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대 왕세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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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이연 (왕세손) |
인터넷 상의 소현세자의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 당연할 수도 있지만 소현세자를 그린 실제 그림은 없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할아버지 정원군의 어진(...)과도 괴리가 좀 있다. 왜 할아버지를 안 닮았을 수도 있지
昭顯世子
1612년 2월 5일, 음력 1월 4일 ~ 1645년 5월 21일, 음력 4월 26일
시대에 의해 희생된 비운의 세자
본관은 전주 이씨(全州李氏), 휘는 이왕(李往).
목차
1 병자호란 이전
1612년 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2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반정이 성공함으로서 하루 아침에 원자가 되었다. 보통 아버지가 세자를 거치지 않고 왕위에 오를 경우 자신의 장남을 바로 형식상 원자로 삼았다가 세자로 봉하는데, 소현세자의 경우 한참 동안 세자에 봉해지지 못하다가 그 후 1625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1]
그 후 불과 2년 만에 정묘호란이 발발한다. 이괄의 난으로 북도 방어력이 극히 약화된 상황에서 막아내기 힘들다고 판단한 인조는, 자신은 강화도로 향하고 세자는 분조[2]를 이끌고 전주로 내려가게 했다. 전란이 끝난 그해 말 강석기의 차녀와 가례를 올리게 된다. 1636년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치욕적으로 패배하면서 남동생인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의 묵던(Mukden, 현재의 랴오닝성 선양시)으로 끌려갔다.
2 병자호란 후, 포로 시기
청나라 고관들과 접촉하면서 친분을 쌓으며 인맥을 쌓아나갔고 그를 통해 얻은 고급정보를 몰래 인조에게 알려줘서 대비하게 하기도 했다.[3]
또 인질로 있으면서도 죽쳐 있지 않고, 아내 강빈의 권유로 묵던 근처에 농장을 만들고 끌려온 조선인들을 노예시장에서 구출해내서 농장에서 일하게 하는 등의 성과를 보였다. 여기서 얻은 곡물로 장사를 하니 세자의 거처가 마치 시장과도 같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상당한 재물을 얻었고 이런 능력만으로도 보건대 소현세자의 상업적 능력은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나라 측에선 툭하면 세자에게 외교적 현안, 특히 명나라와의 밀교 등에 대한 걸 따져 묻곤 했는데, 그때마다 세자는 마치 외교 훈련이라도 받은 듯이 능숙하게 답변하곤 했다고 한다. 또한 횡의 사건[4] 때는 도르곤 등을 찾아 평안감사, 선사포첨사, 의주부윤, 예조참판 등 청나라에 끌려 온 수많은 조선인들이 목이 붙은 채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게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이러한 소현세자의 행보는 점점 인조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가장 큰 원인은 청이 세자를 인조를 길들이는 수단으로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인조가 조금이라도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청나라에서는 "조선 왕(인조)은 너의 세자를 잊었느냐? 너의 아들도 잊었느냐? 짐을 잊었는가? 짐은 네가 나한테 무릎 꿇던 것을 잊지 않고 있다." 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장들이 날아오곤 했으며, 항복한 명나라 문인 범문정이 "조선 왕을 끌어내고 소현을 세웠으면 나았을 거"란 말을 하기도 했으며, 항복구절에 "유고시 세자가 대신한다"는 문구를 넣었다.
2.1 소현세자는 과연 살아남을 것인가?
흔히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를 유능한 아들에 대한 못난 아버지의 시기심으로 여기는 풍조가 강하지만, 이들 부자의 불화는 아버지의 인격이나 아들의 자질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5] 그보다는 아버지의 권위가 실추된 상황에서 아들이 자의든 타의든 아버지를 위협하는 정치권력의 중심에 서버린게 주요했다.
인조-소현세자 부자의 불화는 선대의 선조-광해군 부자의 관계와 여러모로 유사하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재야사림이나 조정중신들이 공공연하게 선위를 요구하는 다른 때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상황에 처했다. 이때 선위를 주장한 이들이 대체자로 낙점한게 세자 광해군이 었다. 게다가 임란 이후 집권여당이 광해군 과잉충성파가 다수 포함된 강경파 북인이었다. 자연히 선조는 왕 노릇 계속하기 위해[6] 광해군을 견제할 필요성이 생겼고, 그래서 어린 영창대군과 탁소북을 이용했다.
인조는 그보다 더 심각했다. 파천했지만 잡히진 않은 선조와 달리, 외적에게 붙잡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권위가 바닥을 쳤다. 선조를 위협한 건 그래도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내부의 정치권력이었는데, 인조는 조선을 침략해 짓밟은 거대한 외세가 세자를 영향력 아래두고 압박해오고 있었다. 이 경우 인조 자신의 왕권도 왕권이지만, 청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청에게 집권정당성으로 얻어 즉위하는 조선 왕의 출현을 경계해야 했다.
고려 무신정권 때 명종은 무신들에 의해 옹립되었기에, 집권 정당성을 보장받기 위해 경대승이 사망하자 스스로 무신 이의민을 정계에 끌어들였다. 원 간섭기 고려 왕들은 원나라 황실의 일원이라는데 집권정당성을 얻었기에, 원이 약해지기 전까지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인조가 청에 의해 물러나고 소현세자가 즉위한다면 청나라의 뜻에 따라 즉위해 청나라로부터 집권정당성을 얻는 조선 왕이 출현할 것이며, 이는 그의 가계를 따라 이어질 것이니, 청에 대한 종속이 심해질것은 당연했다. 이건 곧 원 간섭기의 재림이다.
결국, 복수귀의 기질을 지닌 인조가 문제였던 것이 아닌, 소현세자의 청나라와의 깊게 꼬인 관계가 소현세자의 목숨을 조여낸 것이었다. 소현세자가 당시 할수 있는 것은 결국 아무래도 아무도 모르게 해외에 망명하거나[7] 아예 그냥 조선 태종의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그랬듯이 미친 짓하다 세자 자리를 동생에게 물려주고 때를 기다리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인조가 태종처럼 행동할 가능성도 없거니와, 동생 봉림대군이 그렇게 왕이 될지라도 과연 세종대왕 때와 같은 상황이 가능한지는 확실하지도 않다. 게다가 송시열의 산당 일행은 봉림대군의 즉위가 불합리하다고 보는 작자들이다. 그렇게 봉림대군이 왕이 되고 소현세자가 침사고든 병이든 걸리지 않고 오래 살더라도 여전히 정통성의 문제가 걸려 있기에 산당과 유림들이 이 문제를 그냥 둘지도 문제다.
차라리 소현세자가 아픈 몸을 버텨내서 라도 중국에 더 오래 있으면서 "포로"의 신분으로 계속 있다가 인조가 죽고 난 후 조선에 돌아왔다면 그나마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덤으로 원치않은 청나라의 간섭을 데리고 올수도 있다. 물론 고려의 공민왕이 그랬던 것처럼 청나라의 간섭을 끊을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계란으로 바위치기며, 불후의 명장들 이성계 같은 이들이 이괄의 난에 갈려나간 이후 답도 없는 작자들인 김자점 등등이 고위직을 잡고 있고 호란 때 피해가 심했기에 전력을 회복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청나라는 공민왕 때의 원나라와는 달리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결국 시대가 소현세자에게 요구한 건 정사가 전해주듯 병사 혹은 독살당하거나, 존재를 지우고 망명하거나, 어찌어찌 아버지의 눈을 피해 원나라 간섭기의 고려왕 처럼 사는 대신 기회를 엿보는 것밖에는 방법이 전혀 없다(...).
여러모로 사연이 기구하게 꼬인 운명인 것이다.
3 귀국 준비, 그리고 기구한 운명을 향해
인조는 자연스럽게 세자를 꺼리기 시작했다. 세자가 영구귀국 전 2차례 임시 귀국을 했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삼전도 이후 3년 만에 소현세자는 1차 귀국을 하게 되는데, 청에 보낸 사신이 "세자가 3년이나 청에 있었으니 고국 구경이나 시켜달라"며 독단적으로 요구했고 청이 원손과 인평대군을 볼모로 보내는 것을 조건으로 승낙한다. 독단으로 진행된 이 일로 원손까지 청의 손아귀에 집어넣게 된 인조는, 격분해 사신을 유배보낸다. 그리고 환영행사도 치르지 않았다.
2차 임시귀국 때는 의심이 더욱 심해져 있었다. "세자가 여기 오래 있었으니 또 한번 보내주겠다"며 일시귀국 시킨것을 영구귀국으로 잘못 이해하고 중한 것은 버리고 작은 것은 취하니 이 어찌 된 영문인가? 저들이 갑자기 호의를 보이니 내 알수가 없구나. 조그만 일에도 의심이 생긴다. 한번 화살에 상처입은 매란 으레 이런 것이다 라면서 노골적으로 의심을 드러냈다.
이러한 의심은 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친정아버지, 그러니까 인조의 사돈이자 소현세자의 장인인 강석기가 죽자 김자점을 비롯한 삼정승이 세자빈이 빈소를 찾아 곡을 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거절하는 것으로 표면화된다. 나중에 강빈의 사사에 한몫을 했던 김자점조차 당황해서 "빈궁이 부친상을 당해서 가보라고 청나라에서 보내줬는데, 못보게 하면 청나라 사람들이 의심을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다시금 청했으나 무시했고 세자가 청으로 갈 동안 찾아보지도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심기원의 역모까지 터진다. 반정공신 심기원이 인조를 상왕에 앉히고 세자를 왕위에 앉혀 반정을 일으킬 음모를 꾸몄는데 세자가 귀국한 걸 보고 왕이 될 재목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회은군[8]으로 바꾸고 이것저것 꾸미다 발각된 사건인데 이로 인해 세자에 대한 경계심은 더욱 강해진다.
4 귀국과 의문의 죽음(독살설)
청나라가 명을 완전히 접수한 뒤인 1645년, 청 황제는[9] 소현세자의 영구 귀국을 허락했고 소현세자는 강빈과 함께 귀국했다.
이후의 행적을 보면 인조는 이미 후계자 교체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9년 만에 귀국한 세자에게 어떠한 위로의 말도, 귀국 축하 연회도, 치하도 하지 않았다. 죽기 전 3달 동안 세자에 대한 기사라곤 당대의 대 문장가 이식이 세자의 귀환을 축하하는 교서를 발표했다는 것뿐이다. 노골적인 박대의 분위기 속에 소현세자는 병을 얻었고, 결국 귀국한 지 3달도 못 되어 그 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소현세자의 죽음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 때문에 소현세자가 독살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국가의 공적 역사 기록이라 할수 있는 실록에서까지도 소현세자의 시체가 매우 심하게 검게 변해 있었더라는 이야기를 적어, 소현세자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실록의 기록을 적자면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가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라고 쓰여 있다.# (독살설을 긍정하는 쪽에서는 이 죽음에는 인조가 직접 개입했으리란 말도 있고, 방조했다는 해석도 있다.)
소현세자의 처남들인 강문명 등이 소현세자의 장례 일정이 원손에게 불리한 날이니 바꿔달라고 하자 "그렇게 잘 안다면 어디 네놈이 한번 날을 잡아라!"라고 소리지르기도 했고, 지관들이 정한 장지를 불편하다는 이유로 다른 곳으로 바꿨는데, 지관들이 거긴 흉지라고 수군거리다가 곤장을 맞고 국문당하기도 했다. 장례조차도 "사대부의 예면 족하다"는 이유로 너무나도 초라하게 치러져서, 신하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독살이 있고 없고 떠나서, 세자에게 애정이 없었던 것은 분명해보인다.
이덕일이 제시한 그 많은 독살설 중에 유일하게 실록 등 사료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고, 무엇보다 인조의 행동 때문에 연구자들도 그 가능성에 동의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래서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는 게 사실인 걸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실제로는 글자 그대로 '설'일 뿐이니 섣불리 사실로 기정하는 것은 금물이다.
최근에는 의학적 근거를 통해 독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도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소현세자가 묵던 곳에서 쓴 편지를 보면 세자는 원래 귀국 직전부터 몸이 안 좋았고, 정치적 관점을 배제하고 완전히 한의학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단순한 의료사고였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는 소리. 또한 간이 안 좋아 사망한 경우에도 얼굴이 검게 물들고 선혈이 흘러나오는 증세를 보인다고 한다. 또 최근 소현세자의 일기가 번역되면서, 독살설보다는 처방을 잘못 해서 죽었다는 견해가 많은 편이다.
정치적 관점과 인조의 전후 행보를 보자면 인조가 세자를 제거했거나 세자의 죽음과 어떤 형태로든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어보이지만, 순수하게 의학적 관점에서도 볼땐 그냥 건강이 안 좋던 사람이 실력 없는 의사를 만나 병이 도져 사망했고, 인조는 그저 그 상황을 이용했을 뿐일 수 있는 것이다.[10]
야사에서는 소현세자가 인조에게 청나라에서 가져온 벼루를 자랑하자 분노한 인조가 소현세자의 머리에 벼루를 던졌고 이에 맞은 소현세자가 상처가 덧나서 죽어버렸다는 말이 있는데, 여느 야사가 그렇듯이 웃고 넘어가자.[11]
5 사후
그가 사망한 후 인조는 후계자 교체와 그에 따른 정리작업에 돌입한다. 청의 영향력 아래 있는 세자는 죽었으나 뒷날 청이 소현세자의 맏아들을 데려가려 했던 데서 드러나듯, 소현세자의 자식들 역시 청의 계산 아래 있었다. 인조는 역시 청에 볼모로 가긴 했지만 차남이라서 청의 주목을 받지 않았던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낙점하고 움직였다.
송준길 등이 소현세자의 아들을 왕세손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소인배놈들의 행태를 차마 볼수가 없다!!"고 길길이 날뛰며 욕을 퍼붓더니, 이시백, 이시방 형제, 김육 등의 반대를 모두 무시하고 둘째 봉림대군을 세자로 만들었다. 이때 인조의 주장에 영합한 것이 김류와 김자점이었는데, 김류는 인조가 "원손은 영 못 써먹겠다!!"고 하자 "혹시 양녕대군 같으면 쫓아내야겠죠?"라고 한마디 거들었다가 원손을 가르쳤던 김육에게 "어린 원손이 무슨 죄를 저질렀습니까?"하고 극딜을 당했다.
인조가 "원손이 멍청해서 안 되겠다!!"고 하자 "재강할 때 원손의 재능이 드러났거든요?"라고 다시 김육의 반발을 산다. 그러자 인조는 "한갓 총명함이 문제가 아니라 나이가 문제다. 내가 나이가 많아 어린 원손이 성장함을 지켜볼 수가 없다"고 억지를 부려서 원손의 승계를 뒤틀었고, 김자점이 신나서 왕에게 아부하여 조정의 논의를 결정지어 효종을 후계로 삼는다. 물론 이러한 조치는 후대의 정통성 논란을 일으켰지만, 이 정통성 논쟁과 청의 영향하에 있는 군왕의 탄생 중 인조가 어느쪽을 더 위험하게 여겼을지는 뻔하지 않은가.
그렇게 효종-현종의 승계라인을 결정지은 인조는 맏며느리 민회빈 강씨에게 화살을 돌렸다. 강빈을 박대하다 전복에 독을 탔다는 누명을 씌워 그녀의 궁녀들을 무고하고, 강빈이 그 일로 항의하자 건방지다는 둥 청나라에 있을 때 홍금적의를 지어 입고 난을 모의했다는 둥 각종 누명을 덮어 씌워 사사했다.
그리고 소현세자와 강빈의 세 아들을 어린 나이에 제주도로 유배보낸다. 섬 생활을 이겨내지 못한 장남 석철과 차남 석린은 어린 나이에 연이어 병사한다. 이들이 죽기 직전 소현세자 부부의 죽음을 전해들은 청은 용골대를 보내서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도로 데려가서 키우고 싶다는 뜻을 전했는데, 이들을 이용해 인조를 압박하려는 속셈이 빤히 보이는지라 조선은 당연히 거절했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 내에 있는데 그 묘를 소경원(昭慶園)이라고 한다.[12] 현재 이 묘는 비공개라 들어가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소경원 구역이 농협 부지이기 때문. 단 아예 볼 수 없는 것은 아니고 서삼릉에 가면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아침 10시에 해설사의 인솔 하에 비공개 능역을 들어갈 수 있는데, 소경원을 답사하고 싶으면 이때 시간 맞춰서 서삼릉을 방문하면 된다. 또 근처의 군부대에서 정훈교육 기간에 맞추어 단체 방문한다. 비공개 능역 답사 때 인종과 인성왕후의 능인 효릉과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도 돌아볼 수 있다.
6 자녀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는 모두 3남 5녀를 두었다.
- 경선군 이석철 : 제주도 유배 후 사망. 소현세자의 장남이기 때문에 경안군의 아들과 손자가 사후 양자 제도를 통해 그의 대를 이었다.
- 경완군 이석린 : 제주도 유배 후 사망.
- 경안군 이석견 : 제주도-강화도-교동도로 유배지를 옮겨다니다가 결국 방면되었다. 혼인한 지 얼마 안 된 22세에 요절한다.
- 경숙군주 : 구봉장에게 하가하여 1남을 두었다.
- 경녕군주 : 박태정에게 하가하여 5남 4녀를 두었다.
- 경순군주 : 소현세자의 자녀들 중 가장 장수하였으나(55세), 19세에 남편이 사망하여 후손은 없다.
-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사이에서 첫째, 둘째로 태어났지만 어려서 요절한 딸이 2명 있으며, 승정원일기에 출생과 장례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세 아들 중 경안군 이석견만 후손을 남겼기 때문에 소현세자의 남계 후손은 모두 경안군의 후손이다. 왕이 된 효종 직계가 갈수록 손이 귀해지다 끊어져 버린 것과 달리, 소현세자의 후손들은 4살짜리 아이가 8년에 걸친 섬에서의 귀양살이를 버텨내고 이후 여러차례 역모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음에도 끝까지 대를 이어 살아남았다. 자세한 것은 이석견 항목을 참고.
아들들은 왕위계승권 때문에 역모에 휘말려 죽거나 불안한 삶을 살았다면, 남겨진 세 딸은 기록이 없지만 효종이 청나라에서 공주를 왕비로 시집보내라고 했지만 공녀로 보내지 않은 걸 봐서는 나름대로 잘 대우해준 듯.
7 천주교?
일단 조선인 포로쇄환이나 각종 외교적 현안에서 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며 조선의 세자로서 부끄럽지 않게 행동한건 맞다. 문제는 가톨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조선에 들여오려고 했다는 둥, 서구문물에 밝아 그가 왕이 되었으면 개방이 빨라졌을 거라는 둥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 여인도 사냥터에 말 타고 참여하는 청의 문화나 몰락해가는 대국 명과 조선인 포로들의 애환이었다. 심양 일기에서 서구문물에 관심을 가졌다고 볼만한 기록이 없다. 후술하겠지만 석달도 안되는 북경생활, 그것도 아담 샬 신부 혼자만의 기록에 근거해 서구 문물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ref>, 유교체제의 한계를 깨달았다는 둥[13] 관련 논문이라도 한편 읽어보았을까 싶은 어거지가 정설인냥 대중에게 떠돌아다닌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광해군과 유사점이 있다. 물론 광해군처럼 엄청난 실책을 저질러 놓고도 가려진건 아니지만.
소현세자와 친교를 나누고 그가 천주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는 아담 샬 신부는 예수회 소속으로 1619년 마카오에 상륙해 1623년 북경에 입성하였다. 1627~30년까지 서안에 파견되었던 것을 제외하면 1666년 사망할 때까지 북경에만 머물렀다.
그는 1622년부터 1658년까지 자신과 중국 가톨릭에 관련한 사건들을 적은 라틴어 회고록 <Historica Relatio>을 남겼다. 이 기록에서 만주인들이 조선 왕국을 점령하고 요동에 포로로 잡아온 '조선왕'이 역법을 익히려고 조선 역관들을 대동해 찾아왔고 아담 샬 신부 자신은 이를 성심성의껏 도와주며 조선 왕과 우정을 쌓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역법과 기타 서학서는 물론 성상과 천주교 서적들을 선물했는데, 이에 감격한 조선왕이 서신을 보내 "천주교의 교리를 널리 알리고 싶으니 선교사를 일행에 포함시킬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잘못된 예식을 할까 두려워 성상은 그냥 돌려보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담 샬 신부는 성상을 돌려보낸 것을 겸양으로 생각하고 조선왕의 환관 중 세례를 받은 이에게 교육을 시켜 성상을 다시 돌려보내자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회 선교사를 대동시켜 조선에 들여보내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조선에 들어갈 시기를 놓쳤다고 적었다.
1929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서 1672년 레겐스부르크에서 출간된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을 발견한 일본인 학자 야마구치 마사유키(山口正之)는 해당 부분을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이자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 주교에게 프랑스어로 번역해줄 것을 부탁해 연구를 시작했다. 야마구치는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에 나온 조선왕이 실제론 소현세자였으며 아담 샬 신부가 이를 오인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오늘날까지 소현세자와 천주교의 관계를 설명할 때 거론되는 주장들을 폈다.
그러나 야마구치는 편지 부분만을 연구하고 그 뒤에 이어지는 아담 샬 신부의 회고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아 소현세자가 성상을 그냥 돌려보냈다고 주장했고 더 나아가 아담 샬이 성상을 지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세례성사를 받은 환관을 데려가주십사 청원하고, 소현세자가 이를 허락할 뿐 아니라 오히려 유럽 선교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해 명국 출신 환관 이방조(李邦詔), 장삼외(張三畏), 유중림(劉仲林), 곡풍등(谷豊登), 두문방(竇文芳)과 궁녀들이 인조 23년에 2월 18일 세자를 따라서 한양에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이 해방 이후에도 이어져 오늘날 대중들에게 소현세자는 천주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를 들여오려 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서 그[=세자]는 말하기를 ‘신부님의 동료들 가운데 한 분을 제가 모시고 가서 저와 제 백성들을 가르치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이 없다면 이 환관이 그 대신 어떤 모양으로든 대행할 것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 선교회 장상에게 예수회원 가운데서 어느 회원으로든지 조선 왕을 따라가도록 해 주십사고 간청했습니다. 필요하다면 나중에 다른 회원으로 대치할 계획으로 말입니다. 장상은 대답하기를 그런 일이라면 예수회 순찰사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었습니다. 그러나 순찰사에게 연락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호기를 놓쳤던 것입니다. 그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에는 아담 샬이 아니라 소현세자쪽에서 선교사를 청하고 정 안되면 환관을 선교사로 활용할 생각을 했고 이에 아담 샬 신부는 백방으로 손을 썼지만 윗선의 허락을 받지못해 하지 못했다고 적혀있다. 야마구치의 연구는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과도 안맞는 부분이 있다. 게다가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 자체도, 그리스도교에 대해 일말의 사전지식도 없던 순치제가 예수 생애 화집을 보고 우리의 성현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대한 분이라며 경배를 드리고 황후가 예수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적어둔 진실성에 문제가 많은 기록이다. 아담 샬 신부의 말만 믿으면 순치제도 반쯤 기독교인이다.
일단 1644년 아담 샬 신부의 행적을 살펴보자. 이해는 격변의 한해였다. 1644년(순치 원년) 1월 반란군을 규합한 이자성(李自成)은 장안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순(順), 연호를 영창(永昌)으로 정했다. 그 해 3월 18일 이자성의 군대는 북경을 점령하고 노략질하였다. 그러나 이자성의 천하는 예친왕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에 의해 40일만에 끝이났다. 오삼계의 협조로 산해관을 돌파한 청군은 5월 1일 청군이 북경에 입성해 중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청군은 자신들의 입주를 위해 북경의 중, 동, 서부 구역의 한족(漢族)들에게 사흘 이내에 북, 남부 지역으로 이주할 것을 명령하였다.
5월 11일 아담 샬 신부는 자신은 명 숭정제 2년부터 북경에 거주하는 유럽 선교사로서 교회당과 성모당과 이에 딸린 성구 및 3천권 이상의 서적을 선교 목적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그 밖에 대량의 인쇄용 판본과 천문 기구, 그리고 책력에 필요한 140여권의 서적을 보유하고 있어서 사흘 이내의 이주는 불가능하다고 설명하고 따라서 북경 내에 거주하며 선교와 책력 제작을 계속하기를 청원하였다. 이에 2명의 관리들이 선교원에 와서 사실 여부를 확인한 후, 이튿날 아담 샬 신부의 청원을 허락하는 청 황제의 증서가 교부되었다.
그 직후 아담 샬 신부는 순치 2년을 위한 책력을 만들었고, 그 해 8월 1일에 있을 일식도 예보하였다. 이 날의 일식은 전통적인 대통력(大統曆)과 이슬람식 회회력(回回曆)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아담 샬 신부의 주가는 올라갔다. 같은 해 7월 2일 도르곤은 유럽식 역법으로 완성된 책력을 시헌력(時憲曆)이라 명명하고 순치 2년부터 천하에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이로써 아담 샬 신부는 명조에 의해 청조에서 봉직할 기회를 얻었고 그 해 11월 25일 흠천관(欽天監) 감정(監正)에 임명되었다.
소현세자는 8월 20일 심양을 출발해 1,600리 떨어진 북경으로 향했다. 그리고 9월 19일 북경에 도착했다. 심양일기는 북경을 떠나기 2일전인 8월 18일을 마지막이므로 북경에서 세자의 행적을 알려주는 조선 측 사료는 없다. 아담 샬 신부와 소현세자가 교류했다는 기록은 오직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에만 나온다. 심양일기와 장계에는 소현세자가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다고 볼 만한 기록이 전혀 없으므로 아담 샬 신부와의 만남 이전에 세자가 천주교에 대해 알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소현세자는 11월 11일 귀국 허가를 받아 11월 26일 조선으로 떠났으나 북경에 머무른 기간은 70일 남짓. 아담 샬 신부와 교류할 수 있었던 시간도 이 기간 뿐이다. 심양 시절부터 만나는 사람과 갈 수 있는 장소를 제한받았던 세자이기에 만약 아담 샬을 만났다면 실권자인 도르곤의 허가가 있어야 했을 것이다.
아담 샬 신부는 소현세자와 여러번 만났다고 하는데, 세자를 조선왕으로 오인하고 인질이 아닌 포로로 적는 등 여러번 만난 사람치곤 부정확한 정보를 담고있다. 소현세자가 아담 샬 신부에게 보냈다는 서신은 오늘날 원본이 전해지지 않으며 오직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에만 등장한다. 그런데 이 서신 서두를 보면 구원자 하느님(Salvatoris Dei) 상 운운하는 표현이 나온다.[14] 마테오 리치 신부 이후 중국에 간 선교사들은 Deus를 천주(天主)라는 용어로 번역해 신명(神名)으로 사용했다. 그리스도교를 잘 알지도 못하는 세자가 이런 용어를 썼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즉, 진짜로 만나서 서신을 보냈다쳐도 해당 편지 내용은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아니라 아담 샬 신부의 첨삭을 거쳤을 가능성이 높다.
명에 봉직하던 환관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었던 건 맞고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중국인 환관을 데려온건 맞지만[15]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지낼 때 중국인 환관들을 거느렸는지, 귀국할 때 데려온 환관들 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었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명 조정에 봉사하던 궁인들은 엄연히 청의 포로였다. 인질 신분이었던 세자가 임의로 특정인을 요구해 대동하는건 어려운 일이다. 아담 샬 신부는 소현세자가 귀국하기 하루전에야 청 조정에서 관직을 받았다. 그전에는 계속 남을수 있을지 없을지 조차 확실하지 않은 상황인데 아담 샬 신부 임의로 명 환관을 조선으로 보내는 것 역시 어렵다. 게다가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에서조차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만약 성공했다면 자신의 선교일화를 상당부분 부풀렸으며 조선선교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16] 그가 회고록에 언급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담 샬 신부의 회고록 뿐 아니라 동료 선교사들의 서한이나 보고서에도 전혀 확인되지 않으며 인조실록 같은 조선측 기록에서도 이들이 천주교 신자인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소현세자가 데려온 중국인 환관과 궁녀는 어디까지나 청 조정이 임의로 뽑아 보낸 이들이었다.[17]
인조실록 1645년 7월 22일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 어떤 요망스런 무당이 말하기를 “세자가 북경서 올 때에 금수(錦繡, 수놓은 비단)를 많이 구입해 왔는데, 이 물건이 빌미가 되어 흉화를 당하게 된 것이니, 이것들을 빨리 물에 띄워버리거나 불에 태워서 신(神)에게 사죄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흉화가 또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애란이 이 말을 듣고 강빈에게 고하자, 강빈은 그 말을 믿고 그 금수(錦繡)를 모조리 찾아내어 애란에게 주면서 무당의 말과 같이 하도록 하였다.
아담 샬 신부가 전해주었다는 성상이나 서학서는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요약하면 아담 샬 신부가 자기 회고록에서 세자와의 만남과 그의 서신에 대해 언급한 것이 소현세자가 천주교에 관심이 깊었다는 주장에 대한 유일한 증언이며, 후대 저자들의 진술들은 모두 아담 샬 신부의 증언을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가 인용한 세자의 서신은 원본이 부재하기 때문에 그 진위를 알 수가 없다. 설령 세자가 아담 샬 신부에게 서신을 보낸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아담 샬 신부가 세자의 서신을 충실하게 번역, 인용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아담 샬 신부는 여러번 만났다고 주장한 사람치곤 소현세자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조차 틀리게 적었으며,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명 환관이 있었던 건 맞지만 이들은 아담 샬 신부나 소현세자 의사와 관계없이 청 조정이 임의로 골라 보낸 이들이며 천주교 신자인지도 알 수 없고 무슨 특별한 역할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세자가 성상이나 천주교 서적을 들여왔는지도 확실치 않다. 설사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왔다쳐도 유몽인(1559-1623), 정두원(1561-?), 이수광(1563-1628), 이익(1579-1624)[18] 등이 한문으로 번역된 천주교 서적을 들여와 소개한 상황에서 뭐 그리 특별하게 여겨질 일인지도 의문이다. 또한 아담 샬 신부가 남긴 교류기록에서 종교관련 부분들을 빼놓고 보면 소현세자가 가장 큰 관심을 쏟은 부분은 역법으로 보이는데 이 역법은 조선이 외국 문물중에서 가장 가감없이 받아들여온 부분이다.
여담으로 아담 샬 신부와 흡사하게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도 선교 활동의 와중에 본인의 기록을 많이 부풀렸다.
막상 조선시대 당시에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귀국할 때, 청 황제가 원하는대로 선물을 주겠다 하자 소현세자는 청 황제의 귀한 벼루를 요구해서 받아오고[19], 봉림대군이 조선 포로들을 요구하여 데려왔고, 이것을 보고 소현세자에게 노한 인조가 그 벼루로 소현세자를 때려죽였다는 이야기가 민간에 널리 퍼져있던 것이나 위에 나온 심기원이 소현세자가 왕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이야기 등, 소현세자의 활동은 조선시대 당시에는 양반 계층과 민중 모두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다. 소현세자가 벼루에 맞아 죽었다는 야사는 1980년대까지도 대한민국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으나, 1980년대 이후 소현세자가 과도하게 추앙되면서 2010년대 현재는 거의 잊혀버린 상태다.
8 오늘날의 소현세자
소현세자에 대한 대중적 여론이 상당히 동정적, 호의적이다보니 현대의 창작물에서는 좋은 대접을 받는다. 사극에서 등장할 때는 아버지 인조가 악역으로 자주 나오는 데 반해 주로 주인공의 조력자 역을 많이 한다. 비중있게 나오지는 않아도 선역으로 잘 나오는 편. 능력과 기대감은 있었지만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기 때문인지 역사를 기반으로 한 소설의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한다.
2010년 3월에는 김인숙 작가가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인 <소현>을 발표했다. 작품 속 소현세자가 비록 대단히 능동적인 행동은 하지 않지만, 묘사나 고증은 괜찮은 편.
만화가 박시백은 자신의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사대부의 바다에 고립된 광해군을 생각하자"라고 큰 기대를 걸지 않으면서도 "그(사대부)들을 설득해가면서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는 건 어려웠겠지만, 성리학 일변도였던 조선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은 주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유자들 눈에는 문제점도 많았겠지만, 세계사적 전환기에 반드시 필요한 인격과 정치적 능력을 가졌던 세자' 라고 긍정적으로 평했다.
물론 이는 '역사의 만약'을 통한 평가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있겠다. 당연히 학계에서 소현세자에 관해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그가 심양에서 벌인 외교, 대외활동과 그의 죽음(사인, 병증, 장례절차)과 관련된 부분일 뿐이다. '만약' 소현세자가 살아남아 왕위를 계승했다면 유교 교조주의에 찌든 조선에 나타난 기린아가 되었을지, 박시백의 추정처럼 어느 정도 충격만 주고 결국은 흐지부지 평범한 왕이 되었을지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일본에게 침탈당함으로서 근대화가 실패한 우리나라 역사의 대한 보상 심리라고도 볼 수 있다.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 믿는 줄도 모른다.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그의 치세에 표착해 왔을 헨드릭 하멜 일행을 통해 네덜란드와 수교하고 무역을 장려했을거라는 나름대로의 근거를 드는 주장이긴 하다.[20]
하지만 인조 다음 왕인 효종이 능력이 뛰어난 왕이었는데다가 그 역시 외부 기술이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다는 점에서[21] 이는 부당하다.[22]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고 해도 결과는 크게 바뀐다는 보장은 없다. 소현세자가 서양의 많은 문물들을 배우고 받아들이는데 창구가 되었던 일종의 선배격이었던 청나라는 훗날 19세기 서양 열강의 이권밭이 되어버렸다. 그 모든 게 화신 일당의 삽질 때문이다.
그리고 어찌어찌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정치를 잘 해낸다해도 이후 왕이 된 소현세자의 발을 묶을 그림자는 남아 있었는데, "청나라 덕분에 왕이 되었다는 집권자" 라는 오명은 기본이며 원나라 고려 간섭기 왕보다 더 상황이 좋을 것인지는 과연 의문이다. 정통성은 적장자로서 매우 좋은 위치에 있지만 오명을 씼겨내려면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 비운의 죽음에 더욱 애통하는 이유로서 인헌공 강감찬의 18대손 사위라는 인식인데, 북방 오랑캐를 몰아낸 구국영웅의 18대손 사위가 오랑캐에 의해 왕이 되었다는 인식도 될 수 있어, 양날의 칼이 된 셈이다.
8.1 사극에서 소현세자를 연기한 배우
- 최강칠우 : 임호
- 탐나는도다 : 소영돈
- 마의 : 정겨운
-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 : 정성운 : JTBC의 2013년 기획에는 소현세자 탄생 400주년 기념작이라 하여 소현세자가 주인공인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 드라마의 주인공은 소용 조씨다.
본격 페이크 주인공 하지만 MBC 화정에선 청태종으로 등장해 승리자가 된다. - 삼총사 : 이진욱
- 화정 : 백성현
- ↑ 당시 인조반정의 명분은 백성들이 보기에 매우 부족했고, 이 때문에 세자의 책봉이 미뤄질 정도로 민심이 어지러웠다고 한다.
- ↑ 조정의 일부
- ↑ 몽골어나 만주어에 능했다는 이야기가 인터넷에 떠돌고 tvn 드라마 <삼총사>에선 능숙한 만주어로 말하는 소현세자가 등장하는데, 실제로는 외국어를 못했다. 본인 스스로 황제의 말을 잘 못 알아들어 불편하다고 밝혔고, 청나라가 몽골어를 가르치려고 보낸 역관들을 "아랫사람들부터 익숙하게 되면 배우겠다"면서 돌려보낸 기록이 있다.
- ↑ 임경업, 최명길 등이 명나라를 위해 공포탄을 쏘고 화살촉을 제거한 화살을 쏘는 등 태업 행위를 하고, 명나라 배에 식량을 제공하며 스님들을 시켜 명나라에 외교문서들을 전달했다가, 명나라 병부상서가 투항하면서 들킨 일.
- ↑ 정말 아버지의 인격이 문제가 된 사례는, 아버지가 기질 차이로 ― 물론 그것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 아들을 심하게 대하다 정신병자로 만들고 좋은 대체제가 생기자 죽여버린 아버지가 있다.
- ↑ 참고로 선조의 선위를 주장하며 신하들이 들었던 예가 당현종과 당숙종의 사례인데 선대 황제와 현 황제의 권력다툼이 벌어져 아버지 현종이 실권을 모두 잃고 반유폐생활을 해야 했다. 선조 이전까지 조선에 상왕이 4명 있었는데(상왕으로 달랑 하루있었던 세조 제외) 군사권과 외교권을 쥐고 실권을 휘두른 태종을 제외한 태조, 정종, 단종은 모두 쿠데타(1차, 2차 왕자의 난, 계유정난)로 반강제로 물러났으며 이중 단종은 비명에 갔다. 이런 사례들을 볼때 선위하고 물러나라는 게 선조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을까?
- ↑ 서양 왕자들(특히 장자들)은 자신의 위치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해외로 망명했다가 때가 무르익으면 귀국했다. 예를 들어, 영국의 찰스 1세가 죽고 크롬웰의 공포정치가 시작되자 신변의 위험을 느낀 적장자 찰스 2세는 해외로 망명했다.
- ↑ 월산대군의 4대손
- ↑ 정확히 하자면 순치제는 어린애라, 실권을 쥐고 있던 섭정왕 도르곤이 돌려 보낸 것이었다.
- ↑ 소현세자를 집도한 의원 이형익은 소현세자 귀국 후 소현세자의 주치의로 내정되었으며 침술에 능한 이였는데, 소현세자는 침을 맞은 직후 사망했다. 원래 이 작자는 돌팔이 의사라는 시각이 많았고, 효종(당시 봉림대군)도 이 사건을 의료사고로 생각했는지 중병에 걸린 이후에도 이 어의에게 침을 맞지 않았다. 인조가 계속 맞으라고 했음에도 끝내 맞지 않았다. 어이없게도 효종 자신도 결국 수전증이 있었던 침의에게 머리에 침을 맞고 과다출혈로 사망하지만. 덤으로 인조도 병이 걸려 그 이형익(!!!)에게 침을 맞다가, 갑작스럽게 병이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이것조차 의료사고면, 세 부자 모두 의료사고로 명을 달리한 셈. 특히 이형익 이 작자는 왕급 인물 둘을 더블 킬하는 위업을 달성했다덧붙여 이형익은 1660년 현종 원년 때 외출 중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는데, 몽둥이와 호미에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맞고, 시신은 한강에 던져졌다고 한다. 맞아 죽은 걸 보면 원래부터 평판이 좋지 않은 모양. - ↑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는 소현세자파의 약사를 설명하면서 이 야사를 사실인 양 소개하고 있다.
- ↑ 그나마 소경원이란 이름은 고종황제 때 붙여진 이름이다. 그 이전에는 소현묘라 불렸으며 정자각이나 석물 같은 것도 없었다. 다만 정자각은 한국전쟁 때 불타 초석만 남아 있다.
- ↑ 그 근거가 상업활동에 힘썼다느니 서연을 열심히 안했다느니 하는 건데, 상업활동을 하긴 했는데 청이 1641년 12월부터 따로 정착비용을 주는 대신 토지를 주어 농사를 지으라고 지시했다. 청은 심양관에 한번씩 담비가죽, 담요, 낙타, 노루 등 예물을 보냈고 이에 심양관 측에서도 조선산 과일이나 은제품을 답례품으로 보내야 했다. 게다가 청 황족이 사적으로 상업거래를 요구하는 일도 있었고 청 관리들도 많이 만나야 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돈과 귀중품이 많이 필요했다. 농사지을 때 조선인 포로들을 써서 이들을 구제해주거나 수완을 발휘해 많은 이익을 낸 점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지만, 확대 해석할 여지는 전혀 없다. 서연을 열심히 하지 않은 것도, 서연이 소홀해지는 1640년 경부터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가며 심양관을 여러차례 수리한 걸로 볼때, 그냥 심양 생활이 기약없이 길어질 걸 생각하고 신경을 덜 썼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심양생활 길어지면서 건강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모시던 신하들이 농사짓는 걸 반대하긴 했는데, 이건 청이 세자를 영영 돌려보내지 않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 ↑ 어제 뜻밖에 제게 보내주신 구원자 하느님의 상, 역서들, 기타 서학서들을 선물로 받고 제가 얼마나 감격했는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저는 신부님께 큰 빚을 졌습니다.
- ↑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 7월 22일 신미 2번째 기사. [1]
- ↑ 1637년 11월 8일 아담 샬 신부가 마카오의 데 로데스(Alexander de Rhodes)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입국 허가 없이 북경에 들어온 프란치스코회의 프란치스코 델 라 마드레 데 디오스(Francisco de la Madre de Dios) 수사와 가스파르 데 알렌다(Gaspar de Alenda) 수사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그들에게 조선 선교를 권했다.
- ↑ 이들은 1645년 7월 22일 청 사신을 따라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 ↑ 성호(星湖) 이익(李瀷)말고 간옹(艮翁) 이익(李瀷)
- ↑ 위 인조실록 기사에 소현세자가 비단을 많이 가져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런 것이 근거가 되어 나온 이야기 같다.
- ↑ 부연 설명으로 하멜 일행을 구류한 효종이 실제 행한 사실을 보자면, 이미 조선에 정착한 얀 벨테브레를 불러와 통역하게 하고,
정작 벨테브레가 모국어를 많이 까먹어 일본어 통역을 동원하긴 했지만하멜과 그 일행을 훈련도감에 배속시켜 화승총을 제작하게 했다. - ↑ 묘하게 청에 대한 복수로 수꼴 기질이 있었다는 이미지가 강한 효종이지만 실제로 효종은 청나라의 문물을 고평가한 인물이었다. 예컨대 사대부 복식보다 청나라인들의 융복이 더 실용적이고 청의 전투기술이 조선의 것보다 월등하다는 식으로 칭찬하는 등.
- ↑ 2차 나선정벌 당시 조선군은 러시아군 상선을 불태우고(정규군이 아닌 용병대라는 이야기도 있음) 플린트락 소총 여러 정을 노획해 귀국했다. 조선 조정은 이후 이 플린트락 소총을 대량 생산해보려 했지만, 종래에 사용하던 조총에 비해
단가효율성에 큰 차이가 없었다고 판단했기에 대체되지 않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