔다가 떠나는데 일기에 자당에 대한 기사가 쓰여있다.

(...)朝食後 告辭天只前 則敎以好赴 大雪國辱 再三論諭 少無以別意爲歎也。

아침밥을 먹은 후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하교하시길,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거라." 라고 두세 번 타이르시는데 조금도 이별을 아쉬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셨다.

터놓지 못한 비애 역시 기록되어 있는데 자당께서 돌아가시자 '어찌 하랴, 어찌 하랴,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서 죽느니만 못하구나'(1597년 4월 19일)라고 적고 있고 아들 이면이 죽었을 때는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건만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1597년 10월 14일),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지 나흘이 되는 날인데도 마음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1597년 10월 16일) 라는 기록 등 지휘관으로서 휘하 장졸들 앞에서 드러내지 못한 비감을 쓴 바가 많다.

당시 나라를 범한 왜적에 대한 적개심 역시 그대로 적혀 있다. 왜군 포로를 잡았는데 그들이 척 봐도 엉터리 정보를 보여주거나 조선을 아주 우습게 보는 투로 대꾸하자 가차없이 베어버렸으며, 포로를 능지처참한 적도 2번이나 있다. 더욱이 정유년(1597년)에 셋째아들 이면이 왜군에게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왜군은 나라와 백성의 원수 뿐만 아니라 장군 개인의 원수이기도 한 셈.[17]

그 외 꿈을 꾼 이야기나 꿈에 대한 장군 나름대로의 해석, 어떤 일을 두고 점을 치는 장면, 원균, 권율 등 주변인물에 대한 적나라한 평가[18]와 진중에서 쓴 시, 독서한 후의 소회 등도 살펴볼 수 있다

어느 병사가 나이가 너무 많아 전역시키면서 병사들끼리 여는 간단한 축하식에 어울리며 돼지고기를 같이 먹는데 몇점 집어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3 위상

3.1 사료적 가치

이순신의 면밀한 성품 탓에 사소한 사정까지도 자세히 적혀 있어 그당시 전황과, 시대상, 역사까지 짚어볼 수 있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은 책'이다. 이 시기를 다룬 역사사료로서는 조선조정 움직임이 높은 평가이나 개인 입장이 강조되어, 책임 회피가 돋보이는 징비록과 함께 실록 바로 다음가는 위치.[19]

또한 몇 쪽만 넘겨보아도 창고를 검열했더니 장부에는 수백 발이 있다던 화살이 알고보니 죄다 습기먹거나 썩어서 못쓰게 됐다거나, 배를 보러 갔더니 역시 물에 뜨지도 못하는 배가 있다거나 해서 허구한 날 관계자들이 줄줄이 장을 맞는 이야기가 빠지질 않는 등 당시 조선군의 열악한 상황을 알 수 있다.[20]

3.2 문학적 가치

여러 대학, 기관에서 권장 도서로 선정되어 읽기를 권하고 있다. 이순신을 다룬 소설 칼의노래를 쓴 소설가 김훈은 문학으로서의 난중일기를 '수식을 배제한 무인다운 글의 전범' 이라고 하며 문체와 내용을 극찬하였다.

3.3 대중에게

저자인 이순신이 거의 절대적인 명망을 자랑하기 때문에 난중일기 역시 현대에 굉장히 저명하다. 조선 시대의 기록물로서는 거의 최고의 인지도일 정도. 과거 한국의 학자, 대유(大儒)들이 쓴 저서들 중 목민심서, 징비록 등의 책도 유명하다지만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은 반면 난중일기는 적어도 '책 제목'이나 '누가 썼는가?' 따위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다만 인지도가 그러할뿐 난중일기 자체를 정독해본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

4 번역

최초의 한글 번역본은 1968년 시인 이은상이 난중일기 초고본과 충무공전서본을 합본해 처음으로 우리말로 옮긴 것이 첫 한글 번역본이라고 알려졌지만, 다시 1955년 북한 평양에서 간행된 난중일기 한글 번역본이 최근 입수되었다. 이는 벽초 홍명희의 아들, 국어학자 홍기문이 1955년 11월 30일 평양에서 펴낸 '리순신 장군 전집'에 실은 난중일기 번역본을 찾아낸 것이다.

현재 국내 번역본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노승석 교수가 번역한 난중일기가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가 있다. 참고로 노승석 교수의 번역본은 2005년에 최초로 동아일보사에서 한국어 완역본으로 출판했다. 그 뒤에 교감을 거쳐서 2010년민음사에서 다시 출판했다. 이 번역본에는 32일치 일기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그 뒤에도 교감을 거쳐서 2014년여해에서 또 다시 출판했다. 이 번역본에는 이순신이 삼국지연의에서 교훈이 되는 내용을 옮겨 적은 내용과 홍기문1955년에 최초로 우리말로 번역한 난중일기 번역본을 반영했다. 그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2015년에 동일한 출판사에서 또 다시 번역했다. 이번 번역본에서는 갑오년에 쓴 9일치 일기를 추가했다.

외국 출판의 경우 이미 영역, 일역되었으며 올레그 피로젠코 주한 러시아대사관이 번역한 난중일기 러시아어 번역판이 나온다고 한다. #

5 기타

  • 국가기록유산 사이트, 고전번역원에서 난중일기와 이충무공전서를 열람할 수 있다. 번역은 없지만 한문을 읽을 정도의 한자 지식이 있는 사람은 읽어볼 수 있다.
  • 일기 곳곳에서 어머니를 칭할 때 어머니(母)라는 말 대신 천지(天只 : 하늘 천/다만 지)라는 표현으로 칭하는 부분이 많다. '천지(天只)를 떠나서~', '천지(天只)께서 평안하시다고 한다. 다행이고 또 다행이다.' 이런 식인데 이것은, 시경(詩經)의 '모야천지(母也天只)', 즉 '어머니는 하늘이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 난중일기에서 이충무공이 제일 길게 적은 일기는 정유년(1597년) 9월 16일의 일기다. 다름 아닌 명량 해전을 치르던 날의 일기. 명량 해전은 이충무공 역시 일생에서 가장 길었고, 긴박한 시간으로 느꼈을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오죽하면 이날 일기 마지막에 '실로 천행한 일이었다'고 덧붙였을 정도이니. 난중일기 곳곳에 장군의 감정이나 생각이 잘 드러나는 편이지만 무엇보다 감정이 제일 잘 드러나는 일기는 정유년 일기다. 이 해에 워낙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문화재청에서는 난중일기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기로 하고 2012년에 신청서를 유네스코에 제출하였다. 이후 2013년 6월 18일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의 최종 심사를 거쳐 새마을운동 기록물과 함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이로써 2015년 10월 9일 기준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와 한국의 유교책판이 추가로 등재되면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한국 기록물은 13개가 되었다. 아시아에서도 독보적인 1위이며 세계구급으로도 상당히 많은 편.(공동 4위)
  • 난중일기에는 짤막하게 여진(女眞)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제까지 이순신과 관계한 여인의 이름으로 해석되어 왔고 번역될 될 때에도 그렇게 번였했지만 이것이 완전히 오역이라는 주장이 있다.[2]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나, 실제 난중일기는 총 8권이 있어야 한다. 년수로는 7년이라 당연히 7권이 맞지 않느냐 할 수 있겠지만, 정유년을 다룬 정유년의 일기가 정유일기, 속정유일기 두권으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이다. 누락된 부분은 1595년 을미년을 다룬 을미일기로 이는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다. 한국사에서 난중일기의 역사적 위치가 위치인 만큼 이 '을미일기'가 발견된다면 임진왜란 중 을미년의 내용이 상당히 바뀔 것이라는 평도 존재한다. 다만 월간 조선 기사에 따르면 이미 '충무공 전서(조선 정조시기)'에 을미일기의 내용이 반영되어 있어 중요한 부분은 알려졌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참고로 이 기사에선 충무공의 다른 유물들의 허술한 관리 실태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으니 읽어보면 좋다.

5.1 도난 사건

1967년 12월 31일 난중일기가 도난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난중일기는 당시 현충사의 유물전시관에 전시되고 있었는데 범인들은 저녁 8시~10시 경에 철문을 부수고 다이얼을 맞추고 침입하여 서간첩, 입진장초, 충무공유사 등 10책을 훔쳤다.

수사를 벌였지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지지부진하자 대통령은 1968년 1월 8일 문화재 도난에 따른 전례 없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는데 그 요지는 "1월 17일까지 난중일기를 찾지 못하면 전 수사기관을 동원하여 범인을 체포 엄벌하겠으며 범인 스스로 뉘우쳐 자수하거나 정보를 제공하면 그 죄에 대해서는 일체 불문에 붙이고 난중일기의 행방을 알려주는 시민에게는 특별상금을 주겠다"는 강경과 회유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부터가 개인적으로 이순신을 존경한다고 하기도 했고, 한민족 영웅 기념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례적으로 움직였다는 평이 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1968년 1월 9일, 한 어린 시민의 제보로 끝내 범인들은 부산에서 체포되었고 난중일기는 도난 10일 만에 '일본으로 유출되기 직전' 회수되었다. 검거당시 난중일기는 비닐에 싸여 고추장 항아리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신고자는 공범의 조카였다고 한다.

주범은 유근필유금필이 아니다이라는 자로 당시에 37세, 무직자 였으며 사학과를 졸업하였고 전직 중학교 교감 출신(!)이었다. 당시 그 외 6명을 검거하고 한 명은 수배하였다고 발표했다. 월간조선의 기사를 보면 절도범은 다 잡히고 공범 양씨만이 도주하다 목숨을 끊었다고 하는데, 정황상 수배가 내려진 사람이 자살한 양씨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절도 전에 현충사 전시관을 답사하였고 난중일기를 일본에 가져가 1천만원 정도에 판후 나눠갖기로 모의했다고 한다. 2010년의 소비자 물가지수를 100으로 기준하면 1976년의 소비자 물가지수는 12.6이다.[21] 이를 통계청의 답변을 참고하여[22]해석하면 1976년 당시 1천만원은 10,000,000*(100/12.6)해서 2010년 기준 약 79,365,079원이 된다. 즉 이들은 감히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국보급 중요 사료를 고작 1억도 안 되는 돈에 팔아버리려고 한 인간들이다. 소비자 물가지수의 한계상 실제로는 1억을 넘기야 넘겠다만, 그래봐야 고작 1~3억 정도의 푼돈에 유네스코 기록유산에도 등재될 만한 문화재를 팔아먹으려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당시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이나 그것을 반대한 6.3 항쟁이 1964년에 벌어지는 등 대일감정이 매우 좋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에 만일 진짜로 난중일기가 일본에 유출이라도 되었었다면 저 자들은 일본에 맞서 싸운 성웅의 중요 유품을 다른 곳도 아닌 일본에 팔아먹은 매국노로 여겨져 성난 시민들에게 맞아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중앙일보 기사에 따르면 주범 유근필에게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고...

이 일이 있은 후 정부에서는 50부의 영인본을 만들어 전국에 보냈고 원본은 열람이 금지되었다.

이 사건을 다룬 영상 - 대한뉴스 658호

  1. 1.0 1.1 Nanjung Ilgi: War Diary of Admiral Yi Sun-sin
  2. Le journal intime de guerre de l'Amiral Yi Sun-sin
  3. 지정 명칭은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이다. 부록으로 서간첩 1책, 임진장초 1책, 합 9책이다.
  4. 원문 출처는 고전번역원 사이트 이충무공전서 수록 난중일기 번역은 직접 번역함.
  5. 이순신은 일기에서 시종일관 어머니를 天只(천지)라고 칭하고 있다.
  6. 긴 화살
  7. 일명 애기살. 덧살로 쏨
  8. 아직 개전이 고지되지 않은 상태였다.
  9. 순찰사(巡察使)를 말함.
  10. 역에서 일을 보던 구실아치
  11. 공문서
  12. 밤 아홉시부터 열한시 사이
  13. 이충무공이 임진란 개전 후 첫 해전을 치른 5월 초순에서 중순까지의 일기는 결여(缺如)되었다고 되어있음.
  14. 항복한 왜군
  15. 하늘이 내린 행운
  16. 아들이 늙은 것을 보고 어머니 마음이 상할까봐 그랬다는 의미. 참고로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부모님에게 본인의 흰 머리카락을 내보이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아직 남아 있는데, 이것이 중장년층 대상으로 검은색이나 짙은 갈색 염색약이 꾸준한 수요를 보이는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물론 제일 큰 이유는 젊어 보이고 싶은 거겠지만
  17. 포로한테만 이러는게 아니라 아군이라도 군율을 어기거나 직무에 태만한 것을 발견하면 가차없이 처벌했다.원균은 급이 같으니 어떻게 처벌할 수도 없고 난중일기에 실컷 디스를 해놨다.
  18. 원균의 경우는 당연히 지독히 평가하고 있다.
  19. 영국대영박물관 등에 가보면 대항해시대 때 말단 영국 해군 수병이 고향에 주고받은 편지라든지 식료품 가게의 음식 목록 따위의 굉장히 사소한 기록물들까지 보관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당시의 생활상을 자세히 파악하게 해주는 기록들로서 가치가 큰 탓이다. 한국의 경우는 이런 종류의 기록이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 한자로 쓰여진 바람에 번역이 안되어 있었는데 요즘에는 이런 생활상에 대한 기록들도 번역되는 일이 점점 활발해지고 있다.
  20. 물론 조선군이 이렇게 된 건 장장 200년 가까이 지속되었던 오랜 평화 때문이며, 특히나 여진족이 약탈을 했던 북방과 달리 남쪽은 일본쪽에서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왜구가 고려 때에 비해 크게 줄어 후방이나 다름없었다
  21. e나라지표 '물가상승률
  22. [1] 엑셀 '붙임' 파일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