냅 라조이

이름냅 라조이(Napoléon "Nap" Lajoie)
생몰월일1874년 9월 5일~1959년 2월 7일
국적미국
출신지로드 아일랜드 주 운소켓
포지션2루수
투타우투우타
소속 팀필라델피아 필리스(1896~1900)
필라데피아 애슬레틱스(1901~1902)
클리블랜드 냅스(1902~1914)
필라데피아 애슬레틱스(1915~1916)
1901~1904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타격왕
없음냅 라조이
(필라데피아 애슬레틱스)
앨머 플릭
(클리블랜드 냅스)
1901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홈런왕
없음냅 라조이
(필라데피아 애슬레틱스)
삭스 세이볼드
(필라데피아 애슬레틱스)
1898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타점왕
조지 데이비스
(뉴욕 자이언츠)
냅 라조이
(필라델피아 필리스)
에드 델라헨티
(필라델피아 필리스)
1901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타점왕
없음냅 라조이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버크 프리먼
(보스턴 아메리칸스)
1904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타점왕
버크 프리먼
(보스턴 아메리칸스
냅 라조이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해리 데이비스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냅 라조이
헌액 연도1937년
헌액 방식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83.58% (2회)

1 소개

로저스 혼스비와 함께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강의 2루수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던 前 야구선수.현역시절 포지션은 2루수였다.공수주 3박자가 모두 뛰어났던 선수로 뛰어난 실력과 더불어 잘생긴 외모로 인기가 많았다.

2 선수시절

1874년 로드 아일랜드 주 운소켓에서 태어난 라조이는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틈틈히 지역 야구팀에서 뛰었다.그러던 어느날,라조이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스카우터의 눈에 띄어 1896년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입단해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데뷔 첫 시즌 39경기에 출전해 .326의 타율을 기록한 라조이는 다음해인 1897년,라조이는 본격적으로 풀타임 2루수로 뛰면서 타율 .361 197안타 9홈런 20도루 127타점을 기록하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1898년에는 타율 .324 197안타 6홈런 25도루 127타점을 기록하며 개인통산 최초로 타점왕을 차지했고,1899년에는 부상으로인해 시즌 절반밖에 출장하지 못했음에도 .378의 고타율을 기록하며 활약했다.1900년에는 .337 152안타 7홈런 22도루 92타점을 기록했으며 시즌이 끝난후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로 이적했다.하지만 라조이의 소속팀이던 필리스가 이에 소송을 제기하며 라조이는 필리스와 어슬레틱스의 소유권 분쟁에 휘말리게 됐다.

하지만 라조이는 법정소송을 법이면서도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으로 이적한 첫 해 타율 .426 232안타 14홈런 27도루 125타점을 기록하며 최고의 해를 보낸다.라조이는 타격 도루를 제외한 모든 부문에서 타격 7관왕을 차지했다.[1]다음 해인 1902년에도 라조이는 타율 .378 133안타 7홈런 19도루 65타점을 기록하며 활약했다.그러나 이 해필리스와의 소송에서 패소한 라조이는 다시 필리스로 돌아갈뻔 했으나 아메리칸리그 총재였던 밴 존슨은 그런 라조이를 신생팀이던 클리블랜드 브롱코스로 이적 시켜버렸다.

이와중에 가만히 있다가 뜬금없이 라조이를 얻게된 클리블랜드 브롱코스는 아주 난리가 났다.당시 클리블랜드는 창단한지 2년 밖에 안된 신생 팀이었다.그런데 어느날 갑지기 스타선수인 라조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것이다.라조이가 클리블랜드로 이적한 후 사람들은 라조이를 보기 위해 벌떼처럼 몰려들었고,클리블랜드는 아예 팀명을 브롱코스에서 라조이의 이름인 냅을 따와 클리블랜드 냅스라고 팀명을 바꿔버렸다.클리블랜드로 이적한 첫 해 라조이는 클리블랜드에서 타율 .379 132안타 7홈런 19도루 64타점을 기록했다.다음 해인 1903년에는 타율 .344 167안타 7홈런 21도루 93타점을 기록하며 다시 도약했고 1904년에는 타율.376 208안타 5홈런 29도루 102타점을 기록하며 타격 4관왕에 올랐고 이후에도 1910년 타격왕을 차지하는 등 구준히 활약하다가 1914년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로 이적,2년을 더 뛰다가 1916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3 은퇴 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투표에서는 첫 해에 최초의 5인에게 밀려 헌액되지 못했지만 다음 해인 1937년에는 85.58%의 득표율로 헌액되었다.
  1. 당시에 14홈런이면 절대 적은수가 아니었다.라조이가 뛰었던 시대는 데드볼 시대라는 것을 감안하자.그때의 야구공은 지금 쓰는 공과는 전혀 달랐다.